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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 쉬멍 걷는다 제주 올레
제주에 '걷는 길(Trail)'이 만들어졌다. '제주올레' 길이다.
올레의 원뜻은 제주어로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길을 뜻한다.
이 제주 만의 독특한 길들을 엮어 '제주올레'로 재창조한 사람은 제주 출신 언론인 서명숙(현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씨다.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고 돌아와 고향 제주에 걷는 길 올레를 만들었다.
올레길은 2007년 9월9일 제주의 동쪽 성산에서 시작해 서귀포를 거쳐 현재 저지오름까지 총 13코스(231km)가 만들어져 있다. 올해 6월27일에 13코스가 열렸다.
앞으로 20코스까지 만들어 제주를 한 바퀴 이어놓을 게획이다.
전 세계에는 이름난 걷는 길(Trail)이 많다. 슾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페루의 잉카 트레일,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일, 히말라야 트레일 등, 걷기 운동은 이제 지구촌 전체의 트렌드다.
우리에게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제주올레 트레일이 있다.
한라산을 축으로 사람들은 걷는다. 돌담길을 걷고, 오름을 오르기도 한다. 곶자왈 숲길을 지나고, 아슬아슬한 기정(절벽)길을 걷기도 한다. 바당(바다)길을 걸을 때에는 제주의 여신인 해녀들을 만나기도 한다. 제주의 햇살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천천히, 천천히 걷다보면 우리 모두는 진정한 순례자가 될 것이다.
"올레길에서는 간세다리로 놀멍 쉬멍 걸어보게 마씨."
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이해선씨는 30여 년간 세계 곳곳의 오지나 비경지를 떠돌며 사진작업을 해온 작가다. 1993년 바탕골 미술관에서 첫 사진전 '낯선 시간들'로 세상에 선보였고, 오지 여행기록인 <내마음속의 샹그릴라>, 라다크 방랑기록인 <10루피로 산 행복>, 이스터섬 체류기인 <모아이 블루> 등 고품격의 사진집을 겸한 여행서를 출간,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진가이기 이전에 글장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그의 글이 보이는 감성은 종종 사진에서의 감동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뛰어나다.
제주올레 제1코스 시흥~광치기 올레(총 15km, 4~5시간 소요)
전설의 설문대할망이 저기 살아나왔네!
올레의 시작은 제주에서 가장 해가 먼저 뜨는 성산포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제주 동회선 일주버스는 학교 입구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올레길의 시작이다. 동네 뒷산 같은 두산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돌담장들로 둘러처진 밭에는 당근과 감자들이 자라고 있었다. 화산석 때문인지 땅조차도 거뭇했다. 구불구불 돌담길을 따라 두산봉에 올랐다.
말미오름이라고도 불리는 두산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과연 노인들 말처럼 절경이었다.
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제주 신화 속 '설문대할망'은 한라산과 일출봉에 다리를 걸치고 우도를 빨래판 삼아 빨래를 했다고 한다. 올레길을 걸을 때만은 설문대할망의 전설에 푹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검정 돌담, 노란 유채, 당근, 감자밭, 오름 자락으로 펼쳐진 밭과 돌담들이 만들어낸 문양이 거대한 조각보 같다.
말미오름에서 사람들은 대개 바다의 광활한 풍광에 끌려 바다만 바라보다 내려간다. 그러나 몸을 돌려 한라산도 바라보자. 올망졸망 오름들을 자식처럼 거느린 한라산에도 눈인사를 해보자. 올레길 내내 저 산을 보면서 걸어야 할 터이니.
말미오름에서 내려와 이제는 알오름으로 올라가보자. 소들이 길을 막고 서있는 목장길도 지나고 호밀밭도 지난다. 고사리를 머리에 잔뜩 이고 있는 묘지를 지나다 보면 푸른 철문이 달린 목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말미오름이 소들의 천국이라면 알오름은 말들의 세상이다. 그래서 일명 '말오름'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갓 태어난 망아지들의 재롱을 보며 앉아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가롭다. 오름의 발아래로 이름도 예쁜 종달리마을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종달리..
마을은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하고 평화스러웠다. 훼손되지 않은 원형의 올레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올레는 집에서 바깥으로, 밖에서 집으로 들고 나는 길이다. 안과 밖의 완충지대, 올레는 어느 공간보다 넉넉한 공간이다.
집안에는 인적이 없다. 바람만이 돌담 사이로 넘나들며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필경 집주인은 소라나 보말을 따라 물질을 갔거나 다들 마늘밭에 일하러 갔으리라.
종달리마을은 남국의 시에스타처럼 잠들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큰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한때 염전이었다는 곳에는 갈대들이 무성하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종달리 아낙들이 머리에 이고 한라산 자락을 넘어 멀리 제주까지 팔러 다녔다고 한다. 그들의 고달픈 걷기에 비하면 지금 맨 몸으로 올레길을 걷는 우리는 얼마나 수월한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다리를 달래며 타박타박 다시 길을 걸었다.
조개가 많이 잡힌다는 종달리 바닷가에 이르렀다. 우도를 지나온 파도가 모래톱에서 찰랑거린다. 모래톱을 걸을 때 발밑에서 조개껍질들이 짜그락짜그락 소리를 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조개껍질 부서지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그 소리가 이곳까지 끙끙거리며 안고 왔던 내 안의 근심들을 지워 버린다.
해무 사이로 우도가 가물거렸다. 가던 길을 멈추고 모래톱에 주저앉았다. '놀멍 쉬멍 걸으멍' 중 '놀멍 쉬멍'만 하는 것 같다. 1코스 종점인 광치기 해번이 지척인데 나는 이곳에서 일어설 줄 모른다. 배낭 속 시집 한 권을 꺼내 바다를 향해 펼쳐 들었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바다에 취한 올레꾼, 배낭을 메고 잔다.
*교통
제주공항에서 100번 시내버스를 이용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동회선 일주버스(성산 경유)를 갈아타고 성산 시흥교회(정류장 명칭) 앞 하차.
*숙박
시흥리 할머니 민박집:서귀포시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을 도배하고 이부자리도 새로 장만해 깨끗하다. 다소 불편하지만 외갓집에 온 것 같은 푸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민박집이다.
초롱민박:해녀 출신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직접 따온 해산물을 먹을 수 있다. 성산초등헉교 부근. 064-782-4589, 011-691-4580.
성산포빌리지:새로 지어 깨끗한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 1코스 종점 광치기 해변에서 일출봉 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다. 784-8940.
라까사인펜션:1코스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다. 시흥 해녀의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782-0399.
강태여 할망민박 782-7753, 오신생 할망민박 016-9838-4773, 강병희 이장민박 011-691-3278, 쏠레민박 784-1668, 011-692-1438.
*먹을거리
시흥해녀의 집:조개죽과 전복죽이 유명한 곳. 해녀들이 수확한 해산물로 요리하며 주민들이 직접 운영. 782-9230.
오조해녀의 집:종달-시흥 해안도로 끝 성산갑문 인근에 있다. 해녀들이 직접 운영하는 곳으로 전복죽과 조개죽이 유명하다. 민박도 겸하고 있다. 784-0893.
수마포 해변 해녀 노점:일출봉 아래에 있는 이곳에는 그날 채취한 해산물을 저렴하게 판다.
광치기 해산물촌:1코스 종점이자 2코스 시작인 광치기 해변에 있다. 성게국, 각종 해산물 등을 먹을 수 있다.
제1-1코스 우도 올레(총 16.1km, 5~6시간 소요)
종일 아름다운 바다 풍경 속을, 풍경의 일부가 되어
천진항은 우도의 관문이다. 선착장에 내려 푸른 바다를 향해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다. 올레길은 섬을 붕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쯤은 안해도 된다. 어차피 섬을 한바퀴 돌아 다시 이곳에서 배를 타야 할 터이니.
해안길을 조금 걸어가자 '올레길' 이라는 앙증맞은 표지판이 오른쪽으로 가라 한다. 돌담길로 접어들었다. 밭에는 호밀이 익어가고 황금빛 호밀밭 너머로 일출봉은 섬처럼 떠 있었다. 이제 우도 올레길이 서서히 그 속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길은 풀밭으로 이어졌다. 띠의 새순인 삘기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삐비라고 불렀다. 채 피지 않은 삐비는 참으로 부드럽고 맛있었는데... 딱히 먹을 것이 없었던 그때는 삐비가 봄이 준 간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서 먹을 수 없다.
쇠물통이라는 곳을 지나갔다. 소나 말들이 물을 먹는 곳이란다. 언덕에 올라서자 호밀밭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저만큼 백사장이 나타났다. 그 유명한 서빈백사다. 정확하게는 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이다. 강렬한 햇살 아래 모래는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모래 성분이 달라서인지 바다색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청색이다.
해수욕장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쇠물통에서 바라보았던 동화 같은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서라면 태풍으로 고립되어도 좋으리라. 마을을 지나 밭길로 접어들었다. 정겨운 돌담길 사이로 말들이 아는 체를 한다. 삘기를 하얗게 뒤집어 쓴 흰머리 묘지도 만났다.
하우목동항에는 성산포에서 온 연락선에서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항에 성산포 다니는 연락선이 다니지 않았다. 종달리와 우도를 오가던 배들이 머물던 항이었다.
하우목동을 지나 작은 포구에 이르렀다. 바닷가 아기자기한 집들로 인해 포구는 더 아름다웠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바람 센 우도에서는 태극기가 가장 잘 펄럭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애국심이 강한 포구, 이름을 물으니 주흥동 포구란다.
올레길은 다시 섬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늘밭을 지나고 작은 언덕에 올라서자 파평 윤씨 가족묘가 나타났다. 우도봉이 바라보이고 하고수동해수욕장이 바로 아래다. 호밀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돌담길은 우도에서만이 볼 수 있는 정겨운 길이다. 이 길에서는 해안선을 무법천지로 달리는 오토바이와 차량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
하고수동해수욕장은 비양도가 파도를 막아주어서 호수처럼 잔잔하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수녀들이 코이프 자락을 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간다. 저들로 인해 풍경이 더 맑아졌다.
소라 껍질로 만든 방사탑이 비양도 입구에 서있다. 섬 속의 섬 비양도는 꽃양귀비로 붉게 물들었다.
우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는 조일리마을은 검멀레해수욕장 곁에 있었다. 우도 개척자인 김진사가 거주했던 마을로 가장 오래된 집터가 있다. 조일리를 지나 우도봉에 오른다. 올레길은 우도봉으로 향하지 않고 오른쪽 망동산으로 오른다.
망동산에서는 우도의 전경은 물론이고 종달리의 지미봉과 대수산봉도 다 보인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때 이곳이 봉수대 역할을 했단다.
망동산에서 추억을 뒤로 하고 우도봉에 올랐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 풍경을 지두청사라 부른다. 오늘 내내 저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걸어온 것이다. 우도 올레길 끝인 천진항이 저만치 보인다. 나는 지두청사의 한 풍경이 되어 천진항으로 걷기 시작했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 혹은 서귀포에서 성산행 시내버스 이용, 성산포에서 하차. 성산항까지 도보로 15분.
