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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493년 극달화상이 창건 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유가사였다. 그 후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
동화사 ①.대웅전은 팔공산을 대표하는 법당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건물을 조선 후기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②.영산전-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한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는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영산전 현판 글씨는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맛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으로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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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천태각은 영산전 바로 뒤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전각이다. 천태각은 독성각이라고도 하는데 나반존자를 모신 곳이다. 나반존자는 옛날 중국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깨달음 을 성취해서 독성이라고도 불린다. 머리카락이 희고 긴 눈썹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나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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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동별당은 강생원에서 영산전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주지 스님의 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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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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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산신각은 산신을 모셔 놓은 당우로 한국 불교 안에 토착 신앙을 수용한 증거라 할수 있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조상하여 봉안하거나 탱화로 모시기도 한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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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사전은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둔 곳이다. 조사전에는 초창주로 알려진 극달 화상과 보조 국사, 사명 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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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칠성각대웅전 서편 뒤 맨 위쪽에 위치해 있는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으로 가람 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칠성각 안에는 철종 8년(1857)에 그려진 삼존 형식의 칠성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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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서별당은 심검당 뒤 서쪽으로 약간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인다. 금당선원에서 옮겨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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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설법전은 해탈교를 지나 동화사의 바깥 마당 오른편에 있다.
설법전 안에는 대중 스님들의 맡은 바 소임을 적어 놓은 용상방이 붙어 있다.
1990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 불사 때 지은 설법전은 각종 법회와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16.원음각은 절에서 의식이나 행사, 법회를 행할 때 사용하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범종은 지옥 중생을 비롯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법고는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이다. 목어는 수중 중생을 위해, 구름 모양을 새긴 운판은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면서 친다.
원음각의 목어는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에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법고는 높이가 두어 길되는 큰 북으로 영남 승군을 호령하던 승군 본영이 동화사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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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당선원은 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진표 율사로부터 영심 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 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터가 바로 금당선원 자리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수선의 참구도량으로 개원 이래운수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앟았으며, 수많은 도인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스님 등 해방 이후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선원의 면모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현재 납자들이 정진 중에 있다. 금당선원은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보물 제248호 삼층석탑 2기가 극락전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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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인악당은 조선 시대 고승 인악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인악대사비는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것이 다른 비석들과는 대별된다. 이것은 동화사가 봉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은 1808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안동 김씨 김희순이 짓고 썼는데 와희지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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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통일약사 여래대불
▶부지면적 : 33,050㎡ (10,000평) ▶불사착공일 :1990년 10월 26일
▶통일약사대불 : 점안 대법회일 :1992년 11월 27일 ▶석조대불 규모 석조대불 높이 : 17m
▶석조대불 최대둘레:16.5m , ▶ 좌대 높이 : 13m▶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 : 3m 총 33m
▶석조대불 원석 규모 : 8등분으로 조성되며 약 300톤 원석으로 조각됨
▶불상원석 : 2,000톤(전북 익산군 황동석) ▶좌대원석 : 3,000톤. 총 5,000톤
▶원석을 300km 옮겨서 조성된 석불중 세계 최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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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심검당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당우이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지혜의 칼을 찾는 집' 이라 해서 선실이나 강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현재 이곳은 스님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며, 1978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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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符印寺)>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와 연혁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 현종~문종 때 이곳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장경은 몽골침입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현재 그 일부가 일본 교토[京都] 남례사(南禮寺)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창한 것으로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이밖에 절 주위에 신라말의 석탑양식을 보여주는 쌍탑을 비롯하여 석등·당간지주·마애불좌상·배례석 등이 있다.
<파계사> [把溪寺]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
파계사 /파계사목조관음보살좌상(1447), 보물 제992호, 높이 ...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804년(애장왕 5)에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절로 그 연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뒤 1605년(선조 38)에 계관(戒寬)법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원통전(圓通殿)을 중건하고, 1695년(숙종 21)에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6년 6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에 들어서면 법당인 원통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 높은 기단 위에 서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설선당(說禪堂)이 있다. 이 건물 뒤쪽으로 기영각·산령각·응향각(凝香閣)·미타전 등이 있는데 그중 기영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御筆)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어필각(御筆閣)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해지지 않는다. 중요문화재로는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을 비롯해 삼장보살도(1707)·팔각석 등이 있다. 또한 절의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원의대사의 부도와 비(1648), 전명대사의 부도와 비(1658), 현응대사의 부도와 비(1701)가 있다.
