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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시 지
Byun, Shi Ji
韓國性의 完成으로 世界的 스타덤에 오른
暴風의 老畵家
김남수 / 미술평론가
지금 우리들에게는 한국미술의 세계화라고 하는 중요한 과제가 우리 미술인들 앞에 가로 놓여있다. 한국미술의 개방은 미술을 통한 나라간의 장벽이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어설픈 몸짓이나 서툰 제스츄어 가지고는 살아남기 힘든 세계질서의 미술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날 동서간의 소통이 어렵고 정보가 차단되었던 시대에 남의 것 흉내를 내거나 표절을 하는 등 문화적 아류가 기승을 부렸던 시대는 이제 종언을 한 것이다.
지금 한국미술은 국제경쟁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전과 시련을 동시에 맞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최후의 승부수는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한국성’이라고 하는 독보적인 예술양식의 완성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서양화단에서 현역작가로 한국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화가로 원로화가 변시지 화백을 들 수 있다. 본란이 표지작가로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을 선정한 것은 이미 세계의 유명작가들과 함께 인터넷 망 등 사이버아트 갤러리 등에 널리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가는 배 A leaving boat> 31.8 x 39.4 cm 1996
邊時志화백의 최근 핫 뉴스
한국산업은행(총재 유지창)은 지난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제 37차 ADB(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가졌었다. 세계 70개국의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국제금융 및 투자은행, UN산하 WTO(세계무역기구)와 ILO(국제노동기구) 관계자 등 3천500여명의 금융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금융올림픽이라 불리는 이 세계적 행사에 주최측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일환으로 가장 동양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작품화집 ‘BYUN SHI JI'를 1천권 제작을 하여 선물로 증정을 했다. 국제자유도시인 제주의 풍물을 소재로한 대표작들이 소개된 이 화집은 화가 ‘변시지’화백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거친 파도 A roaring> 39.4 x 53 cm 1984
<하염없는 걸음 Weary walk> 31.8 x 39.4 cm 1987
<고뇌 Deap agony> 50 x 60.6 cm 1983
<고향 Home> 33.4 x 24.2 cm 1985
이번 화집에는 일본에 유학시절 공모전 등에서 수상한 작품, 인물화와 풍경화, 60년대 서울 비원파(장리석, 손응성 등)로 활동했던 시절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변시지화백은 1948년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공모전 단체의 하나인 제34회 광풍회(光風會)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여 지금까지 56년 동안 정회원으로서 출품을 해오고 있다. 이번 화집에는 황토빛으로 물든 제주의 풍경 4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 외국 손님들에게 선물로 전해진 이 화집은 갖고져 하는 희망자들이 많아 주최측은 제2판 추가제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韓國의 元老畵家 邊時志,
세계의 畵聖 21명과함께 웹사이트에 登場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뭘 하는 사람일까요'라는 웹 사이버 퀴즈 설문요지를 미국 미시간 대학이 학생들의 문화지식 학습을 위해 내 놓았다. 학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학급에서 배운 문화적 주제나 인물과 관련한 사항을 인터넷 사이버로 설문을 던져 예/아니오(yes/no)로 답변을 하는 게임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물을 설정한 학생은 예, 또는 아니오,로 답변하고 이 때 다른 정보를 유출하면 아니 되고 남은 학생들이 설정한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면 다른 학생이 다시 인물을 설정하고 질문을 받는다. 상대그룹이 설정한 인물을 모두 밝혀내는 팀이 이긴다. 미시간 대학의 쥴리엔 월터스씨가 제공해준 자료에 의하면 게임 당일 채팅 방을 개설한다(한 방에 학생 3~4명). 누가 먼저 인물을 설정할지 정한다. 채팅 방에 올라온 알파벳 순으로 해도 좋다. 남은 학생들은 인물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고 설정한 인물은 예,/아니오,로만 답변한다.채팅 룰이 ‘스레드’일 경우 학생들은 순서를 기다릴 필요없이 질문하고 ‘논스레드’일 경우 순서를 기다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은 후 다음 질문을 보낸다. 대답은 예,/아니오,로 간단히 하되 질문에 상응하지 않는 대답을 하게 되는 경우 대화를 지속할 수 없다. 상대의 설정인물을 가장 빨리 맞추는 그룹이 승리를 하게 된다.학생들의 작업노트에는 인물에 대한 아래와 같은 정보를 적어 놓는다. 또한 좋은 정보를 찾을만한 웹사이트 목록도 적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이름, 성별, 국적, 사망일, 직업, 장르, 주제, 내용, 이주, 주요약력, 그밖에 중요한 정보 등이 화가에 대한 설문요지다. 비록 인터넷의 채팅방법을 원용하고 있지만 문화와 관련한 학습효과가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예술가에 대한 월드 웹 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주소가 있다. 인터넷 예술사(C화이트콤브), 보스턴대학 인터넷 관련 링크, 엔카르타 프랑스, 엔카르타 스페인 백과사전, 동 이타리아, 독일 등 그 수효가 많다. 인터넷 사용어로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일본어, 포루르칼어. 스페인어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번 사이버상에 설정된 인물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그대로 세계의 화성들이 소개되고 있다. 레오나르드 단빈치, 미켈란젤로, 바크, 보쉬, 살바드로 달리, 알바트 뒤러, 엘 그레코, 칸딘스키, 프리다 칼로, 틀루즈 로트렉, 호앙 미로, 조지아 오키프, 파블로 피카소, 르느아르, 디에코 리베라, 로댕, 틴토레토, 한국의 변시지, 일본의 카츄시카 후쿠사이 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움 Yearning> 72.7 x 91 cm 1988
