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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창작문학상 산문부문 심사평>
정확한 문장으로 구체적 형상화를
이번 창작 문학상 산문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열다섯 명의 열아홉 편이었다. 장르는 수필과 동화, 소설 등 다양했다.
수필은 박미란(네 편) 박수현 김나리 최남미 네 명이 응모하였다. 추억이나 기억 등의 개인사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주장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무난하게 생각을 펼친 글들이었지만, 부분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표현과 어색한 문장 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소재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통찰로 끌어올리는 사유의 힘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동화는 정상원 최영문 김정자 임지형 네 명이 응모하였다. 정상원과 최영문의 동화는 모호한 관념에 빠져 있어서 아쉽고, 김정자의 동화는 인물들의 성격이 이유도 없이 과장되어 개연성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소설은 조아해 이수엽 황세현 이경진 장희태 김진희 임안순(두 편) 일곱 명의 여덟 편이었다. 조아해 이수엽 황세현 이경진의 소설은, 각자 소재는 다르지만, 구성의 짜임새가 약하고, 상황이나 사건이 상투적인 성격이 강해서 참신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동화 「엄마의 동전탑」(임지형), 소설 「유리꽃」(장희태) 「악몽」(김진희) 「여기, 소란한 오후」 「장미색 비강진」 다섯 편이었다.
동화 「엄마의 동전탑」은 아빠의 치료비 때문에 오락기로 돈을 벌려는 엄마와 ‘나’의 갈등이 축을 이루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문제를 감당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약하고 작가의 의도에 의해 도식화된 측면이 있어서 실감이 떨어지고 있다.
소설 「유리꽃」은 전반부의 문장력은 좋은데, 인물과 사건이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악몽」은 죽음으로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연극적이고 우화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데, 이후 상투적인 과거가 산만하게 나열되는 문제점이 있다.
임안순의 두 소설은 모두, 문장력과 사건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서사 능력이 일정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시 두 편 모두, 주제를 구체적으로 조형해내는 힘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 소란한 오후」는 다리에 깁스를 한 채 4주 동안 집안에 있는 한 사내를 보는 못의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다. 식물들의 왕성한 생명력과 사내의 무력함이 대비되고 있지만, 이런 구도가 한 인간의 불능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의미를 현대 사회의 문제로 깊이 있게 천착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장미색 비강진」은 미술 치료사인 ‘나’의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신체적 현상과 ‘나’에게 치료를 받는 그녀의 사연을 통해 고통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인물들의 관계가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이 작품 역시 그 고통의 실체를 과거의 우연한 사건과 그로 인한 일반적인 죄책감으로 처리하는 아쉬움이 있다. 주제를 제대로 살려내려면, 이 고통의 실체가 현대적 삶의 심층부에 자리하는 깊이 있는 문제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을 주의 깊게 검토한 결과,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과제를 잘 이행한다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임안순의 「장미색 비강진」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열심히 노력하여 의욕적으로 도전한 다른 응모자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쉬운 지름길은 없다. 부지런히 길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수밖에. 힘들지만 스스로 가야 한다. 가야 길이 된다.
심사위원: 유순영. 배봉기
<산문부 당선작>
장미색 비강진
5월 첫째 주
발진은 왼쪽 아랫배에서 시작되었다. 배꼽과 왼쪽 골반을 사선으로 그었을 때 그 절반쯤이었다. 반점을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샤워를 끝내고 바디로션을 바를 때였다. 건조하고 메마른 탓에 온 몸이 촉촉해지도록 정성을 들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좁쌀크기의 반점이야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그날 치료센터에서 그녀와 9회기 째 만남을 가졌고 함께 일하는 치료사들로부터 결혼 1주년 축하를 받았다. 오전에 시작된 생리로 종일 아랫배가 묵직했으며 그래서인지 생각만큼 황홀한 1주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내가 다시 붉은 반점을 생각한 것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욕실에 있었고 이틀 전 아랫배에 반점이 돋았다는 사실은 기억에도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고 온 몸을 거울에 비췄을 때야 문득 그 자리가 궁금해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불과 이틀 사이에 그것은 쌀 한 톨 크기로 자라났다. 석류 낱알처럼 붉고 선명한 그 빛에 나는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는 샤워중이 아니라도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웃옷부터 들춰봤다. 그곳이 저를 위한 자리인 것처럼 반점은 선홍색 완두콩모양으로 어김없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보았다. 그는 언제나 불을 끄지 않았다. 그에게서 옅은 물감냄새가 났다. 그는 동시집에 싣기 위한 삽화를 두 달째 작업 중이었다. 투명하게 그려달라는 주문이어서 아크릴과 색연필을 사용했다. 그의 손에서 두 가지를 섞어놓은 듯한 알싸한 향이 전해졌다. 손에 묻은 물감은 물로 지우면 그만이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고 해서 물감냄새가 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조금 전 작업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향이 전해져왔다. 기억이 향을 불러냈다. 온 종일 갖가지 미술도구 속에 파묻혀 지내는 내게서도 그러한 향이 전해질지 궁금했다.
