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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천년, 집의사직 유적지 답사보고: 간재 전우 및 고부이씨의 줄포입향 유적지 답사
- 일시: 8.14(토) 오후 2시 00분
- 모임: 줄포면사무소
- 참석: 1.세환 집의종회장, 2.정곤 집의고문, 3.연수 집의총무, 4.병환 종친(37집의), 5.이용범 줄포면지 편집위원장(시인, 백산고 교장), 6.고길섶 줄포면지 간사(작가, 문화비평가), 7.박래철 편집위원(지리학자, 풍수지리학자), 8.허철희 편집위원(사진작가, 한학자), 9.허정주 편집위원(민속학자)
# 한라에서 백두까지! 경향각지 고부인의 위난극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줄포, #근대사박물관 건립, #일념통천으로 기원합니다.
간재 전우의 삼남 응재 전경구와 그의 장남 전일정, 그의 아들 전재기, 그의 아들 전계윤과 전동훈(스파클 대표)과 전계룡이 살았던 가옥. 전우 선생은 1905년 서당동 목리의 제자 양산 이종곤의 부친 이시풍과 셋째 아들 전경구, 그리고 언덕 너머 목리 서당동에 사는 그의 문인 극재 이시택의 초청으로 줄포에 오셨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무시다가 고부이씨 재각 소심재에서 기거, 학당을 설숙하고 강학하였습니다. 응재 거사 전경구는 1896년경 이곳 목중리에 들어왔고(일설에 따르면 1905년에 부자가 함께 왔다고도 하지만, 촌로의 전언에 의하면, 담양전씨와 창녕조씨가 같은 시기에 서당동 목리에 적거했다 함, 1896•1905년?, 요 체증), 분명컨게 1905년 간재 선생이 부약재로 와 3년 동안 머물면서 줄포를 호남 유림의 중심지가 되게 했습니다. [전 계화초교 전백기 교장과 그의 계부이신 고 전일형 옹의 증언에 따르면, 간옹의 삼남 응재 전경구가 코흘리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줄포 땅을 밟은 것이 을사년 봄이며, 선생께서 줄포에 오신 것은 그해 겨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을사 5월에 부약재 현판을 걸었다는 문헌록을 볼 때, 선생께서는 이곳 서당동을 왕래하셨고, 책보따리를 들고 이거하신 시점이 겨울일 것으로 보여지며, 그해 겨울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콧물이 얼어 고드름이 맺힌 혹한의 겨울이었다 합니다. ]
1905년, 고부이씨는 '소심재' 재각을 대수리하여 이곳으로 간재 선생을 모셨고, 선생은 새롭게 단장한 재각을 '부약재'로 이름을 지어 손수 현판을 쓰셨고, '부약재기'을 지어 걸었습니다.
서당동 목상리의 적선보. 줄포면 난산리 512번지에 위치한 이곳은 서당동의 목판 및 석판 인쇄의 산실입니다.
이곳 적선보에서 1932년의 '부풍승람'(1932, 부안향교), 1942년의 '원재집'(1942, 전주인 이원재, 후손 이복수, 문인 이인수 외), 1959년의 '정의재유고'(1959, 고부인 이기로, 후손 이시택•이원종)가 인쇄되었습니다.
1782년의 고부이씨 최초의 대동보인 '임인보'(1782, 고부이씨대종회)의 목판 활자 원본. 당시 영남과 호남지방에서 모습을 보였던 민간인 주도의 목판 인쇄술을 고증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계고정 옆 우물터.
부약재 앞 논 건너 조그맣게 찍힌 정자가 계고정입니다. 이 계고정은 간재 선생께서 국운이 기운 대한제국에서 선비가 해야 할 바를 설계하고 준비하여, 그 다짐을 '계고정기'에 담았습니다. 간옹이 부약재에 머문 1905~1908년, 이 3년은 간재 전우(1841~1922) 선생의 '장루지지(장루지지) 15년 역사'(1908년 줄포를 떠나 도착한 '왕등도 -> 고군산열도 -> 신시도'까지의 5년과 -> 계화도 10년; 도합 15년의 간재학당)를 준비한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의 굳은 의지가 담긴 '계고정기'는 부안읍지 '부풍승람' 누정편에 실려있습니다.
