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언제 고향을 찾는 것일까? 심신(心身)이, 쇠퇴하고 몰락한 지경인, 피폐(疲弊)해졌을 때일 것이다. 그 극적인 사례가 성서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허랑방탕한 생활로 자기 몫의 재산을 다 날린 탕자는 염치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종으로라도 생존하기를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로 했다. 이 장면을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은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누가복음 15장18절)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유명한 시, ‘이니스프리 호도(湖島) The Lake Isle of Innisfree)의 도입부문에 나온다.(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 서북부 스리고(Sligo)지방의 질(Lough Gill)호수 안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니스프리라는 말은 아일랜드어로 ’히스의 섬’이다.(Inis fraoch, island of heather) 히스는 여름에 꽃을 피우는 관목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척박한 들과 산에 흐드러지게 피는 보라색 꽃이다.
예이츠가 어렸을 때 이니스프리 섬에서 호수의 물소리를 들으며, 평화로운 날들을 보낸 기억은 그의 뇌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젊은 날에 이 시를 쓴 배경은 이러하다. 런던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문득 어릴 때, 여름이면 즐겨 보내었던 아일랜드 고향의 무인도인, 이니스프리 작은 섬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화려한 상점 쇼 윈도우의 장식용 인공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서 고향호수가의 물소리를 듣는 듯했고, 샘물을 보는 듯하였다. 회색의 도시생활에서 지치고 심신이 쇠약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평온과 평안을 누리고 싶었다. 마치 미국의 초월주의철학자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보스턴 근처 콩코드의 ‘월든’호수 숲속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혼자서 2년간 자급자족하며, 저술활동을 한 것을 모형으로 하여 예이츠도 이니스프리 작은 섬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소로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스스로의 ‘월든’호수를 갖고 싶었다. 이 시의 분위기는 자연과 소박한 생활을 찬미하며 살았던 소로우의 ‘월든’호수 풍경을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땅의 많은 은퇴자들이 갖는 로망은, 시골로 내려가 자기만의 ‘이니스프리’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니스프리 섬’은 그들의 이상향이고 귀거래사이며, 귀농 인들에게는 자신을 지탱하는 정체성이고, 자연과 더불어 땀 흘리는 일상의 선언이다. 이런 점들이 장년층으로 하여금 이 시를 특히 좋아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스스로 낙원을 만들기보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무릉도원을 찾아, 무임승차로 신선노름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로우는 스스로 자연으로 들어가 숲속생활을 영위한 자연인이 되었고, 예이츠는 그런 풍경을 그리워했다. 이 시의 전반부를 우리말로 옮겨 소개하면 이러하다.
‘나는 일어나 지금 이니스프리 섬으로 가리라,
거기에 조그만 통나무집을 진흙과 작은 가지로 짓고,
그곳에서 아홉 콩밭이랑을 매고 벌통을 치며
벌들이 윙윙거리는 숲속 빈터에 혼자 살리라.
그곳에서 평안을 누리리라,
아주 느리게 다가오는 평안을‘
그런데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도 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젊은 날, 예이츠는 고향 이니스프리를 항상 그리워했지만, 그의 나이가 60초반으로 들어서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비잔티움’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게 만들었을까? 그는 이전에 비잔티움을 여행한 일이 없었다. 그에게 그 도시는 ‘불멸의 지성’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은 유럽문명의 중심이었고 정신적 철학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곳으로의 여행은 그의 영적생활 추구의 상징이었다고 예이츠는 말했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와 오스만 트루크 그리고 이슬람의 문화가 섞여 있는 비잔티움은 6세기의 예술가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예이츠의 말과 같이 비잔티움은 예술정신과 철학의 가장 높은 수준을 구가했으며, 영혼이 없는 자들이 영혼을 추구하기 위한 영적여행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예이츠는 1928년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란 시를 ’The Tower’라는 시집에서 발표하였다. 평론가들에 의하면, 이 시의 중심 아이디어는 시간이 어떻게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자연적인 힘과 열정을 서서히 쇠약케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 힘을 얻은 뒤, 소멸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의 첫 연(聯)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도발적인 번식모습이다. 예로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 들’이 나오고, 산란을 위해 폭포를 올라가는 연어들, 바다에 우글대는 고등어의 모습이 나온다. 예이츠는 이러한 번식의 이미지를 가장 강력한 젊음의 힘으로 상징한다. 반면 노인들의 모습은 ‘막대기에 걸린 다 헐어진 옷’과 같이, 혹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노래 부르기를 대신하여 ‘기념비를 연구하는’ 힘 빠진 모습으로 연출한다.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젊음이 가지는 혜택은 젊은이를 위한 것이며, 늙은이들은 자신을 위한 다른 가치를 창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첫 연의 끝부분에 ‘불멸의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혹 젊음과 육체적 쾌락은 인생후반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존재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이츠는 인생의 전 후반에 공정한 균형감각을 부여함으로써, 폭넓은 관점에서 시간의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그는 그가 늙었기 때문에 노인을 찬양하는 유혹에서 벗어났다.