일주일만이어서 나는 그만큼 설레었고 그가 내는 숨소리에 금세 취해갔다. 정성들여 바른 바디로션을 그가 다 거둬가고 내 몸에는 다시 그의 타액이 부드럽게 발라졌다. 그가 그토록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반점쯤이야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나또한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러했다. 그의 입술이 왼쪽 갈비뼈를 지나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저릿한 기운이 발끝과 머리끝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밭은 숨을 내쉬었다. 감은 눈꺼풀 새로 얕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도 어서 내 안으로 들어왔으면. 나는 더듬어 그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배꼽과 왼쪽 골반을 사선으로 그었을 때 그 절반쯤에서 그는 입술을 뗐다. 반점이 있는 자리였다. 감았던 눈을 떴다.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온 빛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자위도 쓰라렸다. 천장 벽지의 사선무늬가 눈앞까지 떨어져 나왔다가 돌아가 원래 자리에 박혔다. 그가 말했다. 여기, 당신 몸에 뭐가 났어. 알고 있어? 그리고 곧장 내 안으로 들어왔다.
5월 둘째 주
신호등을 건너 벚나무가 심어진 공원으로 접어들었다. 벚나무는 동서로 길쭉한 공원을 가로지르며 백여 미터를 마주하고 늘어서 있다. 가지런한 모양새로 동과 서를 십 일자로 그으며 넓적하기 만한 공원의 단조로움을 깼다. 오전이지만 내리쬐는 볕이 상당했다. 지난 달 꽃을 먼저 틔어 보낸 벚나무는 이어 새순을 내밀었고 그렇게 자라난 잎이 대부분의 볕을 가려주었다. 벚나무 길은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끝이 났다. 왼편으로는 금융가가 시작되고 오른편은 녹지가 그런대로 잘 된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다. 나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구립 도서관과 역시 빨간 벽돌로 세워진 성당 사이를 지나자 아트 앤 마인드. 줄기가 한 아름 정도 되는 느티나무 너머로 치료센터 간판이 보였다.
목요일이다. 2시에 있을 단 한차례 만남, 치료센터에 나오는 5일 중 가장 한가한 날이면서 가장 힘든 날이기도 했다. 가슴 저 편에서 쿵쿵쿵, 하고 큰 울림이 전해져왔다.
바빴어요. 아버지도 바빴고 저도 바빴거든요. 저라도 죽고 싶었을 거예요. 5회기 때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하던 그녀가 넌지시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애매모호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겠냐고 나는 되물었다. 그럼 객관적인 진술이 필요한 건가요? 이를테면 이런 거요. 아버지는 일 욕심이 많았어요. 완벽하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셨죠. 게다가 여자 욕심도 많아서 당시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더 있었어요. 저는 왜 바빴을까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학원에 과외에 안 바쁠 수가 있나요. 대학은 정말 좋더군요. 시간도 많고…… 그런데 저는 바빴어요, 제 뱃속에 덜컥 애가 생겼지 뭐예요.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목요일 아침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선생님, 보셨어요? 벌써 꽃망울을 터트렸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계바늘이 정확히 두시를 가리켰다. 10회기를 만나는 동안 그녀는 단 한번도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처럼 먼저 말을 건넨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며 흥분하던 5회기 때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면제를 얼마나 먹었는지 아세요? 저도 몰라요. 의사도 모른다고 했어요, 다 녹아버려서. 수면제를 먹어도 위세척 하면 다 산다면서요. 몇 백 알을 먹어도 살 수 있는 거래요.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의 흥분이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9년 전 자살했던 어머니가 되살아온 듯했다.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크게 당황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건네고 있는 말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갸웃한 표정을 봤는지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장미말예요. 요 앞 장미덩굴. 이래도 모르겠냐고 그녀의 얼굴이 묻고 있다. 장미…… 장미라니, 요 앞에 장미가 있었던가. 생각은 그랬지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벌써 망울이 졌나요? 실망한 기색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아니, 아니요. 망울이 진 게 아니라 망울을 터트렸다고요. 그러나 잠깐이었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심각한 우울증에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맞나 싶게 해맑은 미소, 이제야 그녀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것이 믿겨졌다. 그녀는 그 표정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쭉 지켜봤어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땐 가지만 앙상했는데……. 지난주에는 여기저기 망울이 돋아 있는 거예요. 제가 일주일 내내 얼마나 설레었게요. 꽃망울이 터졌을까. 꽃잎은 붉은색일까 분홍색일까. 아, 정말이지 목요일 이 시간만 기다렸다고요. 그녀의 그림만 볼 줄 알았지 장미에 새순이 돋는지, 꽃망울을 터트렸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그녀가 장미덩굴에 그토록 관심이 있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치료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마당에 있는 장미덩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그녀가 경험한 정서를 동일한 느낌으로 공감해야하는 치료사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느끼고 이해한 뒤 내 느낌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저도 궁금해요. 꽃 색깔이 어떻든가요? 선생님도 궁금하세요? 저만 궁금해 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장미덩굴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살며시 비틀어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그깟 장미 색깔이 궁금해서 오늘을 기다렸던 것이 아니에요. 붉은 색이면 어떻고 분홍색이면 어때요. 그래봤자 다 장미색인 걸. 꽃망울을 터트리고 나온 장미꽃. 저는 그 장미꽃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보람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봐요.