*숙박
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 근처에 산호풍경(064-783-3542), 섬하얀성민박(784-4487), 하늘이민박(783-0235), 검멀래해변 근처에 동굴리조트(784-6678)가 있다.
*먹을거리
일해횟집 064-782-5204(홍조단괴해변 해수욕장 근처), 해광식당 782-0234(하고수동해수욕장 근처, 보말칼국수 맛이 일품), 해와달 그리고 섬식당 784-0941(비양도 입구 근처, 우럭지리가 유명), 동굴밥상 784-6678(검멀래헤수욕장 근처).
1- 1코스(우도) 천진항~쇠물통언덕(0.8km)~서천진동(1.4km)~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2.2km)~하우목동항(3.2km)~오봉리 주흥동 사거리(4.4km)~탑다니탑(5.8km)~하고수동해수욕장(7.7km)~비양도 입구(8.7km)~조일리 영일동(11.8km)~검멀래해수욕장(12.7km)~망동산((13.6km)~꽃양귀비 군락지(13.9km)~우도 정상봉(14.3km)~돌칸이(15.4km)~천진항(16.1km)
2- *이정표의 괄호 안 숫자는 출발점부터의 누적 거리임.
제2코스 광치기~온평 올레(총 17.2km, 5~6시간 소요)
부근 갈대숲에서 오리들이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오조 갑문을 지나 내해로 들어서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습지를 걷는 것 같다. 이곳 습지는 국제 멸종위기종인 저어새와 노랑부리저어새, 그리고 수많은 철새가 겨울을 나는 곳이다. 매년 10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이 서있다. 이곳에서 겨울을 지낸 철새들은 다 돌아가고 몇몇 오리 떼와 백로만이 한가롭게 수면 위에서 노닐고 있다. 내수면 저편으로 오조리마을과 식산봉이 바라보인다.
옛날 우도와 오조리 해안에는 유독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오조리 해안을 지키던 장수가 마을 사람들과 합심해 노람지(가리로 덮는 띠로 짠 이엉)를 엮어 식산봉 전체를 덮게 했다. 바다에서 바라본 식산봉은 영락없는 군량미였다. 이 모습을 본 왜구들은 더 이상 쳐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식산봉에 오르는 길목에 희귀식물인 황근 자생지가 있다. 노랑무궁화라고도 불리는 황근꽃은 여름에 핀다는데 아직 철이 일러서인지 꽃은 볼 수 없었다. 꽃 피는 7월이면 너를 보러 오마, 황근에게 인사하고 오름에 올랐다. 해발 60m 남짓한 식산봉에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 상록수림이 울창했다. 오름 정상에 묘지가 하나 있고, 일출봉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식산봉을 돌아나오면 일출봉에서 떠오르는 태양빛이 가장 먼저 닿는다는 오조리마을이다. 갈대숲 무성한 작은 포구에 텅 빈 배 한 척이 무료하게 떠 있었다..
올레 표시인 푸른 화살표를 따라 오조리마을을 돌아 나오자 성산 하수종말처리장 부근이다. 출발했던 광치기 해안이 지척이다. 두 시간 남짓 오조리 내수면을 돌아다닌 것이다.
성산읍 고성리, 대수산봉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그저 타박타박 포장된 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혀질 즈음 대수산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났다.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오름에 이르자 시야가 확 트였다. 어제 오늘 내내 걸었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출봉, 우도, 지미봉, 그리고 어제 올랐던 말미오름까지.
대수산봉을 내려오는 길에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있다.
수많은 비석들을 둘러보았다. 탐라국 고, 양, 부씨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후손들은 다들 뭍으로 떠나갔는가.
은평리 숲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다. 고, 양, 부 삼신인이 삼공주와 혼인한 장소로 전해지는 혼인지이다.
탐라의 시조 삼신인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동쪽 바다 위에서 오색찬란한 궤짝이 떠내려와 해안가에 머물렀다. 내려와 궤를 열어보니 벽랑국에서 온 세 명의 공주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신인들은 세 공주와 혼인지에서 혼례를 올리고 궤에서 나온 소와 말을 기르고, 오곡의 종자를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로써 제주의 농경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혼인지에는 수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옆에는 삼신인이 혼례를 치르고 신방을 차렸다는 조그만 굴이 있는 굴은 들어갈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낮고 좁았다.
혼인지에서 제주 전통혼례가 있었다. 결혼식을 하는 커플은 제주 올레길에 반해 이곳에서 혼례식을 하기로 했단다. "신화 속 혼인식 이후 혼인지에서 처음으로 하는 혼인식" 이라며 많은 하객이 참가했다. 당시를 재현하는 온평리 주민예술단의 축하 퍼레이드는 혼인지의 시간을 그 옛날로 돌려놓았다. 올레길은 탐라국까지 이어졌다.
벽랑국 공주들이 당도했다는 온평포구에 도착했다. 포구에는 제주의 옛 등대인 도대불이 서서 올레꾼을 반기고 있다. 해질녘 바다로 나가던 어부가 켰다가 아침에 들어오는 어부가 껐다는 도대불. 이제 등대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올레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교통
제주공항에서 100번 시내버스를 이용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동회선 일주버스(성산 경유)를 타고 성산리(성산 입구 삼거리) 하차.
*숙박
둥지황토민박 011-698-8805(혼인지 부근에 있는 펜션으로 올레꾼들에게 인기 좋은 곳), 성산한방찜질방 064-782-5552, 빌라켄찜질방 784-5579(성산읍사무소 부근), 소라의성민박 784-6363(온평포구 인근).
*먹을거리
아바이순대 784-0059(광치기 해변과 하수종말처리장 사이에 위치, 순대국밥과 순대정식이 유명), 온평리 생활개선회 식당 782-8689(성게칼국수가 유명), 호떡분식 782-5816(고성리 홍마트 사거리), 둥지황토마을식당 011-698-8805(둥지 황토마을 팬션 안에 위치).
제3코스 온평~표선 올레(총 22km, 6~7시간 소요)
오랜 친구인 듯, 말 한 마리 더불어 통오름을 걷다
온평포구를 뒤로하고 중산간으로 길을 잡았다. 원형의 올레길들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고즈넉한 돌담장 길은 계속 이어졌다.
신산리라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동백나무 아래 하르방들이 비를 맞고 서있다. 하나, 둘, 셋 그 아름다움에 반해 나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오들랑농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 동백나무 아래에 여러 형상의 돌하르방들이 있었다. 주인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무례하게 농원을 침입한 올레꾼을 나무라지 않고 돌하르방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익롯에 있는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3읍이었던 제주목(제주시), 대정고을, 정의(성읍)고을에 있던 것이란다. 손이 큰 돌하르방은 무인석이고, 손이 작은 하르방은 문인석이란다. 돌하르방의 수는 제주목 25기, 대정고을 12기, 정의고을 12기 등 모두 49기가 있었는데 현재는 총 47기가 남아있다고 했다. 커피까지 덤으로 한 잔 얻어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길은 난산리에 위치한 통오름으로 이어졌다. 통오름은 물통 혹은 밥통처럼 생겨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낮은 오름에 비해 분화구는 꽤 깊어보였다.
통오름은 말들의 세상이다. 비에 젖은 말 한 마리가 나를 따라왔다. 이곳의 말들은 이미 올레꾼들에 익숙한 모양이다. 비내리는 통오름에서 말과 함께 걷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통오름을 내려와 나란히 붙어있는 독자봉에 올랐다. 봉화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통오름의 분화구가 한눈에 보였다. 날씨가 맑았다면 한라산이 가깝게 보일 것 같은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왔다. 독자봉의 남쪽 면은 울창한 숲길이었다. 길은 삼달리로 이어졌다.
바람처럼 살다 간 사진가 김영갑. 이곳 중산간 삼달리에는 그가 폐교를 빌려 만들어 놓은 갤러리가 있었다..
근 20년 가까이 제주의 자연을 사진에 담아 온 그가 루게릭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이곳 갤러리에는 그를 닮은 제주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와, 바다다! 17km 가까이 중산간 길만 걷다 바다를 만나니 반가웠다. 신풍 바다목장 길이다. 바다와 면해 있는 너른 초원지대는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확 트였다. 소나 말들은 모두 우사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세찬 비바람만 몰아쳤다.
지나온 작은 다리가 '배고픈 다리' 라는 걸 알았지만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다리가 배고픈 게 아니라 지금 이 길을 걷는 내가 배가 고팠다. 날은 저물고 멀리 해비치호텔의 불빛이 등대처럼 보였다. 표선해수욕장 백사장을 가로질러 당케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다.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1리에 여성전용 민박집인 세화의 집(064-787-7794)을 운영하는 정수보, 정영희씨 부부는 제주 정착에 성공한 경상도 부부다.
지난해 9월23일부터 문을 연 게 '세화의 집'이다.
늘 여성 전용 숙소가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집 구조 때문이기도 해요. 방문을 열고 나오면 거실이에요. 그래서 남녀가 함께 지내기엔 불편한 게 많을 수밖에 없어요. 또 초창기에 올레를 찾는 사람 대부분이 여성이었거든요."
콩, 깻잎 등 손님상에 올려놓을 여러 종류의 야채와 곡식이 텃밭에 심어져 있는 세화의 집은 정영희씨의 모닝송 담긴 아침식사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면 올레꾼들은 정영희씨가 정성껏 사준 주먹밥을 챙긴 다음 정수보씨의 차를 타고 올레 기점으로 이동한다. 하루종일 올레길 걷느라 지친 상태로 세화의 집으로 돌아오면 이번에는 구운 감자가 기다리고 있다. 앞마당에 만들어놓은 아궁이는 밤이면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그 안에는 감자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면서 익어간다.
"아들만 둘 키우다 보니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힘든 표정으로 저희 집에 왔다가 환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올레 길이 구도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아무튼 이제는 올레꾼들이 아들딸 같고 가족 같아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에는 카드를 74장이나 보낼 정도로 가까워진 사람이 많아요. 이만하면 제주 생활에 성공한 거죠?"
정영희씨는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 말라"며 "어지간한 물품은 동네 가게를 이용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용료 1인 기준 1박당 25,000원(아침밥과 점심 주먹밥 포함). 1인 추가시 15,000원 추가.
*교통
제주공항에서 100번 시내버스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다음 동회선 일주버스(성산 경유)를 갈아타고 온평초등학교 하차(온평포구까지 1km 남짓 걸어야 함).
*숙박
세화의 집 민박 064-787-7794(여자들만 묵을 수 있는 가정집 민박. 올레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부근에서 전화하면 픽업 가능. 워낙 인기가 좋아 예약은 필수), 소라의 성 민박 784-6363(온평포구 부근), 해비치호텔 & 리조트 780-8000(표선해수욕장에 위치한 6성급 호텔과 리조트. 호텔에서 제주올레 패키지 상품을 내놓기도 한다. 올레꾼을 위한 특별 게스트하우스도 운영), 가원비치민박 787-0063(표선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민박집. 4~8명이 잘 수 있는 방 5개 구비).
*먹을거리
소라의 성 해녀식당 784-6363(온평리 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포구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 전북죽과 백반), 다미진횟집 787-5050(당케포구에 위치. 깔끔한 횟집으로 유명), 낭구지횟집 787-7111(당케포구에 있는 횟집으로 현지인들에게 인기. 특히 생선지리가 일품), 춘자국수 787-3124(표선면사무소 부근에 위치. 간판은 없으나 멸치 우려낸 국수 맛이 일품).