□ 누정(樓亭): 1. 계고정(212, 稽古亭): 군에서 남쪽으로 40리의 줄포면 난산리 고부이씨 재각 부약재의 동쪽에 있다. 고종 을사년(1905) 5월에 간재 전우 선생이 문생·제자(諸子)들과 함께 부약재에서 학문을 익히고 닦았는데, 당시 이 정자를 짓고 이름 지었습니다.
또 간재 선생이 쓴 명(銘)이 있는데, “옛날 일을 고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늘날에 쓰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리석고 옛 사람은 똑똑하지만, 어찌 마음이 둘이겠는가? 마음은 속진에 찌들어, 이리저리 옮겨감이 끝이 없는데, 드디어 천연에 이르렀으니, 옛것에 비추어 부끄럽구나. 이 정자가 날개를 편 듯하니, 여러 선비가 몰려오지만, 지금은 내치고 함께할 수없으니, 오직 옛날만을 믿으려 하네. 이해와 득실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한데, 어째서 미련한 놈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나는 배우는 자들을 위해 심담을 토로하는데, 쓴 맛을 꺼려하지 않으면, 맛이 바뀌어 감람 맛이 된다네.” 고, 하였습니다.(간재 전우, 계고정기)
⦁ 在茁浦面卵山里. 瀛州李氏齋閣東, 高宗乙巳仲夏. 良齋田先生愚, 與門生諸子講靡于乎孚禴齋, 時構此亭, 名之. 又有銘曰, 稽古何爲. 欲以用今, 今愚昔哲, 惡有二心. 心爲俗漬, 轉徙不已, 遂至天淵, 指古作恥. 有翼斯亭, 有來羣彦, 黜今無與, 惟古是信. 利害得失, 較若列眉, 如何迷夫, 尙不覽知. 吾爲學者, 吐心吐瞻, 莫厭苦澀, 味回橄欖. [良齋田愚撰, 稽古亭記, 212]
목중리 앞잔등에 있었던 무기고 터. 옛 건선면 서당동은 건선방 건선리로, 지금의 줄포면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일제에 저항하는 존화척왜 사상의 발원지였고, 1947년 경찰 2명을 민간인이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민족주의 인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1947년의 '노루목 사건'과 함께, 이곳에 건선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었고, 당시 가장 컸다는 알미장터에 대해 대담하는 줄포면지 편찬위원들.
• 노루목 사건의 범인을 오래도록 특정하지 못하자, '전주까지 인근 주민들을 불러 심문했다. 나도 불려 갔는데, 막내를 임신한 상태여서 그래도 좀 견딜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초죽음이 되었다.', 고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합니다(고부인, 37세 이병환 증언).
목중리 앞 건선면사무소 터: 목중리 마을회관에서 앞잔등(옛 무기고 터) 중간 지점에 있었던 건선면사무소 터입니다. 사진의 전선주 두 주가 세워진 지점에 옛 목중리 모정이 있었고, 이 모정에서 앞잔등 쪽으로 50m x 50m 지점에 폭 100m x 70~80m 지점이 건선면사무소 터로 추정됩니다.
⦁추정 근거: ① 목중리 출신 전홍기(66, 서울 거주)와 이병환(66, 서울 거주)이 어린 시절, 이곳 모정에서 마을 어른들의 장기 관람을 하고 있을 때, 증언자 전홍기의 부친인 고 전일형 옹(간재 전우의 손자)께서 ‘이자리가 옛 건선면사무소 자리이다. 옛 건선면 시절 중심지는 목중리였다.’ 고 하셨다 합니다. ② ‘1975년 봄, 모정 위의 윗배미 밭과 모정 아래의 아랫배미 과수원을 합하여 논으로 만들 때, 위 그림 표시 100m x 70~80m 부분 지역에서 기왓장 잔해가 나왔다.’, 고 부친을 도와 현장을 목격한 전홍기 당사자가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현장에 모인 고 전일형, 고 이종민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은 '옛날 마을 집은 모두 초가집이었다. 기와집으로 지은 건선면 관아가 이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고들 하셨다 합니다. ③ 이 때 목중리 모정은 동네 당산나무 아래로 옮겼으며(현재 작은 당산나무 위치, 당시의 아름드리 마을 보호수는 세월과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다시 심었음.), 이 모정이 후일 현재의 마을회관 앞으로 옮겨 신축했습니다.