이제 70초반에 진입한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할까? 예이츠의 시 첫 부분에 나오는 ‘저 세상은 늙은이 들이 살 곳은 아니야’, ‘그럼 난 뭐야? 늙어빠진 나는 도대체 뭐냐고?’라는 말처럼 실망하고 분노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젊음이 누리는 본능이나 관능의 음악에서 깨어나 새로운 가치인 ‘불멸의 지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처럼 그 지성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각자의 정신의 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난 먼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 온 것이지’와 같이 노인들이 추구해야할 것은 자기만이 가진 영혼의 노래이다.
예이츠에게 다행한 것은 비잔티움이란 서양문명의 성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야 할 것과 여행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고구려의 구토회복인 다물정신(多勿精神)일까? 아니면 파미르고원에서 홍익정신(弘益精神)을 찾아야할까? 그도 아니면 고대 수메르까지 시간여행을 해야 할까? 그래서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처럼 영생을 찾으려는 여행을 떠날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찾아야할 정신적 고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공유하는 정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며, 종교적 구원 외에는 우리가 순례할 성지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며 기회이기도 하다.
이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암울한 시대에, 우리의 정신만이라도 안전한 포구에서 잠시 쉼을 얻도록 예이츠의 시를 감상해보면 어떨까?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Sailing to Byzantium)
1.
저 세상은 늙은이들이 살 곳은 아니야,
자 보렴, 젊은 것들은 짝을 지어 껴안고 있고
숲속의 새들은 짝을 찾느라 연신 지저귀고 있잖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저 죽어가는 것들을 봐!
산란하기 위해 수 천리 물길을 찾아온 연어는
물살 거센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바다에는 고등어가 짝을 짓느라 득실대고 있잖아?
저 모든 것들, 사람이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이나 모두
그저 배고 태어나고 죽는 저 일에 몰두해 있지 않니?
그저 본능 아니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을 뿐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지 않니?
그러니 이곳은 나와 같은 늙은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저들의 세상이 아니겠어?
2.
그럼 난 뭐야? 늙어빠진 나는 도대체 뭐냐고?
솔직히 말해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막대기 위에
낡고 헤어진 외투를 걸쳐놓았을 뿐이지,
혹 영혼에서 울려나와 박수를 치고 노래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언젠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 이 낡은 외투의 조각조각들을 위해
더 높고 힘찬 영혼의 노래를 불러댈 수 있다면 혹 모를까
그냥 늙은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
그런데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난 먼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온 것이라네.
3.
아, 성자들이시여, 황금으로 새겨진 모자이크 속에
신의 성스런 불 속에 영원히 서 계시는 당신 성자들이시여,
성스런 불로부터 나오셔서 허공으로부터 감돌며 내게 내려오시라,
오셔서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주시라.
욕망에 찌들고 병든 내 심장,
한 번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어야할
유한한 생명에 얽매어 스스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나의 심장을
말끔히 태워주시오, 그리하여 나 역시도
벽속에 장식된 저 영원한 예술품 속으로 넣어주시오.
4.
나고 죽는 제 세상으로부터 한 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 다시는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로 된 그 어떤 몸뚱이 같은 것은
취하지 않으리라,
먼 옛날 희랍의 金細工(금세공)장이가
졸음에 겨운 황제를 깨우기 위해
금으로 入絲(입사)하고 琺瑯(법랑)하여
만들었다는 한 마리 황금의 새가 되어 지저귀리라,
아니면 황금의 가지 위에 앉아
비잔티움의 여러 귀족들과 귀부인들에게
지나간 일들과 눈앞을 지나가는 현재, 그리고 또 다가올 미래를
노래로서 들려주리라.
주) 이름 있는 시인이 직역으로 번역한 것보다, 시 전체의 분위기를 살리는 이 번역을 택했으나 번역자를 확인하지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