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싶으십니까?
행복하게 사는데,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가능하시겠습니까?
행복이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방해하는 것을 통칭해서 지칭하여 유혹이라
고 합니다.
유혹이라고 하면 선뜻 선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유혹이란 우리의 본질적인 본연
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혹은 각 사람의 가장 약한 부
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각자마다 다른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유혹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만 더’라는 유
혹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유혹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 ‘조금만 더’라는 유혹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내용으로 보아서 그는 아마도 아버지가 돌
아가셨는데, 형이 유산을 독차지한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유산 분배가 불공평하
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전혀 엉뚱하게 어떤 부자가 자신만을 위해서
재산을 비축했지만, 그것을 사용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은 조금 더 갖기를 원한 청년이고, 이야기 속의 부자는 이
미 충분히 가졌지만, 이제 곧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마지막은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문득 이렇게 던져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련되어서도 ‘조금만 더’라는 유혹을 받고 있는지, 조금만
더 성서를 읽고 싶고, 조금만 더 성체 조배를 하고 싶고, 조금만 더 기도를 하
고 싶고, 조금만 더 선행을 하고 싶으십니까?
또, 하느님께 인색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헌금이나 교무금을 적게 내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것
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실 아이러니 하지만, 오늘의 성서 내용을 가지고 썩어 없어질 재물을 쌓지 말
고 영원히 좀 먹지 않는 하늘 나라에 재물을 쌓으라고 하면서, 교회에 헌금을 강
요하는 사람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 못 보았습니다.
도대체 하느님께 인색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일만이 아니
라 하느님의 일에 신경을 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저히 견디다 못해서 당
신이 직접 내려오셔서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헬렌 켈러라는 유명한 사람을 아시죠, 저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물입니다. 그
런데, 설리반 선생님을 통해서 장애를 극복한 셀렌켈러 여사가 성장한 후에 무엇
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철저한 사회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
서는 더 이상의 조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처음에
장애자들을 위한 삶을 살다가, 장애의 악순환이 빈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달
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빌게이츠 입니다. 전세계에서 재산이 가
장 많은 사람중의 한 명인데, 그가 선진국 수준의 보건 혜택을 세계 어디서나 누
릴 수 있도록 재단을 설립하였는데, 이 재단의 기금이 250억불, 한국돈으로 20조
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사실 그는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개인 차원의 사회공헌 활동에 큰 관심을 두
지 않았습니다. 시민 운동가 출신인 아버지의 권유도 “사업을 더 성공시키는
게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라며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생각
을 바꾸게 된 것은 1998년 어느 날 저녁에 읽은 한 신문기사 때문이었습니다. 기
사의 내용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90%가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으
나 이들 나라가 갖추고 있는 보건 자원은 10%를 넘지 않고, 열악한 보건 환경이
이들 나라의 사회·경제 발전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에게 불편이 오거나 불이익이 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
는 청년처럼 분노하고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
웃이나 주변 사람들, 혹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분노하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
님께 인색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 스스로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
을, 즉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당신 아들의 삶을 통해서 우
리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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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다해: 깨어 기다리는 삶
오늘의 주제는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하느님께
서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준비하시고 실현시키시며 마침내 그리스
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오
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서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등불을 들
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독서: 지혜 18,6-9: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깨달았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구
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수백 년 간 인내로
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으로
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미
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해, 역사를 통해 완성
돼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
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직 도래하여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복음: 루가 12,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 역시 지난 주일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이 세상
의 재물에다 자신의 보증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32-34절). 이렇게 재물과 재
화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내용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집주인`을 깨어 기
다린다는 내용(36절)과 연결되고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
라에 들어가기 위해 현실적으로든 미래에 있어서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상의 재물로부터의 자유보다도 "사람의 아들
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40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 즉 어떤 순간에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
상 `자유롭고`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
라"(35-36절).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여행이나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태도
의 표현이다. 즉 움직이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등불을 켜놓는 것`은 한 밤
중에 갑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 필요하다. 종들의 이러한 태도는 겁이 난다든지,
염려스러워서 취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그 종들
의 시중을 들어주리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기쁨에 차서 취하는 태도이다. "주인
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예수님은
특히 수난사에서 `야훼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
와 그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
에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
라"(40절)는 이 권고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 빛에 기
쁘게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충실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
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
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
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
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
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
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1-48절).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관리인처럼 권위를 위임받
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진정한 `주인`에 대한 기다림이 이미 사라지
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항상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
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
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이 그들을 위
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 자체가 지배와 권세의 도구가 되면 안되기 때
문이다.
제2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의 신앙
2독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
함과 선조들의 믿음은 그 `약속 받은 땅`이 장차 얻게 될 천상 고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항상 알아모실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하느
님 나라를 이루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끊
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항구한 신앙으
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과 같이 우리의 삶을 이루
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자.
첫댓글 준비하는 삶이란 끝날에 걱정 하지 않고 지금 현재를 주님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