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광아리랑
설도갑문(雪島甲門)
김 학 진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음이 편안한 삶이 제일 수명도 길고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유리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물은 유유히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여의도의 높은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밝은 햇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식탁위에 쏟아졌다.
내가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우리교회에 나오시는 황 장로님께서도 노 집사님을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고 여러번 말씀하셔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입 니다. 그러니 신앙인으로서 손을 잡으세요. 사람이란 살아가면서 잘못 된 일도 하게 되고 어려운 일도 만나게 되지요 예수님도 은30냥을 받고 판 가롯 유다를 사랑하셨거든요. 자! 그러니 뭐 꼭 ---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이니까요”
내가 마련한 한강호텔 뷔페식당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집사 부부, 황 장로와 그의 딸 이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식기에 담겨진 화려한 음식들도 이들은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황 장로님께서 먼저 인사를 드리시지요 이쪽이 노 집사님 부부시니까요”
“네... 저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먼저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 우선 제 아버지께서 잘못하신 일에 대해서 늦게나마 자식 된 도리로 사과를 드립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뭐 쉽게 용서가 되겠습니까마는 지난일이라도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서.... 그저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황 장로는 고개를 떨구었다. 황 장로의 딸은 아버지의 이런 구차스러운 말과 아직 보이지 않던 겸허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물론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이미 할아버지가
아주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러 간다는 귀띔은 해주어서 알고 있으나 이런 태도에 놀란기색이 얼굴에 역역히 나타나고 있었다.
노 집사가 황 장로의 말을 듣고 나서
“장로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황명수장로입니다.”
“저희 아버지하고 황장로님 아버지하고는 친구이십니다. 목포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대가 어려워서 서로 갈라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족들이 22명인데 모두 순교했지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우리가정만이 아니더라구요 그 집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순교했지요. 뭐 황 장로님 아버지께서 모두 저지른 일은 아니시구요 시대가 그래서 그 앞장을 서신 것이지요, 이제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까 특별히 용서를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일일랑 이제 마음에 두고 잊지 마십시오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나갔으니까요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시는 일은요?”
“네, 건축업을 하고 있습니다.”
“건축업이라면?”
“네 싼 집을 사서 고쳐서 팔거나 또 토지를 구해서 집을 짖기도 하지요”
“네 그러시군요, 이번에 고향에 있는 돌팍 재에다 순교자 묘를 이장합니다. 올여름에 추모관을 짓고 추도예배를 드리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뭐 꼭 의무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석하지요 회관 짓는데도 협조하시지요 그런데 고향사람들이 좋아할까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군요 노 집사님께서는 용서를 빌어서 괜찮겠지만 고향에 많은 순교자가족들이 용서해 주기는 아직 뭐한 것 같군요.”
황 장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워보이다가 잠시 후 두려운 생각까지 드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 집사 부인이 나섰다.
“그렇지요 우리야 이렇게 황 장로님을 만났으니 이해가 되지만 아직 고향사람들은 거리가 있지요. 억지로 참석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황 장로님?”
“그렇기도 하군그래...”
“지금 고향에 살고 계십니까?”
“아니요. 서울에서 살지요 용산에서 만화가게를 해요 애들이 버니까 우리 둘이서만 살아요
그래서 돌팍재 순교자묘지 이전문제도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을 작년에 야월리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위가 있는데 서둘러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렇군요. 자 우리음식을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여기는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거든요”
이들은 서로 음식을 날라 오기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나서 내 뒤를 따랐다. 저마다 접시위에 음식물을 담았다. 접시위에는 바다에서 나는 해삼물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노 집사도 황 장로도 또 그 뒤를 따라오는 노 집사의 부인도 해삼물이 가득 담긴 접시를 가지고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 노집사는 자리에 앉아서 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가정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자리를 베풀어 주셔서 황 장로님을 만나 뵙게 되었군요 사실 따지고 보면 황 장로님과는 고향사람이고 또 황 장로님 아버지와는 저희 아버지와 친구이셨습니다”
노집사의 아내가 거들었다.
“그렇지요 그런 일이 어디 용서한다는 말만으로 잊혀지겠어요 그러니 그 가족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듣는다는 게 중요한 일이지요 우리는 고향을 떠나 온 지 10년이 넘었거든요 작년에 묘지를 이장한다고 해서 한 번 내려갔었지요 바쁜 도시생활이라서 고향에 자주 내려갈 수도 업구요”
“그러니 이번에 용기를 내어서 같이 가세요 돌팍재에 가서 추모예배를 드릴 거니까요 황 장로님이 참석하셔서 용기 있게 말씀하세요 설도갑문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한다구요 공개적으로 말씀하세요 그러면 뭐 그 때처럼 때려죽이겠어요 모두가 지나간 일인데요 뭐......”
