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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치노(Alfredo James Pacino)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2) - 오프라 윈프리
“우리는 그(필 도나휴)를 제압해 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실제 모습 그대로 방송해 주시면 됩니다.”
We don't expect you to beat him, of course. Just go on the air and be yourself.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
Destiny words : 당신의 실제 모습 그대로 방송해 주시면 됩니다.
‘수많은 명사회자가 있는 가운데 후발 주자인 내가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히트된 아이디어를 안전하게 모방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나만의 색깔을 내세울 것인가?’
흑인 여성 사회자 오프라 윈프리는 1978년 볼티모어에서 ‘피플 아 토킹’을 공동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시카고에서 방송되고 있는 필 도나휴의 ‘필 도나휴 쇼’는 미 전역에서 방송되면서 토크 쇼의 진수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연히 지방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피플 아 토킹’은 필 도나휴 쇼의 아류 프로그램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글쎄요, 뭐라고 할까?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댐과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필 도나휴의 이미지였죠.”
내로라하는 사회자들이 필 도나휴가 구축하고 있는 토크 쇼 분야에 도전장을 냈지만 중년 남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성적 매력과 여성 시청자들의 고민을 단번에 풀어주는 만능 해결사와도 같은 재담을 뛰어넘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린다. 오프라는 이런 절박한 상황을 역이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1983년 노동절 주말, 오프라는 시카고에서 방송되고 있는 토크 쇼 ‘AM 시카고’의 메인 MC에 응모하기 위해 볼티모어를 떠나 낯선 대도시 시카고로 향한다. 그의 행동을 지켜본 볼티모어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미쳤구나! 넌 지금 시카고로 건너가 자폭을 시도하고 있는 거야”라고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저도 불안했죠.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인기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필 도나휴에게 도전장을 내겠다는 각오로 덤볐으니.”
오프라는 지금 생각해봐도 어디서 그런 오기와 배짱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한다. 마침내 수많은 경력 응모자 가운데 오프라는 새로운 ‘AM 시카고’의 진행자로 발탁된다.
뚱뚱한 흑인, 10대 미혼모 경력, 미녀라고 하기에는 투박한 외모. 오프라의 신상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녀가 행운을 차지한 것은 그야말로 경천지동할 일이었다. ‘AM 시카고’의 진행자 자리는 평균 3개월을 못 넘기고 교체되어 왔기 때문에 지역 방송가에서는 ‘독약이 든 토크 쇼’라는 오명이 붙어 있었다. 간절히 바라던 진행자로 낙점이 됐지만 고민은 이제부터. ‘과연 어떤 차별적인 면으로 필 도나휴와 경쟁을 벌이냐’가 심각한 문제였다.
절박한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방송국장 데니스 스완슨은 오프라에게 커다란 깨우침의 말을 한다.
“우리는 필 도나휴를 제압해 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실제 모습 그대로 방송해 주시면 됩니다.”
본격적인 시청률 전쟁에 나서야 하는 오프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건네진 데니스 국장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충고는 남의 모방보다는 위험할지라도 자기만의 색깔을 가져달라는 완곡한 주문이었다. 토크쇼의 방향타를 잡은 오프라는 방송 첫날부터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지독한 가난, 동네 청년들에게 강간을 당해 10대 시절 아이를 가졌던 감추고 싶은 사연 등 자신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평범한 시청자들이 털어놓는 사연에 대해 자신의 체험담을 가미시켜 인생 조언자 역할을 자임한다.
꾸미지 않고 털털하게 진행하는 오프라의 쇼는 방송 횟수가 거듭할수록 시청률이 폭증하기 시작한다. 경쟁 프로 필 도나휴가 점잖고 지적인 논쟁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후발 주자 ‘AM 시카고’는 서민들의 일상적 고민을 흉금 없이 털어놓고 웃고 때로는 애달픈 사연에 함께 눈물짓는 보통주부들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간다.
“전 흑인입니다. 그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죠. 이것을 분장이나 단시일 내의 다이어트로 제 체형을 변화시킨다고 해도 저 자신의 본질은 변함이 없죠. 그래서 저는 다소 흉이 될지라도 있는 그대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컨셉을 세웠죠. 이것이 먹혀 들어갔습니다. 인기는 자연스럽게 따라 왔고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데 가장 탁월한 진행자’라는 칭송을등에 업고 오프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게 된다. 그후 20년 이상 독보적인 토크 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오프라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오프라 매거진과 여성 문제 전문 케이블 TV를 창설하는 등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부와 명성을 함께 쥐고 있는 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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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3) - 우피 골드버그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
“다른 사람의 조롱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You’re strong enough to take other people’s ridicule, then stand by your convictions.