그녀의 상태를 알기 위한 진단기법이 지난주로 끝이 나고 오늘은 본격적인 미술치료가 시작되는 날이다. 우리는 목요일 두시에 한 시간 반 동안 만남을 가졌다. 초기 단계에서는 대부분이 그리하듯 그녀도 치료 자체에 굉장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탐색했다. 나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 어디까지를 받아줄 수 있겠는지 시험하고는 했다. 그것은 현재의 감정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거나 요청한 것과 무관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드러났다.
치료사는 내담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되 앞지르는 것은 금물이다. 상대가 치료사와 온전한 관계가 형성됐다고 여길 때까지, 이쯤 되면 내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한다. 독특한 관계인 만큼 치료사를 온전히 신뢰하기도 내담자에게는 어려운 일이고 또 내담자에게서 신뢰를 끌어내기도 치료사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선행돼야 하는 것이므로 다소 시간이 가더라도 묵묵히 기다려야한다. 기다림 속에 연애 초기 때처럼 서로를 향한 탐색과 시치미 떼기가 있다. 속속들이 발견되는 새로운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야 치료를 향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다. 그러니 괜한 생채기를 내는 것보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치료사의 가장 큰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주 까지도 그녀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나를 탐색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타인을 탐색할 줄 알아야 자기탐색도 이뤄질 테니까.
기우는 햇살이 창을 뚫고 둥그런 테이블에까지 드리워졌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보고 앉는 것은 자칫 권위적일 수 있고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긋는 꼴이 되므로 그녀가 용이하게 작업할 수 있는 거리 내에 나란히 앉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도 풍경화를 그리나요? 그녀가 물었다. 진단기법의 마지막 단계인 풍경구성법은 지난 주로 끝이 났다. 오늘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 풍경화를 한 번 더 그리는 것도 괜찮겠지만 나는 그냥 정해진 시수에 맞춰가기로 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지금까지는 제가 알려줬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러면 뭘 그리나요? 그리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세요.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그릴 것인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뒤편에 있는 정리함으로 갔다. 다양한 미술도구들이 정리함 속에 칸칸이 분리되어 있다. 미술매체를 선택할 권한은 오늘부터 그녀의 몫이다. 그녀는 도화지 한 장과 크레파스를 들었다.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듯 했으나 곧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간 슬로우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던 손이 드디어 활짝 핀 장미 한 송이를 그려냈다. 몽우리에 물방울이 맺혀있어 장미는 꽤 싱그럽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림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제가 기다렸던 장미꽃이에요. 장미도 알았을까요? 물론 알았겠죠. 그랬으니 이렇게 예쁜 꽃망울을 터트렸겠죠.
5월 셋째 주
반점은 오십 원짜리 동전크기까지 자랐다가 어느 순간 크기를 멈추고 점점 갈색으로 변해갔다. 붉은 빛이 가라앉으며 허물을 남겼는데 손으로 긁으면 하얀 보푸라기처럼 잔 비듬이 일었다. 흔적만 남은 자리를 보며 내가 안정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곧 아랫배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새로운 반점들이 돋아났다. 이처럼 정체불명의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이들이 제각각 그 크기를 키워간다면…….
가렵지 않다니 다행이네. 스탠드 불빛 아래 그가 말했다. 반점이 돋은 몸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것 마냥 몹시 불편했다. 그래도 그가 먼저 불을 끈 것은 못내 서운했다. 그는 언제나 불을 끄지 않았으니까. 가만 보면 꽃 몽우리 같아. 활짝 피기 전에 피부과에 가봐. 그가 돌아누우며 말했다.