황 장로는 야월 도에 비치고 있는 햇빛이 창가로 들어와 식탁위에 비치고 있는듯 했다.
영등포 로타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의 어깨를 탁 쳤다. 뒤를 돌아다보니 영후였다
화재보험회사에 지점장노릇을 하고 있는 친구였다. 방금 치과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동창생을 만나 한 건 올렸다고 했다. 한 달 전인가 그가 우리교회에 전화를 해서 만났더니 화재보험을 하나 들라고 권해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 것 하나를 계약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차일피일 미루어 오고 있는 터였다.
“지난번에 왜 안 왔어 온다고 하면서”
“응 바빴어 교회일 때문에”
“그래 교인들이 많지 일도 많을 테고”
“그렇지 뭐”
“저기, 내 사무실에 일할사람이 한 사람 필요한데 교인 중에 일할 사람 한 사람 없을까 ? ”
“있겠지 알아보면”
“한 사람 소개시켜줘 착실한 사람으로 말이야”
나는 교인 한 사람을 추천했다. 황장로의 딸이었다. 교회의 장로로 우리교회에서는 10년이나 넘게 같이 신앙생활을 해온 가정이었다. 오래전에 전라도 황등지방에서 이사를 온 가정이었다. 주일이면 온 식구가 모두 예배에 참석했다. 고척동 후미진 곳에 셋집을 얻어서 살고 있었다. 고향에서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10년 동안이나 쭉 지켜보니 그 생활이 건실해 보였다. 그리많지 않은 교인을 보면서도 황 장로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딸이 물었다.
“아버지 왜 서울인데 교인수가 이렇게 적어 이 교회는?”
“모든 교회들이 처음에는 한 두 명으로 시작했어 세월이 지나면서 더 많은 교인들로 숫자가 늘어나는 거야”
황장로다운 대답이었다. 황 장로가 처음으로 교회를 나와서 장로직에 오르기까지는 여러 해 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해왔다. 황 장로는 영등포에 있는 제분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성격이 온순하고 성실해서 회사에서도 임원직에 기용되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임시고용직으로 들어가서 공장의 임원직에 오르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는 일도 많았고 남다른 구석이 있어서 교회 안에서도 신앙생활이 항상 진취적이고 적극성을 보였다. 황 장로의 딸은 소개한 보험회사 사무실에 오랜 동안 다녔다. 식구가 8사람이라 그 가정이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황 장로 식구들이 가정에 일로 출석하지 못하는 날은 빈자리가 뚜렷이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무밭에서 한솎음뽑아낸 밭같이 비워있었다. 황 장로가 자란 지방의 고향에서도 신앙생활을 잘 한 것 같았다. 어쩌다가 예배시간에 간증을 하는 시간이 마련되면 고향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을 자주 이야기를 했고 순교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까지 했다. 그런 그가 교회로 배달된 내가 쓴 신문기사를 보고나서 안색이 확 달라졌다. 기사 가운데 나오는 사진과 기사내용이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문기사를 읽고 보니 아버지가 저질렀던 비참한 생활들이 적라나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그동안 황장로는 그 사실을 소문으로만 듣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오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도 고향이어서 붙어살다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황등지방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뒷이야기로 어린 시절은 고향 야월도에서 보냈는데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 왜 사람들이 나를 빨갱이 자식이라고 해”
하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다 때가 그랬든 기라”
하면서 끝내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죄를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하겠느냐”
고 물었다
“아버지도 용서를 받으셨는데 자식들이야 용서를 안해 주겠어요 예수그리스도는 용서의 하나님이고 화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용서와 화해를 제일로 치는 것이지요
한번만나서 용서를 구하세요“
나는 그에게 이미 늦었지만 서로 만나 화해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황장로는 나의 뜻하지 않는 제의에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 지금 아들이 용서를 빈다고 해서 그가 들어줄 일도 아니고 괜히 과거의 일을 다시 기억되게 할뿐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반대를 했다. 그러다가 한 두 달이 지나자 생각을 달리했는지 내가 여러번 권유하는 바람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황 장로가 한 번 만나서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은 용서를 구해야 하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신앙생활에는 하나님께 꺼리 끼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 일이 자주 기도할 때 마다 회개의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만나서 용서를 구할 생각이라고 했다.
강의실에서 특강수강을 하고 있던 장 충식은 내가 쓴 신문기사를 읽어 보았다고 했다. 기독교 주간신문에 연재하는 <사마리아 땅의 신앙인> 이라는 연재물로 순교자들의 관한 기사였다. 그러면서 내 귀에다 대고 투박한 지방사투리를 구사했다.
