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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7 - 셀주크 투르크가 십자군을 쫓아내니 바로 몽골군이 침공해 오다!
1097년에 제 1차 십자군 5만은 니케아를 함락한후 아나톨리아를 지나 안티오키아성을 1년여 공방전 끝에
힘겹게 함락하고는 남하해서 1099년에 예루살렘성을 악천고투 끝에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자
레반트에는 5개의 기독교 왕국이 세워지니 이에 서로 분열됐던 이슬람 투크르크인들은 지하드에 나섭니다.
1차 십자군이 기독교왕국을 세울수 있었던건 이슬람 투르크 세력이 분열해 싸웠기 때문이니... 안티오키아
(성경에 안디옥, 터키의 하타이) 성을 1년간 포위공격했는데 알레포 태수가 원군을 이끌고 가고 싶어도
형제인 다마스커스 태수가 그 빈틈에 알레포를 공격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니 알레포와 다마스커스
그리고 모술의 세 태수가 동시에 원군을 보냈으면.....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성 밖에서 전멸했을 것입니다.
45년후 모술의 태수로 셀주크 투르크족 장기는 1144년 기독교 십자군 5국 중에 하나인 에데사백국
을 점령하니, 유럽에서는 놀라서 제2차 십자군이 일어나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원정을 오는데.... 장기는 반란 진압중인 1146년 9월에 암살되고
이라크 서북부 모술은 장남 사이프 앗 딘이, 할랍(알레포)은 차남 마흐무드(누르 앗 딘)가 계승합니다.
1. 프랑스와 독일의 2차 십자군 격파
독일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을 지나 1147년 터키의 도릴라이움에서 셀주크 투르크(룸 셀주크) 군과 전투
에서 전멸당해 2만명 중에 90% 인 1만 8천을 잃었으니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한 루이 7세는
독일군이 극소수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는 왕은 위험한 아나톨리아(터키) 대신 배로 건넜으나 선박이
모자라 육로로 보낸 프랑스 십자군도 터키 라오디케아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무참히 패해 전멸당합니다.
레반트에 도착한 루이7세는 프로방스에서 새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해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독일황제 콘라트 3세도 용병들을 고용해 군세를 회복했는데, 예루살렘 왕국 군대가
합세하면 대군이었으나 원래 목표인 에데사 탈환은 관심이 없었으니.... 기독교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배자 레몽은 누르 앗 딘 형제들이 다투는 틈을 타서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으스대는 미남인 레몽을 좋아하지 않자 레몽은 자신의 조카인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를 설득하니, 왕비는 루이 7세에게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
하겠다고 협박겸해 애원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
이 돌기 시작하니 루이 7세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해 왕비 엘레오노르를 연금시켜 버립니다.
프랑스와 독일 십자군은 알레포 대신 기독교 예루살렘왕국과 동맹한 이슬람 다마스커스를 공격
하기로 하는데 이교도와 동맹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다마스커스가 유럽에 다마스커스직물
로 인해 훨씬 유명한지라 대도시 다마스커스를 함락하면 자신들의 명성이 드높아진다는 것이라?
하지만 루이 7세는 이슬람과 전투 보다는 독실한 기독교도로 성지를 찾아가는게 우선이라
1148년 전투하기 좋은 봄철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허비하고는.... 무더운 여름철인
7월 24일에 다마스커스를 공격하다가 더위와 갈증으로 대패하고는 유럽으로 철수합니다.
예루살렘왕 보두앵 2세 딸 멜리장드가 프랑스 앙주백작 풀크5세와 결혼해 낳은 장남이 조프루아
로, 동생 보두앵 3세는 어머니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예루살렘왕이 되고 조 푸루아는
앙주백작을 이어 받았는데.... 영국왕 헨리 1세는 아들이 없자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
갔다가 과부가 된 딸 마틸다를 조프루아에게 재가시키니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헨리 2세입니다.
프랑스 서남부 포도산지 아키텐과 가스코뉴를 상속한 엘레에노르는 레반트에서 귀국후 결국 루이
7세와 이혼하고 11살이나 어린 총각인 앙주 백작 헨리 2세와 결혼하니 헨리 2세는 아내가
가져온 재력으로 군대를 모아 1154년 영국으로 쳐들어가 영국왕이되니 프랜타지네트 왕조입니다.