<기다림 Waiting> 45.5 x 60.6 cm 1992
<꿈 Dream> 24.3 x 33.4cm 1991
世界의 有名 인터넷 사이트에
100大作家와 함께 邊時志 화백 登場
지난 1997년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은 세계적인 유명화가들과 함께 외국의 유명 인터넷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한국화단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큰 감동을 불러 이르켰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인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 사이트인 '야후(YAHOO)'에 변시지 화백이 세계 100대 화가로 소개되면서 한국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또한 미국의 인터넷 라인인 ‘Best Art.Com'에 피카소, 반 고흐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그 후 프랑스의 유수한 인터넷 사이트인 ’www. ifrance.com'에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세계 유명화가 17명의 ‘가을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아트 사이트는 그가 일본에서 귀국후 70년대 초 서울의 ‘비원파’시절 그린 비원의 <가을풍경>이 소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www.inter-art.com에도 80년대의 작품 <콜로세움>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토록 변시지 화백의 작품세계가 7,8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인터넷 사이버 아트 창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비록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유재 등 서양의 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양인으로서의 예술양식,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한국성을 지향하는 극명한 정신주의와 주제가 세계예술의 질서와 맞아 떨어짐으로서 국제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아트페어나 파리 견본시장, 비엔날레 등을 통하여 간헐적으로 혹은 단발로 끝나는 몇 몇 작가들이 없지 않았지만 거게가 이벤트성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邊時志의 作品世界
그의 예술세계가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지난 74년 중앙화단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로 금의환향, 제주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불과 3년 만인 77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잠재력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작업 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 등이 제주풍경으로 환치(換置)되는 등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나 한 가지 패턴에 안주하고 있는 다른 대가들에 비교하면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으며 유화의 세계에서도 작가 변시지화백처럼 극적인 변신이 가능함을 실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요, 아카데미즘이나 사실주의 기초수업이 튼튼한 바탕이 되어 오늘의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든 것이다
<나그네 A vagabond> 24.3 x 33.4 cm 1990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열대성 남극의 정취가 물씬 밴 제주는 아스팔트문명의 산물인 공해와는 전혀 절연된 깨끗한 풍토적인 환경과 분위기,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의 망각 속에 살아 온 작가 변시지화백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애정 때문에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의 완만하게 굴곡이 진 밭이랑과 화산질로 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위돌, 나지막이 두른 돌각담, 완만한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짜릿한 바다 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곳자와 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구릉지대,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극의 태양,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오는 자연환경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작가의 소증한 소재요 피사체 였다. 사실 작가의 마음속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詩情)과 시상(詩想)이 떠오른 시인(詩人)이 시를 읊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화백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조형화 한 것이다.
