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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0;1-16. 드로아에서의 바울의 사역. 2017. 2/22, 3/1, 3/8, 3/22
1. 배경과 상황, 은장색 데메드리오로 말미암아 우상 아데미의 도시 에베소에서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납니다(행 19:23-41). 그 후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마게도냐를 지나 남부 헬라 지방에 이릅니다(1-2절). 겨울이 지나고 에게해의 항해가 가능해지자 바울은 예루살렘 사절단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기로 결정합니다(3절). 그러나 바울은 그 배에 자신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단독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빌립보로 가서 항구인 네압볼리에서 드로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5절). 바울은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사절단 일행들과 다시 합류했습니다. 마침 드로아에는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있어 바울 일행은 이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레를 머물고 출발하기 전날에 함께 떡을 떼었고 바울은 밤중까지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던 젊은 청년 유두고가 졸음을 못 이겨 3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바울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1-1. 먼저 20장 전체는 이미 19;21에 암시가 되었습니다. 이일이 다 된 이후에.... 로마로 향하여야 하리라. 끝은 로마입니다. 숲은 로마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사역에서 한하나의 나무를 봅니다. 여러분, 숲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큰 그림은 그리지만 하나하나의 결과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려는 과정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이 나오게 되지요, 우리가 목적을 향하여 갑니다만 그러나 나의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에는 목적한 것을 온전히 이루게 됩니다. 반면에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목적을 모를 수가 있고 작은 결과에 만족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늘 로마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나 가는 사역지에서 아름다운 매듭을 짓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적의 내용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로마를 보게 됩니다.
1-2. 20장에서는 두 사건을 기록합니다. 하나는 떡을 떼고 사도의 증거를 듣기 위하여 주의 첫 날에 드로아에서 제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교회와 직분과 사명에 대하여 권면을 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어떻게 일꾼들을 세웠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20;1-16절 까지 의 내용을 보면
1-3. 1-2, 에베소의 소요가 그치자, 무슨 소요입니까? 데메드리오 사건입니다. 아데미 신과 연관된 철학과 맘몬주의와 기득권 때문에 일어난 소요입니다. 그런데 이소요가 그치자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한 이후에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바다를 통해서 빌립보, 고린도, 베뢰아를 방문합니다. 그 곳에서 제자들을 권하고, 권하고는 권면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세워진 일꾼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권면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권면은 보혜사 성령, 보혜사에서 나왔습니다. 파라클레스입니다. 파라클레스의 뜻은, 권면의 뜻은 옹호와 위로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로하고 무엇을 옹호했습니까요? 지금 바울은 박해를 많이 받았던 곳을 들러봅니다. 거기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이 현장에 있는 제자들은 바울이 이전에 겪었던 그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나서 권면하는데, 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뜻, 주님의 도를 옹호하고 이 고통 받았던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여러분, 이 것이 목회입니다. 영혼 사랑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안에 있는 양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밖에 있는 양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일에 열심과 최선으로 사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전교회라는 우리 안에 있는 양에게 주의 도를 옹호하고 권면을 합니다. 만약에 다른 우리에 잇는 양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관심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주님은 이런 목자를 가리켜서 삯꾼 목자라고 했습니다. 먼저를 울타리가 없는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합니다. 하지만 비전교회라는 우리 안에 있는 양에게 권면을 합니다. 가르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주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수반하며 신앙의 삶을 사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줍니다. 최선을 다하여 도와줍니다. 이 것이 바울이 한 권면입니다.
여러분, 모세와 아론이 무엇이 다를까요? 출32;1, 6, 7입니다. 그리고 9, 13-14입니다.
사울 왕과 다웃이 무엇이 다를까요? 삼상13;8-9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불레셋이 쳐 들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해서 이런 일을 합니다. 13-14절 보세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바나바가 무엇이 다를까요?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유 대왕, 웃시아가 왜 한쎈씨 병에 걸릴까요? 대하26;4-8. 15-21
바울은 제자들에게 권면을 했습니다. 주의 도를 옹호하고 위로했습니다.