셋째아들 사자왕 리차드는 아버지 헨리 2세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군대를 쳐부수고 헨리 2세가
홧병으로 죽자 영국 왕에 올라 제3차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 아이유브 왕조를 연 살라흐 앗딘과
전쟁을 한후 귀국해 프랑스왕과 전쟁을 하다가 전사하자 동생 존왕은 귀족들의 위세에 눌려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하니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으로 이어져 근대 민주주의의 시초가 됩니다.
시리아 북부 할랍(알레포)의 태수 마흐무드(누르앗 딘)는 십자군의 에데사 공격을 막고 1147년
다마스커스의 우누르를 도와 보스라의 십자군을 격퇴했으며.... 1148년 프랑스와 독일 황제
십자군의 다마스커스 공격에 출진해서는 불과 나흘만인 7월 28일에 격파해서 쫓아내 버립니다.
마흐무드(누르앗 딘)는 그후 1149년 6월 이나브 전투에서 기독교 5 왕국중에 하나인 안티오크
공작 레몽을 전사시키며 명성을 떨쳤으며, 1151년 동족인 이슬람 투르크족의 앗딘 우누르가
다스리는 다마스쿠스 포위에 나섰지만 십자군 예루살렘 여왕 멜리장드의 개입으로 실패합니다.
마흐무드는 1152년 타르투스를 일시 점령하는등 힘을 과시한후 마침내 1154년 4월 부하 장수 아이유브의
활약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으며 1157년 6월 야곱의 여울에서 보두앵 3세의 십자군을 격파했으나
병에 걸리니 할랍(알레포)에선 혼란이 일었는데, 1158년 회복한 마흐무드는 샤이자르를 점령하고 십자군
이 포위한 다마스쿠스를 구원했으니 7월 부타이하 전투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에게 패합니다.
저 보두앵 3세의 어머니는 아들과 공동왕인 멜리장드인데 그녀 아버지 보두앵은 에데사 백국 통치자로
아르메니아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해 낳은 딸이 멜리장드로 아버지가 보두앵 1세의
후계자로 예루살렘왕이 되었으며..... 딸 멜리장드는 프랑스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결혼해 낳은 아들
조프루아는 영국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해 낳은 아들 헨리 2세는 영국의 왕 헨리 2세가 됩니다.
그리고 풀크 5세와 멜리장드 사이에 차남이 보두앵 3세인데 아버지 보두앵 2세 사후 멜리장드는 남편 풀크
5세와 잠시 공동 예루살렘왕이었다가 남편 사후 예루살렘여왕으로서 저 동맹국 이슬람 다마스커스를
공격한 알레포의 마흐무드를 격퇴한 여결인데 1152년 아들 보두앵3세가 성년이 되어 왕위를 요구하자
거부하니 내란이 벌어졌고 결국 왕위에 오른 보두액 3세는 1158년에 마흐무드를 격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조의 재상 샤와르가 망명해 온 것을 계기로 마흐무드는 십자군
과의 이집트 쟁탈전에 들어갔으니... 보두앵 3세가 죽고 동생인 십자군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이집트 원정에 나선 그해 9월 마흐무드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포위합니다.
마흐무드는 저 부카이아 전투에서 십자군 안티오크- 트리폴리 군에게 패하였지만,
1164년 8월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를 이집트에 보낸 후에 재차 겨룬 하림
전투에서 마흐무드는 안티오크 공작과 트리폴리 백작을 사로잡으며 대승을 거둡니다.
2. 아이유브 왕조
1168년, 십자군 예루살렘왕 아모리가 대대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하자 파티마조의 칼리파가 도움
을 요청해 오니 이에 마흐무드는 아이유브의 동생 시르쿠와 조카 유수프를 파견 했는데.....
이들은 십자군이 철수하자 이집트를 장악해 1169년 1월 재상 샤와르를 처단하고 시르쿠가
재상이 되었으며 두달후 삼촌 시르쿠가 병사하자 조카 유수프(살라흐 앗 딘)가 뒤를 이었습니다.
