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5일 전 복음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복음에 대한 해설과 묵상을 가장 보편적인 내용인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했다고 한다면 그분들에게 오늘 복음을 가지고 반박을 누군가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분들의 설명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한문 시간이 생각납니다. 지금 유일하게 생각나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우와 모순이라는 단어의 고사 배경이 한문 책에 그 내용이 있었습니다. 마치 5일 전과 복음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과 비교하면 창과 방패와 같은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제가 양상을 띄고 있다고 했지 모순이라고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내용을 어떤 신부님께 반박하기 위해서 드린 질문이 아니라 실제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저는 단순히 의문이 들어 순수한 뜻에서 질문을 드린 것인데 마땅히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합니다. 결코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보기엔 어려울 것 없는데 막상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소에 이런 내용을 묵상을 자주 했다면 전혀 당황스럽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질문자가 요구하는 물음에 대한 시원한 답변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배제하고도 말입니다. 제가 판단을 했을 때 아마 이런 걸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시는 수도자가 아니거나 신학생, 신부님 같은 분 아니면 평신도가 이런 걸 묵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골치 아픈 것 같고 또 굳이 이런 걸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걸 전제하고서 한번 살펴보게 되면 좀 더 부드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내용을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한문 책에도 나온 것이지만 모순이라는 뜻은 글도 글이지만 그 고사의 배경을 생각하게 되면 모순이라는 뜻 그 자체의 말보다 오늘 복음이 최후의 심판과 비교를 해 묵상하게 된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천국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가 아니고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뜻인데 보통 보면 개신교 성경은 결코보다는 결단코를 선호합니다. 별 중요한 내용은 아닌데 사실 이것도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결코보다는 좀 더 강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때 이 의로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만 놓고 봤을 때 언어적인 해석을 할 때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하느님 말씀을 논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 말은 어떤 말일까요? 사실 내용과 내용 사이에 빈 공간은 우리가 묵상을 통해서 그 의미를 채워넣을 때만 전체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개의 복음을 보면 이런 게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게 어떤 부분에서는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스물 살때부터 군생활 제외하고 지금까지 개신교 성경 포함해 약 30년 동안 본 걸 바탕으로 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30년 봐도 실력은 형편 없습니다. 저는 오늘은 이렇게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손익분기라는 말을 약 25년 전에 서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아는 형이 자주 사용한 단어였는데 회계학에서 보면 이걸 계산하는 방식이 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장사를 했을 때 만약 물건의 개수를 가지고 계산을 할 수도 있고 또 돈 총액을 가지고 계산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집이라고 하면 짜장면을 몇 그릇 팔아야 손익분기점이 되는가 아니면 얼마의 매출이 되어야 손익분기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묵상한 게 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국에 공인회계사가 있다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헌법재판소에 헌법재판연구관들처럼 말입니다. 헌법재판연구관들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생각은 어떤 단편적인 내용에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을 집중 연구를 해서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천국에 공인회계사가 있다면 생각보다는 골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산을 하긴 하지만 그 처리가 실제는 이미 이 지상에서 계속 정산이 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께서도 하실 수도 있고 우리의 수호천사가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명책에 사실이 기록되면서 동시에 정산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정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그냥 추측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그냥 보면 한 순간 다 정산이 되겠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도 심판하실 때는 일정한 근거 자료는 보여주실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야 아무런 토를 달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의로움도 마치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는 천국문 앞에서 우리의 삶을 총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학이나 회계학에서 말하는 손익분기 결산을 해서 그 분기점을 넘어 천국에 입성할 것 같습니다. 손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잘못한 것 같은 게 될 것입니다. 익은 선행과 자선, 기도 같은 게 될 것입니다. 최종 회계처리를 하게 됐을 때 최종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손익분기점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는 ‘똔또이’라는 속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 분기점을 넘어서야 아마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말씀처럼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의로움은 한 순간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회계학에서 보면 재무제표는 한 시점의 결과를 알고 싶을 때만 사용하는 지표입니다. 하지만 1년 간의 재무 상태를 알고 싶을 땐 다른 자료를 이용합니다. 의로움이라는 지표도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유동적으로 계속 변할 것입니다.
신앙과 믿음의 길을 계속 잘 유지하면 그 의로움은 높아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가 변동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또한 이럴 것입니다. 이렇다고 하더라도 물론 조금의 변동은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곡선은 상향곡선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희망적일 것입니다. 하향곡선을 그린다면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 곡선이 상향곡선에 있는 사람은 지금 비록 힘든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지는 하루하루 충실히 잘 살았을 때 돌아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만 잘 보낸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것입니다. 사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순 이 시기만 회개하고 성찰하는 그런 유일한 시간처럼 생각하는 건 금물일 것입니다.
첫댓글 저는 의도적으로 오늘 복음의 결과적인 결론 언급을 일부러 피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이 그걸 묵상하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시면 의미 있는 묵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천국문 입성의 손익분기점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한번 스스로 진단을 해보시면 아주 유익한 사순을 보낼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