Destiny words :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의 흑인 사회자로 무대에 나선 그녀의 자유분방한 패션은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1994년 3월 21일 거행된 아카데미상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가 작품상에 지명되면서, 연출자 스티븐 스필버그는 오락성과 인류 역사의 최대 비극인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극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반추시켜주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날 행사장에서 스필버그에게 쏟아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버금가는 조명을 받은 주역은 빌리 크리스탈에 이어 사회봉을 잡은 흑인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였다. 그녀는 깔끔한 정장 대신 폭이 넓은 검은색 의상에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는 스카프를 맨 다소 파격적인 의상을 착용해 시선을 끌었다. 일반인들의 예상을 깬 이 같은 복장은 그녀의 성장과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징표이다.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면서 옷을 입고 행동을 하는 것에 묘한 반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기 위해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버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알려진 뉴욕 주 첼시 출신인 우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히피 풍 나팔 청바지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즐겨 치장하는 머리갈래를 좌우로 꼰 아프로 스타일을 하고 다닌 튀는 소녀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얼굴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을 칠하고 다녔다. 당연히 주변에서 우피에 대해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너 옷이 왜 그래? 차분하게 입을 수 없어? 너랑 다니면 나까지 손가락질을 받고 있어. 너랑 함께 안 다닐래!”
아동들만의 수수한 복장 틈바구니 속에서 찢어지고 색이 바랜 청바지, 가슴이 노출된 티셔츠, 흡사 가발을 올려놓은 듯한 수북한 아프로 헤어스타일은 친구들로부터 스스로 따돌림을 당하는 단초가 된다.
“복장을 문제 삼아 저를 멀리하는 친구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옷을 차분히 입고 오라고 강요하는 이들에게 저는 오히려 너희들과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그렇게는 못 해! 하고 강짜를 놓았죠. 이토록 주변 눈치에 전혀 개의치 않는 성격이 영화배우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독립적인 행보를 할 수 있도록 자극과 용기를 심어준 이는 다름 아닌 어머니다. 태성적으로 자신의 딸이 다른 아이들과는 별종의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우피의 모친은 그녀에게 늘 격려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의 조롱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남과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두려운 감정은 없었어요. 주제 넘는 말 같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맞추어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동화되기보다는 자기 주관을 내세운 이탈을 시도했던 우피의 행동거지는 조화보다는 개성을 강조하는 영화계 속성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프로 영화계에 입문해서도 치렁치렁한 곱슬 장발머리에 검은 슈트를 단골로 착용했던 그의 행실은 처음에는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 뒤 우피의 트레이드마크를 관객들과 동료 여배우들이 모방하면서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는 패션 리더로 대접받는 사태가 발생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사실 무척 힘겨운 일이죠. 하지만 이런 당당함이 영화계, 아니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갖고 대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는 점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행동으로 주위의 질시와 조롱을 받았던 우피 골드버그는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길 원하는 세상의 흐름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면서 개성적인 스타로 성장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런 당당한 출세 뒤에는 딸의 행동을 전폭 지지하면서 격려하고 용기와 자극을 주었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있다.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4) - 이안
이안(李安)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바로 내가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Sense and sensibility are two ways I have of seeing the world.
Destiny words :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바로 내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소재는 무엇일까?’이안은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늘 이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근본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 색체가 강하게 남아 있는 중화권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각보다는 단체의 의견을 중시하는 문화적 관습에서 성장한 그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자유분방한 미국으로 건너온 뒤 자연스럽게 문화적 혼란을 겪는다. 그는 어찌 보면 극과 극을 이루는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오늘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매우 긴요한 배경이 됐는지 모른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
중국인들만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쿵후 선생> <음식 남녀>를 발표, 국제 영화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어느 날 영국 배우 겸 시나리오 작가 엠마 톰슨이 각색한 대본을 전달받는다. 그 시나리오가 바로 <센스 앤 센서빌리티>이다.