1-4. 3절입니다. 바울이 헬라에서 3개월 머무릅느다. 다시 곤경이 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양육하고 가르칩니다. 어디를 가든지 제자들을 챙깁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또 등장을 합니다. 바울은 원래 방해와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욱 거세게 맞서면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이 될 지금의 사역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위해서 피해줍니다. 우리 안의 제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작정을 합니다. 베뢰아, 데살로니가, 더베에서 온 제자들의 무리는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기다립니다. 만나서 수리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배로 닷세만에 드로아에 도착을 합니다. 7일간 머뭅니다. 여기서 떡을 떼고 교훈을 듣기 위하여 첫 날 모임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두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1-5. 13-15입니다. 드로아에서 제자들의 무리는 해로를 이용하여 앗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혼자서 20마일을 걸어서 여행을 합니다. 여러분, 열정의 바울이 혼자서 도보로 여행을 합니다. 과거에 겪었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묵상하고 20마일을 혼자 걸어서 여행을 합니다. 현재의 불안과 투쟁이 있는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묵상하며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갈망과 비전을 보면서 혼자 도보로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앗소에서 합류하고 미들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서 밀레도에 도착을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미할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안식입니다. 그의 안식의 비결은 주님입니다. 온갖 속박을 끊어버리고 오직 주님에게만 사로 잡히는 바울입니다. 그래서 해답을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배를 타고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헬라에서 3개월, 마케도니아에서 누가와 함께 배를 타고 드로아를 거쳐서 걸어서 혼자 20마일을 여행합니다. 바울의 안식은 이런 열정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울에게 잇어서 시작의 끝이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시작은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 끝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빌1;21에서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에게 지배를 받았던 바울은 그를 둘러 싼 모든 환경을 지배합니다. 언제나 자신의 환경, 역경, 순리,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서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 태웠습니다. 이 것을 안식으로 여겼습니다. 빌4;12의 고백처럼 바울은 이 것이 안식이고 휴식입니다.
두 번째는 휴식을 모르는 끈질진 열정입니다. 바울은 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을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디 않습니다. 꾸물 거리지 않습니다. 중단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바울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에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사랑, 섬김, 도움을 베풀어 줍니다. 바울은 꾸준히 쉬지 않고 목전의 일들을 수행합니다. 그러면서도 늘 잊지 않는 것이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항상 저 너머의 지역에 대한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입니다.
1-6. 중요한 두 가지 사건입니다. 하나는 드로아에서의 모임입니다. 구성원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사람, 가이오, 루스드라에서 만난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 드로비모, 그리고 누가입니다. ㅇ해 모였을까요? 떡을 떼기 위해서입니다. 구속하신 주님의 몸과 피를 항상 마음에 두기 위함입니다. 날이 새기까지 강론을 합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땅으로 떨어지고 잠시 중단이 되었지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바울의 손과 몸으로 역사를 일으켜서, 유두고가 살아나는 경험을 모든 사람이 합니다.
두 번째는 밀레도에서의 일입니다.
2. 그러면 왜 유두고는 창에서 떨어졌는가? 일반적인 사고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원인제공이 유두고와 바울에게 있습니다. 그렇지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유두고에게 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4가지가 있습니다. 본인의 역활과 바울사도의 역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유를 바울에게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설교가 길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발생이 되면 그 현장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는가? 문제와 현장 수습은 목회자의 몫이고 거기에 주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먼저 유두고의 모습입니다.
2-1. 유두고가 ‘깊이 졸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졸 더니”(9절).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9절). 졸음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생리현상입니다. 사실 유두고는 노예였기 때문에 온종일 고된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피곤하여 졸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면 성도들도 유두고처럼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졸면 유두고처럼 믿음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졸면 문제가 생깁니다. 꼭 보고, 꼭듣고, 꼭 지켜야 할 그 순간에 졸면 어느 것이든지 문제가 생깁니다.