피부과는 집 앞 사거리에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의 최대 본분인 양 가슴까지 드러난 맨살을 샅샅이 살피면서 진단에 도움이 될까 싶은 근래 이전의 일까지를 물어왔다. 진지한 표정과 근엄한 목소리였지만 결국 대답이 뻔한 질문들이다. 또한 그는 여느 의사들처럼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베푼 친절 너머에는 의사가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권위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잠시 후 코에 걸린 안경을 올리며 그가 나를 봤다. 장미색 비강진이라고, 흔한 피부병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 말의 꼬리에 자신의 진단과 처방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확고함 같은 것이 서려있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막상 진단을 내리고 나서는 별도의 설명이 없다. 장미색 비강진……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 붉은 반점이 내 몸을 뚫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원인이 무엇인지. 원인은…… 없어요. 보통 바이러스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전염도 되나요? 아뇨, 그건 염려 마세요. 호흡이든 접촉이든 전염되지 않으니까요.
궁금한 것이 더 있냐고 물으면서 그는 손에 쥔 볼펜을 책상위로 툭툭 내리쳤다. 습관처럼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환자를 얼마나 재촉하고 불편하게 하는지 알고 있을까. 치료센터를 찾은 대부분은 현 의료시스템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치료에 강한 거부의사를 밝힌 사람들이다. 잠시였지만 그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등허리가 아팠다. 편의점에나 있을 법한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의사를 마주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나 걸리나요? 이게 다 없어지려면. 보통 2주는 좀 이르고, 지금 이 상태면…… 앞으로 3, 4주 정도? 제가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나요? 그런 거 없습니다. 평소대로 잘 먹고 잘 자면 됩니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대해 꼭 그만큼만 대답했다.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병명에 따른 질의응답 교본이라도 있는 것일까. 환자의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그가 나는 몹시 답답했다.
약은 아침 저녁, 연고는 샤워 후에 바르세요.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 겁니다.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목요일에 다시 나오세요. 그가 안경을 벗고 잠시 눈을 비볐다. 또 한명의 환자를 무사히 치러냈다는 안도와 피로를 동시에 느끼는 것 같다. 습관처럼 굳어져서 그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터져 나온 행동에 나는 또다시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따지듯 물었다. 왜 하필 장미색이죠? 그의 안경이 다시 코끝에 걸렸다. 반점을 자세히 보세요. 울긋불긋한 것이 꼭 장미색 같잖아요.
수증기가 욕실을 안개처럼 감쌌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가슴위로 뿌려졌다. 제아무리 많은 물을 붓는다고 해도 결코 씻어낼 수 없는 붉은 반점, 진피에서 피어올린 꽃망울이 몸속을 뚫고 올라와 표피에 가득 피어난 붉은 생채기. 의사는 별다른 원인이 없다고 했지만 몸에 나타나는 반응 중에 원인 없는 것은 없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심리적 갈등이 내 몸의 증상으로 전환되어 신체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다. 내 안에 흐트러진 무엇, 나도 모르는 균형의 어긋남에 대해 몸이 이처럼 반응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나에게, 바로 내 안에 있다. 그러므로 내 속에서 찾아야 했다.
가시가 자꾸 찔러요. 왜 하필 그녀의 말이 떠올랐을까. 오늘 그녀는 또 다른 장미꽃을 그렸다. 꽃잎은 바닥에 다 떨어져 있었지만 새파란 줄기를 뚫고 나온 가시가 무엇보다 선명한 그림이었다. 검은색 가시는 곧 찌를 태세로 밤송이처럼 촘촘했고 그 옆으로 빨간색 원이 하나 있었다. 중앙에 가시 하나가 박힌 채였다. 원은 피처럼 무엇인가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제 심장이에요. 이 피가 그때부터 지금껏 멈추지 않고 이렇게 흐르고 있어요.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것 좀 뽑아주세요 선생님. 가시는 분명히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미워서 견딜 수 없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자살한 어머니인지, 여러 가지로 바빴던 아버지인지, 바로 그녀 자신인지. 어쨌든 그것은 9년 동안 심장을 찌르며 그녀 안에 침잠해있던 가시였다. 그녀가 수많은 가시를 그토록 잘 표현해 주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가슴 한 귀퉁이에 감춰둔 채 누구 앞에도,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내 보인 적 없는 가시를 그녀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를 찔러대며 아프게 한 고통의 실체를 마주한 것이다.