“무엇인가에 맞은 듯한 전율감을 받았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충돌, 바로 이것이야말로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영화 만들기의 원천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이안 감독의 진단이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많은 이성과 감정의 대결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공산권인 러시아에서 수많은 문호들을 배출하거나 엄격한 회교 윤리가 지배하는 터키·이란 등에서 예술영화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개인적 욕망과 문화적인 통제 사이의 갈등이 예술양식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센스와 센서빌리티는 바로 내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안 감독은 각색자 엠마 톰슨을 직접 출연시켜 영화를 제작해 다음해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에 해당되는 황금곰상을 수여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안 감독은 당시 서방 매스컴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는 ‘어둠과 밝음, 음과 양의 개념을 대비시켜 주고 있다. 난 지금도 서구 소설가 제인이 동양적인 사상을 이해하고 이 제목을 사용했을까라는 짙은 궁금증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설령 제인이 동양적인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인간 세상이 서로 모순된 생각 속에서 늘 다투고 갈등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제목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고 했다.
보검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와호장룡>,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선악의 대결을 노출시킨 <헐크> 등은 바로 이안 감독이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 이성과 감정의 대결을 담아낸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사리 판단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이성과 조절이 불가능한 감정 상태가 혼재되어 있다고 봤을 때 이안 감독이 추구하고 있는 이들 두 감정의 대립 관계는 앞으로도 관객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끌어들일 만한 그만의 영화적 특징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안(李安)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5) - 이자크 펄만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ractice.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
Destiny words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99%의 연습으로 대가반열에 오른 이스라엘 출신 음악가 이자크 펄만.
“노력이라는 것은 음악가에게 연습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바이올린 주자로 명성을 얻은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지겹도록 반복한 연습 덕분입니다.”
라디오 음악 프로를 늘 청취했던 부모 덕분에 펄만은 출생 직후부터 음악 선율을 감싸 안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바이올린 연주 실황을 듣고 “엄마, 나도 저 악기 연주하고 싶어”라고 말한 것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4살이었다.
“많은 악기 중 바이올린은 아담하고 단정한 리듬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습니다.”
10살 때 체계적인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 위해 텔아비브 콘세르바토레에 입학하게 되고, 이곳에서 평생 음악 스승 중 한명인 리브카 골드기르트로부터 13여 년 동안 바이올린 독주법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
“선생님께서 제게 늘 하신 말씀은 ‘연습, 연습’이었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한창 또래아이들과 뛰어놀 나이에 펄만은 학교 연습실에서 하루 4~5시간씩 주어진 변주곡을 끊임없이 반복 연주하는 과제물을 받았다.
“너 연습했어?”
리브카 선생은 펄만을 보면 단 두 마디만 했다.
“악기를 공부하는 대다수의 학생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한 곡을 지정해 반복 연주하는 연습입니다. 나 또한 똑같은 곡을 하루에 수 시간씩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 넌더리나게 싫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펄만은 이러한 고된 연습이 있었기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됐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연습은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생긴 후천적 습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본능이 되었습니다. 연주 공연을 할 때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판정은 결국 연주회를 앞두고 얼마만큼 연습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숱한 연습은 결국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고 본다면 발명왕 에디슨이 체험에서 우러나온 노력 99%는 음악가인 나에게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실감나는, 내 인생의 기반을 만들어준 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펄만은 이제 많은 젊은 예비 음악학도를 양성하고 있다. 그가 지금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이다.
“연습하라, 그리고 또 연습하라! 천재는 99% 연습에서 나온다.”
강연에 나섰을 때 펄만은 “세상의 모든 음악가는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자신이 관심을 두었던 분야에 목표를 세웠고 진정한 실력자가 되기 위해 아낌없는 시간을 투자해 연습을 했다고 봅니다”고 강조하면서, “여러분이 어느 한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 그리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펄만의 이런 주장은 아마 음악가들에게만 주는 충고는 아니라고 본다.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선사해주는 교훈이 아닐까?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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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6) - 제니퍼 애니스톤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에 더 많은 관심" |