1983년 러시아 사할린 상공에서 KAL기가 격추된 지 올해 29년째입니다. 260명의 생명을 일순간에 빼앗아간 대형 사고였습니다. 유족들이 러시아의 정부에 배상청구서를 냈는데 러시아 당국은 “조종사의 과실이 인정된 만큼 책임은 너희에게 있으니 보상할 수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민간항공기인 줄 알면서 격추한 러시아의 만행도 규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조종사가 냉전시대의 러시아의 영공을 660km나 침범했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남의 나라 비행기가 서울 항공에 날아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들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엄청난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한마디로 조송사의 실수였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약 450km입니다. 그런데 우리 항공기가 러시아의 영공을 660km나 들어갔는데 조종사가 모른다는 것은 조종사가 깊이 잠이 들어서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 한눈을 팔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의 조종석은 몇 개의 보터만 누르면 비행기가 자동으로 알아서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조종사는 운행을 하면서 농담도 하고 식사도 하고 신문도 봅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자다가 항해를 이탈하여 러시아 영공을 침범하여 변을 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위와 똑같이 졸다가 변을 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유드고란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들다 그만 떨어졌습니다. 그는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떨어져 죽고 맙니다. 졸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졸면 사람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옛날 설날 특집으로 “좋은 세상 만들어 들입니다.”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아들을 10살 때 잃고 32년 동안이나 애타게 찾았는데 SBS 사의 노력으로 극적인 상봉을 합니다. 그러면 왜 그 아들과 32년 동안 헤어졌습니까? 그 아들이 10살 때 기차를 타고 졸다 내릴 곳에 내리지 못하고 서울까지 옴으로 인하여 빚어진 사건입니다. 그 사람은 졸음 때문에 32년 동안 부모 없는 고아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졸음을 이지기 못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깊이 잠이 든 것은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드리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래설교 해도 잠깐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얼마나 명설교입니까? 그 명 설교를 듣고도 지루하여 잠을 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깨어있기만 하면, 내가 살아있기만 하면, 내가 정신만 차리면, 아무리 긴 설교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심령이면 긴 설교이든 짧은 설교이든 은혜가 되지 않고 졸음이 옵니다. 그런데 졸게 하는 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조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닭이 병이 들면 그저 앉아서도 졸고 서서도 졸고 추운 데서도 졸고 따뜻한데 서도 좁니다.
어떤 목사가 꿈에 죽어서 천국엘 갔습니다. 어느 이상하게 생긴 총알택시 기사도 죽어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마중 나와서, "목사님은 저 쪽 지옥 길로 가시고, 총알택시기사는 이쪽 천국 길로 가시오.", 그래서 목사는 베드로에게 "세상에서 목사 일을 한 사람은 접니다. 저분은 총알택시 기사였고요, 그런데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인생을 바친 저는 지옥이고, 온갖 교통위반을 한 총알택시 기사는 천국이고 뭔가 착오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바로 된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자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목사님 당신은 설교를 시작했다면 사람들을 잠재웠지만, 그러지만 총알택시기사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게 했답니다. 그 택시만 탔다하면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하나님' 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거든요". 다 같이 인사합시다. “예배시간에 졸지 맙시다.”
2-2.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았는데’ 있습니다. 창은 본래 걸터앉으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지만 유두고가 창문에 꼭 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삼층 누각에서 위험하게 앉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편리하게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창문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꼭 들어 맞습니다. 여러분, 유듀고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욧갓타입니다. 다행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의 삶의 과정이 있는 것과 죽는 것과 다시 사는 것이 이름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늘 다행입니다. 지금도 피곤한데 창문에 걸터앉을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욧갓타입니다. 들어오면서 은혜 받을 생각보다는 말씀은 들어야 하는데 어디 시원하고 공기가 좋은 곳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름의 의미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김미성집사님, 그렇지요? 아름다운 성, 그 예루살렘이 되어야 하는데 유두고입니다. 위험한 곳은 위험합니다. 여러분, 창은 걸터 앉는 곳이 아닙니다. 위험한 곳에서 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할 수가 있습니다.