<해촌 A village by the sea> 50 x 65.1 cm 1980
특히 작가의 자화상을 메타포로 이미지화 한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외롭게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모래사장이나 해안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點中人物), 낚시를 드리운 노옹의 태공망의 풍경은 그 모두가 작가의 자화상이자, 이미지로 체험한 상상의 세계였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의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농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회화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그 표현의 방법론과 양식에서 변시지화백만의 독보적인 경지요, 오리지날리티이며,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행여 그의 화폭 속에 불필요한 덧살이나 췌육이 딱지딱지 장황한 설명으로 가해진다면 그 작품의 순수성에 훼손이 갔을 것이다. YAHWOO 등 인터넷 사이버 갤러리에 변시지화백이 세계100대 화가로 등장을 한다던지, 파리나 유럽 등지의 웹아트 사이트 등에 그가 선택되어 소개되고 있는 점은 우리 한국미술의 쾌거요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의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유능하고 국익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는 원로화가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서 해외진출을 통한 한국미술의 세계화등 재원상의 많은 투자 등 정부나 국가가 해야할 과제들이 화급을 요하고 있다. 즉 세계의 아트페어나 세계의 경매시장에 출품과 상장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서 세계속의 한국미술은 21세기 외화가득의 전략적인 문화예술사업으로 자리매김을 해야하는 것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Portrait of nemo> 110 x 80 cm 1951
<환상 An illusion> 24.2 x 40.9 cm 1991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91 x 116.8 cm 1993
結 論
21세기 정보화시대는 IT산업 못지 않게 문화예술이 나라마다의 중요한 국가의 전략산업으로서 재충전의 기회를 다져가고 있다. 미래학의 석학들은 문화예술이 그나라의 부를 측정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비록 조상에게 물려받은 5000년의 역사를가지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화예술의 후진국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양화의 장르를 탐구하는 원로 화가지만 그의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추구, 토속적이고 풍토적인 작가만의 사투리적인 예술양식을 천착함으로 성공한 예술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作家의 行蹟
변시지화백은 192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출생했다. 선친과 함께 도일, 45년 오사까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 후 동경의 데라우찌만지로(寺內萬治朗)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했다. 48년 23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여 일본 미술사상 전무한 일로 NHK는 톱뉴스로 한 주간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49년 도꾜 긴자 시세이도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고, 51년과 52년 광풍회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56년까지 광풍회 정회원으로서 출품한 그는 57년 영구 귀국길에 올랐으나 2004년까지 광풍회전 정회원으로서의 작품을 출품해오고 있다. 60년 서라벌예대 미술과 과장으로 초빙되었고 이해 서울미대 동양화과 출신의 이학숙여사와 결혼했다. 75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 전임, 86년 ‘화가 변시지’ 열화당 출간, 94년 서귀포시민상, 97년 서귀포기당미술관에 변시지상설전시실 개관, 동 명예관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예술양식은 10년 내지 20년의 텀을 두고 변화를 해왔다. 가령 57년 귀국하기까지의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75년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기 까지의 서울에서의 작품활동, 그리고 지금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거친 바다 Rough sea> 162.2 x 130.3 cm 1983
서울에서 작업했던 경향들은 이른바 비원파, 혹은 고궁파로 불리워지는 자연의 실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던 아카데미즘의 화풍이었다. ‘경회루’와 ‘애련정’, ‘향온정’, ‘반도지(半島池)’, ‘미용정’등의 고궁을 극사실, 극세필, 극채색으로 집중적인 묘사를 했다. 이 시기에 동료작가로서는 손응성, 장리석, 등 훗날 한국 화단을 빛낸 구상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인물화 가운데서도 특히 좌상을 연작으로 발표했던 그는 47년작 <여인>, 48년에 완성한 <베레모의 여인>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상> 그리고 중반에 그린 <네모의 상> <여인> <여인과 연인> <남자> <K씨의 상> 등이 있었다. 당시 그의 귀국전을 보고 쓴 평문에서 시인 조병화氏는 ‘소박하면서 단조로운 통일 가운데 고요히 가라앉은 윤택한 시심과 탁하지 않은 맑은 빛과 색이 러프한 화면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깊은 뉘앙스의 폭은 먼 거리를 타고 비쳐 오르는 아름다움을 우리들 앞에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한 것은 문인의 눈에 비친 그의 예술의 특징과 세련미를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162.2 x 130.3 cm 1988