해수욕장 당케포구는 설문대할망이 만든 포구다. 옛날 이곳 앞 바다는 수심이 너무 깊어 폭풍이 몰아치면 영락없이 파도가 마을을 덮쳤다. 사람들은 설문대할망에게 마을 앞바다를 메워 달라고 빌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설문대할망은 하룻밤 만에 표선 앞바다를 메워 모래밭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포구 끝에 설문대할망당을 짓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당케포구, 그곳에서 올레4코스가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왠지 당집을 보고 길을 걷고 싶었다. 당집은 포구 끝에 있었다. 키가 닿을 정도로 낮았고, 작은 당집에는 사용하다 만 촛대와 오방색 천 조각들만 나뒹굴었다. 설문대할망을 기리기에는 너무 초라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한달에 두번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제를 지낸다고 한다.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해안 길을 걸었다. 올레길을 연 (사)제주올레의 서명숙 대표는 제주 해녀들을 여신이라고 했다. 설문대할망의 강인함을 전수받은 여신들임에 틀림없다.
가마리 해녀작업장을 통과하는 올레길은 해녀들의 삶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묻어날 것 같은 태왁과 잠수를 위해 허리에 차는 납덩어리들이 그녀들의 삶을 대변해준다. 태왁은 해녀들이 사용하는 부유도구다. 원래는 박으로 만들었지만 요즈음은 스티로폼 태왁이 대부분이다.
바닷길을 뒤로하고 중산간으로 접어들었다. 길 양쪽으로 온통 감귤 과수원이다.
5월 올레길은 향기의 길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귀에 들리는 것보다 코끝에 와닿는 꽃향기가 먼저다. 향기의 진원지는 감귤꽃이다. 향기에 대한 기억은 다른 기억들을 앞선다. 어릴 적 고향집에 피던 치자꽃 향기, 그 향기는 내 유년의 추억을 지배했다. 감귤꽃 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이 길은, 두고 두고 내 추억 속에 남을 것이다.
인적이 없는 올레길을 걷는 것은 하나의 수행에 가깝다. 사람 구경하기 힘드니 절로 묵언의 길이요, 눈을 현혹하는 대단한 볼거리가 없으니 마음도 가라앉는다. 올레길 전 코스 중 사람이 가장 없다는 길이다. 올레길 각 코스에는 길안내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4코스지기는 "이 코스야말로 진정한 사색의 올레길" 이라며 꼭 걸어보기를 권했다.
망오름에 올랐다. 나무들이 많아 정상에 올라서도 밀림 같은 숲속이다. 미로 같은 숲길을 빠져나와 '거슨새미'에 이르렀다. 한라산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샘이라 해서 거슨새미로 불린다.
중국 황실이 제주에 장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급파해 제주의 산혈과 물혈을 끊어려 했지만 거슨새미 물은 끊지 못했단다. 작은 우물 하나에도 전설은 있다. 과연 제주는 산들의 나라다.
우물은 크지 않았고 우물에서 빠져나온 물들이 작은 연못을 이뤘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길을 가자 온통 노란색을 칠한 건물이 나타났다. 황궁이다. 이름도 생소한 종교단체의 건물이다. 황궁 아래로는 영천사라는 절이 있다. 한적한 이 부근이 기도하기 좋은 땅인가 보다.
삼석교란 다리 부근을 지나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가마리를 지나온 후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묘지 부근에서 산딸기를 따고 있었다. 그녀는 "쓸쓸하게 왜 혼자 걷고 있느냐"며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홀로 걷는 내 모습이 그리 쓸쓸해 보였나? 그녀는 나에게 방금 딴 산딸기를 소쿠리째 건네며 먹으란다. 우리는 묘지에 앉아 딸기를 나눠 먹었다. 밥 사먹을 데가 없어 쪼록쪼록 굶어서인지 딸기를 채 씹지도 않고 우적우적 먹었다. 이 묘지가 할아버지 묘지란다. 묘지에는 노란 민들레와 엉겅퀴꽃이 만발해 있었다.
내가 먹은 만큼 딸기를 따서 채워 주려 했더니, 집에 가져가도 먹을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소쿠리를 들고 훠이훠이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허허로워 보인다. 쓸쓸한 사람 눈에는 모두 다 쓸쓸해 보이는 법이다.
태흥리 해안도로에는 인동초와 갯뫼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표현처럼 쓸쓸한 사람이 되어 터덜터덜 해안길을 걸었다. 태흥리 포구를 지나고 남원포구가 나올 때까지. 4코스는 길고도 길었다.
*교통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표선 민속촌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종점에서 하차(당케포구까지 200m).
*숙박
와하하 게스트 하우스 064-787-4948(보오여행자를 위한 전용숙소. 표선해수욕장에서 서쪽으로 3km 거리의 바닷가에 위치. 부근에서 픽업 가능). 그외, 3코스에 소개한 숙소들 이용.
*먹을거리
해비치호텔 양,한식당 064-780-8000(제주올레메뉴), 남쪽나라횟집 787-5556(토산리 샤인빌리조트 인근), 남원 범일분식 764-5069(주인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끓여내는 순대국밥집. 남원 주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 포구 위 길, 패밀리마트에서 서쪽으로 직진 200m), 마당갈비식당 764-5989(남원 사거리에 위치. 메밀과 무를 넣고 끓인 돼지고깃국이 유명).
제5코스 남원~쇠소깍 올레(총 15km, 4~5시간 소요)
남원포구를 지나 큰엉산책로에서는 숲과 바다가 서로 숨바꼭질을 한다. 우묵사스레피나무는 풀처럼 드러눕고 보리장나무는 넝쿨로 바다를 가린다. 굴뚝새와 동박새들도 숨바꼭질에 가세한다. 터널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가 더 짙푸르다. 산책로 중간중간 놓인 벤치에서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인다. 이곳에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큰엉해안길이라고.
숲과 바다가 숨바꼭질도 끝이 나고 확 트인 절벽이 나타났다. 바다와 하늘뿐인 푸른 세상이다. 20여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 어디쯤 큰 엉이 있을까? '엉' 이란 제주 방언으로 절벽에 뚫린 바위 그늘이다. 발아래 갯바위 낚시꾼에게 길을 물었다.
"아저씨, 큰엉이 어디에요?" 나이든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듯 뒤돌아보았다.
"당신 서 있는 곳이 큰엉이오."
그랬다. 난 늘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그곳을 떠나고 난 뒤에 알아채리곤 했다.
금호리조트 앞, 바위에 큰엉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나중에야 보았다.
철 늦은 동백꽃이 피어 있는 한 사찰을 지나고, 신그물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용천수가 솟아나는 개울이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의 노천탕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위미 동백나무숲은 수령이 오래된 300여 그루의 토종 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숲은 한 할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동박낭할망'이라 불렀다. 위미 동백숲은 1982년 제주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130여 년 전 위미리 여성 현맹춘(1858~1933)은 제주도의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 이곳에 심기 시작했다. 동백 씨 한 알 심고, 돌 한 덩어리 담을 쌓고, 그녀의 동백숲 가꾸기는 평생에 걸쳐 이뤄졌다. 나무가 자라면서 거친 황무지는 기름진 땅으로 바뀌었고 동백나무는 울창한 숲이 되었다.
동네 할아버지는 동백나무숲 길은 겨울에 걸어야 제일 아름답다며 동백꽃 필 때 다시 오라고 한다. 비록 꽃은 없어도 햇살에 반짝이는 동백숲은 싱그러웠다.
조배머들코지.
특이한 지명의 표지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제주에서는 언어들이 낯설다. 칠십 척이 넘는 기암괴석들이 비룡 모양으로 웅장하게 있었다는데 지금은 기이한 돌멩이 몇 점만 남아 있다.
위미항을 지나 공천포항에 이르렀다. 자리물회로 유명한 공천포의 한 식당에서 자리물회를 먹었다. 제피잎을 넣은 물회는 그 향 때문에 낯설었다. 음식도, 지명도, 낯선 타국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숨죽인 것처럼 잔잔하다. 쇠소깍까지 가지 말고 이곳에서 주저앉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작은 포구만 보면 머물고 싶은 것은 어떤 조화인가? 앞바다에 길게 누워 있는 지귀도까지 나를 유혹했다. 방파제 난간에 그려진 파란 올레 화살표가 길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공천포항을 지나자 아름다운 망장포구가 나타났다. 저리도 작은 포구에 배가 몇 척이나 들어올 수 있을까? 그러나 옛날에는 이 포구로 몽골군들이 말을 들여왔다고 한다.
망장포구를 지나 작은 숲길이 나타났다. 큰엉 산책길처럼 포장된 길이 아닌 흙으로 된 원시의 숲길이다. 오늘 걸어온 어떤 길보다 아름다웠다. 숲길 바로 옆으로 바다가 맞닿아 있다.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숲 사이로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들어가면 딱 좋을 작은 백사장까지 덤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를 떠올려본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이 길에서 키스를 하리라.'
쇠소깍 1.5km라는 표지판을 보면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한라산이 저무는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원읍행 버스 이용(정류장에서 남원포구까지 200m).
*숙박
티파니에서 아침을 064-764-9669(남원포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통나무 펜션), 금호리조트 766-8000(남원 큰엉 경승지에 위치한 고급리조트. 올레꾼들에 숙박료 할인해줌), 쇠소깍민박 767-2900.
서귀포 시내가 가까우므로 서귀포에 있는 숙소를 이용해도 좋다(6코스 숙박 참조).
*먹을거리
공천포식당 064-767-2425(공천포해수욕장 바로 앞에 위치. 물회로 전국에 알려진 맛집), 아서원 767-3130(해물짬뽕으로 소문난 중국집. 쇠소깍에서 효돈 방향으로 15분 거리), 수악관 764-2267(위미에 있는 중국요리집), 황금분식 764-7896(위미 킹마트 맞은편에 있는 분식집).
제6코스 쇠소깍~외돌개 올레(총 15km, 4~5시간 소요)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칠십리, 황혼이 오네
쇠소깍은 효돈천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쇠는 효돈을 뜻하고, 깍이란 제주 방언으로 맨 끝을 뜻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큰엉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이 소(沼)에 소(牛)가 자주 빠져 죽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서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바위들과 숲, 그리고 바닷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물빛은 또 다른 '블루'다. 제주 대표관광지 쇠소깍, 그 높은 이름만큼 절경이다. 전통 뗏목인 테우가 사람들을 태우고 소를 오르내린다.
이제 6코스의 시작이다. 쇠소깍을 벗어나자 야자나무가 우뚝우뚝 솟아 있는 남국의 풍경이 펼쳐진다. 제주 해안길을 걸을 때면 문득문득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이스터섬이 연상된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대형 돌하르방은 이스터섬의 모아이석상과 닮아 있었다. 그 척박한 이스터섬에 비하면 제주는 얼마나 풍요로운 섬인가.
