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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연과 과학 이론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는 무리 져서 거지 중천(中天)에 높이 떠서 두 나라 훨씬 펴고, 펄펄 백운간(白雲간間)에 노피 떠서 천리강산(千里江山) 머나먼 길을 어이갈꼬 슬피 운다 원산(遠山)은 첩첩(疊疊), 태산(泰山)은 주춤, 기암(奇巖)은 층층(層層), 장송(長松)은 락락(落落), 에이 구부러져 광풍(狂風)에 흥(興)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층암절벽상(層巖絶壁上)에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주루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하야 천방벼 지방져 소쿠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릉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작자 미상 <유산가>에서-
1. 자연ㆍ카오스 (chaos)
혼돈(chaos)이론은 흐르는 물이나 기후와 같은 커다란 계(係)의 작용을 설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뉴턴으로부터 꽃피우기 시작한 물리학은 최근까지도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계만을 연구대상으로 생각하여 왔고, 불규칙한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 예를 들어 유체(기체와 액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난류 현상(turbulence : 유체의 한 종류ㆍ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 서로 섞이는 흐름)을 뉴턴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뉴턴이 남긴 지적 유산은 우주가 탄생한 시점부터 작동을 시작해, 그 이후 충실한 기계처럼 미리 정해준 홈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해 온 시계장치 우주라는 상(像)이다. 그것은 완전히 결정론적인 시계, 우연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그래서 그 미래가 현재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결정론은 188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라플라스(pirrre Laplce: 1749 - 1827)의 ‘신의 계산기’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어떤 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있다면 우주를 기술하는 방정식으로부터, 그 운동 방정식을 풀면, 미래의 모든 시점에 있어서 그 물질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규칙해 보이는 운동은 우리가 계(係)의 운동방정식과 초기조건을 모르기 때문이지 물리학이 더 발전하면 이러한 운동도 결국 방정식의 규칙운동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태양계의 운동과 같이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태양계의 운동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한 태양계에 있어서 별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말한다.)
그러나 라플라스가 말한 방정식에 의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요점은 우리가 그 계(係)의 초기상태를 절대로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리적 계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가장 정확한 측정도 고작 소수점 이하 10 또는 12자리에 불과했다. 우리가 무한히 정확하게, 소수점 이하 무한한 자리까지 측정을 계속 할 수 있다면 라플라스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가령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생각해 보자. 처음 3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시간 간격을 소수점 이하 10자리의 정확도를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 물방울이 떨어지는 시간간격은 소수점 이하 9자리까지 예측할 수 있다. 그 다음 물방울은 소수점 이하 8자리,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매단계마다 오차는 10배씩 늘어나고, 미래 방향으로 10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 물방울이 얼마 후 떨어질 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오차의 증폭이야말로 라플라스의 완전한 결정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 틈새인 셈이다. 완벽한 측정이 불가능한 한 아무리 작은 오차도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소수점 이하 1백자리까지 물방울 시간 간격을 측정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예견은 1백번째 물방울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sensitivity to initial conditions)’,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 라고 한다. (동경에 있는 나비가 날개를 치면 한 달 후에 그 영향으로 플로리다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이 현상은 행동의 고도의 불규칙성과 뗄 수 없이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규칙적인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은 그 움직임을 예측 불가능한 - 따라서 불규칙한 - 무엇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초기 조건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계를 혼돈계(chaos system)라고 한다. 자연은 이와 같은 혼돈계가 더욱 풍성하며, 이 혼돈계에 리듬이 있고 그 리듬에 감정을 이입하고 흥(興)이 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뉴턴의 시계 같은 우주 관념이나 라플라스의 신의 계산기 관념은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에 의한 태양계에 있어서 별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물론 태양계만 하더라도 그 복잡성 때문에 오늘날 발달된 컴퓨터의 고속 계산력을 빌리자 않고서는 그 중력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고 한다. 