안개처럼 떠돌던 수증기가 유리벽과 벽면 타일에 흘러내리며 긴 물 자국을 남겼다. 서릿발 내린 창처럼 뿌연 거울에는 붉어터진 반점대신 살색의 흐릿한 내 모습만 보일 뿐이다. 툭툭, 샤워기 끝에 남은 물이 떨어지자 갑작스런 고요와 그래서 더 크게 들리는 물방울 소리. 그 소리가 수면위로 파문이 일 듯 내 속에 웅크린 무의식을 일깨웠다. 그러자 욕실이 흔들리고 32평 아파트가 흔들리고 301동 전체가 흔들리며 세상이 푹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 틈을 비집고 내 안에서 무엇인가 솟구쳐 나오려고 했다.
당신이 경험한 감정, 뇌리를 스치는 기억들을 떠올려보세요.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는 것처럼, 소풍 가서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무엇이 보이나요? 그래요, 그럼 그것을 꼭 붙잡아요. 얘기를 해도 좋고 그림으로 그려도 좋아요. 불안과 공포로 얼룩진 사람에게 나는 이처럼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애써 부정하고 억압했다. 그것은 시한폭탄을 안주머니에 싸매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의식하지 않는다 해서 시한폭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 속에서 터질 날을 기다렸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안주머니에서 꺼내 두 눈으로 봐야했다. 그것이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의식해야만 했다. 무의식으로 억압된 감정을 의식수준으로 끌어내는 것이 곧 치료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눌러 삼켰다. 흔들리는 틈을 타고 행여 솟구칠까 두려워서 더 밑으로 내리 눌렀다. 그는 며칠째 바쁘다. 온 몸 구석구석 발라야하는데……. 의사가 샤워 후 바르라며 처방해준 연고는 연 노랑색 둥근 통 안에 담겨 있다. 욕실 전등불은 밝다. 밝은 불빛아래 그에게 등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어쩐지 서글펐다.
5월 넷 째주
치료센터 앞에 있는 느티나무 잎이 제법 푸른빛을 발했다. 만개한 장미꽃은 울타리를 이루며 치료센터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장미색, 그녀의 말처럼 빨갛든지 노랗든지 다 장미색일 테지만 장미덩굴의 장미색깔은 핏빛처럼 붉다. 꽃망울이 터진 것과 아직 망울진 것이 한데 어울려 연초록 잎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뿌리에서 끌어올린 양분이 줄기를 지나 꽃 몽우리까지 다다르고 얼마간의 뒤척임 끝에 터져 나온 선혈 같은 꽃잎들이 치료센터 마당을 휩싸고 돌았다. 그러고 보니 꽃망울이 터졌을 때와 내 몸에 붉은 반점이 돋은 시기가 같다. 동일한 시기에 망울이 져서 하나는 앞마당에, 하나는 내 몸뚱이에 피어났다. 같은 장미색인데도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내 몸을 휩싸고 도는 장미색은 아늑했던 내 속을 갈기갈기 파헤쳐 놓은 것만 같다. 물기 머금은 꽃잎이 싱그러워서 내 몸에 핀 붉은 반점이 더욱 처량하다.
오늘로 세 번째 방문이다. 좀 어때요? 접수를 하던 간호사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 겸 물었다. 아주 심각해요. 대답이 아니어도 내가 얼마만큼 심각한 지 일그러진 내 표정이 잘 말해주었다. 첫 방문 때만도 배와 가슴에만 박혀있던 반점이 하루가 다르게 위 아래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이제 내 몸은 타원형으로 넓게 퍼진 반점들이 한데 얽혀 붉은 색 페인트를 서툴게 뿌려놓은 데다 화상 입은 환자의 일그러진 몸뚱이를 보는 것만 같다. 얼굴과 종아리,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를 제외하고는 죄다 반점이다.
