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리었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
성씨의 역사
강릉유씨(江陵劉氏) 시조 유전(劉荃)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유전이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40세손으로 왕안석(王安石)에게 간언하다가 고려 문종 때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영일군(迎日郡)에 터를 잡은 후로 경상도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유씨(劉氏)는 거창(巨昌), 강릉(江陵), 배천(白川)을 관향으로 삼아 본적이 되었다.
이후 유전의 12세손 유창(劉敞)이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옥성은 강릉의 옛 이름이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아 강릉을 본관으로 하고 있음이 《거창구보(居昌舊譜)》 서문에 실려 있다.
분적종 및 분파
강릉유씨는 거창유씨(巨昌劉氏)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걸포리
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용상리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
전라남도 승주군 월등면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구림리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신원리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봉명리
충청북도 제원군 수산면 고명리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추학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강릉유씨는 11,772가구 총 36,33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강릉유씨시조 劉承備(승비) - 「서기1273-1350」 |
|
강릉유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 병부상서로서 우리나라에 건너오신 유씨(劉氏)도 시조 휘.전 할아버지의 9세손 이시며 휘.창(敞)문희공 할아버지의 증조 할아버지이신 휘.승비(承備)이시다. 할아버지의 초휘는 서(瑞)요 자는 천상(天祥)이며 호는 국재(菊齋)이시다. 할아버지께서는 고려원종14년(1273) 강원도 우계현 지금 강릉시에서 송재공 휘.연(沿)할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고려조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 하시다가 상서도성 추밀원 좌복야로 치사(퇴직)하시니 고려 충혜왕께서는 할아버지께 봉조하(奉朝賀. 당상관으로 연세가 높아 퇴직하게 되면 봉조하의 칭호를 주고 종신토록 그 품계에 알맞은 봉록을 주었고 국가적인 행사에 조복을 입고 참여하게 하였던 제도)의 칭호를 내리시는 은전을 받으시고 충정왕2년(1350)에 서거하시니 수 78세이셨고 할머니는 정부인 옥구장씨로 개성윤을 역임하신 유(維)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개성부 남문밖 자좌원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찾을길이 없어 우리대종회에서는 여러 해를 두고 논의한 끝에 제단을 서울 상일동 문희공묘소 서편에 시조할아버지이하 2대 제단소(乾.巽)를 마련(2002.10.25) 하여 매년 4월 청명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안향(安珦1243~1306) 호는 회헌(晦軒) 시호 문성공(文成公)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셨다. 동학인(同學人)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과 더불어 중국 원나라에 건너가 거유명사(巨儒名師)로 유명한 학자들과 교우하며 원나라의 서책과 경전을 상고하여 효행명(孝行銘)을 펴 내시고 조선조에 이르러 증손 휘.창(敞) 문희공께서 귀(貴)히 되시므로 인하여 순충보조공신에 추증되셨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휘.연(沿)이시고 호는 송재(松齋)이시다. (강릉유씨대동보 동도 상계편 P.13참조) 시조할아버지 어머니는 정화택주(택호) 연안이씨로 호부시랑 휘.승안(承顔)의 따님이시다. ※ 구보에 강원도관찰사 귀산(貴山)의 녀로 기록된바 있으나 연안이씨 족보에 의하면 귀산은 조선조 태종때 인물로 문희공과 동시(同時)사람이다. 고로 오록(誤錄)으로 보며 우리 족보에도 연안이씨 승안의녀로 기록되어 있다. 더 상고 해 보면 귀산의 아버지 원발(元發)이 고려말에 전공판서를 역임,조선조 태조(이성계)가 개국후 여러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나가지 않았으며 귀령(貴齡)과 귀산(貴山)형제는 세종조에서 좌의정과 관찰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고찰(考察)을 바란다. 할머니는 정부인 옥구장씨로 개성윤 유(維)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4남을 두셨으니 장남이 휘.송백(松栢)개성윤 상호군이며 차남 송단(松檀).삼남 송절(松節) 두 할아버지는 무후(無後)하고 사남 송재(松梓)할아버지는 금성군이시고 큰손자 휘.천봉(天鳳)은 안악군수를 역임하시고 아들 문희공의 귀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 받으셨다. |
출처: 강릉유씨 대종회
www.kangyu.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