<Memory of the sea> 50 x 125 cm 1995
<Portrait of Shi Guan> 110 x 83 cm 1949
<한라산 Mt. Halla> 39.4 x 27.4 cm 1996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92 x 116.8 cm 1988
<지루한 사간 Dull time> 91 x 116.8 cm 1991
<소년과 조랑말 A pony and a boy> 116.8 x 91 cm 1992
<Road in Autumn> 60.6 x 53.5 cm 1970
<이어도 - 죽은 어부의 노래 A song of dead fisherman> 17 x 29.5 cm 198
<오름 Hill(parasitic vdcano)> 31.8 x 40.9 cm 1989
<어둠속의 폭풍 Storm in the dark> 45.5 x 53 cm 1991
<서귀포 풍경 The scenery of Seagwipo> 162.2 x 130.3cm 1988
<생각 A thought> 45.5 x 53 cm 1980
변 시 지
Byun, Shi Jee
世界의 有名 인터넷 사이트에서 公認받고 있는
暴風의 畵家 邊時志
김남수 / 미술평론가
원로 서양화가 우성(宇城) 邊時志의 작품세계가 세계적인 유명작가들과 함께 외국의 유명 인터넷에 그의 작품세계가 전시되어 한국화단에 화제를 모으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예술세계는 4년 전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 사이트인 '야후(YAHOO)'에 세계 100대 화가로 소개되면서 한국미술계의 비상한 관심과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이어 미국의 인터넷 라인인 'Best Price Art. com'에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등과 함께 소개 됐으며, 최근에는 프랑스의 유수한 인터넷 사이트인 'www.ifrance.com' 에 역시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세계의 유명화가 17명의 가을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아트 사이트는 그가 70년대 초 일본에서 귀국한 후 서울에서 일명 '비원파'에 속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던 당시 그린 '비원'의 가을풍경이 소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변시지는 최근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www.inter-art.com에도 80년대의 작품 <콜로세움>이 소개되고 있다.
<폭풍의 바다 13> 112.1 x 162.2cm 캔버스에 유채1990
이토록 변시지의 작품세계가 4년 전부터 세계의 각 인터넷 사이버 아트 창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비록 양화이기는 하지마는 동양인으로서의 예술양식,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향토성이 물씬 농축된 독창적인 조형세계가 세계의 예술양식과 공존할 수 있고 접목이 가능한 우수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국제교류전, 혹은 아트페어나 해외 견본시장 등에서 한국미술이 가끔 소개되어 일부의 원로나 중진작가들이 각광을 받은 사실이 있었지만 세계의 인터넷망을 통하여 한국의 화가가 세계의 인터넷 사이트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변시지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일명 폭풍의 화가로 알리어진 한국화단의 원로 변시지의 작업경륜은 반세기가 훨씬 넘는다. 그의 예술양식은 10년 내지 20년의 텀을 두고 변화를 해왔다. 가령 57년 귀국하기까지의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해방후 서울에서의 극사실주의를 추구했던 비원파의 동인들과의 활동, 75년 교향인 제주도로 귀항하기까지의 작품활동, 그리고 지금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폭풍의 바다 8> 112.1 x 162.2cm 캔버스에 유채 1990
<폭풍의 바다 6>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폭풍의 바다 5>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서울에서 작업했던 경향들은 이른바 비원파, 혹은 고궁파로 불리워지는 자연의 실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던 아카데미즘의 화풍이 그것이다. .<경회루> <향온정> <반도지> <애련정> <부용정> 등의 고궁을 극사실, 극세필, 극채색으로 집중적인 묘사를 했던 시기에 동료작가로서는 손응성, 장리석 등 훗날 한국화단을 빛낸 구상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 인물화 가운데서도 특히 좌상(坐像)을 연작으로 발표했던 그는 47년작 <여인>, 48년에 완성한 <베레모의 여인>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상>, 그리고 51년 중반에 그린 <네모의 상> <여인> <등잔과 여인> <K씨의 상> <남자> 등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유학시절 인물을 소재로한 집중적인 탐구가 변시지 예술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작가 변시지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응모작 <베레모의 여인> <만돌린을 가진 여자> <조춘> <가을풍경> 등 넉 점이 입상, 최 연소자의 나이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당시 일본화단은 변시지의 수상으로 센세이션날한 화제와 충격으로 일파만파 미술계를 크게 흔들고, 놀라게 했다. 문제는 수상자가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충격과 경악을 동시에 맛 본 것이다.
