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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옥동서원 구수천 영동반야사,
월류봉, 와인터널을 다녀와서!
천안휴게소 (天安休憩所, Cheonan Service area)
는 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신풍리에 위치한 경부
고속도로의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부산 방향으로 존재한다. 소재지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성남로 793-40 위치하고 있다. 시설
수면실 샤워실 세탁실 쉼터 이발소 수유실 약국 내고장특산물 브랜드
매장 : 앤젤리너스, 탐앤 등
옥동서원(玉洞書院)
1984년 12월 19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 1518년
(중종 13) 황맹헌(黃孟獻), 황희(黃喜), 황효헌(黃孝獻)의 학문과 덕
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580년(선조 13) 백화서원으로 이름
짓고 영당(影堂)을 지어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다가 1714년
(숙종 40) 추가로 전식(全湜)을 배향하고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1783년(정조 7) 황뉴(黃紐)가 배향되었으며 1789년
‘옥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옥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조치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1987년 청월루(淸樓),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덕사, 학문
강론이나 유림의 모임과 행사장소인 강당, 향사 때 제수를 장만해두
는 전사청(典祀廳),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雇直)과 화직(火直),
묘직(廟直)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누각인 팔각정 등이
있다. 황희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고 《갈천문집(葛川文集)》 등의 귀중
한 필사본과 목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
(上丁:첫째번 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출처:(두산백과)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다 가신 분들의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6월. '난 나라를
위해 뭘 하고 있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한 나라사랑
하는 마음으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다.
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은 충북 영동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계 백화산
(933m)을 사이에 두고 금강과 낙동강이 흐르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고려 시대 몽골침입 당시에는 몽골군과 격한 전투가 벌어졌고, 임진왜란 때
에는 의병들의 주 활동지였던 천년 옛길로 구수천·중모천이라고도 부르는
석천에 흐르는 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
저승골
임천석대 맞은 편의 골짜기로 고려때(1254년)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침입하자, 황령사 승홍지가 지휘 하는 상주의 관민은 저승골로 이들을 유인,
섬멸하여 몽고군이 대패한 승전을 이룬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길을 "백화산 호국의 길"로 부르기도 합니다.
백화산(白華山)
해발 933m의 백화산(한성봉)은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위치
하고 있는 산으로 바위가 많고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산이다. 이곳에선 백화산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지도상에
는 한성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성봉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 자동차
로 20분 정도 북쪽으로 가면 반야사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르고
있으나, 낙타등과 같은 능선을 하고 있는 경북 상주시에서 오르는 사람도
있다. 경북쪽 산행들 머리에는 조선 숙종때의 옥동서원과 백옥정, 보현사
등이 있으며, 충북쪽 반야사 입구에서 오르는 코스는 신라 성덕왕때 창건
된 고찰 반야사가 등산객을 반긴다. 산 위치는 영동군과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으며 수원이 풍부하고 기암절벽이 많은 산으로 반야사쪽 산중턱
에는 "저승골" 이라 불리는 협곡이 숨어 있어 모험가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현재 호국의 길을 조성하여 둘레길을 정비하였으며,
몽고 항쟁 기념비 조성하였으며, 작은 계곡이나 물이
맑고 풍부하여 조용한 피서지로 좋은 곳이다.
산행은 상주시 쪽인 수봉리에서 시작하여 영동군 황간면으로 내려오는 코스
와, 영동군 쪽인 황간산림욕장에서 시작하는 코스가 있다. 수봉리에서 출발
하여 논길을 따라가면 신덕마을에 이르는데, 마을 건너편에 옥동서원이 있다.
이곳에서 개울을 건너면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 길로 100m쯤 오르면
보현사에 닿는다. 보현사는 용문암 터에 있었던 절인데,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보현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오르면 용추폭포
가 나오며, 조금 가파른 등산로를 1시간 정도 오르면 보문사 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15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은 922m봉을 거쳐
정상에 도착하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금돌산성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이
다. 보문사 터에서 금돌산성(사적 30)까지는 20분 정도 오른다. 금돌산성
을 지나 주능선을 따라 오르면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서는 속리산·
민주지산·덕유산이 보인다.