“우리가 밝은 면을 밖으로 노출시킨다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As we let our own light shine, we unconsciously give other people permission to do the same. 제니퍼 애니스톤(Jennifer Aniston) Destiny words : 우리가 밝은 면을 밖으로 노출시킨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1994년부터 방영된 NBC 시트콤 <프렌즈>로 단번에 유명세를 얻은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재담을 내세워 시청자들의 환대를 받고 있는 주인공. 부친 존 애니스톤도 TV 연기자 출신이다. 방송 연기자 생활 30여 년 동안 주역과 조역을 오가면서 온갖 인생을 열연했던 존은 딸만큼은 자신처럼 시청자들의 일희일비에 운명을 거는 생활보다 “너는 법조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되뇌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부전여전이라고나 할까? 부친의 희망을 저버리고 애니스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우들의 웃음보를 터트리게 만드는 발군의 연기 기질을 드러낸다. “글쎄, 저는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믹적 요소를 내세운 연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배여서 연기 초년병 시절에는 뜻하지 않는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방과 후 드라마 학원에서 체계적인 연기 훈련 과정을 이수받는다. 당시 습작 공연으로 안톤 체홉의 <세 자매>를 공연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매우 심각한 연기를 하고 있을 때 객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빠져나간 뒤 그녀는 연출 담당 지도교수 앤소니 애비슨으로부터 “제니퍼, 비록 드라마 내용은 심각했지만 자네 연기를 보고 관중들이 웃음을 보였다구. 비극적 요소에서 웃음을 유발시키는 데 자네만큼 재능이 있는 친구는 없을 것 같아”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사실 당황했죠. 제 나름대로는 매우 진지한 분위기 속에 빠져 들었는데 이를 지켜본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으니.” 제니퍼는 이런 반응을 받으면서 자신이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남을 웃겨 왔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연기 수련생 시절 제니퍼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제니퍼 그레이나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처럼 묵직하고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는 연기자가 되길 희망했다. “비극을 연기하지만 객석에서는 웃음보를 터트리는 사건을 여러 번 겪으면서 지금까지 확고하게 새겨두었던 연기 목표를 변경시키기로 했죠. 즉, 이제부터는 식은 죽 먹기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자고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눈물샘을 자극시키겠다고 작정한 비극적 헤로인보다는 타인이 먼저 인정해준 희극 배우로 연기 승부를 걸겠다는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 목표를 확고하게 잡은 이후 제니퍼의 연기 완숙도는 일취월장했다. 20대 초반에 <프렌즈> 시리즈로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에미상 연기 부분상을 독식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하지만 제니퍼는 어느 날 문득 ‘시청자들을 웃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는 것일까?’라는 회의에 말려드는 슬럼프에 빠진다. 외부 행사장에서는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연기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뇌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칠흑 같은 어두운 동굴에서 단번에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듯한 격려의 문구를 발견한다. 제니퍼 자신을 격려한 문장은 바로 지독한 흑백 정책에 휘말려 40여 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치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가진 연설 가운데 들어 있었다. ‘우리가 밝은 면을 밖으로 노출시킨다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친구의 편지에서 발견한 이 격려의 문구는 제니퍼에게 남을 위안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만델라의 명연설은 계속된다. ‘세상에 가장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남을 위해 베풀수 있는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는 법이다.’일면식도 없는 정치 지도자가 국민들을 위해 행한 연설문은 저 멀리 미국에서 슬럼프에 빠져 있는 유망한 여성 연기인을 부활시키는 자극을 주게 된 것이다. “잠시 회의감에 빠졌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난 그때 웃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행동으로 그러한 선물을 선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새삼 절감했습니다. 내 재주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생의 의욕을 느낀다니 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요?” 재능 있는 연기자가 영원히 우리 곁을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랐을 위기의 순간에 운명적으로 접하게 된 가슴을 적시는 글은 성경 속에 기술된 ‘일상적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세상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에피퍼니’ 사건을 떠올려주는 사례가 됐다. 그림에도 재능을 갖고 있던 제니퍼 애니스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회를 갖는가 하면 영화배우 겸업 선언을 하면서 <폴리와 함께Along Came Polly, 2004>에서 폴리 역을 맡아, 관객들에게 해학의 진가를 선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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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7) - 제이미 리 커티스
“진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Truth is the most valuable thing we have.
제이미 리 커티스 (Jamie Lee Curtis)
Destiny words : 진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사이코>의 여주인공 자넷 리와 <뜨거운 것이 좋아> <스팔타커스>로 1960년대 섹시 가이로 주가를 높였던 토니 커티스. 탑 스타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커티스는 연예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아 TV 영화에서 단역을 거쳐 존 카펜터 감독의 공포극 <할로윈>에서 로리 스트로우드 역으로 일약에 스타급 배우로 부상한다. <퍼펙트>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에 이어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콤비로 출연한 <트루 라이즈>로 골든글로브 여우상을 따내면서 중견 배우로 올라선다. 그 후 <할로윈 리저렉션> <프리키 프라이데이> 등에 출연했지만 영화배우보다는 알코올과 약물 중독에 빠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졸지에 스캔들메이커로 전락한다.