유수프(살라흐 앗 딘)는 1169년에 누비아인들의 반란과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 동로마 연합군을
격파해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1170년 유수프는 팔레스타인의 가자를 공격하고 아카바를 점령하는등
명성을 드높혔으니 마흐무드는 시아파 이집트의 수니파 복원 지시에 유수프가 머뭇거리자 분노합니다.
알레포와 다카스커스의 통치자 마흐무드는 1171년 여름 남하하였는데 요르단에 있던 유수프
가 대면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회군하자 의심은 증폭되었으며, 다만 유수프(살라흐앗딘)
가 사과 편지를 보내고 그해 9월 마지막 파티마조의 칼리파가 사망하자 수니파를
복원하며 긴장은 완화되었으며 유수프는 유사시를 대비해 리비아와 예멘을 미리 정복했습니다.
1173년 7월, 마흐무드는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부재한 틈에 카라크를 포위하고 유수프
를 소환했지만 유수프는 부친 아이유브의 위독함을 이유로 도중에 철수해버렸고
마흐무드의 의심은 증폭되었으며.... 아이유브가 병사해 양측의 중재자가 사라지자
1174년 마흐무드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는데....... 그해 5월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합니다.
후계자인 앗 살리흐 이스마일은 불과 11세였고 그의 삼촌인 모술의 마우두드가 기회를
잡아 에데사와 할랍(알레포)을 점령해버렸의며 7월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노리던 십자군 예루살렘왕 아모리 역시 사망하였고 13세의 보두앵 4세가 계승합니다.
다마스쿠스 총독과 할랍(알레포) 총독이 11세인 이스마일의 섭정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
시칠리아군의 침공과 파티마 부흥운동을 진압한 유수프는 겨우 7백의 기병으로
북상해 1174년 11월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는 이후 홈스, 하마를 접수한후 이스마일
이 있는 할랍(알레포)을 포위하는데 1175년 2월 십자군과 아사신의 개입으로 철수합니다.
1175년 4월, 하마 전투에서 할랍-모술의 장기 후손의 군대를 격파한 유수프(살라흐 앗딘)는 재차 할랍
(알레포) 을 포위하고 이스마일로 부터 할랍(알레포) 을 제외한 시리아의 지배자로 인정받은후 회군
하였으며, 이후 십자군과 휴전한 유수프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왕' 을 칭하며 내치에 주력하였고
1176년 4월 텔 술탄 전투에서 모술군을 격파해 할랍을 포위하나 수비대의 강경한 저항으로 포기합니다.
다만 만비즈, 비자아 등 인근 요새들을 점령하며 도시를 봉쇄하였고 그해 5월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
를 받는데... 1177년 할랍(알레포)의 이스마일은 모술측 총독을 처형하고 친정에 나서자 유수프는
그해 11월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했다가 몽지스가르 전투에서 패하였고, 1179년 6월 마르즈 아이윤
전투에서 보두앵 4세를 격파하며 반격했는데 1180년 유수프는 재차 십자군과 휴전을 맺었고
1181년 12월, 할랍의 이스마일이 사망하니 사촌인 모술의 마수드(이즈 앗 딘) 가 도시를 접수합니다.
1182년 5월, 마수드는 할랍을 신자르 영주인 형 장기 2세에 넘기고 모술로 돌아갔으며 유수프는 벨부아
전투와 베이루트 포위등 십자군과 맞서고 장기 왕조와 휴전이 종료된 9월 할랍을 포위하였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그는 포위를 풀고 북진해 에데사, 누사이빈을 점령하였고 이에 라카가 항복하니
유수프는 모술을 포위했는데 셀주크 술탄과 칼리파가 개입하자 회군하는 도중에 신자르를 점령합니다.
1183년 할랍-모술 연합군이 결성되었으나 유수프가 진군해오자 도주하였고 그해 5월 디야르바크르
를 점령한 그는 마침내 할랍을 포위하니 수비대의 공격으로 동생 부리가 전사했음에도 포위해
6월 장기 2세가 항복하자 유수프는 기존 신자르 영지를 돌려줄 뿐만 아니라 라카, 누사이빈,
사루즈까지 더해주고는 동생 알 아딜 아흐마드(사이프 앗 딘)를 할랍(알레포) 총독으로 봉합니다.