하산은 등산로의 반대편인 영동군 쪽으로 내려간다. 석천골에 이르는 길
주변에는 벚나무가 많다. 석천골에는 성덕왕 때 창건한 반야사가 있다.
이 코스는 6시간 정도 소요된다. 황간면 우매리에 있는 황간산림욕장에서
출발하면 2시간 이내에 정상에 도차할 수 있는 짧은 코스가 있다. 교통편
은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여 황간에 도착하고, 황간에서 수봉리까지는 시외
버스를 이용한다. 상주시에서는 모동행 버스를 이용한다.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에서 황간I.C를 빠져 나와 상주시 모동 방면으로 가다
가 우매리에서 반야사로 진입하거나 수봉재를 넘어 수봉리에 도착하면 된다.
주변에는 한천팔경, 물한계곡, 민주지산 등 명소가 많다.
숙박 시설은 영동군과 상주 시내에 많다
출처:(두산백과)
반야사(般若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 의상(義湘)의 십대제자 중 한 명인 상원(相源)이 창건
하였다. 일설에는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元曉)가 창건
했다고도 한다. 예로부터 이 일대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
져 절 이름을 반야사라 하였다. 반야(般若)는 바로 문수보살을 상징
한다. 그러나 이 절이 들어선 지장산이 백화산(白華山)이라고도 불리
므로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설도 있다. 1352년(고려 충숙왕 2)에
중건하고, 1464년(조선 세조 10) 세조(世祖)의 허락을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9일 동안 법회에
참석한 뒤 신미(信眉) 등의 청으로 이 절에 들러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했다고 한다.
세조가 이 절에 들렀을 때의 설화가 전한다.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
하자 문수동자가 나타나더니, 세조를 절 뒤쪽에 있는 망경대(望景臺)
영천으로 인도한 후 목욕을 하라고 권하였다. 세조가 목욕을 시작
하자, 문수동자는 왕의 불심이 지극하므로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
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사라졌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고, 1993년 대웅
전을 중창한 뒤 요사를 세워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백화루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1993년까지 대웅전으로
쓰이된 건물로 1975년 중수한 바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아미타
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1993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와 신중탱화·감로탱화가 있다.
유물로는 요사에 있는 신중탱화와 삼층석탑이 유명하다. 신중탱화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본래 보국사(輔國寺)에 있던 것으로 1890년
(고종 27) 응상(應祥)이 그렸다고 한다. 이 탱화를 누가 언제 이
사찰로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다.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세워진
것으로, 1950년 성학(性學)이 절 동쪽 500m 부근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세웠다. 전체 높이 315cm이고 조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절 남쪽 100m 쯤에는 부도 2기
가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탑신 위에 원반 모양의 옥개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 석재를 올린 것으로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이밖에
왕이 죽었을 때 그 영위를 봉안하는 영위판(靈位板)과
문수동자가 탔다는 목각사자 등이 전한다
월류봉 [月留峯]
높이는 400.7m이다. 깎아지른 절벽산인 월류봉 아래로 물 맑은
초강천(草江川) 상류가 휘감아 흘러 수려한 풍경을 이룬다.‘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의 월류봉(月留峯)이란 이름처럼 달밤
의 정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이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하였다.
한천팔경은 제1경인 월류봉을 비롯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
(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
(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화헌악은 월류봉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든 모습을 가리키고, 용연동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沼)를
말하며, 산양벽(산양암)은 월류봉의 가파른 절벽을 이르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 황간현(黃澗縣) 불우조에‘
심묘사(深妙寺)의 팔경(八景)’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 바로 한천팔경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한때 이곳에 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월류봉 아래쪽에 우암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한천정사(寒泉精舍,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와
영동 송우암 유허비(충청북도기념물 제46호)가 있다.