40대 중반을 살아오면서 커티스 스스로는 세 차례 인생의 전환점을 체험했다고 밝혔다. 3살 때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모가 전격 이혼하면서 그녀는 첫 번째 인생 변환을 겪게 된다. 영화배우 남편과 이혼한 자넷 리는 평범한 증권 중계인 보브 브랜트 재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커티스는 불규칙하고 자유분방한 영화배우 아버지보다는 지극히 가정적인 의붓아버지와 만나면서 심적 안정을 찾는다.
“영화계는 늘 화려함을 쫓는 불나방 같은 생활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화려했던 배우도 늙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냉정하게 버림받는 곳이 바로 할리우드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비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관객들에게 보이는 가공의 모습이 아닌 인간 커티스의 모습을 통해 연기자로 성장해 보겠다며 다짐했고 좌우명처럼 여기고 있는 단어도 ‘진실’이다.
“영화계는 정직이나 신뢰가 인정과 보상을 보장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난 조금이라도 더 진실된 생활을 하자고 다짐해왔습니다.”
커티스가 인생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공개하고 있는 명구는 작가 마크 트웨인의 것을 꼽고 있다.‘진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이처럼 그녀 삶의 첫 번째 모토가 ‘진실’이라면, 두 번째 잠언은
‘행복’이다.
인기 배우의 허상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잔 두 잔 마시게 된 술과 마약은 어느 날부터 그녀를 중증 환자로 전락시켰다. 근 6년 동안 나락의 시간. 어느 날 8살짜리 딸 애니가 “난 엄마가 없어도 용변을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난 정말로 엄마의 관심이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이후 믿지 못하겠지만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 그동안 난 아이를 방치했어. 저 아이는 나의 진정한 선물이고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야!’중증 환자였던 커티스는 곧바로 컬럼비아 대학교 국립 약물중독남용센터 의료진의 도움을 통해 재활치료 교육을 받고 과거의 무절제한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세 번째 인생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는 ‘자존심’이 불러 일으켰다.
2003년 45세의 나이 때 여성지 「모어」의 표지 모델로 나선다.당시 커티스는 딸에게 들려준 구전 내용을 모아 동화책 「다섯 살은 괴로워」를 출간하고 동화 작가로서 매스컴의 조명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책자 홍보를 겸해 여성지 인터뷰에 응하면서 도발적인 행동을 했다. 그것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은밀한 신체 부위가 보일 정도의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화보 촬영을 시도한 것이다.
“나를 포함해 여성들이 중년을 맞게 되면 자신의 변화된 몸매에 대해 스스로 모멸감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수치심까지 느끼고 있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고요. 스스로를 못마땅해 한다면 누가 당사자를 사랑해 주겠어요. 그래서 중년 여성에게 묻어 있는 세월의 편린은 20대 숙녀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속옷 차림과 전신 사진 게재를 시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이런 의도는 대성공으로 귀결됐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변해가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닌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소라고 역설하고 있는 제이미 리 커티스.
그녀는 현재 지구촌 중년 여성들에게 가장 많은 환대를 받고 있는 연기자로 유명세를 더해가고 있는 중이다.
제이미 리 커티스 (Jamie Lee Curtis)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8) - 존 레귀자모
“너의 증오심과 유머 감각을 좀 더 생산적인 데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떻겠니?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Why don’t you rechannel your hostility and humor into something productive? Have you ever thought about being a comedian?
Destiny words : 너의 증오심과 유머 감각을 좀 더 생산적인 데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떻겠니?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알렉스가 결국 정부 당국에 체포되어 로봇처럼 조종되는 지극히 수동적 인간으로 징계당하는 장면이 삽입됐다. 중남미 최대의 커피 원산지인 컬럼비아 출신의 존 레귀자모는 남미 특유의 깡마른 체격, 상대방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날카로운 눈빛을 내세워 할리우드 악역 전문 배우로 한몫 해내고 있다.
“연기자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지만 내 청소년 시절은 울분과 반항기로 가득한 시절이었습니다.”
미국 이주민이 겪어야 하는 지독한 가난과 언어 장벽은 4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존 레귀자모의 마음에 적개심만 쌓이게 했다.
“글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발이나 옷, 학용품도 마련해줄 수 없는 가난이 원인이 됐다고 생각해요.”
나이키 운동화에 멋진 구찌 가방까지 들고 다니는 잘사는 친구 틈바구니에서 존은 쓰레기 하적상 재활용품 박스 안에서 구해온 신발과 거의 넝마 수준인 청바지를 입고 다녀야 했다.신발의 경우 제대로 짝을 찾지 못해 왼발은 크고 오른발은 작은 신발을 구겨 신어야 하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스페인어가 섞인 영어에다 싸구려 티가 물씬 풍기는 복장.당연히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그대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을 공격하는 것에 쾌감을 느껴간다.