섶섬과 제지기오름이 점점 가까워진다. 보목포구에 이르렀다. 보목의 옛 지명은 볼래낭개로 볼래나무가 많은 포구라는 뜻이다. 낮은 언덕 같은 제지기오름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잘 가꾼 너른 별장이 있다. 국민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주인은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무심한 꽃들은 만발해 있다. 제지기오름의 숲 사이로 내려다본 보목포구는 아늑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부두에 사람들이 잔득 모여있다. 호기심에 발길을 부두로 돌렸다. 모두가 자릿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단다. 일년 중 4월에 잡히는 자리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자리, 하면 보목자리지" 하는 자리 사러 나온 노인으로부터 자리생선 이야기를 들었다.
"요즈음은 지귀도 부근에서 잡히는 자리가 제일 맛있지."
노인은 손으로 섬 하나를 가리켰다. 섬은 물에서 손톱만큼 올라와 길게 누워 있다. 지귀도 앞에서 잡히는 보목자리는 살이 부드러워 물회에 좋고, 가파도 거친 바다에서 잡히는 모슬포자리는 뼈가 억세 구이가 좋단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배는 들어오지 않고, 노인으로부터 보목 앞바다 섶섬에 관한 전설을 들었다.
"섬에 용이 되고 싶은 구렁이가 있었는데..."
그때였다. 배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단절되었다.
할아버지, 그 구렁이가 이무기인가요? 제주에는 웬 전설이 그리도 많은지,
보목항을 빠져나왔다. 섶섬을 바라보며 바닷길을 걸었다. 용이 되고 싶었던 구렁이는 용이 되었을까?
섶섬의 전설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구두미포구에 와 있었다. 도로표지판에 '문필로' 라고 쓰여 있다. 섶섬 동쪽에 문필봉이 있어 이 부근에 인재가 많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섶섬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다. 섶섬과 새섬, 문섬이 구두미포구에서는 한눈에 들어왔다.
길은 제주KAL호텔과 파라다이스호텔 사이로 이어졌다. 소정방폭포를 지나 서복전시관을 지날 즈음 올레꾼들과 외국 단체관광객이 뒤섞여 호젓한 느낌이 줄어들었다. 점점 서귀포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중섭미술관에 들렀다. 이중섭의 작품 대신 복제화가 걸려 있었다. 지방 소도시의 예산으로 이중섭의 원화들을 걸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허전했다.
미술관 잔디밭에서 '서귀포 칠십리' 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외돌개, 그곳까지 가려다 파도 치는 서귀포항구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 놀멍쉬멍, 그렇게 걷는거야.
*교통
서귀포 중앙로터리에서 서귀공영 8번 버스 이용, 두례빌라(하례리) 하차. 쇠소깍까지 1.4km.
*숙박
제주대연수원 064-732-6930(보목리 구두미포구 부근. 제주올레 회원에 한해서 예약 가능), 애순이네민박 011-600-3316(서귀포 시내에 있는 가정집 민박으로 여자들만 이용 가능), 남국호텔 762-4111, 010-8492-0307(시외버스터미널에서 5분 거리.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올레꾼들에게 인기. 올레꾼들에게 할인가 적용. 1박 15,000원), 민중각여관 763-0501(서귀포시 중심인 중앙로터리 인근에 위치. 올레꾼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서 묵어본 사람들로붜 후한 점수를 받는 곳), 건강나라찜질방 732-5300(서귀포 시내).
*먹을거리
어진이네식당 064-732-7442(보목 포구 맨 끝에 위치. 자리물회로 유명), 해녀식당 732-3177(보목 해녀들이 직접 운영. 보목 포구 바로 앞에 있음), 안거리 밖거리 763-2552(보리밥정식으로 유명. 이중섭미술관 아래쪽에 위치), 대도식당 763-1033(메밀복국과 김치복국으로 유명. 메밀반죽에 무우를 채 썰어 끓인 복국으로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복국), 새섬갈비 732-4001(돼지갈비집, 천지연폭포 건너편 언덕에 위치), 제주할망뚝배기 733-9934(서귀포 시민들이 즐겨찾는 맛집. 서귀포항 해군기지 맞은편에 위치), 수희식당 762-0777(오분자뚝배기로 유명한 맛집).
제7코스 외돌개~월평 올레(총 15.1km, 4~5시간 소요)
50여개국 외교관들이 극찬한, 제주 바당올레의 정수
제주 바당올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 올레 한 코스만 걷고 싶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길, 50여개국 외교관들이 극찬했다는 길, 7코스 올레길에 대한 찬사는 차고 넘쳤다. 외돌개 솔빛 바다, 그 숲에서 길이 시작된다. 송림 사이로 바라보이는 바다는 삶에 지친 이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기에 충분하다.
삼매봉 서쪽 해안에 동굴들이 보인다. 황우지 12동굴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 상륙에 대항하기 위한 자폭용 어뢰정을 숨기려고 만든 동굴이다. 이 아름다운 바다에도 상흔은 있다. 사람들도 저 동굴처럼 상처 한두 개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올레길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나무계단을 따라 해안 절벽길을 걷다보면 왜 이 길에 대한 찬사가 그리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들, 연보랏빛 갯무꽃, 먼 바다에서 불어와 처음으로 맞는 그 푸른바람들... 알베르카뮈가 그의 고향 티파샤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고 했던가. 제주 돔베낭길에는 그야말로 신들이 내려와 산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바다로 물들었다. 미나리밭을 지나고 야자수 군락지대를 지났다. 야트막한 산언덕에 올라서면 수봉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자연생태길인 수봉로는 올레지기인 김수봉님이 만든 길이다. 염소나 다니던 해안 덤불숲을 손수 삽과 곡괭이만으로 계단을 만들고 길을 냈다. 길 양쪽으로는 억새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고 있다. 숨바꼭질하기 좋은 억새밭을 내려서면 작지왓해안이다.
이제 길은 법환리로 이어진다. 법환포구 앞바다에는 범섬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ㄱ소려시대 최영 장군이 이끌고 온 대규모 군사가 군막을 치고 주둔한 곳이라 막숙이라 부른다.
몽골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왔다. 목호들이 본거지로 삼았던 범섬을 포위해 전멸시켜 몽고 지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곳이다. 나무로 배를 엮어 범섬으로 건너갔던 곳은 '배연(배염)줄이' 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바닷가 민물이 흘러나오는 곳에 빨래터가 있다. 마을 할머니들이 빨랫감을 들고 이곳에 나와 손빨래를 한다. 세탁기에 비해 훨씬 때가 잘 간다며 빨래감을 들어 보였다.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먹어보니 물맛이 아주 깨끗했다. 들고 다니던 빈물통에 물을 채웠다. 법환포구를 지날 때에는 생수를 사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검은 잠수복을 입은 한 무리의 해녀들이 작업을 나갔다.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법환은 해녀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법환의 끝자락 두물머리에 서 바윗길로 내려섰다. 객바위를 오르내려야 하는 험한 길이다. 서근도라는 섬이 나타났다. 이곳 사람들은 그냥 썩은섬이라고 부른다. 썰물 때면 바닷길이 열려 들어갈 수 있다. 서근도 해안길 끄트머리에 풍림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닷가 언덕 송림 아래 정자가 있다. 빨간 우체통 하나가 매달려 있고 '바닷가우체국' 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스피커에서 시와 음악이 흘러나왔다. 푸른 바다와 음악이 있는 정자에서 사람들은 엽서를 쓴다. 올레길이 만들어낸 정겨운 풍경들이다. 이 바닷가 우체국을 운영하는 사람은 풍림콘도 총지배인인 '천년의 바람님' 이시다. 강정천 맑은 물과 푸른 바다를 보고 살아서인가. 맑은 곳에서는 아이디어도 맑다.
강정해안 길을 걷는다. '해군기지 반대' 라는 노란 깃발들이 만장처럼 나부끼고 있다. 바다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이. 길을 걷는 마음이 무겁다. '평화의 섬 제주' 라는 팻말도 보인다. 너럭바위 너머로 해녀 한 명이 태왁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이제 강정해안에서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도 사라질지 모른다.
달빛에 보면 가장 아름답다는 월평포구가 7코스의 종점이다. 누군가가 배 한 척만 대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 같다. 포구는 작아도 그 포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광활했다. 저 멀리 송악산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마치 섬처럼 보인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풍림리조트에 있는 '바닷가우체국'은 올레꾼들에게 인기 명소다. 코발트빛 바다가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해안단애 언덕배기에 올라앉은 원두막 쉼터 안에 있는 이 우체국은 우체통 하나다. 하지만 전국 팔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명물 우체통이다. 우체통 옆에는 엽서가 수북히 쌓여 있다. 무료다. 펜도 옆에 놓여 있고, 눈 나쁜 이들을 위해 돋보기안경도 대나무통 안에 놓여 있다.
우체통 앞 탁자에는 늘 사람들이 안도현의 '바닷가우체국' 시나 노래를 들으면서 뭔가 쓰고 있다. 올레길을 걸으며 느낀 아름다운 자연,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 얘기, 갈등 겪는 배우자나 연인에게 보내는 애틋한 글 등 내용도 다양하다. 이렇게 사연을 적은 엽서를 우체통에 넣으면 풍림리조트 직원들이 우표를 붙여 발송해준다. 하루에 다섯 명씩 선발해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원두막 안에 작은 나무조각들은 개울을 타고 산에서 흘러내린 큰 나무를 주워 잘라 만든 일명 '소원틀'이다. 소원을 적어 원두막에 걸어놓아도 되고 기념삼아 가져가도 된다.
바닷가우체국은 우체통만 있는 게 아니다. 인터넷카페(cafe.naver.com/seasee.cafe)도 있다. 바닷가우체국 카페는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생태관광프로그램 20선 중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경관이 뛰어난 제7코스를 포함해 올레길 13코스에 대한 기본 자료에서부터 최근 올레를 답사한 올레꾼들이 올린 최신 정보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다.
제주풍림리조트는 외돌개에서 월풍포구까지이어지는 15.1km 길이의 제7코스의 3분의 2 지점에 있다. 때문에 오전 8시나 9시쯤 출발한 올레꾼들의 배가 출출할 즈음 닿는다. 풍림리조트는 이런 올레꾼들을 위해 점심뷔페나 정식(월,화는 올레정식)을 내놓기도 한다(1인당 7,000원).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직원에게 슬쩍 올레꾼이라 얘기하면 커피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또한 객실 5개에 한해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고 있다(예약 064-739-9001). 1박당 이용료는 1인당 2만원이며 객실당 최대 6명까지 받는다. 가벼운 아침도 제공한다. 거기다 지난 3월부터 올레꾼들의 발품을 덜어주기 위해 제7~8코스 기점과 종착점인 외돌개, 왈포포구, 대명포구를 왕복하는 셔틀버스를 하루에 3번씩 운행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제주풍림리조트의 총지배인인 신순배씨를 비롯한 직원들의 정성에 의한 것이다. 신순배 총지배인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카운터에서 맞이하고 카운터에서 인사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용객과의 관계에서 이제는 친구, 선후배 관계로 발전했다.