“내처가 동네입니다 잉 그 동네가 몹시 고난을 당한 모양입니다 잉 전쟁통에 교인들 모두가 초죽음을 당했습니다 잉 그러니 그것을 취재해서 신문에 실으면 특종이 될 겝니다 잉, 아직 아무 곳에도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잉”
“그래요 어디 인데요 처가 동네라구요?”
“염산입니다 굴비가 많이나는 영광요 ”
“전라도지방 영광굴비?”
장충식이 주소를 적어 건내 준 메모를 손에 받아 쥔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장충식의 처가를 찾아가서 그의 장인을 만났다. 이곳을 찾아온 동기와 또 사위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있다. 사위가 알려주어서 왔는데 이곳을 취재해서 신문에 기사화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는 의심없이 타지사람인 나를 대해 주었다.
“모두가 지나간 일입니다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잉 그 때 일들을 ........”
“그러니까 장인어른께서도 그때 당하신 모양시이군요”
“그렇지요 내가 스무살 때 였으니까 한참 때 였지요 나도 그때 죽을 것인디 살았지여 잉 그런 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지요 동네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디 나만 혼자 살았응 게 목사 장로교인들 모두 저 설도갑문 속에 처밖여 죽었응 게...... .”
장충식의 장인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앞에 보이는 바다를 쳐다 보았다. 바닷물이 이쪽으로 철석이며 집 앞 마당 쪽으로 밀려왔다.
“모두 바다에 처 밖았응 게 죽창으로 배를 찔러 저 앞바다에 묻었응 게”
장인은 그날의 악몽을 잊으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금 담배연기를 입속으로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품었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을 했는지 나를 데리고 설도갑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옛날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자면서.....
“여긴 게, 여기서 죽창으로 배를 찌르고 발길로 차서 이 바다 속에다 수장시켰 응 게 이 바닷물 속에 시체가 빨래를 널어놓은 것 마냥 새하얗게 둥둥 떠 다녔응 게”
장인은 다시 나를 데리고 교회로 갔다. 새 염산교회였다. 종탑위에 십자가가 저녁노을에 타고 있었다.
“제가 다닌 교회입니다. 그때 당시 나는 엉터리 교인이었응 게 술 담배 다하고 엉망이었응 게 물론 지금도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이 교회 김 목사님이 나를 살려 내었응게, 인민군들이 김 목사를 잡아가는 중이었지요 새벽에 교회 앞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김 목사님은 나를 피하라며 눈짓을 하며 끌려 가셨어요 내가 그 눈치를 채고 집으로 돌아오는 척 하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달아났지요, 날이 밝기 전에 동네를 떠났지요 몇 달 동안 동네를 돌아오지 못하고 광주까지 나가서 숨어살았어요. 그런 까닭으로 목숨을 건졌지요.“
끔찍했다 매일같이 교인들을 잡아다가 생매장을 하거나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나는 장충식의 장인이 들려주던 지난 기억속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다녔다는 교회로 향했다.
장인은 그 교회의 유 목사를 나에게 소개했다. 사위와 동창생으로 이곳 순교자들을 취재 하 기위해서 온 기자라고 소개를 했다. 그날 저녁 난 교회사택에서 유목사와 함께 밤을 지샜다 그가 들려준 순교한 교인들의 이야기와 교회가 세워진 설립시기의 이야기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아침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나자 아침상이 들어왔다. 맛살무침, 맛살로 끓인 국 거기에다가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바다고기를 구워서 반찬으로 올려놓았다. 아침을 마친 후 나는 유목사가 소개하는 집사 한 분과 같이 순교자들이 묻혀있다는 돌팍재의 무덤을 향했다.
얼마 전의 교회에서 구입한 땅에다 묘지를 조성하고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묘를 한 군데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나는 유 목사를 따라온 집사 한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메모를 해 놓았다. 하 집사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 강 춘석을만났다. 그 날 날 내려 보내 준 곳에 처참한 내용이 기록된 교인들을 알아낼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었고 취재해 온 것을 기사화했다. 염산 구길 교회 교인들이 순교한 사실이 생생하게 들어났다고 했다. 더욱이 설도갑문에서 죽창으로 찔러 바다에 빠트려 죽인 곳의 현장촬영은 그 옛날 비극의 시대에 다시 와 섰는 듯한 감을 느낀다고 했다. 6.25라는 민족의 비극적 현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부지기수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교인들이 순교당한 일들은 그 수가 너무나 엄청났다.
