2024년 3월 11일(월)
* 시작 기도
주님...
내게 있어 주님은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나의 삶은 그 주님을 부정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광풍을 불어 이런 나의 심령을 날려버리시고 오직 주만이 나의 전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를 부인하고 육신으로 행하려는 옛 사람을 오늘 이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죄에 대하여 아무 것도 반응할 수 없는 거룩한 불구자가 되게 하시고 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날 정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영혼이 주의 은혜로 소생케 하사 주님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50:1-15
제목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시는 하나님.
1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제사로 당신과 언약한 자들을 재판하시기 위하여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증인으로 소집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해 돋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세상을 부르신다.
이렇게 증인을 부르신 하나님은 부족함이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시온에 계시면서 온 세계 구석구석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은 곧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오실 때는 결코 아무도 모르게 오시지 않으실 것인데 불이 타오르고 사방에는 광풍이 불어 닥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 하늘과 땅에 말씀하시기를 제사로 나와 언약을 맺은 나의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모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하늘은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데 하나님은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요 백성들에게 감사와 함께 참 제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아, 내가 네 잘못에 대해서 증언할 것이다.
귀 기울여 잘 들어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8절에 내가 너희의 제물로 인하여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너희의 번제가 항상 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신다.
나는 결코 네가 드리는 수소나 숫염소를 받지 않겠다.
내가 어디 짐승이 없어서 너희가 바치는 그 짐승을 받으려고 하는 줄 아느냐?
숲이나 산에 있는 짐승이 다 내 것이며 새나 들짐승도 내 것이다.
설령 내가 배고프다 할지라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은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고 염소의 피를 마시더냐?
너희는 이제 외형적인 제사만 하지 말고 제발 감사로 제사하고 가장 높으시며 지존하신 하나님께 너희가 약속한 것을 갚을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좀 찾아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건질 것이니 그 때 너희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묻어나는 시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아쉬운 게 무엇이란 말인가?
온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과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시기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걸하시듯 하소연을 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언약 백성이며 언약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만, 그 제사에는 그들의 마음이 전혀 담겨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약에 꽂혀 계신다.
언약의 기본은 창세전 언약으로써 아들을 믿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한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창세전에 이미 약속하신 언약은, 사람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하신 것이지 결코 짐승들이나 자연 만물에게 하신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짐승이나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지 결코 짐승이나 여타 만물에 있지 않으신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한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신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며 사람의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신다.
(렘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사고하는 생각 뒤에 숨어있는 동기까지 보시는 분이시다.
(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에 아버지의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거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사람도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행동을 보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그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다.
그것을 가리켜 교감이라고 한다.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중심을 모르시겠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나 매일 드리는 번제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함께 드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집에 구걸하러 온 거지에게 밥 한 덩이 주는 것도 아니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설령 이런 경우라도 그들의 마음을 담아서 대접을 하건만, 하물며 하나님께야 두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주님 앞에서 이런 자들과 다름이 없는 자임을 고백한다.
마음은 딴 곳에 있으면서 행위로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렇게 하고 나는 스스로 떳떳한 체 하던 자였다.
결국 나는 죄를 목록의 죄, 행위의 죄로만 볼 줄 알았지 내 마음으로 짓는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나는 옛 사람을 지배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죄의 세력을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죄의 세력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매일 또는 절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만 최고로 드리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나를 지배하였던 것이다.
겉으로는 얼마든지 외식적으로 행할 수 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화 있을진저’ 하시면서 그토록 책망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내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닌가?
내 안에 이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예배는 멋지게 디자인하고 설교는 그럴 듯하게 하면서도 정작 내 삶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한 나는 통통하고 살찐 제물을 갖다 바칠 줄 알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외식적인 제사만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괴로워하시며 또한 고통스러워 하셨다.
(사 1:11-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런 백성들에게 주님은 요청하신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말씀으로 주님께 나아오라고 요청하시지 않는가?
외식적인 제사만 아니라 너희 마음의 중심으로 감사를 회복하고 내게 나아와 나를 부르라고 말이다.
(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는 악인 중의 악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한다.
적어도 이들은 제물에 대해서는 온전한 것을 드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제물조차 눈 먼 것, 다리 저는 것, 상처난 것 등 가치 없는 것을 드리는 자가 아니었던가?
헌금도 헌금이지만 내 삶에서 전혀 주님을 지존하신 주님으로 모시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 내가 잘 되게 하는 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아쉬움이 없을 때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찾고, 내가 아쉬움이 있을 때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으면서 찾지 않았던가?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이중적이요 나 중심적이며 욥의 친구들처럼 보상신앙을 가지고 믿어왔던 자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요 이미 죽었어야 할 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아쉬움을 호소하시면서 까지 나를 살려주시고 또한 참아주셨다.
주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신단 말인가?
그것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을 주어 영생하는 존재로 세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삼으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내 가슴이 찌릿찌릿 아프다.
말씀의 검으로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신다.
이것은 주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심으로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언제까지 가책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외식적인 제사가 변하여 마음의 중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말씀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 나의 마음 중심을 다하여 감사의 제사로 나아간다.
나의 추하고 악한 죄를 주의 보혈로 씻고 성령께서 그런 나를 마음껏 사용하시기를 바라며 정결함으로 나아가는 내가 바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임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은 무엇이 그리 아쉬우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아쉬움을 토로하시는지요?
숲의 모든 짐승이 주의 것이며 새들도 들짐승도 땅의 모든 만물이 주의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땅의 모든 것은 말씀으로 지으셨지만, 사람만큼은 땅의 흙으로 지으시고 말씀을 주셨지요.
그것은 지음 받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과 교제하기 위함인 줄 압니다.
주님은 그 교제하심 곧 언약적인 교제에 마음을 다 쏟아 부으심을 아오니 이제는 나도 돌아서서 오직 주님과의 교제에 마음을 쏟아 붓게 하소서.
주님만이 나의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임을 알았사오니 다른 데서 그 무엇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내 마음 중심으로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참 예배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