라플라스의 말이 함축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우주에는 질서정연한 보편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의 초기 조건만 알면 우주 전체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라플라스만의 생각이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그러므로 「혼돈(chaos)」의 저자인 글라이크(James Galeick)는, 라플라스의 이 낙관적인 생각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알고 있는 현대인에서 웃음거리로 보이겠지만, 실은 현대 과학의 대부분이 오로지 라플라스의 꿈을 추종하여 온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혼돈계’의 ‘난류현상’의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역학계를 구성하는 부분들 중 독립하여 운동하는 것들은 각각 하나의 변수이며 또한 각각의 자유도를 갖고 있어 위상공간 내에 새로운 별개의 차원을 갖는 것이다. 폭포의 낙하에서 일어나는 난류의 소용돌이나 폭풍우를 ㄹ동반한 난기류의 소용돌이에서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자연의 모습은 그것이 무한한 자유도를 갖는 계인만큼 그 위상공간은 무한한 차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의 분자와 기체 분자 하나하나가 각각 독립된 다른 궤도를 따라 운동할 때, 그 하나하나를 다 임의적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선형 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유체의 비선형 방정식을 사용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세계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단지 1 제곱센티미터의 난류를, 그것도 겨우 2,3초내에 일어나는 유체를 정확히 측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앞서 사례로 든 라플라스의 꿈을 통해 본 것처럼, 이러한 혼돈의 자연에서도 어떤 보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추구해마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은 다양한 과학 이론으로 정립되어 가고 있다.
2.과학이론의 본질
과학이론과 관련된 논제는 다양한 각도에서 출제되고 있다. 이러한 논제는 크게 다음 두 방향이 지배적이었다. 첫째는 과학원리의 성격 자체에 중심을 둔 논제이다. 예컨대, 과학이론에 상응하는 것이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느냐, 아니면 과학이론은 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도구일 뿐이냐?(‘98, 고려대 자연계열 모의), 과학이론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가?(’98 고려대 자연계열), 실제 적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화된 모델과 그에 따르는 과학이론은 왜 필요한가?(‘97 고려대 자연계열 기출문제), 자연과학의 지식은 객관적인가?(’97 서강대 기출문제), 과학법칙에 있어 수학의 역할은 무엇인가?(‘98 이대 자연계열), 과학자의 발견과 발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98 이대 자연계열)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특정한 과학법칙을 주어진 현실에 연계・적용시키는 논제이다. 예컨대 과학법칙을 원용하여 현실의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97,98 이대 자연계열), 과학혁명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를 특정시기 현실에서 논할 수 있는가?(’98 한양대 자연계열)등이 대표적이다.
논제의 다양한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과학원리-구체적 사례 적용’이라는 점이다. 이는 교과과정에서 배운 과학의 기본방법과 원리를 단순 암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장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려는 취지라 보면 될 것이다. 앞에 예로 든 카오스 이론을 자연현상과 연관시켜 설명해 보는 것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러한 논제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만 골라 살펴보기로 하자.
‘98 고려대(자연계열 모의고사)에서는 과학이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과학이론이 자연계의 실제와 대응하느냐, 아니며 자연계를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물음이다. 이 논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심코 배우고 외워왔던 과학법칙 혹은 과학공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유도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몇 가지 과학공식을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실제 자연현상과 대응시켜 본다면, 논의를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문제이다. 예컨대, 낙하법칙이 실제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낙하현상의 일부분의 설명에 불과한지에 대한 성찰로부터 이 문제의 논의의 핵심을 잡을 수도 있다. 논제를 직접 읽어보자.
--------------------------------------------------------------------<관점1> 과학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과학이론은 자연계를 제대로 설명하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맞는 이론이 아니면 틀린 이론인 것이다. 자연계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론적 실재(理論的 實在)’를 상정한다. 예를 들어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을 하면 자연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자에서는, ‘책상’개념이나 ‘의자’개념에 대응하는 물체가 객관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자’와 같은 이론적인 실재에도 그 대응물이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다.