77년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마치 지금 까지 작업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들이 제주풍경으로 환치되는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는 돌연변이라고나 할까. 얼핏 생각하면 유화의 세계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가능한 것일까 싶을 만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아열대성 남국의 정취가 물씬 나는 제주는 아스팔트 문명이 가져온, 공해로 뒤덮인 뭍(육지)과는 전혀 다른 풍토 적인 환경과 분위기와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을 망각 속에 살아온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정 때문에 금의환향하면서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 의 밭이랑과 화산질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위돌과 낮으막히 두른돌각담, 완만하게 굴곡이 진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 오는 짜릿한 바닷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곳자와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하여 멀리서 수평선 위에 떠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온 것은 일상 우리가 보아왔던 이러한 소재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작가의 마음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詩情), 시상(詩想)이 떠오른 시인이 시(詩)를 읊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읊조리고 승화시킨 것이다.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그리고 모래사장이나 해안선 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點中人物), 낚시를 드리운 노옹 태공망은 그 모두가 자화상이요, 작가의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농축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화폭에 표출되는 양식과 표현의 방법론은 작가 특유의 독보적 경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다는데 우리의 공감을 얻고 있다. 가령 제주토양의 상징인 황갈색의 모노톤한 색조가 마티엘 효과까지 상승시키면서 화면전체를 메꾸고 그 위에 지극히 단순화시킨 정제돤 먹선으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이미지화 한다든지 등 가시적인 외연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작가 특유의 어법으로 작품을 완성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여과되어 재창조된 결과는 항상 제주의 리얼한 실상과는 또 다른 풍물시(風物詩)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술이 동양적 사유에 바탕한 농밀한 한국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속기와 불필요한 덧살을 떨쳐 버린 간결한 추상성, 사의성, 심의성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우직하고 투지력이 강한 황소, 봄나물의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와 연두빛 들과 산과 하늘 등 단색조로 그린 박수근의 작품 등 모두가 변시지의 예술과 함께 한국성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도 그 속에 담긴 진솔한 한국의 정서와 정신 때문이다.
<3인의 나부> 83 x 110cm 캔버스에 유채 1951
<폭풍의 바다 1> 83 x 110cm 캔버스에 유채 1993
그가 한국성에 보다 큰 애착을 갖게된 것은 1981년 유럽 순방 길에 올랐던 때 느낀 감정과 결심 때문이다. 이태리의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폼페이, 나포리 등을 비롯하여 파리와 런던을 둘러보면서 느낀 충동이 컸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현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선후배나 일부 동료작가들이 몇 백년 앞서 있는 그들을 흉내 내면서 닮고 있다는데 실망스러웠고 이러다간 우리 민족성의 말살과 개성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와 갈등 때문에 이국만리 타국에 있으면서 깨친 것이 바로 한국적인 유화가 없을까 라는데 착안을 했다고 한다. 이른바 유화적인 매재를 쓰면서 우리의 것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이 오늘의 예술양식을 굳히게된 모티브가 됐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1927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출생하여 올해로 76세의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그는 불과 6세때 선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 그곳에서 일본의 오사까 (대판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으로 진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52년 귀국하기까지 20여년간을 일본인 작가들과 경쟁을 하면서 화가로서 자질을 길렀으며, 각급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민족적 차별이 심한 일본인 사회에서 보다 큰 공분을 느끼면서 반드시 우리 민족의 미술을 찾겠다는 결심을 몇 번이고 다심을 하면서 작업을 해온 그는 주위 환경의 여건과 자극이 그로 하여금 우리 그림을 하게된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화가로서의 운명적인 외길을 걸어온 작가 변시지는 분명 우리 시대가 낳은 진실한 예술인으로서의 숭고한 생애를 살아온 인물이다. 요즘의 세태와는 전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천성적으로 정직과 진실만을 간직하고 살아온 그는 아직도 동심의 꿈을 버리지 못하면서 예술행위를 신앙처럼 여기고 작업에 심취하고 있는 오염되지 않은 숭고한 화가다.