이 지점 오른쪽에 목중리 모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위로 50m, 오른쪽으로 50m 지점을 좌표로 폭 100m x 70~80m 지점에서 기왓장 잔해를 발견했습니다. 1975년 봄 이곳의 밭을 논으로 만들 때인데, 이 땅의 소유주인 전일형과 마을 어른들이 '여기가 옛 건선면사무소 자리가 확실하다!' 고 했던 이야기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전홍기가 증언했습니다.
• 지서와 알미장에 대해서는, 듣기는 들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건선면사무소가 목중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그 사실이 고증된다면), 목중리의 개방형 지형을 볼 때 알미장터 또한 목중리에 있었고, 우물터에서 면사무소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 봅니다.
• 아니면, 면사무소 자리에서 목중리 앞잔등(혹 더 넓게는 남월 최진호네 집 부분까지)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 목중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경목회'의 최고령 회원이신 이종채 옹(84, 서울 거주)은, '한때 남월과 목중리를 합하여 '남중리'라 불리었던 시기, 이 시기가 서당동 중심의 건선방 또는 건선면의 전성기였고, 이 시기 이 일대에 알미장이 서지 않았을까?', 하였는데, 이 말씀에 목중리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 이는 무기고가 자리했던 위치와도 연결됩니다. 목중리 앞잔등이라 불리는 곳, 지금의 목중리 앞 사거리! 이곳이 알미장의 중심이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운집하는 곳에 지서가 소재했고, 훗날 그 곳에 무기고를 세웠다는 추정이 목중리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 [# 내 고향 줄포]1905년, 을사지변은 참으로 번곤사태였습니다. 간옹께서 목숨으로 담보하여 청참오적소 올리고, 온 집안[담양전씨, 야은공파]이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 [어쩌면, 1895년 박영효 등이 간재 전우를 수구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 실현을 위해 전우를 죽여야 한다.'는 소를 올리자, 고종께서 이를 거절하고 순흥부사와 중추원 찬의로 임명했고(모두 거절함), 이듬해인 1896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를 거부하고, 역적 척결 소를 올림. -> 1896년 7월 ~ 1899년 2월, 최명희의 주선으로 충청도 태안 근흥면에서 후진 교육. -> 1899년 공주 금곡으로 이거함.]
• 간옹께서는 태화산으로 은거하고, 큰집 일효(민구의 자?)는 공주 명강 서당을 지키려 종가에 가고, 작은집 정재공 화구는 익산 삼기 기산리 선영으로 이거하고, 우리집 응재공 경구는 서당동 목리 중재공 시풍(고부인, 33집의)이 사는 곳으로 이거해야 했습니다.
• 한 동네에 위아랫집에서 살던 전백기 교장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응제 조부께서 부친의 명으로 어린 일정과 일순 두 아들을 데리고 목리 서당동으로 오셨는데, 일형 숙부는 10년 뒤 태어난 목리 서당동 태생이라고..!
• 그리고, 서울에 사는 전홍기의 전언에 의하면, '백부 일정공은 1900년생이요, 계부 일순공은 1901년생, 년년생이라. 나(일형)는 형들과 15년 차 1916년에 출생한 순수 건선방 목리 서당동 출신이다.'고, 부친으로부터 들었다, 합니다.