“뉴욕 지하철, 시장, 백화점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우리들의 놀이터였죠. 여학생들의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기, 노점상 음식을 먹고 돈을 지불 안 하고 도망치기, 좌판에 놓여 있는 물건 훔치기, 지하철 안에서 고성방가하기 등 온갖 악질적인 행동을 벌이고 다녔어요.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이런 무법적인 일을 자행할 때 마치 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쾌감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중학교 시절부터 존은 선도 불능의 문제아로 낙인 찍힌다. 간신히 떠밀려 가듯 중학교를 졸업한 뒤 맨하튼 소재의 머레이 버그트럼 직업학교에 입학 원서를 제출한다. 그렇지만 중학교 학적 조회에서 드러난 좋지 못한 행동 때문에 입학을 거절당한다.
머레이 학교는 대학 진학대신 다양한 직업교육을 통해 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워주는 전문학교로 빈민가 출신들이 입학을 선호하는 교육기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모친은 교장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작성해 아들 존의 입학을 허락해줄 것을 간청한다. 극성스런 모친의 로비 덕분인지 존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을 허가받는다.
“직업학교 생활이요? 입학하자마자 학교 당국이 질색할 짓만 하고 다녔죠. 입학하고 3개월이 지나자 교내에 소문이 자자했어요.”
그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실 문을 잠가 선생이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교내 분수대 물을 밖으로 퍼내기, 수업 도중 학생들을 부추겨 집단 외출하기, 방과 후 지하철 칸칸마다 헤집고 다니기….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지하철에서 19세 이상용 야담을 늘어놓으면서 성인 승객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제 내면에 연기 기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깨닫게 됐죠.”
다소 선정적인 내용이 문제됐지만 어쨌든 여러 사람 앞에서 말솜씨를 털어 놓으면서 그는 묘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에 다소 멍청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친구들과 몰려다닐 바에야 뭔가 멋진 일을 해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직업학교 학생의 처지에서 뚜렷이 어떤 일을 벌일 상황은 아니어서 그는 일상생활의 악동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고 만다.
2학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껄렁껄렁한 친구들과 복도 끝을 오가면서 소동을 벌이고 있는데 수학 선생이 다가 오더니 존의 멱살을 잡고 복도 모퉁이로 끌고 간다.
“그래 또래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선생들에게 구제불능 소리를 듣는 것이 그렇게 좋아?”
“물론이죠. 쾌감을 느낍니다!”
선도부 교사도 손을 들어버린 존은 체격이 작고 다소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는 수학 담당 주파 선생의 면전에서 교양 없는 말버릇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그날따라 주파 선생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이 반항아 존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너의 증오심과 유머 감각을 좀 더 생산적인 데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떻겠니?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날 주파 선생님이 던진 말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장래 생각을 하면서 자리 잡아가는 것을 보고 초조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나이 들어서까지 공장 노동자로 얼굴에 기름칠 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저는 남과 다른 보다 적극적이고 눈에 띄는 인생을 살고 싶었어요.”
진지하게 인생 목표를 찾아보라는 주파 선생의 말은 갈팡질팡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던 존 레귀자모의 인생행로를 다잡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 후 존은 전화번호부를 뒤져 연극학교 입학을 수소문한다. 몇 달 뒤 뉴욕에 있는 실비아 리 쇼케이스 극단 연습생으로 입교 허락을 받아낸다. 이곳에서 3여 년 동안 기초 연기 훈련과 아동극 주연 배우로 활동한다.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뉴욕 대학교 영화과에 입학하고 재학 중 연출한 습작이 ‘스필버그 포커스 어워드 상’을 덜컥 수상하면서 여러 프로덕션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게 된다. 깡마른 외모 덕분에 그는 돈 존스 주연의 경찰 미니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에 전격 캐스팅된다. 록 소시민들을 괴롭히는 악당 역할이었지만 그는 학창 시절의 축적된 경험을 십분 살려 실감나는 악역을 펼쳐 놓는다.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존의 인지도도 서서히 확산되어 나간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주파 선생은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신 것 같았어요. 그분은 저의 숨어 있는 자질이 밖으로 분출할 수 있는 자극을 주신 것이죠. 제가 지금 배우로 한몫 해내고 있는 것의 공적을 100% 주파 선생님에게 돌립니다. 자칫 망나니로 어두운 구석에서 원한과 좌절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를 저를 밝은 길로 인도해 주셨으니까요. 주파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스크린 안에서 더 지독한 악역으로 제 영역을 개척해서 관객들에게 끝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 연기자가 되겠습니다!”