2-3. 피곤입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유드고라는 이름은 그 성격으로 보아 노예의 이름입니다. 월리암 바클레이는 노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루 종일 시종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했으니 얼마나 졸리고 피곤하겠습니까? 유두고가 창에서 떨어진 이유는 ‘너무 피곤’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예면 온종일 많은 일을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피곤한 것은 당연하고,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피곤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앉아 있으니 그래서 그는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음은 오고, 설교는 길고, 그 설교는 이해도 되지 않고, 몸은 피곤하니 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떨어진 청년을 책망하지 않는 것을 보아 그의 처지가 피곤한 것을 이해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 집니다. 자고 싶고 눕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 여러분들이 만약 삼일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면 그저 자고 싶은 생각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교훈을 얻습니까? 육체가 피곤하면 영혼도 피곤입니다. 물론 영적인 것이 정신과 마음과 육체를 지배합니다. 통제합니다. 그럼에도 육체가 피곤하면 영혼이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담는 그릇이 문제가 생기면 안의 내용물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깨진 독에 물붓기란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쉼입니다. 안식일은 쉼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법칙을 무시하고 계속 일하면 육체가 병들고 영이 망가집니다.
2-4. 정신 해이입니다. 제가 목사님과 개척교회 때부터 장로 사역을 할 때까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목사님 사촌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설교만 시작을 하면 아예 주무시는 분이 있습니다. 1년 52주 항상 그렇습니다. 25년간 거의 그랬습니다. 강대상 바로 앞에서 그럽니다. 맨 앞인데도 졸아요. 왜 그럴까요? 정신해이입니다. 유두고가 3층 창문에 걸터앉은 자체가 정신이 느슨한 모습입니다. 방안에 많은 등불을 켜 놓았으니 물론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문에 걸터앉아 맑은 공기를 마셨습니다. 창문에 걸터 앉다보니 눈이 바울사도의 말씀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소리, 창밖의 모습, 여기저기 살피니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목사님들이 성도들이 교회 오실 때 앞자리를 권합니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말을 합니까? 이런 말이 생긴 것은 앞자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은어입니다. 앞자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꼭 뒤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뒤에 있는 자리를 고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교회에서 시험 드는 사람,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 한마디로 신앙이 헤 이해 지는 사람입니다. 정신이나 신앙이 헤이 해 지는 사람은 말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에 딴생각을 합니다. 집 생각, 친구생각, 오후의 스케줄 등, 몸은 교회당에 생각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설교 시간이 흐를수록 졸음만 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계속 꾸벅 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집사님, 예수님께서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그 분은 대답하기를 우편국에 계십니다. 사도행전에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엉겁결에 ‘우편국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졸다가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 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졸릴 때가 있습니다. 꾸벅꾸벅 졸릴 때가 있습니다. 시험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졸아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시험이 깊이 들면 이기지 못하여 마귀의 밥이 되어 결국 손해를 보게 됩니다.