한편 1180년대 들어 메카 순례단을 습격하던 카라크성의 르노 드 샤티용이 1183년 메카
자체 기습을 시도하자 유수프는 두차례에 걸쳐 카라크를 포위했으나...... 1185년
십자군과 휴전이 체결되자 유수프는 재차 모술 포위에 나서지만 하란에서 중병에 걸려
회군하였고 결국 이듬해 모술의 마수드가 복속하는 것으로 유수프(살라딘)는 만족합니다.
3. 유수프(살라딘)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을 멸하니 3차 십자군이 오다!
이집트를 점령해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유수프(살라흐 앗딘)는 1186년 11월 십자군 성주 르노가
재차 이슬람 순례단을 습격하자 휴전 종료를 선언하고는 1187년 7월,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해 왕을 포로로 잡은후 예루살렘성을 함락해 십자군 예루살렘왕국을 멸했으며, 그후
도착한 3차 십자군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와 전쟁 끝에 평화협정을 맺고는 1193년 3월 사망합니다.
1187년 7월 하틴의 뿔 전투 패배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분열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통합에 성공한 이슬람 군주 살라딘(유수프) 에게 점령당하자.....
유럽에서는 세나라 왕들이 참가하는 성지 탈환 군대인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유럽 최대의 세력을 자랑했던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와
"사자심왕" 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국왕 리처드 1세에 프랑스 카페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업적으로 "존엄왕" 이라고 불리던 필리프 2세등 군주들이 참가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에 독일왕이 참전한 사상 최고, 최대의 군대는 레반트로 진격해 1189년부터 1192년
까지 3년 동안 전쟁을 하기에 이르는데 독일오아은 터키 아나톨리아를 진군하는 중에가 강을
건너다가 익사해 해산했지만 프랑스왕 필립 2세와 영국 사자심왕 리차드는 레반트에 상륙합니다.
제1차 십자군은 제후들만 참가했고 제2차 십자군은 프랑스왕과 독일황제가 참가했지만 다마스크스성을
공격하다가 별 성과 없이 패퇴했지만 제3차 십자군은 "왕들의 십자군" 이라고 불릴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였으며, 이슬람은 당대의 영웅으로 회자되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 이었습니다.
살라딘이란 영웅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던 이슬람과는 달리 십자군은 단결력이 떨어졌으니 아크레
함락후 리처드 1세 혼자서 원정을 총지휘하다시피 했으니 결국 성지 탈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분전한 덕분에 살라흐 앗 딘에게 빼앗겼던 레반트
해안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일부 회복할수 있었고 요새들이 신축 및 재건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향후 26년간 기독교도들의 성지순례가 보장되는등 십자군
국가들의 수명연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인데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앗 딘과 유럽 최고의 명장이자 용맹한 기사 리처드 1세의 낭만적인 대결은 후대에 회자 되었습니다.
살라딘이 죽은후 장남 알리가 다마스쿠스, 차남 우스만이 이집트, 삼남 가가 알레포를 계승 하였으며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총독을 지낸 동생 알 아딜은 자지라를 맡게 되었는데 1194년 부터 다마스쿠스
알리와 이집트의 우스만은 내전을 벌였으니 앗 자히르는 전자에서 라타키야와 자블라를 얻어냅니다.
양측 내전을 중재해 명망을 쌓던 삼촌 알 아딜은 1196년 본심을 드러내 알리를 축출하고 다마스쿠스를
장악했으며, 1198년 이집트의 우스만이 요절하자 알리는 어린 술탄의 후계인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알리의 요청에 앗 자히르는 홈스의 시르쿠 2세와 함께 삼촌 알 아딜이 부재한 다마스쿠스를 포위합니다.
이듬해 알 아딜은 아들 알 카밀의 원군으로 포위를 뚫고 알리를 추격해 격파하고는 1200년 2월에 이집트
를 정복해 술탄이 되었으며, 앗 자히르는 알리와 함께 재차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나 알 아딜이 후자에게
마야파리킨을 내어 주며 연합을 붕괴시켰고 결국 1202년 3월 앗 자히르는 숙부 알 아딜에게 복속합니다.