존 레귀자모(John Leguizamo)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9) - 존 트라볼타 |
“희망은 이를 추구하는 비참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Hope never leaves a wretched man that seeks her.
Destiny words : 희망은 이를 추구하는 비참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토요일 밤의 열기> <그리스> 등을 히트시키면서 단번에 디스코 황제로 부상했던 존 트라볼타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명예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약 중독에 빠져 6년 이상 은퇴 상태에 빠지는 극과 극의 체험을 한 재능꾼이다.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력을 골고루 갖춘 그가 일순간의 방탕으로 나락에 떨어졌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모든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을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가치관이 큰 힘이 됐다.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당신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어때?라는 말은 지독한 모멸감을 심어줄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있고 박자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발레리나가 될 소질이 있다는 말은 숨어 있는 재능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격려의 말이 될 수 있죠.”
폭넓은 연기생활을 하는 와중에 독서로 삶의 풍족함을 깨우치고 있다고 밝힌 그는 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 좌우명도 책을 읽는 과정에서 체득했다고 한다.
그가 잠언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존 플레처의 『선장』이라는 책에 명기된 구절이다.‘희망은 이를 추구하는 비참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존 트라볼타는 대다수 평범한 이들도 최소한의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이나 성향에 맞는 일을 찾게 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포부를 갖고 전력을 쏟아 승부를 걸어 보라고 권유한다.
“가난하다는 등 외부 환경 때문에 우리가 좌절하고 용기를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봅니다. 유리잔에 들어 있는 반잔의 물을 보고‘반이나 남아 있네’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곧바로 연기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짧은 무명 시절을 거쳐 <토요일 밤의 열기>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독립심이 강한 모친은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연극 교사로 일하고 있는 모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독서와 구연동화 연습을 한 것이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부침을 거듭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는 할리우드 최고 연기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람을 좋아하고 겸손한 태도를 빼놓을 수 없다.
그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암에 걸린 소녀가 죽기 전에 존 트라볼타를 꼭 만나보길 원한다는 전갈을 받게 된다. 흔쾌히 병실을 방문한 존은 시한부 생명이라는 판정을 받고 의료진도 포기한 7살짜리 어린 소녀에게 “넌 꼭 완치 될거야! 약속하지?”라는 격려의 말을 던진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2년 뒤, LA 공항에서 늘씬한 미모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와 ‘저를 기억하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넨다.그녀는 바로 암 판정을 받았던 7살짜리 소녀였다.
“멋진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난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죠. 이런 신념이 병마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저는 배우라는 직업이 단순히 은막에 나와 연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역경에 처한 이들이 삶의 용기를 자극받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직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존 트라볼타 배우로서 최고의 명예와 마약으로 인생의 나락을 동시에 맛본 디스코 황제 1954년 뉴저지 주 잉글우드 태생. 1970년대 디스코 열풍을 주도한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로 춤과 노래, 연기를 겸비한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다. 이어 <그리스Grease, 1978> <도시의 카우보이Urban Cowboy, 1980>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지만 갑자기 찾아온 부와 명성을 주체하지 못해 마약과 술에 빠져 급격한 인기 하락을 겪게 된다. 은퇴 상태에 빠졌다가 미혼모를 돌보는 택시 운전사 역을 맡은 <마이키 이야기Look Who's Talking, 1989>로 멋지게 컴백하는데 성공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Pulp Fiction, 1994>에서는 인간미를 갖고 있는 킬러 역을 맡아 여성 팬들의 심장 박동 소리를 높인다. 상업성만을 쫓는 할리우드의 속성을 꼬집은 <쿨Be Cool, 2005>에서 제작업자 칠리 팔머 역을 맡아 멋들어진 춤 솜씨를 다시 한 번 과시한다. |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20) - 카를로스 산타나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네가 갖고 있는 능력의 150%를 발휘하도록 해라. 그것은 화가가 되든 음악가가 되든 아니면 소방관이 되든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Whatever You're doing or whatever you're trying to be, you should do 150percent. Whether You're a painter or a musician or a fireman.
Destiny words :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네가 갖고 있는 능력의 150%를 발휘하도록 해라!
‘자신의 야망을 펼치고 싶다면 밖으로 나서라. 그리고 세상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라!’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한몫을 해내고 있는 카를로스 산타나는‘안락한 교실보다는 거친 사회생활을 통해 실용적인 음악을 시도, 단시일 내에 팝 거물로 등극한 음악인’이다.