기사가 나간 후에 전화가 왔다. 신문기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서 꼭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노량진 전철 역 앞 다방에서 만나자고 시간약속까지 정해놓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기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만나서 자세한 말씀을드리겠지만 기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기사가 오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취재하여 쓴 기사가 간혹 잘못 쓰여 지는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노량진 전철역 앞 다방은 그래도 아침나절이라 한적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그들 앞에 앉자 40대 남자 옆에 앉아있는 이는 부인이라고 했다.
” 바쁘신 시간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 신문에 나온 장본인입니다.”
그러니까 기사화된 순교자집안에 한 식구가 모두 한꺼번에 순교한 가정이라고 했다.
“제가 그때 학도병으로 나가서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일을 겪었던 친척들에게 말을 들으니 우리 식구들을 모두 죽인 주범이 내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증언자로 나온 그 조 집사라는 이가 빨갱이였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수많은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그런데 마침 자기가 나서서 교인들의 목숨을 구한 것처럼 말했지요. 그사람이빨갱이입니다.”
그러니까 기사내용 모두가 뒤집혀진 것이다. 반대로 증언자들 가운데 위증을 한 것이다.
“그러니 기사를 바르게 써 주셔야 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노 집사의 가족 22명이 모두 순교했는데 그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이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노 집사 부부와 함께 다시 전라남도 염산지방으로 갔다. 노 집사는 그 지방의 유지였다. 그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랜 동안 고향을 떠나 용산에서 만화 가게를 하며 살아온 까닭으로 고향을 자주 갈 수 없어 그랬겠으나 그 지방을 떠난 유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곳은 염산지방에서 조금 떨어진 야월리였다. 야장교회 조목사가 그의 둘째사위였다.
딸이 조목사와 결혼을 해서 야장교회의 초빙을 받아온 것이다. 이미 가족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으나 딸이 사위와 함께 고향에서 살고 있었다. 야장교회교인들은 6월의 처절한 기억을 안고 있었다. 염산 구길교회에서 북서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점이었다. 야월도가 앞에 있고 남쪽으로는 드높은 가을 산이 앉아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여인 내들은 바닷가로 나가서 하얀 조개를 줍고 해변이나 갯벌을 일군다. 먹이를 얻기 위해서이다.
염전과 해태양식으로 사철을 일할 수가 있어 천연자원의 낙원으로 불리워 오는 야월리이다.
중국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린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노 집사의 사위 조두천 목사는 교회가 세워진 내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타마자 선교사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려고 법성포로 목적를 두고 왔는데 야월 도에 도착하여 이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교회 연혁에는 창립일이 1908년 4월5일인데 조금 더 일찍 세워진 것 같습니다. 이웃에 있는 대동교회가 창립 80주년이 되었는데 그곳에 다니던 교인들 말에 의하면 야월 리에 사는 소금장수들이 그 동네에 소금을 팔러 와서 복음을전해주어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해요“.
노 집사의 기사가 왜곡되었다는 기사를 바로 잡기위해 교회에 장로라는 정범모를 데리고 왔다. 1915년 야월리 야촌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야장교회라고 불렀고 6.25동란 때 교인 68명이 모두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범모장로에 증언이었다.
“순교자 68명의 숫자와 이름은 정확히 모릅니다. 면사무소에서 확인해 보니까 전혀 관계가 없는 점도 있어요. 교인이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죽어서 알 길이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마구 죽인 거죠. 전해진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이 지역적으로 외진 곳이라서 예수 믿는 분들이 새 소식을 듣고와서 국군이 오니까 환영하자고 말한 것이 탈로가 나서 교인들 모두 설도로 끌고가서 죽였다고 해요. 모두 죽인거지요. 사변직후에 예수 믿으면 빨리 죽는다는 말이 퍼져서 아예 예수를 믿지 말라고 까지 했어요. 그래서 선교의 도움이 되지 못했지요. 그런데 순교자 가운데 최 두리라는 집사가 있었는데 이분은교회의기둥집사였어요. 그 부인이 고 순자집사였는데 충주에 사는 고 성진장로의 딸이었지요. 교인들이 순교할 때 고순자집사는 외딴섬에서 일하고 있다가 교인들이 모두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왔어요. 그는 나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냐며 야월도로 와서 순교했지요 교인들의 마지막 순교자였어요. 섬이라서 대부분 가족단위의 신도들이 순교했어요.“