고향인 서귀포에 <기당미술관>을 건립, 후예들을 위하여 시에 기증하는 등 참으로 이 노 화가는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면서 깨끗하고 숭고한 생예를 살아가고 있다. 필자로서 이 화가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며 바라건데 선진국처럼 주무부처인 예술당국이 창작기금의 지원 등 많은 배려를 할 때 한국에서의 세계적인 예술가는 탄생되는 것이라고 보아진다.
1951년 시세이도 화랑에서 열린 제2회 개인전 당시
제3회 개인전 팜프렛 표지
<귀로> 80.3 x 116.8cm 캔버스에 유채 1991
<기다림> 27.3 x 40.9cm 캔버스에 유채 1995
<기다림> 45.5 x 33.4cm 캔버스에 유채 1984
<폭풍의 바다> 162.2 x 112.1cm 캔버스에 유채 1993
<나그네> 25 x 39cm 캔버스에 유채 1995
<말과 까마귀> 39.4 x 31.8cm 캔버스에 유채 1990
미술화제
변시지 - 작품을 주제로 한 음악회
濟州의 風光 한 幅의 그림이 되고,
한 曲의 音樂이 되어....
2006. 7. 7 제주시 노형동 한라대학교 內 한라아트홀
‘2006 제주 방문의 해'와 ‘제주 특별 자치도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출신의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음악회가 지난 7월 7일 저녁 제주시에 위치한 한라대학교 내 한라아트홀에서 열렸다. KBS교향악단(지휘자 오트마 마가)의 초연으로 발표한 연주회는 30여 년간 고향 제주의 풍광을 화폭에 담아온 변시지 화백 그림을 소재로 한 것이 처음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연주 도중 무대 정면에 제주의 자연 풍경화 변화백의 작품을 담은 영상과 함께 연주된 작곡가 최영섭의 창작곡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등이 발표되어 많은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공연이 끝난 뒤 변 화백은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라며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KBS 교향악단이 내 작품을 소재로 한 음악을 연주해 줘서 기쁘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공연 이튿날 아침 개관 20년째를 맞는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을 찾은 음악전문기자 이장직(중앙일보)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파도 소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화가에게 제주 바다는 어릴 적 추억이자 제주의 역사, 풍속이다. 제주 바다와 바람, 까마귀, 말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고독, 불안, 기다림, 한(恨)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60~70년대 이중간첩으로 오인 받아 안기부의 미행을 받아온 그에게 폭풍은 곧 독재를 의미한다.
난무 102.2 x 130.3cm 1997
그는 안기부 탓에,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변 화백은 23세 때 일본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해 현재 광풍회원으로는 최고참이다. 가족과 떨어져 30년째 서귀포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래도 매년 광풍회전에 출품할 100호짜리 작품 하나씩은 거뜬히 그려내고있는 열정적인 화가이다」 라고 얘기한다.
아울러 지난 7월 12일부터 서울 인사동 '미술관 가는 길'에서 열리는 개관기념 초대전(변시지 삶과 예술)에는 <한라산> <폭풍의 바다> <폭풍> <대화> <깊은고뇌> <폭풍의 귀로> <섬이야기> <낙조> 등 4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 편집부 -
황혼 33.4 x 24.2cm 2002
절망 40.9 x 31.8cm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