파계사목조관음보살좌상
원통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992호. 높이 108㎝. 1976년 6월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 1447년(세종 29)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여러 가지 꽃무늬와 연주무늬[連珠紋] 형태의 구슬이 장식되어 있어 매우 화려하다. 관 밑으로는 앞머리가 많이 내려와 있고 보발(寶髮)은 양쪽 귀 옆으로 내려와 몇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이목구비는 잘 정돈되어 있어 부처와 같이 근엄한 느낌을 준다. 상체는 하체보다 크고 긴 편으로 장대한 면을 보여준다. 천의(天衣)는 법의의 착의방식과 마찬가지로 통견(通肩)으로 걸쳤는데 가슴을 많이 드러내면서 양 무릎과 오른쪽 발끝을 덮고 있고 그 아래로 물결무늬의 옷주름이 형성되어 있다. 가슴 위로는 군의(裙衣)를 주름잡아 묶은 띠매듭이 보이는데, 이러한 군의형식은 원각사탑 부조상(1464)이나 무위사 아미타삼존벽화(1476)의 본존불 등 조선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또한 가슴 앞에 늘어진 목걸이와 함께 영락장식이 양 어깨를 걸쳐 두 팔과 양 무릎 위에까지 흘러내려 있어 상당히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밖을 향하고 있는 반면에 왼손은 무릎 위로 약간 들어올려 안으로 향하고 있는데, 각각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이 보살상에 보이는 천의형식이나 극도로 장식화된 보관 및 영락장식 등은 장륙사건칠보살좌상(1395)을 비롯하여 대승사금동보살좌상(1516 개금)·은해사운부암금동보살좌상(15세기경) 등의 조선시대 보살상과 양식이 매우 유사하므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림사 [松林寺]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흥왕 때 진(陳)나라 사신이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불서(佛書) 2,700권과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때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을 세웠다고 한다. 1092년(선종 9)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수하고,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전탑만 남고 폐허화되었다. 그뒤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 30)에 왜병들의 방화로 다시 소실된 것을 1858년(철종 9) 영추(永樞)가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의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송림사5층전탑
송림사5층전탑 /송림사5층전탑(통일신라), 보물 제189호, 경북 ...
송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보물 제189호. 높이 16.13m, 기단폭 7.3m. 토축(土築)의 얕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전탑으로 신라시대의 탑 가운데 유일하게 금동상륜부(金銅相輪部)가 남아 있다. 기단의 각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와 5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하고, 그 위로 갑석(甲石)을 덮은 후 중앙에 1단의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했는데 이것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수법과 같다. 탑신부는 한 변의 길이 27㎝, 높이 6.2㎝인 방형전(方形塼)과 이를 반으로 자른 장방형전 2가지로 축조되었는데, 곳곳에 문양전(紋樣塼)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짐작된다. 1층 옥신이 가장 높으며 2층 이상의 옥신과 옥개석은 높이와 체감률이 완만하여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옥개부에는 전탑의 일반적인 방식대로 상하에 층단을 두었는데 받침수는 1층부터 9·7·7·6·4단이고, 낙수면의 층단수는 11·9·8·7·5단이다. 낙수면의 층단수가 많아 각 층의 옥개부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벽돌로 쌓은 노반(露盤) 위 모퉁이에 풍령(風鈴)을 단 동판으로 된 갑석이 있고, 그 위 목제 찰주(擦柱)·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용차(龍車)·보주(寶珠)가 차례로 얹혀 있다. 보륜의 일부와 수연(水烟)이 없어진 듯한 공간이 있으나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시대의 금동상륜부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의 상륜부는 1959년 해체·보수 공사 때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며, 이때 1층 옥신과 2·3층 옥개부에서 제작시기가 다른 사리장치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나왔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해체·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층 옥신 남면에 감실(龕室)이 개설되었던 것을 후세에 벽돌로 막은 사실도 밝혀졌다.
송림사5층전탑내 유물
송림사5층전탑의 해체·수리 때 발견된 일괄유물. 보물 제325호.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959년 4월에 실시된 탑의 해체·복원 공사 때 1층 옥신부와 2·3층 옥개부·복발 등에서 각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1층 옥신에서는 조선시대의 목불(木佛)과 파손된 석불, 동불(銅佛)이 나왔고, 2층 옥개부에서는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궤(石櫃) 안에 넣은 높이 14.2㎝ 크기의 금동전각형사리기(金銅殿閣形舍利器)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기는 네 기둥의 아랫부분에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 앙련좌(仰蓮座)를 두어 유리잔을 받치게 하고, 기둥 위로는 보개(寶蓋)를 얹어 전각과 흡사한 모양이다. 가운데에는 높이 7.0㎝, 입지름 8.7㎝의 녹색 유리잔을 안치하고, 그 안에 다시 높이 6.3㎝, 입지름 3.1㎝의 녹색유리제 사리병을 얹어놓았다. 녹색의 유리제품은 사리장엄구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잔의 표면에는 12개의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이 있고, 사리병은 보주형 마개로 막았다. 보개에는 은도금한 수형(樹形) 장식구를 달았으며 200여 개의 영락으로 장엄했다. 금동전각의 노란색과 유리제품의 녹색은 서로 대비되어 호사스럽고 강한 인상을 준다. 사리기 옆에는 높이가 18.0㎝에 달하는 금동제수형장식구(金銅製樹形裝飾具)가 세워져 있다. 3층 옥개부에서는 뚜껑이 없는 석궤 안에서 목개(木蓋)와 부식된 종이 조각이 나왔다. 5층 옥개석 위의 복발에서 높이 7.8㎝, 입지름 18.0㎝의 청자상감원형합(靑磁象嵌圓形盒)과 지름 3.0㎝, 두께 7.5㎝의 금동원륜(金銅圓輪) 2개가 나왔다. 이 원형합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전탑의 윗부분이 고려시대에 수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외에도 구슬 281개, 은환(銀環) 15개, 향목(香木) 7편, 열매 1개가 발견되었다.
↑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 / 대구 동구 도학동. 보물 제248호. 통일신라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