<관점2> 과학이론은 그 자체로서 맞거나 틀리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과학이론이란 단지 우리가 경험한 자연현상을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론의 의의는 자연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들 사이에서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찾아내어 일관성 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과학이론은 이러한 목적에 유용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따라서 과학이론은 단지 가설에 불과하거나 한시적인 진리일 뿐이다. 과학이론의 가치는 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유용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문제 : 위의 예시문을 참고하여, 다음을 논제로 삼아 논술하시오.
논술 : 과학의 특성에 대한 성찰에 입각하여, 과학이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 유의사항
1. 구체적인 예를 들 것
2. 논제와 성명은 쓰지 말 것
3. 글의 길이는 빈 칸을 포함하여 1600자 안팎이 되게 할 것
4. 예시문 속의 문장을 그대로 쓰지 말 것
5. 수험생 개인의 가치관은 원칙적으로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 않음
<관점1>은 과학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계와 바로 대응한다는 것이고, <관점2>는 과학이론이 단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편의적 도구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관점1>의 내용에 익숙한 사람들은 <관점2>의 내용을 의외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과학이론이 실재(實在)와 대응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학이론에 대하 s이러한 논란은 그간에 많이 일어난 것이다. 논란은 특히 현대 물리학 이론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과학 특히 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물질세계에 대해 가장 합리적이고 신뢰할만한 지식을 제공하는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이 완성된 이래 물리학이 보여주는 자연상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형태의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물리학이 자연의 실상을 밝혀내는데 어떤 본질적인 제약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물리학자들은 현재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 매우 ‘흥분’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우리가 소립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는 끈으로 된 작은 고리의 여기(Exoitatian)나 진동이라고 주장한다. 이 끈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다. 그러면 그것들은 ‘실체’일까, 아니면 단지 이론적 구조일 뿐일까? 이러한 문제는 현대 물리학(특히 양자역학) 이론 자체의 성격이면서, 근원적으로는 철학적・인식론적 성격의 문제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논술은 어떤 논제이든 이와 같은 광범위한 문제의 작은 한 가닥을 이루고 있다. 물론 논제는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논제의 각도를 가능한 한정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논제라도 그 논제를 얼마나 풍요롭고 창의력 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관건 중의 하나는, 그 논제와 관련된 배경지식이라 할 수 있다.
2-1. 과학이론의 ‘실재론’과 ‘도구론’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대 물리학 이후 특히 논란이 되는 과학이론의 본질에 대해서는 대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 하나는 <관점1>에 나타난 것처럼, 과학이론이 자연계와 대응한다는 이른바 실재론(realism)이고, 다른 하나는 <관점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학이론이 자연계를 분류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이른바 도구론(instrumentalism)이다. 먼저 실재론은 우리가 가장 익숙해져 있는 과학이론의 성격이다. 이는 뉴턴류(類)의 고전 역학의 특수성을 무의식적으로 일반화하는 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고전 역학의 입자에서는 서술세계[이론・이론적 실재]는 현실세계[자연계]를 단순히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본다. 말을 바꾸면, ‘상태[이론]’가 ‘사건[자연계]’을 일의적(一義的)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뉴턴류의 물리학에서, ‘원자’와 같은 이론적 실재에도 그 대응들이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 이유는, 이러한 물리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른바 ‘물질주의’ 때문이다. 물질주의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세기 데모크리투스(Democritos)는 모든 물질이 아주 작아 파괴될 수 없는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고, 이 단위를 원자(Atom)라고 불렀다. 크기나 모양 등의 고정된 특징을 가진 원자 그 자체는 불변하지만 그들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고 여러 방법으로 결합될 수 있어서 원자로 이루어져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체들은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구성과 불안정성이 조화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변화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재결합에 의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물질주의 사상의 시작이다.