한편 알레포의 앗 자히르는 십자군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4세와 친선을 유지했는데, 1203년 기독교국
아르메니아가 안티오크를 공격하자 킬리키아를 침공해서 그들을 철수시켰으니 양측의 깊은 관계에
120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그에게 서신을 보내 안티오크의 라틴 교회 지지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1216 10월 앗 자히르 가지는 사망하였고 알 아딜의 딸 다이파 카툰 사이 아들 알 아지즈 무함마드
가 계승하였으나 그는 2세로 어렸기에 환관 토그릴이 섭정을 맡았는데 2년후 알 아딜 역시
사망하였고 아들 알 카밀, 알 무아잠, 알 아슈라프가 각각 이집트, 다마스쿠스, 자지라를 계승합니다.
그러던 1218년 2월, 알리는 룸 술탄 카이카우스 2세와 할랍(알레포)을 공격하는데 이를 알 아슈라프
가 개입하여 격퇴하자 섭정 토그릴은 그에 복속하였으며 1231년 토그릴은 자블라를 침공한
십자군을 격파하고는 2년 휴전을 체결하였고 그해 7월 성년이 된 알 아지즈는 친정을 시작합니다.
알 아지즈는 알 카밀의 딸 파티마 카툰과 결혼해 부친과 마찬가지로 술탄과 인척을 맺었는데 알 아지즈는
알 카밀의 아르투크 왕조 원정 때에 도움을 거부한 유일한 시리아 아미르였으니 다만 할랍을 위협
하던 룸 셀주크에 대한 원정에 파병하였고 그외에 부왕 대에 시작된 할랍 시타델 증축을 마무리 합니다.
할랍(알레포)의 자치와 평화를 유지하던 알 아지즈는 1236년 11월 요절하였고 6세 아들 앗 나시르 유수프가
계승하니 조모인 다이파 카툰이 섭정에 나섰으며 이듬해 성전 기사단이 침공해왔지만 할랍 군에게 격파
되었고 한편 다마스쿠스는 알 무아잠, 알 아슈라프에 이어 또다른 동생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넘어갑니다.
이스마일은 할랍, 홈스와 동맹해 이집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에 맞섰고 1244년에는 전자가 십자군,
후자가 호라즘 인들을 끌어들인 라 포르비에 전투로 이어져 이스마일이 패하자 다이파 카툰은
아이유브와 동맹하였고 1245년 할랍-이집트 군이 다마스쿠스를 포위하니 10월 이스마일이 항복합니다.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은 술탄 아이유브는 1247년까지 홈스, 하마를 복속시키고 살카드, 바니야스,
바알벡 등을 정복하며 시리아의 직할지 편입에 나섰으니 이제 십자군 카라크를 제외하면
그와 맞설 이는 할랍(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 뿐이었으니 1248년 5월, 유수프는
홈스를 포위하였고 아이유브가 와병하여 돕지 못하자 그해 8월 아미르 무사가 항복합니다.
10월 아이유브는 병중임에도 재차 홈스를 포위했지만 이듬해 칼리파의 중재로 유수프의 지배를
승인하고 7차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회군하였으니 1249년 9월 사막의 요새 도시 카라크는
아미르 다우드가 할랍9알레포)을 향한 틈에 이집트 군에게 점령되며 양강 구도가 확실해집니다.
그러나 그해 11월 아이유브가 병사하고 후계자인 투란 샤가 1250년 5월 십자군을 격파하며 집권한
바흐리 맘루크들에게 암살되자 정세는 급변하였으니 졸지에 아이유브 가문의 당주가
된 유수프에게 1250년 7월에 다마스쿠스가 항복해온 것이며 한편 카라크성은 재차 자립을 합니다.