"고객과 카페를 통해 대화를 나누다보면 친밀감이 생겨요. 직원들과 선물을 주고받는 고객이 있을 정도니까요. 고객들이 바라는게 어떤 것인지도 깨달을 수 있고요. 2주간에 걸쳐 전 직원들에게 올레길 전 코스를 답사하도록 했어요. 매월 한 차례씩 청소를 위해 찾기도 하고요. 그래야 고객들에게 올레에 대해 제대로 안내할 수 있으니까요."
제주 출신으로 1998년 입사 이후 청평풍림리조트에서 1년 근무한 것 외에는 제주풍림에서 근무해온 신순배 총지배인은 "탐승객들이 올레길을 거닐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게 올레길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올레길을 걸을 때 골목길 구멍가게에 들러 물도 사고 민박도 해 지역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말했다.
신 총지배인은 "하도 올레길에 대해 신경을 쓰니까 올레리조트로 이름을 바꾸라는 이들도 있다"며 "풍림콘도가 제주 올레의 성지가 되었으면 하는게 저를 비롯한 직원들의 바람" 이라고 말했다.
*제7코스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4월 생태관광프로그램 20선 중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경관이 뛰어난 제7코스는 겨울에는 소국이 만발하고 봄에는 유채가 화사하게 핀 바닷길을 걷노라면 정말 남국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가 김수봉(45세), 제주시 출신이지만 생활은 서귀포시에서 하고 있다. 수봉 아저씨는 카메라를 대면 얼굴이 굳을 만큼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지만 일을 할 때는 황소 같다. 그런 기질을 유감 없이 발휘, 2007년 12월 법환포구 마을 200m 전의 해안길을 뚫었다. 김수봉씨가 주축이 되어 낸 구간은 '수봉로'로 불리기도 한다.
"대부분 바닷가쪽으로는 길을 낼 수 없다며 중장비를 동원해 큰 돌을 치우고 잔돌을 덮어 바닷가쪽으로 길을 내자고 했어요. 저만 반대했죠. 이유가 있었어요. 덩굴이 우거진 해안절벽 쪽으로 염소들이 다니는 거예요. 염소 길을 넓히고 다듬으면 되겠다 싶었던 거죠."
수봉 아저씨가 '수봉로' 개척에만 참가한 것은 아니다. 2007년 11월까지 골프장 토목공사 현장 책임자로 근무하던 그는 사단법인 제주올레친구들 이사장인 서명숙씨를 통해 "제주에 스페인 산티아고 800km 순례길 같은 올레길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이후 제2코스 개척작업을 시작으로 열두 코스를 내는데 애써왔다.
*교통
서귀포 중앙로터리 서귀공영 8번, 중문 우체국에서 서귀공영 5번 버스, 외돌개에서 하차.
*숙박
제주풍림리조트 064-739-9001(강정천 바닷가에 자리한 리조트로 올레꾼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별도 운영. 아침식사 포함 1인당 2만원. 올레꾼을 위한 셔틀버스도 운행. 동으로는 6코스 쇠소깍까지, 서쪽으로는 화순해수욕장까지 하루 세번씩 운행), 호도하우스 739-1152(법환포구 바다산책길 해변에 위치), 알레 올레 하우스 011-894-3984(제주올레에 매료되어 서귀포로 이주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민박집. 소박하고 격조있는 분위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적합. 예약은 필수. 법환리 마을 중앙에 위치), 바닷가리조트 739-2023(돔베낭길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전망좋은 펜션).
*먹을거리
솔빛바다 064-762-0075(외돌개 너른 송림에 자리잡은 찻집), 막숙횟집 739-2987(막숙포구에 위치), 동환식당 739-8644(돼지고기를 푸짐하게 썰어넣은 김치찌개가 일품. 법환리 포구 부근에 위치), 제주풍림리조트 739-9001(다양한 메뉴로 차린 점심뷔페가 7,000원).
제7-1코스 월드컵경기장~고근산~외돌개 올레
(총 15.6km, 4~5시간 소요)
입구를 알아냈다. 하영농수산은 큰길 옆 과일 가게였다. 길을 헤맨 끝에 만난 푸른색 화살 표시는 반가웠다.삼나무 울타리를 따라 돌담길은 이어졌다. 올레길을 걷는다기보나 마치 과수원에 일하러 가는 농부가 된 것 같았다.
감귤과수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월산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엉또폭포에 도착했다. 엉또란 큰 바위웅덩이를 뜻한다. 이 폭포는 성류에 비가 80mm 이상 와야만 폭포가 쏟아진단다. 5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 양쪽으로 울창한 난대림이 형성되어 있다. 난간 아래로 내려가 폭포가 흘러내린다는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벽과 숲이 조화를 이뤄 물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른 시각이라 아무도 없는 엉또폭포는 온전히 내차지였다.
동백꽃 만개해 있는 엉또폭포를 뒤로하고 고근산으로 향했다. 길 옆 가로수가 온통 동백나무이다.
고근산에 오른다. 목재로 만든 계단들이 편백나무숲으로 나있다. 산이라기보다는 공원 가는 느낌이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사람들이 운동기구에 매달려 운동을 한다. 20여분 오르자 금방 정상에 닿는다. 분화구 둘레를 도는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다. 편백나무숲을 지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서귀포 시내와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7-1코스 올레길을 낸 사람은 필경 이 풍경을 올레꾼들에게 자랑하고파 길을 연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늘 볼 수 있는 서귀포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고근산은 서귀포 앞바다와 한라산 사이에 솟아 있다. 설문대할망은 심심하면 한라산에 머리를 대고 고근산 굼부리에 궁둥이를 얹어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고 한다.
고근산 뒷면을 돌아 호근동에 들어서면 제주에서도 논을 볼 수 있는 곳이 나온다. 하논 분화구다. 과수원 언덕에서 내려다본 하논분화구는 거대한 운동장 같았다.
하논분화구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마르형 분화구에 형성된 이탄습지 때문이다. 이탄습지는 자연 상태에서 생물체를 부패시키지 않고 장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습지를 말한다. 이 분화구 바닥에는 오만여 년 동안 형성된 깊은 습지 퇴적층이 있다. 그것은 곧 이 분화구의 타임캡슐이다.
하논으로 내려가는 길에 봉림사라는 절이 있다. 그곳에서 물 한 잔 얻어마시고 논으로 내려섰다. 하논은 못자리 준비로 한창이었다. 트랙터로 무논을 가는 풍경이 제주에서는 낯설다. 백로들이 무논 위를 어슬렁거렸다. 할머니는 비닐하우스에 심어둔 모가 싹이 나지 않았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논두렁길을 따라 올레길 표시가 나있다. 무논에서 개구리가 울었다. 개구리소리를 들으며 걷는 올레길, 제주에서는 이런 길도 색다르다.
분화구를 뒤로하고 삼매봉에 올랐다. 남성대란 팔각정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장수의 별 노인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별은 2월 무렵 남쪽 수평선 가까이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노인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낮이라 별은 볼 수 없고, 대신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졌다. 이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노인성을 본 사람보다 더 장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매봉에서 길은 외돌개로 이어졌다.
서귀포의 알짜배기 좋은 곳은 이 코스에 다 들어 있다.
황영민(69세), 배정자(67세)씨 부부는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부부는 그러나 제주의 자연에 흠뻑 반해 지난 2월22일자로 60대 후반 뒤늦은 나이에 제주도민으로 살고 있다. 부부 모두 고향이 대구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서울에서 보냈다. 황영민씨는 건설회사를 운영했고, 아내 배정자씨는 장관 비서를 거쳐 보험세일즈 우먼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부부는 일정기간 살아본 다음에 정착을 결정지으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대로 우선 전세로 집을 얻었다. 그리고 무료한 생활보다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민박을 치고 있다. 올레길 제7코스가 지나가는 법환포구 부근에 위치한 알레올레비엔비하우스(Allez Ollez B&B House, 011-894-3984)가 황영민, 배정자씨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집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에 치이면 자연을 즐기며 살려는 마음이 흐트러질까 하루에 4명 이내의 손님만 받고 있다(2인1실 아침 식사와 점심 샌드의치 포함 25,000원).
*교통
제주국제공항에서 리무진버스 이용, 월드컵경기장 하차. 서귀포 중앙로터리에서 서귀공영 8번, 중문 방향 버스 이용, 신터미널 하차.
*숙박
워터월드찜질방 064-739-1930(월드컵경기장 내에 있는 해수사우나찜질방. 바로 옆에 서귀포 신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편리). 6,7코스에 기재되어 있는 숙박업소도 이용.
*먹을거리
고근산식당 064-739-6020(제주 향토음식인 고기국수와 몸국이 맛있는 집. 월드컵경기장에서 고근산 오르는 길에 위치), 남호식당 739-8375(제주 전통 보양식인 족탕 전문. 월드컵경기장에서 고근산 방향 위치), 수원해장국 739-7677(해장국 전문점. 월드컵경기장에서 고근산 오르는 길 위치), 국수냐 국밥이냐 739-3382(이름처럼 국수와 따로국밥이 맛있는 집. 신서귀포 강정문화회관 앞에 위치).
서귀포 오일장:매월 4일, 9일 열린다. 시장 내 놀부네 순대국밥이 맛있다. 서귀포시 동흥동에서 토평가는 방향에 장터 위치.
제8코스 월평~대평 올레(총 17.6km, 5~6시간 소요)
주상절리대, 그 비경보다 더 감탄스런 해녀 할망들
월평포구에서 올라서면 길은 수풀 사이로 나있다. 이곳에서는 길만 가지 말고 절벽 아래의 물빛을 볼 일이다. 그리고 그 짙푸른 바다를 가슴에 담을 일이다. 볼레낭 줄기 사이로 펼쳐지는 해안선도 보고 가자. 카나리아야자나무 군락지를 지날 때면 지금 카나리아군도를 여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걷는 길이 근사해질 것이다. 길은 약천사 앞 도로를 지나 마늘밭으로 이어진다. 마늘밭을 지날 때에는 행여 애써 지은 농사 망치지 않게 조심하며 지날 일이다.
바위 틈에서 검은 물체들이 움직였다. 자새히 보니 해녀들이다. 물질해 잡은 소라를 등에 지고 지삿개바위 벼랑을 오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도 그들을 따라 벼랑을 올라가 보았다. 벼랑은 무섭고 위험했다. 해녀들은 그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잘도 오른다.
벼랑을 다 올라서자 그곳은 뜻밖에도 주상절리대 전망대였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온 것이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소라를 메고 온 해녀 할망들은 매표소 앞에서 소라를 팔고 있었다. 주상절리대, 그 비경보다 나는 저 해녀 할망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진모살은 중문해수욕장의 옛 이름이다. 배낭을 메고 해수욕장을 걸어보기도 처음이다. 하얏트호텔 산책로를 지나면 조른모살이라는 작은 백사장이 나온다. 거대한 바위병풍들이 해안 북면을 감싸고 있다. 여기부터 또 다른 주상절리대가 펼쳐진다. 갯깍주상절리대다.
주상절리란 용암이 흘러나와 바다와 만난 급격히 식으면서 형성되는 기둥 모양의 수직절벽으로 모양이 대체로 6각형이다. 지나온 지삿개 주상절리대가 바라만 볼 수만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주상절리대 해안으로 걸어갈 수있는 곳이다.
