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年-문태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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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어떻게 살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가끔 생각한다
내가 없어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 지상의 삶을 잘 갈무리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인생엔 저마다 감당해야 할 수레바퀴 시계가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도 결국엔 홀로 떠나고 홀로 남는다
맑은 날 사랑하는 사람과 햇살 고운 창가에 앉아 죽음을 생각해보라
이별을 생각하면 사랑이 더 귀해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하지 않던가 삶과 죽음은 한몸이다
문태준(38)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지상의 생명붙이들이 가진 저마다의 삶과 죽음의 역사에 동참하는일.
들숨과 날숨이 고루 드러나는 잔잔한 숨결의 기록들을 읽는 일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낱낱이 귀하고 섧고 아름답다. 또한 고독하다.
문태준은 고독을 저어하거나 피해가지 않는다.
사랑처럼 고독 역시 삶의 일임을 알며 기꺼이 고독과 이별을 영접하여 맨발을 닦아드리는 시인.
많은 독자가 문태준의 시를 사랑하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알고 있는 고독의 감각에 섬세한 언어의
오솔길을 놓으며 그가 우리의 일상과 동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방송 피디 일을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시를 쓰는 문태준은
하루라고 시를 쓰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적인 기도이고 백팔배이다
이렇게 눌러쓴 그의 시가 갈무리하는 고독과 이별은 고립된 병리가 아니라 애잔하고 따뜻한 삶의 일부로 우리 옆에서 숨 쉰다.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우는' 시인의 울음은 울음인 줄도 모르게 나직나직 하여서
어느새 숨결처럼 몸에 스민다.
술집에서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는데 베갯모에 '百年'이라는 글씨가 새져겨 있다.
흔히 목숨 수(壽)자나 복 복(福)자를 수놓는 베갯모에 수놓아진 '百年'이라는 글씨에 시인의 시선이 멎고,
사랑의 약속인 '백년가약'이 당신의 와병속에서 무량하게 글썽거리기 시작한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이 공존하는 '백년'이라는 말은 세속적이면서도 영원을 꿈꾸게 한다.
백년을 혼자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백년을 살기는 힘드니. 유한한 존재의 안타까운 사랑의 열망이
'백년가약'이라는 말을 만들었을 터, 시인이 가만히 열어 보여주는 백년의 비밀속에는 백겹의 시간이 출렁인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당신의 '백년'은 어디 있는가. /장석남
- 2008. 11. 12 조선일보
첫댓글 포유류의 97%가 일부일처제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 기꺼이 귀속되어 한평생을 숭고히 살다 간다는것. 진정 아름다운 일이지 싶습니다. 백년아니라 천년 만년의 시간동안 출렁이며..그런데 조금 지겹기도 하겠는데요..? ^^
살다보면 진짜 지겨울때가 많아요. 근데 그 고비 넘기고나면 다시 괜찮아지고..그러면서 늙어가는거겠죠? 부부가 유통기한이 있어서 몇십년 살고 바꿀수 있다면 몰라도 ㅎㅎ
같이 가는 동안 출렁이며....... 지겹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모든 시간을 같이하며...... .
가끔 남편이랑 둘이 앉아서 죽음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엔 서로 생각해준다고 상대방보고 더 오래 살라고 하다가, 남아있는 사람의 고통은 어떨까 싶으니까 이제 남편에게 먼저 가라고 합니다. 물론 제 수명대로 다 산 뒤에 이야기지만, 잔병치레 많은 내가 먼저 갈것 같아서 걱정도 되지요.
ㅎ~
누가 먼저가는 일이 없음 좋겠어요. 그냥 한 날 한 시에........ . 슬픈 거 싫어서요. 그쵸?
사람 살아가는 일에 뜻대로 되는 일 별로 없지만 죽음이야말로 예고없이 순서없이 그렇게 오던데요. 간 사람은 말이 없고 남은 사람은 잠시 혼란에 허우적 거리다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말 나온 김에 얘기 할랍니다. 비밀도 아니고... 아이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난 지 오늘이 100일 입니다. 미루고 있던 옷장정리를 했어요. 나름 입성이 까다롭던 남자여서 옷이 많기도 하네요. 아들이 몇 가지 갖겠다는 거 빼고 가톨릭 빈민사목회에 보내려고 꾸렸습니다. 그냥 무량에서 여러분 만나기 전의 제 신상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 뿐이니 위로의 말씀, 그런거 사절입니다.긍정적 낙천적 사람이라 잘~지내고 있거든요.
...... .
사람 살아가는 일에 뜻대로 되는 일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아시니깐 드리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깊은 위로의 말씀 올립니다..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릴까 하다 꾹 참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일상으로 잘 돌아오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