• 중재공의 아들 양산 종곤(고부인, 34집의)이 목리뿐 아니라 건선리 촌장으로 건선방을 받들던 시절의 촌로의 전언에 따르면, 담양전씨와 창녕조씨는 비슷한 시기에 세거하였는데, 목리 서당동의 가옥 위치를 볼 때 창녕조씨가 먼저 자리잡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담양전씨 야은공파의 줄포 입향이 1896년 경이라는 설과 1905년에 부자가 함께 입향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만.. 부약재기에 오른 기록에 따르면(1905년 5월), 이 시기 이전에 선생께서 서당동에 왕래하셨고, 이 즈음 응재공이 난산리 451번지(일제하 1914년 통폐합 주소)로 입향하고, 선생은 암살 위협을 피해 삼남의 집에 잠시 머무시다가 부약재에 학당을 열였습니다.(담양전씨 야은공파, 줄포 입향조 전경구 참조).
간재 전우의 셋째 아들 응재 거사 전경구의 묘비. 공의 묘 아래 간재의 손자 전일중, 전일순, 전일형의 묘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고, 그 아래 간재의 증손 전재기의 묘가 있습니다. [1] 경구-일정-재기-(계윤, 동훈, 계룡), [2](경구)-일순-백기-(계환, 계영, 계엽), [3](경구)-일형-(동수, 남기, 홍기). 일정은 간옹의 제자 시택의 장남 종회의 아내로 무남독녀 정순을 출가시켰고, 일형은 간옹의 애제자 종곤의 이녀 공례를 아내로 맞아 고부이씨와 사돈지간의 특별한 연으로 서당동 목리의 영광을 후세에 전했습니다. # 건선방 줄포의 역사, # 건선방 건선리의 역사는 을사년 1905년부터 시작됩니다.
이세환 고부천년 편찬위원. 고부이씨 종가 집의공파의 종회장인 그는 고부 와석동 -> 한양 사온동 -> 부안 행랑동 -> 줄포 서당동 목리에 이어지는 천년 역사의 흔적을 줄포면지가 찾아주기를, 그 시작의 족적을 남겨주기를 바랐습니다.
소해 여재실의 첨추공 이승종(23집의) 묘역. 멀리 서해 바다와 방장산이 보입니다. 뫼까티, 또는 마까티라 불린 이 여재실 벌안은 줄포국민학교와 수당국민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습니다. 사진은 유년시절의 소회를 증언해 준 이용범 백산고 교장선생님. 줄포가 낳은 천재 시인인 그는 2022년 3월 발행 예정인 '줄포면지' 편집위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문헌 23세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공 승종의 묘. 여재실은 공의 묘각입니다.
청풍무도의 서해 바다. 저 건너 산, 저 산 너머 망망대해, 그 너머 척왜존화의 신념으로 일생을 사셨던 간재 전우, 선생이 줄포로 오게 된 왕등도가 있고, 간옹 당신의 정신의 뿌리인 중국이 있습니다. 간재 전우가 줄포로 온 것은 오직 하나, 중국에 가장 가까운 섬이 왕등도고, 일제가 함부로 오지 못할 곳이, 서해고도 외딴 섬이여야 하고,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이 줄포밖에 없었다고 헙니다, 그 당시에는
고부이씨 유적지를 답사하는 줄포면지 편집위원님들. 사진 왼쪽부터 고길섭 간사(작가, 문화비평가), 허정주 위원(민속학자), 허철희 위원(사진작가, 한학자), 이용범 위원장(시인, 백산고 교장), 박래철 위원(지리학자, 풍수지리학자), 이정곤(고부이씨 집의공파 고문).
1782년, 고부이씨 최초의 대동보 '임인보'를 인쇄했던 목판 활자 원본
이곳 적선보는 서당동 인쇄문화의 발원지로, '부풍승람'의 출판 정보에 기록된 줄포면 목상리 511번지의 인쇄자 이시택의 자택입니다. 그의 부친 정의재 이기로가 짓고, '적선보'라 현판을 건 가옥이자, 즉 32세 기로 - 33세 시택 - 34세 원종으로 대를 이었던 건선방 서당동의 인쇄출판소입니다.