4. 이슬람세계의 대 몽골 전쟁
시리아를 통일한 유수프는 아이유브 왕조 재건에 나섰으니 시리아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유수프는 1251년 2월 압바사 전투에서 이집트의 섭정 아이바크와 맞섰는데 할랍의
맘루크(아자지야) 병력이 후자에게 투항하는지라 패하였고.... 이듬해 아이바크가
십자군과 동맹하고는 북진을 시도하자 유수프는 직접 남하 해서는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리고 1253년 칼리파의 중재로 유수프는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에 할양해 아이바크와 휴전을 하고는
십자군의 시돈을 습격하였는데 1254년 유수프는 십자군과 2년 반의 휴전을 맺었으며 같은
시기 아이바크가 바흐리 맘루크를 숙청하자 바이바르스 등 잔존 아미르들이 유수프에게 망명합니다.
아지자야 맘루크마저 아이바크를 배신하고 투항해왔는데 유수프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고 1256년
재차 칼리파의 중재 하에 팔레스타인을 할양받는 것에 그치니 바이바르스는 1257년 가을 반란
을 일으켰으나 유수프가 반격하자 패하고 카라크에 의탁하였으며 그해 유수프는 술탄으로 책봉됩니다.
한편 1242년 할랍 북쪽을 약탈했던 몽골군은 1256년 왕공 훌라구 하에 대대적으로 출정하였으니
1258년 2월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하자 공포를 느낀 유수프는 훌라구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훌라구는 유수프의 출두를 지시하니 유수프는 자신 대신에 장남 무함마드를 파견합니다.
유수프 저자세 외교에 분노한 쿠르드 맘루크들이 카라크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카라크의 바이바르스가
팔레스타인을 약탈하고 시리아 군을 격파하자 1259년 유수프는 재차 친정에 나서 그를 패배시키니
바이바르스는 항복하고 유수프 휘하로 돌아왔는데 그해 말엽 훌라구가 시리아를 침공하며 급변합니다.
유수프는 이집트 술탄 쿠투즈와 동맹하고 다마스쿠스에 머물렀는데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1260년 초엽 일단의 맘루크들의 그의 암살을 꾀하였고, 실패하자 가자로 도주해서는 유수프의
동생 가지를 술탄으로 옹립하였으며 그해 1월 18일 몽골의 훌라구는 할랍(알레포) 을 포위합니다.
할랍의 총독인 투란 샤(살라딘의 막내 아들)는 훌라구의 항복 제안을 무시하였고 이후 몽골군
은 5일간의 투석기 세례와 땅굴 공격후 1월 24일 할랍을 점령햇으니 기독교도를 제외한
시민 대부분이 학살되었고 몽골의 동맹인 아르메니아 군대가 대사원에 방화하였는데.....
다만 시타델에서 저항하던 투란 샤는 한달 후에야 항복하였고 훌라구의 사면을 받았습니다.
할랍의 함락에 놀란 유수프는 다마스쿠스도 버리고 가자로 도주했으니 3월 다마스쿠스가 몽골군에
항복하였고 바이바르스는 유수프에게 반격을 제안하나 거절당하자 쿠투즈와 연락해 이집트로
돌아갔으며 이집트와 몽골 사이에 고심하던 유수프는 하마의 알 만수르에게 병력 대부분과
가족들을 맡겨 쿠투즈에게 보냈고 이후 북상한 유수프는 카라크의 초청도 거부하고 훌라구의
부관 키토부카에 항복해 알 준 성채를 몽골군에 항복시키고 이란의 훌라구 궁정으로 압송됩니다.
할랍 점령후 몽골의 뭉케 칸 사후 내전 소식에 이란으로 돌아갔던 훌라구는 유수프를 후히 대접해주었으며 1260년 9월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아인잘루트 전투” 에서 키토부카를 전사시키고 다마스쿠스를 점령
했는데, 군대 중에 기존 유수프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에 훌라구는 분노하여 유수프를 처형합니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직후 시리아에서는 몽골 부역자들에 대한 시민들이 린치가 벌어
졌는데 할랍(알레포)도 예외는 아니었고 기독교도 일부가 학살되었으며 10월 20일
맘루크 군이 할랍에 입성하고서야 질서는 회복되었으며..... 얼마후 이집트로 돌아
가던 바이바르스는 할랍 총독 요구가 거절되자 쿠투즈를 암살하고는 술탄이 되었습니다.