출처:(두산백과
포도와 와인의 고장, 충북 영동
충북 영동은 우리나라 최대의 포도 산지이다. 포도 재배 면적이 2,200
ha로 전국 포도생산량의 12.7%에 이른다. 연간 포도생산량은 3만
3,000여 톤. 송이로 따지면 1억 송이 정도라 하니 정말 어마어마한 양
이다. 더구나 와인코리아뿐 아니라 포도 재배 농가가 와이너리를 갖추고
개성 있는 와인을 만든다. 영동의 와이너리 농가 수만 2014년 기준
44곳이나 된다. 각 와이너리마다 맛도, 향도, 색도 틀릴 테니 적어도
44가지 와인이 생산되는 셈이다. 그래서 충북 영동은 전국에서 유일
하게 포도와 와인 특구로 지정되었다.
8월이면 포도가 알알이 영근다. 새콤달콤한 보랏빛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면 영동에서는 포도축제와 함께 와인의 계절이 돌아온다. 영동
에서 와인산업이 뿌리내린 것은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포도를 자체적
으로 발효, 시음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다. 그리고 지금의 와이
너리로 육성한 것은 비교적 근래인 2008년의 일로, 현재까지 영동
곳곳에 44곳의 와이너리가 들어서 44가지 독특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영동군에서 101가지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이너리를 육성
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 그럴 날이 머지않았다. 2013
년 대전와인트로피에서 세계 각지 2,635종의 와인 가운데 세계 2위
에 해당하는 실버 메달을 따고, 2015년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가
주관한 한국와인품평회에서 대상 등 5개 부문을
모두 석권한 와인도 영동 와인이다.
포도를 수확하면 와이너리에서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진다. 와인을
만드는 방법은 포도 수확과 함께 포도 세척, 줄기를 잘라주는 제경,
손으로 포도를 눌러 껍질과 과육을 분리시키는 파쇄 과정을 거친다.
잡균을 제거하고 효모가 발효 작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아황산을
첨가한 뒤 당도를 측정하고 설탕과 효모를 첨가한다. 이후 1차 발효,
여과, 2차 발효 과정을 거쳐 100일 뒤면 와인으로 거듭난다.
컨츄리와인, 도란원, 블루와인농원 등 농가형 와이너리를 직접 방문
해 시음뿐 아니라 구입도 할 수 있으니 와인을 좋아한다면 영동포도
축제와 함께 영동의 와이너리를 들러볼 일이다.
1254년(고종41)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한 차라다이(차라대, 車羅大,
Charadai)는 9월 충주에 당도해 산성을 공격했으나 충주인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를 포기하고 남하를 계속했다. 이후 여몽간의 대대적 공방
전은 상주(尙州)에서 벌어진다.“(고종41년 10월 19일) 차라다이가 상주
산성(尙州山城)을 치거늘 황령사(黃嶺寺)의 승(僧) 홍지(洪之)가 제4관
인(第四官人)을 사살하였다.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매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
차라다이의 충주산성 공격 및 남하에 대한 기록이 9월 14일자였던 데
비추어 10월 19일자의 상주산성 전투 기록은 여몽간의 공방전이 대략
20여 일 이상의 장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전투상황에 대한 다른 자료
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중에서 위의 기록은 당시 전투가 매우 치열했고,
또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승려 홍지가
속해 있었던 황령사가 자리 잡은 상주시의 북쪽 은척면 황령리는 경상도
의 초입부에 해당한다. 몽골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을 넘어 남하하자
인근 지역민들은 보다 남쪽의 험한곳에 위치한 상주산성에 입보(入保)
해 적을 맞아 싸웠다. 당시 황령사 승려 홍지는 휘하의 승도들을 중심
으로 입보(入保)한 상주민을 규합, 자체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어 차라
다이의 공격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차라다이의 지휘에도 불구
하고 제4관인(官人)이라는 몽골군의 고급지휘관이 사살됐다. 그리고
몽골군 사졸 가운데 죽은 자가 과반이라 했다. 전투는 고려의
승첩으로 종결지어졌던 것이다
당시 상주의 관리들은 관아(官衙)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병풍산성에
입보(入保)하고 승 홍지를 비롯한 인근 주민 다수는 백화산성(白華山城)
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백화산성은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
에서 방어요건이 보다 우월하다. 이를 바탕으로, 입보(入保)한 주인
(州人)들이 황령사 승 홍지의 지휘 하에 몽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
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1232년(고종19) 제2차 여몽전쟁 당시 처인
성에서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가 입보(入保)민들을 지휘해 몽골 원수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를 사살했던 사건과 상통한다. 백화
산성이 대몽항전 당시 상주민들의 입보(入保)처로 사용되었던 대표적
성곽이었던 사실은 다음의 자료가 입증한다.