물질주의는 뉴턴(Issac Newton)으로 이어진다. 뉴턴은 저서 ‘원리론(principia)'에서 그의 유명한 운동법칙을 기술하였다. 그 이전의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처럼, 뉴턴은 물질을 수동적이고 관성적인 것으로 여겼다. ’관성(Inertia)은 그의 이론 세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뉴턴의 법칙에 의하면 물체는 멈춰 있을 경우, 다른 외부의 힘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멈춰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면,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물체는 같은 속력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물질은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 뉴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질은 딱딱하고, 질량이 있고, 투과될 수 없으면 움직일 수 있는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턴과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일상에서의 물체와 그 본질이 된다고 생각되는 기본 구성 입자들 간에는 차이가 없었다.(기본입자들이 투과될 수 없다는 특성은 제외) 실재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도구론은 앞에서 잠깐 소개한 현대 물리학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물리이론과 물리적 실재와의 관계는 20세기 초 양자이론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많은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실체가 입자적 성격을 가졌는가 파동적 성격을 가졌는가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로 대두했으며, 특히 이것이 입자와 파동 양쪽의 성질을 함께 지닌다고 하는 이른바 ‘입자․파동 이중성’이 커다란 수수께끼로 등장하였다. 이후 이 문제는 주로 대상의 상태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즉 이러한 양자역학적 상태가 자연대상 실체에 관한 어떤 객관적 실재를 반영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논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물리이론이 대상의 실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큼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략 다음의 세 가지 가능한 해석방식이 취해지게 되었다.
첫째는 그 물리적 행위가 완벽하게 서술 또는 예측될 수 있는 ‘객관적 상태’가 존재할 것으로 보고, 양자역학의 이론 [양자역학의 상태함수]은 이 ‘객관적 상태’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만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이 경우 양자역학적 상태함수가 미처 담고 있지 못한 정보를 담당할 한 무리의 변수가 더 있을 것으로 보아 이를 ‘숨은 변수(hidden variable)’라 부르기도 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대성 자체는 그것의 행위가 완벽하게 서술될 어떤 형태의 상태를 지니고 있으나, 이론의 불완전성 또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성 등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적어도 현 단계의 학문적 상황에서는 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가능한 해석으로는 양자역학적 상태[이론] 그 자체가 곧 객관적 실재로서의 대상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양자역학적 상태 그 자체가 대상의 행위에 대한 완벽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실은 양자역학적 상태가 대상을 불완전하게 서술해서가 아니라, 객관적 실재의 성격 자체가 이러한 본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은 관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이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으로서, 양자역학적 상태는 객관적 실재와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오직 이것을 통해 해석되는 ‘사건’들과 그것이 일어날 확률적 예측만으로 객관적 실재와의 연관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상태함수만으로 대상을 서술하는 기간에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어떠어떠한 관측을 수행하면 어떠한 결과가 관측되리라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태함수 자체는 대상의 행위 예측을 위하여 인식주체가 고안해 낸 하나의 편의적인 장치일 뿐, 객관적 실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것의 ‘사건’발생에 관계되는 해석 이상의 것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참고- 양자역학적 상태/양자역학적 상태함수 : 이론적으로 서술된 상태[서술세계]
실재로서의 대상의 상태 : 자연계 그 자체의 존재양상[현실세계]
2-2. 현대 물리학 이론의 성격
이상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이론상의 특징을 ‘실재대상·이론’의 관계 속에서 살펴 보았다. 다시 이를 ‘직접서술’과 ‘간접서술’로 나누어 설명할 수도 있다. 직접서술은 이론 자체가 현실세계의 그 무엇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존재양태를 지니는 것이며, 오직 그 서술의 해석방식에 있어서만 현실세계와 연결을 갖는 방식이다. 앞의 논제와 관련시켜 볼 때, 고전 물리학의 이론은 직접서술 방식으로서, <관점1>의 실재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잠정적으로 현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은 간접서술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실재론인가, 아니면 도구론인가? 이 문제는 주어진 논술의 논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살펴 본 현대 물리학 이론의 세 가지 해석 중 가장 타당한 입장을 골라야 한다. 이른바 ‘과학적 모형[이론]’과 실제 계(係) 사이에는 앞서 든 현대 물리학의 ‘초끈이론’ 이나 ‘원자’의 사례만 보더라도, 직접 대응시킬 수 없는 뭔가가 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호킹(Stephen Hawking)이 블랙홀(Blackhole)은 검은 것이 아니라 열을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 블랙홀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더욱 블랙홀로부터의 열방출을 탐지하지도 못한 데 있다. 