간재 전우가 짓고 친필로 쓴 '부약재기'와 '부약재' 편액. 간재 선생은 은거지에서 암살위협을 받던 1905년, 서당동 목중리의 중재 이시풍과 응재 전경구, 그리고 목상리의 간재 문인 극재 이시택이 초빙하여 이곳에 왔고, 왕등도로 떠난 1908년까지 3년 동안 부약재에 머물면서 강학하셨습니다. 학동들이 부약재 학당을 가득 채우자, 그 앞에 누정 '계고정'을 지어 지도하셨는데, 국운이 기운 나라의 선비가 나아가야 할 바를 결심하고, 그 다짐을 직접 짓고 손수 쓴 '계고정기'에 담았습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 고부천년, 집의사직 유적지 답사보고: 간재 전우 및 고부이씨의 줄포입향 유적지 답사
- 일시: 8.14(토) 오후 2시 00분
- 모임: 줄포면사무소
- 참석: 1.세환 집의종회장, 2.정곤 집의고문, 3.연수 집의총무, 4.병환 종친(37집의), , 5.이용범 줄포면지 편집위원장(시인, 백산고 교장), 6.고길섶 줄포면지 간사(작가), 7.박래철 편집위원(지리학자, 풍수지리학자), 8.허철희 편집위원(사진작가), 9.허정주 편집위원(민속학자)
# 한라에서 백두까지! 경향각지 고부인의 위난극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 고려 검교 첨의정승 여산군 이경조(1035[고려 정종7]~1116([고려 예종11])는 고부이씨의 시조로 시호는 문헌(文憲)이십니다. 1035년(고려 정종원년) 고부군 와석동에서 출생하여 1064년(고려 문종18)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에 올랐습니다. 1104년(고려 숙종9)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보정공신에 녹훈되어 여산군(礪山郡)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검교첨의정승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서당산(書堂山) 아래에서 학문을 강론하였습니다.
금년(2021년)으로 탄생 984주년을 맞아 천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조선 초 15세조(世祖)까지 단일 파족으로 이어오다 16세 회(晦) 선조부터 삭(朔), 망(望), 초(初), 국(國), 서(瑞), 진수(眞粹), 효번(孝樊), 협(挾)의 아홉 분을 중시조로 모시면서 17개 파로 분파되었습니다. 16세조까지의 후손은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66분이 계신 가운데, 그 중 27분이 종3품 이상의 높은 벼슬을 지내며 고려 십대문벌 ⦁ 조선명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39대에 이르며 번연(蕃衍)해진 후손들은 ‘나라에 충성하되 의(義)를 따르고, 정성으로 조상과 부모를 섬기며, 곧은 길을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 부약재 앞 '협'과 '만록' 정려에 게시된 줄포 고문헌입니다. 한국효문화진흥원에서 발간할 '한국효행열전'에 오를 효행자이며, 이를 고증해 줄 공적 문헌입니다.
• 금계포란! 우리 모든 줄포인들의 명당!! 우리 모든 부안인들의 가슴 속에 새겨지는 영지.. 부풍승람의 부안입니다. 내 고향은..
산 위에 해가 뜨니 아침햇살 빛날 담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줄포# 부안# 근대사박물관 건립 기원#
노루목: 협곡 & 협천.. 부령에서 건선~ 탐라에서 백두~ 골짜기에서 냇가로~, 강이 되고 바다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한반도,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작은 마음, 조심스런 정성, 부약재의 옛이름!, 소심재의 역사입니다. 건선의 역사요, 줄포의 역사입니다.
간옹의 손자 전일형이 살았고, 그의 아들 전동수와 전남기와 전홍기가 살았던 가옥. 담양 전씨는 전우 선생의 삼남 전경구가 1905년 봄(일설에는 1896년 경이라고도 함)에 이곳 목중리로 와 살았으며, 그는 두 아들 일중과 일순을 데리고 왔고, 10년 뒤 막내 일형을 낳아, 이들 세 아들의 자손들이 최근까지 살았습니다. 가옥의 창고 옆 건물은 목중리 마을회관, 그 앞 검은색 기와 지붕 목중마을 모정이 보입니다. 모정 앞에는 옛 아랫샘 우물터가 있습니다.
# 제 고향은 줄포입니다, 일념통천 부풍 근대사 박물관 건립,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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