이곳에서 염전을 하던 노 집사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온가족 22명이 모두 순교했다. 노집사 가정의 순교에 대해서는 장 영구집사가 알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설도에서 살다가 옥실리로 이사를 가서 살 때 6.25사변이 일어났지요. 노 집사가형부였는데 설도 부락에 사는 사람들이 언니네 와서 일을 도와주는 분이 많았어요. 어느 날 빨갱이들이 마이크에 대고 노 병진은 죄가 없다. 나오너라하며 곳곳으로 다니며 외쳤어요. 밭 가운데 숨어서 고구마를 캐먹고 견디었는데 가족들이 이 소리에 속아서 밖으로 나왔지요. 그러자 빨갱이들이 노병진 집사에게 가시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거리를 걷게 한 후 마침내 기둥에 묶어놓 고 어머니에게 아들 죽는 것을 보라며 그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어요. 그때 그의 어머니는 < 예수를 믿지 말아라>고 말하더군요. 끔찍한 일이었어요 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도 나는 내 목숨이 아까워서 언니 네를 집으로 불러들이지 못했어요. 그만 밖에서 밤이슬을 맞게 했지요. 나는 그때 나이가 21살로 믿음이 적었거든요. 그래서 언니에게 그 이튿날 < 언니야 나는 예수 안 믿는다>라고 말했지요. 그 이튿날 언니와 함께 있게 되었지요. 언니가 밭에서 채소를 뽑아 가지고 와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빨갱이 들이 들이 닥쳤어요. 그들은 우리 식구들을 묶어서 바다에 처넣는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대신에 형부를 생각했어요. 빨갱이들이 우리들에게 다시 절구통에다 넣고 찧어 죽인다고 절구통에다 한사람씩 집어넣었어요. 매를 들고 치면 죽는 거지요. 나는 마지막으로 딸을 한번 않아보고 싶다고 했지요. 황패강씨가 나를 살려 주었어요. 얼마 후 언니와 할머니가 순교했어요. 바닷물에 던져버렸지요. 언니는 우리 집 문을 두드려 죽으러 간다고 하면서 고무신을 울타리에 꼽아놓고 가니 네가 살아서 이 고무신을 신으라고 했어요. 할머니는 순교하시면서도 나에게 <주님을 잊지 말아라>고 일러 주셨어요. 형부는 설도에 살면서 일을 많이 했어요. 창고업, 선박 업, 양곡을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형부가 순교하자 설도에 사는 사람들은 울타리가 자빠졌다고 했지요. 지난번 돌팍재로 이장하는데 여동생의 은반지가 묘에서 나왔어요. 지켜보던 이들이 울음을 멈추지 못했지요“
불타버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사변직후에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죽는다 예수꾼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죽지않았느냐^교회나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난리가 나면 예수를 믿는 이들이 첫 죽음인데 예수를 왜 믿느냐며 교회에 나가기를 꺼려했다.
유교가정에서 자라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본사람 있었는데 그는 교회가 먼저 부흥을 해야 많이 그 지역이 살기 좋은 지역이 된다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마음에 심어지면서 상대방을 아끼고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된다는 이유 였다. 선진국에서도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우선한다고 한다. 교회로 인해서 큰 피를 흘리고 먼저 가신 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도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고 주민들이 헌금을모았다.
9,28 수복 후 이 마을 야장교회 부근에서 육 정보의 염전을 경영했다. 노 집사의 가족은 모두 22명이 한 순간에 바다물속에 수장되었던 것이다. 노 집사에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은 할머니 때 부터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옥실리에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어 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갔다. 아버지는 창고업을 하는 관계로 교회에 자주 출석하지 못했 다. 그렇지만 교회에는 여러 사람이 다녀야 한다면서 교회에 종탑을세우기도 했다. 그 종소리를 듣고 동네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나오라는 이유에서였다. 노 집사는 자신의 심정을 나에게 털어 놓았다.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식구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빈집이었지요. 다른 이들한테서 온가족이 몰살했다는 사실을 듣고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주동자가 나와 같이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며 한 방에서 자취를 하던 가까운 친구였어요.
죽은 우리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렸지요. 하나님 이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내 가족을 모두 순교하게 한 그들을 때려 죽여야만 합니까 살여 주어야 합니까 나는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원수를 사랑하라 > 나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나는 잠시 확연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자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곧 마음이 편안해 졌어요. 그 후로 나는 혼자의 힘으로 그를 동네에서 빼내어 국군에 입대 시켰습니다. 지금도 그가 살아있습니다. 가끔 나를 만나면 ^그때 죽어 마땅한 나를 살려 주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내게 주셨습니다.“
돌팍재에 있는 순교자묘지중의 대부분이 노집사 가족의 묘지이다.
정목사에 말에 의하면 전도구역이 약 400호가 넘는 시골마을로 피 흘리며 지킨 순교신앙이 교인들에게 배어있다고 전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