2-5. 두 번째 원인 제공인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7절). 밤중입니다. 바울이 설교를 할 때 특별히 이 날은 성찬식을 겸해서 하였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찬양과 설교가 3시간 이상입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요? “좀 길게 해달라”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짧게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영적으로는 갈급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듣기를 원합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자-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의 설교가 고별설교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에 떠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다시는 드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 말씀이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밤늦게 까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설교가 길어졌습니다. 밤중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밤중은 ‘깊은 밤’으로 1-2입니다. 설교가 길다보니 유ㄷ고는 지루하여서 하품을 몇 변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깊은 잠이 들어 몸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힘없이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은 심각하게 ‘마지막이다’는 생각하고 설교를 하고 있는데 유두고는 ‘너무 길다.’는 것이 사로잡혀 바울의 설교를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죽은 유두고가 살아나게 되었는가? 문제가 발생이 되면 어떻게 해결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도생활을 하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문제가 발생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문제는 다 있습니다. 9절 끝 부분에 죽었는지라. 죽었습니다. 완료형입니다. 끝이 났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령에 감동한 사람입니다. 누구요? 누가입니다. 누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의 소견서, 사망 진단서입니다. 결론이 났습니다. 죽었는지라. 확인이 된 현장이고 확인이 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여러분,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합니다.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참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에 이르렀어도 주님이 하시면, 주님이 살리시면 됩니다. 이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것이 신앙입니다.
3-1. “바울이 내려가서“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그렇습니다. 표현은 현장에 가는 것입니다. 문제된 현장에 가야 합니다. 바울이 내려갑니다. 엘리사도 내려가고 엘리아도 내려갑니다. 현장으로 갑니다. 주님이 갈릴리 현장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엘리아를 찾아 갑니다. 사건의 현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문제가 발생이 되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요? 지금 말씀을 전하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복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현장에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3-2.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엎드려 몸을 안는 것은 일치감을 뜻하는 표현이요, 또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얻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왕하 4;8절이하에 보면 엘리사와 수넴여인이 나옵니다. 이여인이 어떤 여인인가? 귀한 여인입니다. 아무나 그런 여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극진히 섬깁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내려오고, 여리고를 드나들고 할 때마다 엘리사가 들러요. 왜요 그 집에 엘리사가 쉴 곳을 마련했습니다. 얼마나 잘 준지 했느냐? 주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어요. 받은 것이 있으니까? 기도해야지요? 물론 그냥도 기도를 합니다만 엘리사가 이 여인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합니다. 어린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갑자기 아이가 죽습니다. 이 때 이 여인이 누구를 찾아갑니까? 남편이 말겨도 엘리사를 찾아가서 언제 내게 아들을 청구한 적이 있느냐? 항의 하면서 울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엘리사가 이 여인과 함께 그집에 와서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코를 맞추고 입을 맞추고 그 몸을 그 위에 얹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두고에게 바울이 한 것처럼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다 삽니다. 일치감, 간절함이 있습니다. 안수하면 어떨까요? 영이 옮겨집니다. 은혜가 내려갑니다. 복이 주어지고 삶에 새 역사를 씁니다.
3-3. “말하되” 말씀의 능력이 바로 살리는 일을 합니다. 히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들도 말씀을 통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바울에게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 앞치마로 낫게합니다. 치유가 됩니다. 그 때으 아데미 신상에서 행하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청종했던 그 문화를 이용해서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방법입니다. 손의 능력으로 낫고, 말씀으로 낫습니다.
어떻게 해결이 됩니까? 내려가는 개입을 통해서 합니다. 치료하고 살리는 방법은 전체를 드림으로 살립니다. 안수, 가슴으로, 방언으로, 또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선포를 합니다. 왜요? 지금 소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목합니다. 인간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있다. 선포합니다.
4. 청년 유두고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1.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과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영화나 연극이나 운동을 참관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는 영성이 중요합니다.
4-2.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헌신’입니다. 예배를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예배의 근본은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도 드리고, 몸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는 것이고, 시간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다른 것은 드리면 모든 것이 변하여 되돌아옵니다.
4-3. 유두고처럼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주변적 존재(Marginal being)라고 부릅니다. 창에 걸터앉았다는 것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 있으면서 형편에 따라 나가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자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겠죠? 행 20장은 드로아 교회의 청년 유두고처럼 은혜로운 설교 시간에 마귀의 유혹을 받아 졸면 죽을 수 있으니 깨어 경청하라!는 것을 가르쳐 줄까요? 무론 우리는 설교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누가가 유두고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아니면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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