그래서 세 번째 입장에 많은 물리학자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이른바 ‘아인슈타인 인과율’에 의한 타당성 분석의 결과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 인과율이란 ‘두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는 오직 ‘시간성’ 간격을 지닌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 입장은 논술의 <관점2>에 나타난 것처럼, 과학이론이 단지 자연현상을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구론에 해당될 수도 있다. 사실 세 번째 입장은 ‘지나친 도구주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하여, 객관적 실재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입장에 따르면 상태 그 자체의 객관적 실재성은 인정하지 않으나, 상태의 양자역학적 해석에 의해 연결되는 ‘사건’의 실재성은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엄격한’ 도구론에 대한 ‘제한된’ 실재론을 설정할 수 있다. 도구론의 입장은 설혹 ‘직접서술’방식에 의해 표상되고 있는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실재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경험 사실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지적 방편으로 보는 관점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하며 우리가 직접서술방식에 의해서 표상해내는 세계상[이론]이 바로 이 실재를 반영하는 하나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 과학을 위한 좋은 작업 가설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모형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모형이 항상 추구될 수 있고 또 추구되어야 한다는 유보사항이 전제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점이 전제될 경우, 설혹 이러한 제한된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도구론이 제기하는 중요한 쟁점, 즉 서술내용을 객관적 실재와 동일시 함에서 오는 ‘지적 경직성’(예컨대 고전 물리학의 한 측면)에 대한 경고가 충분히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의 목적이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데에도 있다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순수한 도구론적 관점을 취하기 보다는 제한된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합당한 자세라 할 수 있다.
3. 산업 사회와 엔트로피(Entropy)
다음은 과학이론의 이해를 통해 사회의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묻고 있는 논제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이에 따른 산업화는 인류 사회에 많은 편의성을 제공하여 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에 관하여서는 부정적 견해가 존재한다. 이 비판적인 견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열역학 법칙에 의거하는 것이다. 열역학 법칙과 관련된 다음의 지문에 의거하여,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화가 인류의 미래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서술하고 이들의 역기능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나 그 방법에 대해 논술하시오.<’99 이화여대 자연계열>
*역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어떤 물체계를 외부와 고립시켜 놓았을 떄, 그 물체계 내의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되고[제1법칙], 그 물체계 내에서의 모든 현상들은 항상 그 물체계 내의 분자들이 더욱더 무질서한 운동을 하게 되는 방향, 즉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제2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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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너지 수준이 가장 높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최대인 상태가 최소 엔트로피의 상태이며 또한 가장 질서 있는 상태이다. 반면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상태는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이며 최고로 무질서한 상태이다. 한 벌의 카드를 예로 들어보자. 숫자와 그림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가 최대의 질서도, 즉 최소의 엔트로피 상태이다. 카드를 휙 바닥에 내어 던지면 제멋대로의 무질서한 상태가 되어 있다. 이 흩어진 카드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면 카드를 던졌을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할 것이다.
[2] 금속 광물 한 덩어리를 캐어서 연장을 하나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이 연장을 사용하는 동안 금속 분자는 닳거나 부서져서 끊임없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러한 금속 분자들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므로 결국 지하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땅 전체에 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원래의 광물과는 달리 유용한 일을 하는데 사용될 수가 없다. 이렇게 멋대로 분산된 분자들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엔트로피를 더 증가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금속 분자들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장치가 꾸며지고 그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이 마련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장치 자체도 지구의 금속 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금속 분자도 앞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마모, 파쇄 등의 원인으로 흩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런 재활용 장치를 작동시키는데 사용되는 에너지도 결국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된다.