“고려 때에 상주의 주리(州吏) 김조(金祚)에게 만궁(萬宮)이라는 일곱
살 난 딸이 있었는데 부모가 단병(丹兵)을 피하여 백화성으로 가다가 쫒는
군사가 가까워지자 창황하여 길가에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다. …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 출가하여
녹(祿)을 낳았고 녹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상주목 인물편)”
공민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상주 사람 김득배의 선계(先系)와
관련한 위의 기록은 상주민들이 난을 피하여 백화산성에 입보(入保)했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단병
(丹兵)의 침입이라는 것은 대몽항전기(對蒙抗戰期), 몽골군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1254년(고종41) 차라다이 몽골군에 대한 상주산성에서의 전투는 경상
도민의 유일한 항전기록이다. 당시 항전에 보다 상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록의 소략성과 연관된다. 상주산성의 승첩은 몽골군의
고급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몽골군을 궤멸시킨 큰 전투였다. 상주산성에서
의 항전은 중앙정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이 그 중요한 특징이다. 이들은 백화산의 지형을 효과적
으로 활용해 몽골군을 궤멸시키기까지에 이르렀지만 상주승첩이 지역민들의
순수한 항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자연히 그 사실적 내용이 간과되고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1254년의 상주승첩은 ‘고려의 대몽항전사’에서 1232년의 처인성 승첩과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역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
이었다는 점, 지휘자가 관리가 아닌 현지의 승려였다는 점, 전투의 결과가 매우
큰 승리로 귀착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상주산성의 승첩은
처인성 승첩과 함께 대몽항전사의 중요한 전투사례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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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혁, 대몽항쟁사 연구. 345(지도-몽고침략군에 대한 고려의 항전 1
231~1259년), 350(표-몽고의 고려침략 전쟁 개황)p 참조
[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 연구 ]
- 몽골제국의 이름은 ‘몽골’로 통일해 표기했다. 단, ‘인용문헌 내용’과 ‘참고문헌
의 제목’ 등은 원문에 충실했기 때문에 ‘몽고(蒙古)’로 표기되기도 했다.
- 몽골사람 이름은 처음 나올 때 ‘현 몽골발음표기(일반적인 발음표기, 한자표기
, 알파벳표기)’로 표기했고, 두 번째부터는 ‘현 몽골발음표기
(일반적인 발음표기)’로 표기했다.
출처:(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별초)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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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정지용:작시
박인수 이동원:노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우~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 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생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음력)에 태어났다. 정지용은 이곳
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옥천공립
보통학교(현재의 죽향초등학교)에 다녔으며, 14살 때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지용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생가 앞으로는 정지용의 대표시 <향수>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실개천
이 흐르고 있다. 부엌이 딸린 안채와 행랑채 등 2동의 ‘一’자형 초가
(草家)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엉을 얹은 흙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두 개
의 사립문이 있다. 생가 옆으로 물레방아와 정지용동상 등으로 꾸민
작은 공원이 있고, 그 옆으로 정지용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출처:(두산백과)
2019-01-12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