제때 약 먹고 연고도 꼼꼼히 발랐는데 왜 이렇게 차도가 없나요? 나는 의사에게 거짓말을 했다. 약은 제때 먹었지만 연고를 꼼꼼히 바른 것은 아니었다. 등을 내미는 순간 그의 눈가에 스며든 망설임과 주저하는 두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돌연 부엌으로 가서 일회용 비닐장갑을 찾아 두 손에 끼었다. 손에 물감이 배었다는 이유라지만 그 순간 얇은 비닐장갑의 폭이 두꺼워지며 그가 아주 먼데 있는 사람처럼 느껴짐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손과 내 등 사이에 있는 비닐 막은 얇고 투명했지만 한없이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연고를 펴 바르는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비닐장갑을 생각하면 촉각은 금세 무뎌졌다. 그것이 손끝의 체온을 가로막았다. 내 몸에 전해지는 체온을 내 의식이 거부했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그의 행동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나였다. 내 속의 문제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일종의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날 욕실에서의 흔들림을 겪은 후로 더욱 그랬다.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약 먹고 연고 바르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봅시다. 무턱대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야 한다니 맥이 풀렸다. 용수철이라도 달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인 것을. 저…… 시간을 단축시킬 방법은 없을까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신에 걸쳐 생기는 거라 조금 놀라신 것 같은데 제가 의사로서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어쩌면 피부병 축에도 못 끼는 경미한 발진입니다. 아토피처럼 죽을 만큼 가려운 것도 아니고 치료가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또 재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그래서 더욱 객관적이고 사무적이다. 그는 그 목소리로 질의응답 교본을 읽어 내리고 있다. 피부병 축에도 못 끼는 것이라니…… 선생님, 붉어터진 반점을 매일 마주하는 것이 제겐 너무 괴로운 일이에요. 네,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신경 쓰면 치료기간만 길어져요. 약을 좀 바꿔보겠습니다, 조금 독하게. 혹 졸릴 수 있는데 대개 나타나는 반응이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염……되는 거 아니죠. 그렇죠?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전염되지 않습니다.
말처럼 약은 정말 독했다. 독한 만큼 효과가 나타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아침과 함께 먹으면 오전 내내 몽롱한 상태로 내담자들을 만나야 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쏟아지는 잠이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내담자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 수는 없었다. 치료사는 완성해놓은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을 봐야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해 무엇을 먼저 그리고 또 색칠하는지, 필력은 어떠한지, 어느 부분에서 머뭇거리는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있으면 눈앞이 뱅뱅거리며 눈꺼풀이 내려왔다. 다른 치료사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진한 블랙커피를 시간마다 마셨다.
저녁에도 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샤워 후 처방받은 연고를 바르고 잠자리에 누우면 금세 잠이 들었다. 그의 삽화 작업은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더욱 분주해졌다. 태평한 시간을 보내던 그도 주문이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빠지고는 했다. 그러나 이번 작업 때처럼 그를 바쁘게 한 적은 없었다. 오랜만에 주문받은 수작업이라서 일까. 그는 언제나 컴퓨터 작업보다 수작업이 더 좋다고 말했다.
얼마나 잤을까. 코끝으로 알싸한 향이 무디게 전해졌다. 약에 취해 몽롱했지만 사지의 감각은 더딘 속도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였다. 잠에 취해 반쯤 죽어있던 감각을 그가 하나하나 일깨우고 있었다. 그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이완됐던 세포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러면서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바짝 조여 오는 긴장과 또 한편으로는 나른함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눈을 떴지만 캄캄한 어둠이었다. 천장 벽지의 사선무늬 따위가 보일 리 없다. 창문너머로 옅은 빛이 새어 들어왔지만 눈자위가 쓰라리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내 몸이 약으로 몽롱하게 취해있던 탓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표출했던 방어기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무의식의 한 귀퉁이에서는 나를 다그쳤다. 나로 하여 그에게 말하게 했다. 당신, 왜 불을 켜지 않는 거야. 왜 보지 않는 거야. 내 몸을 뚫고 나온 붉은 반점. 내 몸이 토해낸 선혈이, 각혈덩어리가, 피로 낭자한 내 몸뚱이가 보이지 않아. 당신이 닦아줘야 하지 않아? 그에게 이같이 쏟아내고 나면 그날 욕실에서의 흔들림도 멈추고 내가 감춰놓았던 그러나 이제 곧 솟구치려하는 그것도 다시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뱉지 못했다. 목구멍으로 회오리치며 올라오는 말들을, 내가 눌러 삼킨 말의 밑동에, 그 기저에 오롯이 똬리를 틀고 있던 의식이 끝내 눌러 삼켰다.
그녀가 저항했다. 고통의 실체를 직면하고 나면 일시적인 퇴보가 오기도 했다. 지난주에 검은 가시를 직면하고 난 뒤여서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왜 꼭 이처럼 들어맞아야 하는지에 대해 나는 조금 화가 났다. 그녀는 검은 가시를 애써 모른 척하며 시치미 뗐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덮어두려고 했다. 오랜 시간 그녀 속에 침잠해 있던 가시, 그것을 수면 위로 떠올릴 수 있었다면 마주볼 수도 있어야 했다. 두 눈으로 직면하기보다 뒷걸음질쳐 도망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의 실체 앞에 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제 그녀는 제 속에서 툭 하고 터져 나온 가시를 향해 두 눈을 모아야 했다. 그것이 9년 동안 자신의 내면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기생해왔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안으면 안을수록 살 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의 실체임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이쯤이면……. 치료기간이 벌써 세 달째 접어들고 있다. 달이 세 번이나 바뀌도록 그녀는 여태 무얼 했을까. 가시를 외면하고 주변만 맴돌기를 언제까지 할 작정일까. 힘들게 꺼내놓고도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느리고 느린 그녀의 속도에 맞춰가야 하는지. 내 감정을 억누르고 억제하며 언제까지 저항하는 그녀를 수용해야만 하는지.