[3] 어떤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상태로부터 낮은 수준의 상태로 옮겨 갈 때 일이 이루어진다. 중요한 점은 에너지가 옮겨 갈 때마다 다음 번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 양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댐 위의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물이 높은 곳으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물은 전기를 일으키거나 수차를 돌리거나 또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바닥에 떨어져 버린 물은 더 이상 일을 수행할 수 없다.(이들 두 상태를 가리켜 각각 ‘사용 가능한 에너지’ 그리고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상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므로 엔트로피의 증가는 이러한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자연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얼마간의 에너지는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 상태로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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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500자 내외(1400~1600자)로 서술할 것
-시험 시간은 150분임
-제목은 쓰지 말고 본문부터 시작할 것
-수험 번호, 성명 등 자신이 신상에 관련된 사항을 답안지에 드러내지 말 것
-반드시 검은 펜이나 연필로 쓸 것
[1] 은 엔트로피의 개념 설명으로, 엔트로피 증가는 곧 에너지 소모[소비]임을 말해주고 있다. [2]는 이미 소비된 에너지를 다시 활용하려 해도 결국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므로, 결국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3]은 엔트로피가 증가함으로써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바뀌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이 인류의 에너지사용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제시문에 나타나 있듯이, 에너지의 변화에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성, 즉 저(低)엔트로피의 농축된 에너지로부터 고(高)엔트로피의 분산된 에너지로 바뀌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쓸모 있는 에너지를 태워 이산화탄소라는 쓸모 없는 형태, 즉 쓰레기를 만드는 변환만이 가능할 뿐인 것이다. [2]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에너지 재활용도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예를 들면, 도시의 거대한 마천루나 복잡한 도로망([2]의 사례로 볼 때는 ’광물연장’)은 일견 질서의 증가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형태의 엔트로피의 감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에 그보다 더 큰 엔트로피의 증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조물을 보수,관리,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 진리로 천명한다.
3-1. 에너지 사용의 역사
인류는 에너지 사용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 왔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주로 자연력(自然力)을 사용했다. 불이나 태양열은 태고적부터 사용되었다. 원시시대부터는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여 인력 이외의 동력으로 쓰고 있었다. 인간이 인력, 축력(畜力) 다음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물과 바람의 힘을 빌리는 수차(水車)와 풍차(風車)였다. 수차는 기원전 수백년경에 중국과 인도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마에서는 서기 536년대에 수차의 회전이 톱니바퀴에 의해 맷돌로 전달되도록 만든 물에 뜨는 수차가 개발되었다.(이 수차는 동력 용량이 약 0.3w정도였다.) 수차가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술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생산력이 증대된 시기였던 10세기 이후였다. 수차는 초기에는 주로 곡물을 제분하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11세기말부터는 직물 공자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수차는 16세기에 이르자 서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동력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풍차는 수차보다 늦은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에 출현하였다. 풍차는 곡물의 제분, 광산으로부터 광물의 운반 및 양수(揚水)등의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되었다. 풍차는 최고 12kw 정도까지로 출력이 큰 편이었으나 바람이 있을 때에만 돌릴 수 있다는 한계 때문에 수차만큼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산업혁명(18세기 후반부터 약100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동력원은 주로 수차와 풍차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업 중심지나 도시의 위치는 주로 이들 동력원이 이용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너지원은 변형을 가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 고갈(또는 에너지 사용에 따른 환경오염_은 문제시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외연기관)의 출현은 인류의 에너지 사용의 양상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동력원을 지리적, 자연적 제약조건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근대산업이 발달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특히 1784년 와트(J.Watt)가 복동회전(復動回轉:하나의 원동기를 사용하여 여러 개의 작업기를 동시에 가동시킴)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서구의 산업발전은 속도를 더해 갔다. 그러나 증기기관이 그 에너지원으로 목탄과 석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에너지 고갈의 단초를 열었다. 