거대한 절벽과 바다 사이엔 검은 갯돌들이 펼쳐져 있다. 파도는 금방이라도 절벽을 향해 기어오를 태세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밟으며 길을 갔다. 길이라기보다는 걷기 편하게 돌을 편편하게 해놓은 것이다. 해녀들이나 간신히 지나다니던 길을 해병대의 도움으로 바윗길을 냈다고 한다.
갯깍길 중간에 '다람쥐궤' 라는 동굴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된 굴이다. 다람쥐는 제주 방언으로 박쥐를 뜻하고, 궤는 동굴이다. 제법 큰 동굴에 들어서자 서쪽 바다로 뚫려 있다. 터널처럼 생긴 이 동굴을 '들렁궤'라 부른다. 동굴 내부 천장은 육각형으로 샹긴 바위들이 문양을 만들어 마치 중세시대 성당 내부를 연상시킨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해병대길' 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까만 몽돌이 깔려있는 길 끝에 예래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다. 이곳이 반딧불이 서식지라는 팻말이 서있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논짓물에서부터 열리해안 길이다. 열리해안 길은 꽃길이다. 보랏빛 갯무꽃과 노란 유채가 만발해 있다. '흐드러지다'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포장된 해안길을 버리고 위쪽 밭길로 걸어보자. 묵정밭에는 제철 만난 온갖 꽃들이 피어있다. 유채, 갯무, 꽃다지...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뷰파인더 안에서는 바람이 꽃으로 그림을 그린다. 푸드덕 푸드덕, 여기저기서 꿩들이 날아올랐다. 인간의 손길이 안 미치면 안 미칠수록 자연은 더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이곳도 얼마 후면 휴양단지로 개발된다고 한다. 외자를 유치해 50층짜리 빌딩도 들어선단다. 이 꽃길 위에, 반딧불이가 사는 논짓물 그 맑은 물 위에 말이다.
소라, 멍게, 고둥 등등을. 박수기정이 바라보이는 포구에 닿았다.
붉은 등대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포구에 있는 찻집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올레길 중 8코스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교통
국제공항에서 리무진 이용 국제컨벤션센터 하차 후
1-서귀포 방향 시내버스로 월평마을 앞 하차(천해수산 이정표를 따라 1.2km 걸어가면 월평포구에 닿음).
2-서귀포 중앙로터리에서 대포 방향 버스 이용, 월평마을(대해수산) 하차.
*숙박
하얏트 리젠시 제주 064-735-8471, 대평민박 738-0505(대평리 마을), 써니데이제주 738-1999(대포포구 근처에 있는 통나무펜션), 하얀도화지 011-693-0411(예래생태마을에 위치한 민박집. www.hayandohwaji.com), 큰갯물펜션 738-4554(대포항), 팡숑예래펜션 738-1133(논짓물 근처 바닷가에 위치)
문의 및 예약 아쿠아뷰 064-735-8471. www.hyattjeju.com
*먹을거리
대평리 용왕난드르 064-738-0915(대평리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음식점. 보말녹차수제비와 강된장 비빔밥이 있음. 대평리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위치), 보리솔식당 738-3466(지역민들에게 잘 알려진 숨은 맛집. 예래동 주민ㅇ센터 맞은편 위치. 정식과 김치전골이 맛있음), 색달 해녀의집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들을 먹을 수 있는 곳. 중문해수욕장 부근), 씨에스호텔 한식당 735-3000(전통 초가집으로 지은 호텔 내의 한식당. 고등어김치조림, 은갈치조림 등), 레드브라운 738-8288(바리스타 주인이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 스파게티, 볶음밥도 가능. 대평포구 박수기정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집. 수요일은 쉰다), 물고기 카페 070-8147-0804(장선우 감독이 운영하는 카페. 제주의 돌집을 모던한 스타일로 리모텔링 했음. 맛있는 커피와 빵, 식사도 가능. 월요일은 휴무).
제9코스 대평~화순 올레(총 8.81km, 4~4시간30분 소요)
주바위절벽 정으로 쪼아만든 '쪼슨길',
말 몰아 포구로 가던 '몰질'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깎아지른 거대한 바위절벽이 대평포구 서쪽을 막고 있다.
박수기정이다. 박수기정이란 제주 방언으로 박수물이 나오는 높은 벼랑이란 뜻이다.
박수기정 아래 암반에서 일년 내내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데 이 물을 바가지로 마신다고 해서 박수물이라 한다.
박수기정이 병풍처럼 막아서인지 대평포구는 아늑해 보였다. 포구를 돌아 박수기정을 향해 올랐다. 기정으로 오르는 길은 '쪼슨길'과 '몰질'이 있다. 쪼슨길은 절벽으로 오르는 바위를 정으로 쪼아서 만든 길이다. 몰질(말길)은 고려가 원나라 치하에 있을 때 박수기정 위 너른 들판에 키웠던 말을 원나라로 싣고 가기 위해 포구로 낸 길이다.
쪼슨길 오르는 입구에 팻말이 붙어 있다. 쪼슨길은 폐쇄되었으니 몰질로 돌아서 가라고. 슬픈 사연이 있는 쪼슨길을 꼭 올라가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길이 막혀 버렸다.
2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오른다. 대평 기름장수 할머니가 이웃 화순마을로 가기 위해 호미로 돌을 쪼아 길을 내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뒤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보리를 거둬 석공에게 부탁해 길을 냈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고 화순으로 가는 도로가 뚫리면서 이 길은 풀 속에 묻혀 버렸다. (사)제주올레가 옛길을 복원해 지나다니게 했다는데 안전문제 때문인지 막아 버렸다.
말몰이꾼처럼 몰질을 따라 걸었다. 울창한 상록수림 사이로 길이 지그재그로 나있다. 박수기정으로 올라서니 너른 밭들이 펼쳐졌다. 그 옛날 이곳이 말을 길렀던 곳인가? 올레길 표시는 바다쪽이 아닌 밭 안쪽으로 나 있었다. 볼레낭 숲길을 지나고 밭 가운데로 난 길을 간다. 바다도 산도 보이지 않는 들판길이다. 밭길을 돌아나오자 드디어 박수기정 까마득한 절벽이 기다리고 있다. 절벽으로 동아줄이 둘러쳐 있고 기정 높이 130m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절벽 아래로 검푸른 바닷물이 일렁였다.
서쪽으로 삼방산과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카메라를 들자 마라도와 가파도, 형제섬이 한 프레임에 들어왔다.
화순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내가 걸어온 길이 아닌 기정 쪽으로 난 길을 간다. 예전 올레길이란다. 막아둔 동아줄을 넘어 나도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길은 절벽 가장자리로 나 있었다. '한때 이곳에 박수기정 올레길이었다'고 말하는 듯 나무에 매달아둔 리본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 길에서는 새가 되고 싶었다. 푸른 바다를 나는 한 마리 새처럼...
130m 절벽 가장자리를 걸었다. 금지된 길이라 더 아름다웠다. 쪼슨길을 내려가는 곳까지 왔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은 나무로 막혀 있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송림 아래 누군가 갖다 놓은 평상이 있었다. 앞서온 사람들은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화순에서 소풍 온 사람들이었다. 오늘 지나왔던 대평리마을과 포구가 발아래로 펼쳐졌다.
'용왕 난드르'. 대평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용왕이 만든 너른 들에는 호밀이 익어가고, 용왕의 바다는 잔잔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본 사람은 눈빛이 맑다고 했던가. 박수기정 위에 서서 눈이 시리도록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온몸이 푸른빛으로 물들 때까지.
박수기정에서 내려서자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안덕계곡으로 올레길은 이어졌다. 먼 옛날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고, 구름과 안개가 낀 지 7일 만에 큰 산이 솟아났다. 암벽 사이로 물이 흘러 계곡을 이루니 치안치덕한 곳이라 하여 안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찾던 곳으로 김정희, 정온 등도 이곳에 유배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절경을 즐겼다고 한다.
이곳은 솔잎난을 비롯해 300여 종에 이르는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어 1993년 천연기념물 제377호로 지정됐다. 동백나무,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후박나무 등 낯익은 나무들이 빽빽한 밀림을 뚫고 계곡으로 오르내린다. 골은 깊으나 건천이었다. 그나마 조금씩 흐르는 물도 파래가 끼어서 썩어간다. 예전에는 맑은 물이 흘렀다는데 계곡 상류의 개발로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큰길로 빠져나왔다. 8코스 올레길은 가장 난코스였다.
*교통
중문단지에서 대평리행 버스 이용, 종점 하차 후 바다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대평포구가 나온다. 서귀포 중앙로터리에서 대평행 버스 이용, 종점에서 하차.
*숙박
대동민박 용왕난드르 마을 064-738-0915?(대평리), 소라민박 794-1561(화순해수욕장 부근), 뉴 제주펜션 011-284-0255(군산 중턱).
*먹을거리
송도식당 064-794-9408(보리 비빔밥이 맛있는 집. 화순 큰 도로변), 황금미락 794-6789(고등어회 정식이 일품. 화순해수욕장 입구), 화순반점 794-1157(화순해수욕장 부근에서는 배달 가능), 해녀식당 738-0915?(대평포구에 자리한 맛있고 저렴한 식당).
제10코스 화순~하모 올레(총 15.5km, 4~5시간 소요)
파도가 세게 치면 슬피우는 '절울이오름'에 올라
화순해수욕장에서는 바다가 외롭지 않다. 마라도와 가파도, 그리고 형제섬이 사이좋게 떠 있다. 섬 하나 떠 있지 않는 바다는 너무 외로워 보인다.
화순해수욕장을 지나 산방산 자락의 퇴적암 지대를 지났다. 수억 년 동안 바람과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바위의 결들이 빗살무늬 토기를 닮았다. 바위의 결을 가만히 만져보면 태고적 시간들이 느껴진다. 오래된 시간의 결을 밟으며 걷는 길은 또 다른 시간 여행이다.
무인도에나 있을 법한 작은 백사장들이 해안선 곳곳에 숨어 있다. 제주에 누드해수욕장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런 백사장이라면 천혜의 누드해수욕장이 될 것 같다. 이 길을 걸을 때에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가 보자. 파도에 실려온 조가비라도 주우며 걸어 보자. 바위틈에 숨어 있는 작은 동굴에도 들어가 보자.
어디선가 아련한 향기가 났다. 독특한 향기의 진원지는 순비기나무였다. 넝쿨처럼 생긴 키 작은 나무는 모래언덕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에 자라던 순비기나무가 이곳에 있다. 순비기나무 향기를 따라 유연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용머리해안에 큰 범선 한 척이 보였다. 하멜상선전시관이다. 1653년 8월 하멜 일행이 탄 배가 제주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다. 하멜의 표착지가 이곳 용머리해안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주 목사를 지낸 이익태(1694~1696)가 재임기간에 쓴 <지형록>에는 하멜의 표착지를 차귀진 아래 대야수포 부근이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유명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국을 서방세계에 처음 알렸던 하멜은 범선 옆 벤치에 모형으로 앉아 있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김치' 하며 하멜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하멜은 스물 둘 청년이었는데 지금 저 하멜은 늙어 보였다.