선생님, 저를 이해하시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던 말들이 왈칵 솟구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아니. 이해 못하겠어. 검은 가시를 봤잖아. 네 손으로 네가 직접 그려냈잖아. 9년 동안 너를 찌르며 아프게 한 가시잖아. 왜 못 본 척 하는 거야. 왜 다시 품으려는 거야. 왜! 그러나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왜 피부과를 찾았던 것일까. 무의식이 신체화한 몸의 반점은 내 속의 문제를 직면하고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해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해진 날에 맞춰 그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나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진료 방법을 탓하고 비난하고 분석했다. 내담자들이 내게 그리하듯이 나도 그를 탐색했고 또 그에게 저항했다. 경미한 발진이라는 진단을 의심했고 처방을 따르면서 시간이 가기를 맘 편히 기다리지도 못했다. 이런 내가 더딘 속도로 진전과 퇴보를 반복하는 그녀를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치료사라는 허울로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있다.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당신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줄곧 미술치료에 관한 이론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정작 내게는 들어맞지도 않는 이론을 그녀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가시를 직면하고 인정하기까지는 수 개월 아니 수 년의 시간도 모자랄 테니. 그녀가 가시를 안고 걸어온 시간의 배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생님, 저를 이해하시겠어요? 그녀가 다시 묻는다. 이제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 못 해. 내가 너를 어떻게 이해해. 단 한 달 피어오른 반점으로도 세상이 푹 꺼져버릴 것 같았던 내가, 선혈이 낭자한 것 같은 이 붉은 몸뚱이도 가누질 못해 버걱거리던 내가, 내 몸이 이럴 때 하필이면 바빠진 그이도, 유독 어둠 속에서만 느껴지던 그의 손길도 이해 못하는 내가 너를 어떻게 이해해. 그의 손은 왜 매번 내가 샤워를 끝낼 때에 맞춰 더러워지는지, 물로 한번 행구면 되는 것을 왜 꼭 비닐장갑을 찾아 끼는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배려일지도,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알면서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너를 어떻게 이해해. 저벅저벅 피 흘리며 걸어온 9년의 시간을 돌이켜서 네가 쏟아낸 핏물을 똑똑히 보라고 말하는 내게, 핏물 위를 되짚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내게, 이처럼 무섭고 잔인한 내게 이해를 구하다니, 그 신뢰의 바탕은 뭐야, 그 고통은 아픔은, 이런 내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네 처지의 쓸쓸함은.
갑자기 무엇인가 후비고 들어온 것처럼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욕실에서의 흔들림이 내 속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이제 정말 솟구치려고 했다. 그녀가 한 마디만 더 내뱉는다면 왈칵하고 쏟아져 나와 내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낼 것만 같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시작된 울렁임이 심장을 때리며 요동을 쳤다. 숨쉬기조차 힘든 답답함이 전해졌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불끈 쥐었던 손가락 사이사이가 땀으로 흥건했다. 내담자 앞에서 이런 식의 긴장은 처음이다. 이제 그만 그녀와 헤어지고 싶다. 오늘따라 그녀가 내뱉는 말을 견디기가 힘들다. 애써 침묵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몇 주째 그 여자 집에 있었어요. 젊은 여자였어요. 아버지보다 스무 살도 더 어린, 저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어쩌지 못했어요. 고작 스무 살이었거든요. 수술 받은 그날, 그 애 집으로 가는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 정말 죽고 싶었다면 수면제를 먹지 않았을 테죠? 한 알 한 알, 알갱이들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혹시 제 이름을 불렀을까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평소에도 자주 부르고는 했으니까요. 엄마는 기다렸던 거예요. 수면제가 다 녹기 전에 누구라도 돌아오기를. 그깟 장미도…… 내가 기다렸던 장미도 저렇게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엄마는 기다리는 보람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선생님, 제 심장에 가시를 박은 것은 엄마가 아니에요. 가시가 저를 찌른 것이 아니라 제가 이 가시로 엄마를 죽이고 아이를 죽였어요. 그만! 그만!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묵직한 것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몽롱했던 머릿속이 힘차게 출렁이며 긴 파장이 일었다. 그녀에게서 가까스로 억눌렀던 내 모습을 보았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그 틈을 비집고 솟구쳐 나오려던 시한폭탄을 보았다. 그녀를 만나는 목요일이면 왜 꼭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내 속의 무의식과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5회기 때부터였을 것이다. 시기가 언제냐일 뿐 그녀를 통해 끝내 내 속을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그녀가 철저히 피해자이기를 은연중에 나는 바라고 있었다. 고통의 실체는 외부에서 날아온 가시이며 그것이 수 년의 시간동안 자신을 피 흘리게 했음을 깨닫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가해자가 되려고 한다. 어머니의 유산이 아니라 제 속에서 발아시킨 가시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발 그 전에 멈추기를, 죄책감까지 건드리지 않기를 내가 더욱 원하고 있었음을 그녀가 눈치챘을까. 치료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이론서나 낭독하는 내 모습이 그동안 얼마나 우스웠을까.