한편 11월 할랍(알레포)에선 아미르들이 쿠투즈가 임명한 총독을 축출하고 맘루크 장교 라긴을
추대했는데 다음달 몽골군이 재침하자 하마로 철수해서는 12월 홈스의 아미르 무사의 지휘
로 1차 홈스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지만 이후 몽골군은 할랍을 점령해 학살을 자행합니다.
5. 이집트의 맘루크 노예 왕조
1261년 1월에 다마스쿠스 총독의 반란을 진압한 바이바르스는 할랍에 파병하였고 그해
4월 몽골군은 철수하니 모술의 아미르가 이집트로 찾아와 복속했으며 한편 1261년
7월 맘루크 군대가 할랍에서 철수하자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샴스 앗 딘) 가 도시
를 장악해 의탁해온 압바스 왕자를 칼리파 알 하킴 2세로 옹립하여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카이로에서는 다른 왕자인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옹립되었는데 10월에 바이바르스는
재차 군대를 파견해 할랍을 수복하였고 아쿠쉬는 하란을 새 거점으로 삼았으며 1262년
에는 안티오크 공국이 아르메니아군과 할랍을 노렸으나 맘루크 주둔군에 격퇴되었으며
바이바르스는 할랍까지 바리드(군사적 연락망)를 정비해 도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1268년 몽골군이 재차 할랍(알레포) 을 공격해 오자... 이집트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친정에 나서 후퇴시킨후 할랍을 거점으로 안티오크를 공격해서는 마침내
한세기 반 가량 도시 할랍(알레포)을 위협했던 십자군 안티오크 공국을 멸하였습니다.
1269년엔 몽골군이 할랍(알레포) 북쪽을 습격했으나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에 온 것
만으로도 후퇴하였는데 1271년 가을 사마가르 휘하 1만 몽골-룸 셀주크군이 재침
해오자 할랍 주둔군은 11년 전처럼 하마로 후퇴하였는데 다만 사마가르 역시
이집트 술탄이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였고 11월 바이바르스는 할랍에 개선하였습니다.
그 틈에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기습랬으나 이듬해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을 맺었으며 1272년
11월 몽골군은 알 비라를 포위하며 시리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바이바르스에 격파되었고
1273년 바이바르스 명으로 할랍 총독 라긴은 아르메니아의 친몽골 성채 카이뉘크를 점령합니다.
1277년, 이번엔 몽골의 동맹인 이슬람 룸 셀주크를 응징하기로 한 바이바르스는 그해 4월 할랍을
거져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고 카이세리를 점령한 후 귀환하였으니 룸 셀주크는
붕괴되었고 1266년과 1275년의 원정으로 아르메니아 역시 쇠퇴하니 맘루크의 패권이 확립됩니다.
13세기 말 이집트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는 세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번째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루스(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부터 노예를 수급해 오는 교역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바이바르스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으니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
되었고 여러 세력이 경쟁했는데 삽바스 전쟁의 결과 제노바로 부터 아크레에서
티레에 이르는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기꺼이 무역했습니다.
바이바르스는 그러는 동시에 니카이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
인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보장했는데...... 이런 중에 1291년 아크레(아코)가
이슬람세력에 함락되었고, 아크레의 기독교도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한편 1277년 7월 술탄 바이바르스는 룸 셀주크 원정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린 후계자들을 거쳐
2년후 그의 부관이던 칼라운이 술탄으로 즉위하니 이번에도 다마쿠스 총독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1280년 칼라운에게 패해 일 칸국으로 망명하니 몽골군은 1280년 가을
재차 시리아를 침공해 10월 할랍(알레포)을 점령해 시장을 약탈하고 사원들에 방화합니다.
다마스쿠스는 할랍 출신 난민들로 가득했는데 몽골군의 지원 요청에 십자군은 술탄
과의 휴전이 1년 남았다며 거절하였고, 몽골군은 칼라운의 북상에 이듬해 귀환을
약속하고 철수하였으며 홀로 출정한 구호기사단이 맘루크 군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1281년 봄 이집트 맘룩왕조의 술탄 칼라운은 십자군과 재차 10년 휴전을 맺었고 가을 무렵 몽골군은
조지아-아르메니아-구호기사단의 4만 대군과 시리아로 남하했는데 그해 10월 2차 홈스 전투에서
칼라운은 격전 끝에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이듬해 구호기사단의 마르캅을 점령해 이들을 응징합니다.