해질녘 해안길을 걷는 것은 정처 없음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저 바다를 끼고 나있는 길을 걸을 뿐이다.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때 비로소 영혼은 자유롭다. 이따금씩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삼방산이 계속 따라온다. 사계 바닷가에는 목책이 길게 둘러쳐 있다. 이 부근에서 사람발자국, 새발자국, 우제류발자국, 어류 등 화석 100여 점이 발견되었다. 구석기 말기와 신석기 초기의 화석이란다.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고 길 옆 관리소에서 영상으로 화석들을 보았다.
여객선 한 척이 유행가를 틀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선상에는 '국토 최남단 마라도' 라고 쓰여 있었다. 음악 때문인지 조용하던 부두가 술렁거렸다.
국토 최남단의 산 송악산에 올랐다. 성산포 말미오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서귀포 남쪽 해안을 돌아 송악산에 이르렀다. 섬을 반 바퀴 돈 셈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거칠 것이 없다. 동쪽으로 한라산과 산방산이 솟아있고 서쪽으로는 모슬포항과 대정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마라도와 가파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낮은 오름에 비해 분화구는 깊었다. 이곳은 이중 폭발을 거친 화산으로 큰 분화구 안에 또 하나의 폭발이 생긴 것이란다.
대양을 지나 온 파도가 절벽에 부서지며 울부짖는다. 송악산은 파도가 세게 쳐서 오는 소리가 난다고 해 '절울이오름' 이라 한다. 절이란 파도를 뜻한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파도는 절벽에 몸을 던졌다. '절 울민 날 쌘다', 파도가 울면 날씨가 거세다는 이곳 말이다.
이곳에 서면 여러 바람을 만날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 올라온 태풍도 만나고, 소라나 전복 씨를 갖고 온다는 영등할망의 바람도 만난다. 그토록 사진기에 담고 싶어 했던 김영갑의 바람도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만나고 싶은 바람은 나를 떠돌게 만드는 내 안의 바람이다. 바람코지 송악산에서 나는 오래토록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송악산 올레길은 바람의 길이다.
해 저문 하모해수욕장에서 길이 끝났다. 불빛에 이끌려 모슬포항으로 갔다. '파랑도다방' 간판에 불이 켜지고 사내 둘이 다방 안으로 들어간다. 상상의 섬 파랑도, 저 다방에 들어가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을까?
다방 대신 식당에 들러 자리물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오늘 걸어 왔던 길이 파랑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평화로 경유 버스를 타고 화순리 하차. 바다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화순선주협회 사무실이 있다.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회선 일주버스 이용, 화순리에서 하차.
*숙박
소라민박 064-794-1561(화순해수욕장 부근), 멜케로그빌펜션 792-3636(하모해수욕장의 통나무펜션), 산방산게스트하우스 792-2533(모슬포-화순 간 일주도로변. 숙박시 탄산온천 무료), 제주산방산탄산온천 792-8300(모슬포-화순 간 일주도로변. 지하 600m에서 솟아나는 탄산온천수는 세계 3대 탄산온천수로 꼽힐 만큼 수질이 좋음. 찜질방도 있음), 사이 792-0042(북카페겸 게스트하우스. 조용한 곳을 원하는 여행자에게 좋은 숙소. 사계리 해안가에 위치).
*먹을거리
상모해녀의집 010-5270-6116(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성게보말칼국수와 전복죽이 유명. 송악산을 지나 해안도로에 있음), 산방식당 064-794-2165(밀면으로 유명. 모슬포시내 상설시장 인근), 항구식당 794-2254(자리물회와 한치물회가 유명. 모슬포항 내).
제11코스 모슬포~무릉 올레(총 21.5km, 6~7시간 소요)
노루들도 삼동 따 먹고자 사람들과 숨바꼭질
산방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상모리 알뜨르 들녘은 평화로워 보였다. 알뜨르는 아래로 펼쳐진 너른 들이란 뜻이다. 감자 수확이 한창인 너른 들 저편으로 특이한 인공구조물이 보인다. 말로만 듣던 비행기 격납고였다. 대륙 침략을 위해 일본군은 이곳 알뜨르 들판에 비행장을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중국 난징을 폭격했다.
여다 본 격납고 안에는 감자 박스와 감자 깨는 일꾼들의 새참이 들어 있었다.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는 노인들을 뒤로하고 섯알오름으로 향했다.
섯알오름은 제주4.3사건으로 만행이 자행된 비극의 오름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군경의 예비검속에 구금됐던 사람들 중 252명이 이곳 섯알오름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학살이 자행된 구덩이 주위로 추모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길을 걸었다. '백조일손지묘'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한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없었던 가족들은 6년 8개월만에 거의 형체도 알 수 없는 시신 149구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 중 132구를 공동묘역에 안치했다. 1960년 유족들이 묘비를 세워 '백조일손지묘'라 칭하고 뒷면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지구상에 이런 슬픈 비문이 또 있을까?
모슬봉을 향해 상모리마을을 통과했다. 수확시기를 놓친 양배추들이 노란 장다리꽃을 피워 올렸다. '올레상점' 이라는 구멍가게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제 올레길은 작은 구멍가게 이름까지도 바꿔놓았다.
일주도로를 가로질러 모슬봉에 올랐다. 부대 레이더 기지가 있는 정상에는 억새가 군락을 이뤘다. 옛날에는 봉수대가 있어 남으로 저별(송악산)봉수, 북서쪽으로는 차귀봉수와 연락했다고 한다.
모슬봉 주변은 이 지역 최대 공동묘지이다. 지금까지의 올레길이 자연에 대한 찬가였다면 오늘 걷는 올레길은 순례자의 길이다.
공동묘지 비석을 하나 보고 길을 떠나지 못한다. 봉분은 내려앉았고 시멘트에 삐틀삐틀 흘려 쓴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김도철 어머니 묘'
모슬봉 공동묘지를 내려오자 천주교 성지 하나가 나온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다. 아! 또 묘지다. 저 유명한 백서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마리아)의 묘지다. 그녀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이기도 하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는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제주로 쫓겨오게 되었다. 제주로 향하던 그녀는 추자도에서 뱃사공을 매수해 어린 아들을 섬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서울 할머니'로 불리며 이웃의 사랑을 받았다. 모진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낸 그녀의 삶이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해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누군가 놓고 간 꽃다발이 묘지에 놓여 있었다. 길섶에 핀 유채꽃을 한 묶음 꺾어다 그녀에게 바쳤다. 그녀가 추자도에 내려놓고 온 아들은 추자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곶자왈은 제주말로 '가시덤불이 우거져 쓸모없는 땅'이다. 가시덤불로 인해 들어가기 어려웠던 신평~무릉 곶자왈에 올레길이 만들어져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내가 처음 곶자왈을 찾은 것은 백서향 꽃피던 초봄이었다. 비밀의 화원 같은 그곳에 꽃은 피어 있었다. 작은 꽃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숲에 가득했다. 꽃향기에 취해 노루가 재채기를 했다. 옛날 어떤 비구가 잠결에 맡은 상서러운 향기를 잊지 못해 계곡을 헤매다 찾은 꽃이라 한다. 꽃의 생김새는 천리향과 비슷했지만 그 향기만은 비교 우위였다. 꽃을 카메라에 담자 카메라에서도 향기가 났다.
계절은 초여름으로 바뀌고, 다시 찾은 곶자왈에는 삼동이 자락자락 열렸다. 까마중처럼 생긴 검은 열매들을 따 먹어보니 새콤달콤 맛있었다. 삼동으로 술을 듬그면 신경통에 좋다면 주민들이 삼동을 따고 있었다. 곶자왈 노루들도 삼동을 따 먹기 위해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삼동이 많이 열리면 풍년이 든다던데, 올해 제주는 풍년이 들 것이다.
곶자왈 숲길은 아열래 상록수림으로 숲터널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을 타고 오르는 콩짜게난들과 양치류들도 숲의 식구들이다.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지형에서 저리도 훌륭한 숲을 만들어내다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4km 남짓한 곶자왈 올레길은 어떤 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곶자왈은 화산 폭발 후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 형성된 지형이다.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곶자왈은 하늘에서 쏟아진 비가 스며들기 때문에식수 보호를 위해서라도 보존되어야 하는 지형이다. 올레길 제11코스는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2리에 위치한 무릉곶자왈을 가로지른다. 무릉곶자왈 숲길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부문 우수상을 받았을 만큼 숲이 잘 보존되고 아름다운 곳이다.
"길이가 12.5km나 돼요. 제주에서 가장 긴 곶자왈이죠. '곶'과 '자왈'은 같은 뜻이에요. 예전에 쓸모없는 불모지여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숲이 잘 보존된 거죠. 그러다 10년 전 녹색농촌마을 공모를 위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조사하던 중 발견한 것입니다."
무릉곶자왈이 아름답게 보존된 데에는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 촌장인 강영식(48세)씨의 역할도 컸다. 서귀포시 중문이 고향인 강 촌장은 20년간 서울에서 생태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하다 제주 출장길에 발견한 폐교에 마음이 끌려 1999년 낙향을 결심했다.
"낙향 이후 10년 동안 가꿔온 숲이에요. 사실 공개하고 싶지 않았어요. 혼자만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애착을 가졌으니까요. 그러다 올레길이 개척되면서 모슬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을 혼자 누릴 수만은 없다 싶어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거에요.
그렇지만 가급적 숲을 덜 다치게 하려고 길을 낼 때 손가위를 사용했어요. 제주 도목인 녹나무는 물론이고 조롱나무, 종가시나무 등 귀한 나무도 많고, 새우란처럼 희귀 난도 많이 있거든요. 곶자왈은 정말 잘 보존되어야 할 곳이랍니다. 무엇보다 제주의 숨골이니까요."
제주도 귀향 이후 제주대에서 식물자원학 석사과정도 거친 강영식 촌장은 1995년 폐교된 무릉동초등학교를 1999년부터 생태학교로 변신시키고, 4년 전부터는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레 제11코스이 종착점이자 제12코스의 기점에 위치한 생태학교에서는 계절별로 당일에서 5박6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60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한해에 4000~10,000명의 교육생이 배출된다. 교정에는 삼양동 선사유적지를 재현하기 위해 움집도 지어져 있고, 교실은 올레꾼을 위한 개스트하우스로도 이용된다. 1인 기준 1박당 1만원. 064-792-2333. 011-301-2085. www.plantis.co.kr
무릉곶자왈 뿐 아니라 제12코스 개척에도 참가했던 강영식 촌장은 무릉곶자왈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데 찬성을 했으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많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겁니다. 보존적 측면에선 안타깝고 주민소득 차원에선 긍정적인 면이 많으니까요. 화산석을 가져가는 이들도 있어요. 향이 좋고 예뻐 관상용으로 쓰이는 백서향 같은 나무는 벌써 여르 그루를 캐 갔어요. 그러다 보면 무릉곶자왈은 얼마 안 가 망가질 거에요."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정행(평화로 경유) 시외버스 탑승, 모슬포읍내(종점) 하차. 모슬포항 쪽으로 걸어가면 하모체육공원이 나온다.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회선일주도로 시외버스 탑승, 모슬포읍내 하차.