멕시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온 산타나는 언어 장벽으로 인해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이수해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창피하게도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급우들과 말이 안 통했습니다. 다행히 내 존재를 밝힐 수 있는 것은 그림과 음악뿐이었습니다.”
산타나가 음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부친 때문이다. 멕시코 티후아나 지역에서 밴드 단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던 부친은 아들 산타나에게 기타· 바이올린· 베이스 등 주요 악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과 작곡법 등을 전수해준다.
음악의 매력에 한껏 빠져 있던 어린 산타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방과 후 유흥가 거리를 쏘다니면서 거리 공연을 펼치는 당돌함을 보인다.
음악 세계에 미쳐 있던 산타나는 거리 여인들이 뭇 남성들을 호객하는 풍경을 훔쳐보며 새벽까지 기타 연주를 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때 세상 풍경을 거의 대부분 목격했다고 봐야죠. 평일에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순간들을 지켜보았고, 주말이면 교회를 찾아가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영적 존재의 가치를 찾았으니까요. 극과 극을 오가는 이러한 양면적인 상황 속에서 인생을 균형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철학을 스스로 자각했다고 한다면 너무 조숙한 표현일까요?”
멕시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었지만 그는 18살 때 미국에서 중학교 과정을 다시 이수해야만 했다. 당연히 교과 수업에 흥미를 잃고 수업시간에는 그림 그리기, 수업 후에는 거리에서 기타를 치는 공연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런 어느 날, 미술 선생의 호출을 받게 된다.
“애야. 네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성적표를 보니 거의 F인데 그림 과목에서는 꾸준히 A를 받았구나. 그리고 저녁에는 악기 연주를 하고 있다며? 너 혹시 체계적인 그림을 배워볼 생각은 없니?”
멕시코 촌뜨기에게 건넨 미술 담당 여선생의 말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산타나의 열정을 부추겨 주는 계기가 된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가 미술에 상당한 소질이 있는 것으로 알았죠.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미술 전문학원을 방문하면서 제가 그동안 그린 것은 단지 잡스런 그림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운 학생들의 습작품은 마치 정교한 사진을 찍어놓은 듯 세련되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죠. 제가 세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한껏 움츠려 있던 그에게 미술 선생은 격려의 말을 건넨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네가 갖고 있는 능력의 150%를 발휘하도록 해라. 그것은 화가가 되든 음악가가 되든 아니면 소방관이 되든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저는 나름대로 세상의 풍속도를 알 수 있다는 음악에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능력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대상으로 화가보다는 음악가로 방향을 결정한 동기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 즉시 산타나는 당대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공연하는 곳을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리고 거물들의 공연을 보면서 모방하고 과감하게 찬조 공연에 끼어들면서 이론보다는 실무적인 음악 능력을 구축해 나간다. 열성적인 산타나의 태도는 블루스 의 대가인 B. B. 킹· 마일즈 데이비스·존 리 후커 마이클 블룸필드 등의 수제자로 선택되어 생생한 실전 독주법을 전수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늙은 중학생이던 저의 잠재력을 일깨워주신 미술 선생님의 조언이 오늘날 음악인 산타나가 존재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이 매우 생동감 있는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됐구요.”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저변에 깔려 있는 미국 팝 시장에서 멕시코 출신 산타나가 독보적인 음악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물 음악가들을 찾아가 수련생을 자처한 용기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빠트릴 수 없다.
“저는 지금도 음악가뿐 아니라 어떤 예술 영역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경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책이나 주변의 충고, 조언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좌절하고 엎어져 무릎이 까진다 해도 다양한 경험을 쌓으시길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음악가를 희망하는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악기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가 즉석 공연을 시도해 보세요. 몇 십 년 후 아니 빠르면 몇 년 뒤 대가 반열에 올라 있을 여러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1947년 멕시코 하리스코 주 아우트란 태생. 기타리스트 겸 가수. 196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9살 때부터 기타 독주법을 익힌다. 2000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페인어권 출신 가수를 지칭하는 히스패틱 가수로는 처음으로 그래미 ‘올해의 음반 Record of the Year’상을 수상했다. 롭 토마스와 듀엣으로 부른 ‘Smooth’가 수록된 앨범 ‘Supernatural’은 그래미 9개 부분상을 휩쓰는 히트작이 된다. 팝 전문지 롤링 스톤즈 선정,‘가장 위대한 록큰롤 아티스트 90’에 선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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