재침을 준비하던 일왕조의 아바카 칸은 1282년 4월 사망하였고 후계자인 아흐마드 테쿠데르 칸은
무슬림으로서 칼라운과 친교를 맺으면서 시리아에 평화가 찾아오는데 테구테르 칸은 2년후에
처형되었고 아르군 칸은 서유럽에 4차례나 사절을 파견해 협공을 논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으니
그 틈에 이집트의 칼라운은 1287년 라타키야, 1289년 트리폴리를 점령해 트리폴리 백국을 멸합니다.
1290년 11월 십자군의 마지막 해안 성채인 아크레 원정을 앞두고 이집트 맘룩 왕조의 칼라운은 사망
하였고 계승한 아들 칼릴은 1291년 5월 아크레를 함락해 예루살렘 왕국을 멸하였으며 동시에 몽골
일왕국의 아르군 칸과 로마 교황이 모두 사망하여 이집트 술탄 칼릴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레반트를
통일했으니 1097년 십자군 침공 194년만에 유럽 기독교 십자군을 시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입니다!
몽골 일왕조 게이하투 칸은 1292년 이집트의 칼릴에게 할랍(알레포)을 할양하라고 협박했지만 무시
되었으며 이후 내전 끝에 즉위한 마흐무드 가잔 칸은 무슬림이면서도 이집트 맘루크 조와의 대립
을 이어갔으니 1299년 가을, 가잔 칸은 6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침공해 할랍(일레포)을 점령하였습니다.
일왕조 가잔칸은 1299년 12월 3차 홈스 전투에서 이집트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를 격파하지만
보급품 부족으로 이듬해 회군하였으며 한편 십자군은 마지막 시도로 1300년 알렉산드리아, 비블로스,
아크레, 타르투스를 습격한후 시리아 근해의 루아드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서유럽의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가잔 칸은 1301년 2월 재차 할랍을 약탈한 후 다마스쿠스에 쿠틀루그 칸 휘하 2만 대군
을 남기고 귀환하였는데 1302년 9월, 술탄 무함마드는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 루아드 섬을 함락하였으며 1303년 4월 쿠틀루그 칸은 아르메니아군
과 함께 남하했지만 바이바르스 알 자샨키르가 이끈 맘루크 군에 대패하고 물러납니다.
이후 일왕조(이란)의 몽골군은 더이상 시리아를 넘보지 못하였고 1313년 올제이투 칸의 라흐바 포위
를 마지막으로 무력 충돌은 사라졌고..... 결국 1323년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칸은 섭정 추판의
조언대로 할랍 조약을 맺어 맘루크 왕조와 대립을 종식시켰으니 이로써 시리아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하에서 할랍(알레포)은 헬레니즘기와 이슬람제국 이후 처음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데 1354년의 비마리스탄(병원)과 1398년의 알 아투루쉬 모스크
등의 건축물이 지어졌으니...... 그러던 1400년에 시리아를 침공한 몽골인의 후예 라는
"티무르" 는 할랍을 점령하고는 시민 2만명을 학살해서 도시 외곽에 해골탑을 쌓았습니다.
혼란기를 틈타 1404년 할랍 총독 자캄(사이프 앗 딘)이 술탄을 칭하고 시타델에 알현실을 세우는등 독립
군주로 행세하였는데 2년후 1406년 5월에 자캄은 이집트 술탄에게 다시 복속하고는 재차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술탄이 해임하고 새 총독(나입)을 파견하자 또 반기를 들었으나 붙잡혀 처형됩니다.
한편 혼란기 이후 피난민들이 할랍(알레포)으로 돌아왔는데 무슬림 시민들이 이미 구도심의 기독교도
구역을 선점해 버렸으니 이에 기독교도들은 1420년에 성벽 북쪽에 정착하였고 알 자디다(신구역)
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다시 한세기간 평화를 누리던 할랍(알레포)은 1516년 오스만 제국령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