*숙박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 -64-792-2333(11코스 종점에 위치한 자연생태학교 숙소. 1인당 1만원. 취사 가능), 동성수산민박 794-7034(모슬포항), 다모인 건강랜드 794-6477(모슬포 매일시장 옆 불가마찜질방).
*먹을거리
풀내음식당 064-792-4525, 011-323-4310(무릉 인향동 곶자왈 부근. 정식과 순대국밥), 신호등식당 794-6111(모슬포 시내 서쪽. 가정식 밴반이 푸짐하게 나온다), 우리마을 794-1121(대정읍사무소 옆에 위치. 도ㅐ지고기 모듬구이가 유명), 상모2리 올레상점(11코스 중간쯤에 있는 가게로 물이나 간식을 살 수 있음).
제12코스 무릉~한경 올레(총 17.6km, 5~6시간 소요)
모두들 저무는 바다 풍경에 넋을 잃었던 곳
폐교를 리모델링한 제주자연문화생태골은 옛 제주의 생활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촌장님의 설명을 듣고 길을 나섰다. 무릉리가 있고 도원리가 있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무릉리 너른 들이 온통 마늘밭 천지다. 마늘쫑을 미처 뽑지 못해 잘라 버린다. 그래야만 실한 뿌리가 된단다. 마늘밭 사이사이로 호밀이 자라고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호밀밭 길을 걸을 때에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다.
신도연못을 지나고 녹낭봉에 올랐다. 녹나무가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어졌단다. 녹낭봉 나무 사이로 보이는 무릉 들녘은 이곳이 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오름을 내려서도, 마을을 빠져나와도 끝없는 마늘밭 길이 펼쳐졌다. 단조로운 풍경 때문인지 생각마저 단순해진다.
마늘밭이 끝날 즈음 바닷가에 이르렀다. 바다는 황사로 인해 무채색이었다. 암울한 바닷가에 식당 하나가 나타났다. 식장 주인은 올레길이 생겨 손님이 많아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졸졸 따라 다니기에 이름을 물었더니 '올레'란다. 올레슈퍼, 올레강아지, 나는 올레꾼. "인간 올레 배고파요. 밥 주세요." 나는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강아지 올레가 귀를 쫑긋거렸다.
바다는 꼭 푸르지 않아도 된다. 무채색의 바다는 나름 철학적이다. 암대극이 노랗게 피어 있는 해안가 길을 걸었다. 이곳에서는 저 노란 꽃만이 색깔을 지녔다. 너럭바위에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선명하다.
해안도로 곁에 돌탑이 보인다.
원형으로 쌓아올린 돌탑 위에는 하르방처럼 생긴 석상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 방사탑이라고 적혀 있다. 마을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치거나 풍수상 허한 곳으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기 위함이란다. 활짝 핀 유채꽃이 방사탑을 장식해 놓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액운을 막을 것 같았다.
수월봉 정상에 올랐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뿌연 황사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산기상대와 수월정이라는 정자만이 간신히 보일 뿐이다. 길은 잠시 황사 속에 숨겨두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수월봉을 찾았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초를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황사로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사방으로 보였다.
차귀도가 바다 너머로 펼쳐지고 동쪽 해안길 끄트머리에는 풍력발전소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엽서에 나올 만한 이국적인 풍경이다.
수월봉 아래 '엉알' 길을 걸었다.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해안 절벽이 마치 시루떡처럼 쌓여 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 걷는 이 길은 일몰 때가 가장 아름답고 한다.
섬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어느새 자구내 포구에 도착한다. 영화 '이어도' 촬영지라는 표지판이 서있고 차귀도는 이어도가 되어 저만큼 떠 있었다. 포구에는 제주의 옛 등대인 도대불이 서있다. 솔깍이나 생선 기름으로 불을 밝혔던 도대불이 지금은 신호 유적이 되어 포구를 지키고 있다.
자구내 포구에 면한 당산봉에 올랐다. 군부대를 지나 숲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생이기정'에 이른다. 생이기정은 새들이 날아드는 절벽이란 뜻이다. 차귀도의 여러 섬이 오륙도로 보이고, 절벽 아래로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오른다. 바다는 그 푸른빛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곳에 길을 낼 생각을 했을까? 12코스이 종점ㅂ인 용수포구가 빤히 바라보였다.
해는 기울고 바다는 점차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이곳에서 일몰을 맞으리라. 지아비를 기다리다 목을 맨 절부암의 사연도, 용수포구도 일몰 후 가보리라. 띠가 수북이 자란 풀밭에 주저앉았다. 같이 온 지인들은 저무는 바다 풍경에 넋을 잃었다.
"일몰을 보며 한잔 하기 가장 좋은 곳."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모슬포행(평화로 운행)버스 탑승, 모슬포 하차 후 신창~모슬포 순환버스 타고 좌기동(보건소 앞) 하차, 무릉생태학교로 이동(100m).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회선 일주도로버스 탑승 후 모슬포 하차.
*숙박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 064-792-2333(11코스 종점에 위치한 자연생태학교 숙소. 교실 반 정도의 큰 온돌방이 있음. 1인당 1만원. 취사, 아침식사 가능), 동환식당민박 772-2955(차귀도 앞 자구내포구에 있는 식당 겸 민박집), 차귀도횟집민박 773-1114(자구내포구에 있는 민박집), 노을이아름다운펜션 011-448-3935(용수포구).
*먹을거리
동환식당 064-772-2955(차귀도 앞 자구내포구에 위치. 성게국과 매운탕), 고산육거리식당 772-5560(육개장, 내장탕), 신도2리 도원횟집 011-639-4119(12코스 중간 도원리 바닷가에 위치. 우럭매운탕과 한치, 물회가 맛있음.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맛있다), 풀내음식당 792-4525, 011-323-4310(무릉 인향동 곶지왈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정식과 순대국반을 먹을 수 있다).
제13코스 용수포구~저지오름 올레(총 15km, 5~6시간 소요)
울창한 숲 뒤로 분화구도, 바다도 숨어버렸다
용수포구에는 슬픈 사연이 깃든 바위가 있다. 바다에 나갔다가 조난당한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부인은 포구 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남편의 시체가 부인이 목을 매단 나무 밑 바다에 떠올랐다. 대정현감 신재우가 고씨가 목을 맨 곳의 암석에 절부암이라 새겨 고씨 부인의 정절을 후대에 기리게 했다.
절부암 아래 포구에서 올레13코스가 시작됐다. 이 포구는 한국 천주교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표류하다 귀착한 곳이기도 하다.
포구를 벗어나자 지루한 농로가 이어졌다. 7월의 한작 태양은 길을 걷는 올레꾼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거웠다. 온몸이 땀으로 젖을 즈음 저수지 하나가 나타났다. 용수저수지다. 꿩 대신 닭이라고, 바다 대신 나타난 저수지가 반가웠다.
이 저수지는 멸종 위기종인 철새들이 날아와 서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뭉게구름들이 저수지 수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길이 나 있었다. 언제쯤 숲길이 나올까? 지금은 저 강렬한 태양을 피할 그늘이 절실했다. '특전사숲길' 이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제주 중산간의 숲을 어떻게 통과할까? 고민하던 올레 탐사팀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제주도에 주둔하는 특전사 병사들이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총길이 3km에 달하는 숲길을 나무가 다치지 않게, 한두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작은 오솔길을 만들었다. 8코스 바닷길을 만드는데 해병대가 나섰고 이제 숲길은 특전사가 나섰다
비밀의 정원 같은 숲길을 간다. 뜨거운 태양도 이곳 숲속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거미줄이 앞을 가린다. 어린 꿩인 꺼병이들이 종종거리며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돌멩이로 만든 앙증맞은 쉼터에서는 만든 정성에 보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작은 숲길들은 이어졌다 끊어졌다 반복되었다. 다만 고사리 숲길, 고목나무 숲길 등으로 이름만 바뀔 뿐이다.
이 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올레꾼 보기가 쉽지 않다. 소나무 숲길 아래 배낭을 배고 누웠다. 숲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들이 보석 같았다. 새들이 노래를 들려주고 숲을 지나온 바람은 숲의 향기를 담아 부채질을 해준다. 작은 숲이 아름답다. 오솔길이 아름답다. 이 길을 빨리 걷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놀멍 쉬멍, 할 때마다 행복은 그만큼 더 내몫으로 다가온다.
바당 올레길을 걸을 때면 바다가 가장 좋은 것 같더니, 숲길 올레에서는 숲이 더 좋은 것 같다. 숲과 바다 사이에서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숲길을 지나자 처음으로 마을을 만난다. 낙천리 아홉굿마을이다. 걸리버여행기의 거인 왕국에 나올 법한 거대한 의자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50여 년 전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대장간(불미업)이 시작된 낙천리는 주재료인 점토를 파낸 아홉 개의 구멍에 물이 고여 샘(굿)이 된 곳이다. 마을에는 천 개의 의자공원이 있다.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게 나무의자 1000개를 제작, 설치하면서 제주 방언으로 '쉼팡마을'이 되었다.
이 일을 기획하고 총 지휘한 사람을 만나 보았다. 그는 마을 전체의 하나의 공공미술의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공공미술가라고 불렀다. 그는 무더은 여름 뙤약볕 아래 혹은 빗길을 뚫고 길을 걷는 올레꾼들의 얼굴이 성자처럼 보인다고 했다.
테마마을 회관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다시 출발이다. 길은 점점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다. 낙천잣길을 지나고 용선달리를 지난다. 큰 당산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가 새참이라도 이고 나타날 것 같았다. 오늘 길의 끝자락인 저지오름이 저만치서 나를 부른다.
저지오름은 닥나무가 많아서 닥몰오름으로 불렸다. 저지는 닥나무의 한자식 표현이다.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제주도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이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오름에 오른다. 분화구를 따라 도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울창한 숲으로 인해 분화구도, 바다도 숨어버렸다.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나오자 정상 전망대가 나타났다. 비양도와 차귀도 앞바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다. 용당 풍력발전소의 바람개비까지 그 풍경에 가세한다. 오늘의 에필로그,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회전 일주도로행 버스 탑승 후 용수리 하차(약 1시간10분 소요). 용수포구 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간다.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회선 일주도로행 버스 탑승 후 용수리 하차(1시간20분 소요).
종점 저지리에서 돌아갈 때는 저지리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에서 읍면 순환버스를 타고 모슬포나 신창에서 하차 후 서회선 일주도로행 버스로 갈아탄다.
*숙박
저지리 마을 민박(마을 민박 담당 070-7098-4111), 낙천리 체험마을 민박(낙천리사무소 064-773-1947. 1인당 1만원), 들메 농수산 011-692-1960(저지리 생각하는 정원 부근에 위치한 민박집), 에덴빌리지 772-3808(저지리 생각하는 정원과 유리의 중간에 위치).
*먹을거리
낙천리 아홉굿 마을회관(064-773-1946)에서 냉보리수제비(4,000원), 보리빵 토스트(1,000원), 보리비빔밥(4,000원)을 한다. 그 외에 새오름중식(772-5807, 13코스 종점인 마을회관 앞), 닥마루가든(772-5807, 저지리 파출소 옆 말고기 전문점), 신토불이가든(72-4458, 저지마을 입구. 꿩요리, 토종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