죽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 그 양면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던 한 여자가 5년 전 이맘때 몸소 죽음을 긍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내가 치료사라는 이름으로 내담자를 만나기는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이 세상은 살아야하는 이유가 죽어야 하는 이유보다 많았다. 내가 이처럼 죽음을 부정하는 동안 여자는 죽음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과 같은 현실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듣지 못했으므로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현실을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에 더욱 절망한 그 여자가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내가 여자를 철저하게 마주보고 있었으며 우리 사이에는 투명하지만 결코 얇다고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막이 가로놓여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곧 여자의 죽음을 원망으로 받아들였다. 여자의 죽음이 치료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내게 커다란 혼란과 상처를 주었으므로 그만한 감정의 발산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수년의 시간동안 밤새워 체득한 이론을 흔들리게 했던 최초의 여자였으므로.
그 여자가 나 아닌 다른 치료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했다. 나도 한 여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욕실에서의 흔들림 뒤에 그 틈을 비집고 솟구쳐 나오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확실해졌다. 5년 동안 애써 잠재워놓았던 것을 오늘 그녀가 뒤흔들어 깨우고 말았다.
돌연 눈앞의 그녀가 흐릿해지고 온갖 사물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창으로 드리운 햇살이 아직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지만 눈을 돌려보니 창문도 흐릿해졌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는 것일까. 무엇인가 눈앞에서 계속 흘러내렸다. 아니 무너져 내렸다. 견고한 성처럼 나를 무장시켜주었던 이론적 배경, 미술치료에 관한 질의응답 교본들이었다.
6월 첫째 주
독한 약은 효과가 있었다. 선혈 같았던 반점의 색깔들이 점차 흐릿해지며 허물이 벗겨졌다. 연고를 바르지 않으면 각질처럼 잔 비듬이 일어났다. 의왼걸요. 보통 두 달은 가는데, 1년 가는 경우도 봤어요. 여하튼 몸이 잘 견뎌낸 것 같습니다. 의사는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호전된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약은 처음 때와 같이 약해졌고 별도로 보습제를 처방해줬다. 샤워 후에는 반드시 보습제를 발라야했다. 그러지 않으면 온 몸이 지독하게 당겼고 비듬처럼 허물이 이는 통에 긴 시간 목욕하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장미덩굴은 하루에도 수많은 망울을 터트리고 또 수많은 꽃잎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은 내 몸의 반점과 같은 시기에 꽃망울을 터트렸던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박혀있을 것만 같았던 반점도 점차 사그라지고 찬란하게 꽃피웠던 장미꽃도 점점 시들어갔다. 한 달 붉게 달아올랐다 스스럼없이 지고 있었다.
긴 샤워를 마쳤다. 몸의 붉은 기운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흔적만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는 세 달에 걸쳐 작업한 동시집 삽화를 마무리하고 얼마간 한가한 시간을 보내겠다며 좋아했다. 오늘 그녀와 14회기 째 만남을 가졌다.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파왔다. 내 속에서 또 다른 장미색이 터져 나오려나 보다.
첫댓글 축하합니다~!! ♬ ^_^
안순언니! 축하해. 하자 하자~~!
축하합니다.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문사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다 읽고 나니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내려다보고 있네요. 축하드립니다.
안순안순안순 축하해~~~ ㅋㅋ 멋져 ^________^
한 턱 쏴요 -ㅋ
안슌안슌,, 축하 축하해,, ㅋㅋ
안순아, 내 꿈에 너 뭔가에 됐다고 했는데 맞지?ㅋㅋㅋ
누나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