벌목(伐木)으로 산림이 황폐화되고 목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탄은 화석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 중에 가장 먼저 발견된 에너지원이었다. 이후 전기기술과 내연기관의 발명은 에너지 고갈의 본격적인 시대를 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전기기술이 새롭게 등장했다. 전기산업의 출현은 과학이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예를 들어 볼타(A.V.Volta)의 금속전기 현상의 발견과 그 응용에 의한 전지의 발견, 그리고 주울(J.P.Joule)의 전류와 열과의 관계에 대한 법칙의 발견 등> 이러한 과학적 성과에 바탕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전류를 발생시키는 발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1867년 독일의 지멘스(W.Siemens)와 1873년 프랑스의 그람(I.Grammas)dl 발전 장치를 제작하는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발전기는 기계적 에너지를 전기적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이다. 따라서 발전기에 기계적 동력을 공급한느 우너동기가 필요했으며, 초기에는 증기기관이 이용되고 있었다. 1878년 에디슨(T.Edison)dl 발명한 백열전등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뉴욕과 런던 등의 대도시에 화력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려ㅑㄱ 생산은 현실화되기에 이른다. 전력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증기기관의 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터빈(고압의 물, 증기, 가스 등을 노즐로 내뿜게 하여 그 충격으로 회전동력을 얻는 원동기)이 개발되었다. 전기 기술에 있어서 발전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전력을 수송하는 기술이다. 결론적으로 19세기 후반 전기 수송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류를 통한 말소리의 수송, 이른바 ‘전화(電話)의 세기’라는 20세기가 열린 것이다.
내연기관을 제작하려는 시도는 19세기 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내연기관의 원조는 1876년 독일의 다이믈러(G.W.Daimler)가 제작한 4 사이클 기관이다. 다이믈러는 이어서 1883년에 가솔린(석유의 휘발성분을 이루는 무색 액체 휘발유)기관의 제작에 성공하고, 1887년 이 기관을 부착한 최초의 4륜 화물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벤츠(K.T.Benz)와 미국의 포드(H.Ford)도 자동차의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내연기관의 개발과 더불어 자동차가 보급되어감에 따라 20세기초부터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 연료의 사용이 급증하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드디어 이들은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원자의 핵분열 반응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은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1954년 구소련, 1956년 영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한 이후 현재에는 다양한 방식의 원자로가 개발되어 가동되고 있다. 1989년말 시점에서 전 세계의 원자력 발전소는 26개국에서 425기가 가동되고 있어 전 세계 에너지 생산량의 3%, 발전량의 약 20%를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원자력에 의한 발전이 널리 퍼지는 상황에서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원전사고는 체르노빌 사례에서 보듯이 사고가 일어나면 그 피해가 다른 환경사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지속된다. 뿐만 아니라 발전하고 남은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는 아직도 고심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는 자연의 힘을 직접 이용하는 것으로부터 원자력의 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에너지원을 개발해 왔다. 이처럼 에너지원의 개발이 꾸준히 진행된 것은 일차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산업면에서 에너지 수요가 증가한 데 기인한다. 산업체에서의 에너지 이용은 세계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증가되었다. 1970년대에는 두 차례 석유파동을 거치며 에너지 위기까지 겪었다. 석유위기로 대표되는 자원의 위기는 그 내막이 어떻든지간에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고,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도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해야 하는 실정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소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엔트로피 법칙은 진화론이 사회현상에 확대 적용되어 사회적 다원주의(Social Darwinism)을 낳았던 것처럼, 사회현상에 적용되어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데 원용되고 있다. 우리의 상황 또한 앞 뒤 가릴 것 없이 선진국을 발전모델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허다한 부작용을 빚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트로피 이론에 근거한 성장한계론이 상당히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3-2. 세계관으로서의 엔트로피
엔트로피 법칙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 관해 간단히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친 이래, 인류의 열[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 열기관의 효율성에 관한 정량적 접근에 성공한 프랑스의 과학자들과 실험과학에 특출했던 영국 과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일 자연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열에 대한 연구는 그 기틀을 잡게 된다. 그 결과로 에너지는 물리학의 기초개념으로 자리잡고 자연계의 불변성의 원리이자 변환 속에서의 통일적 역할을 맡은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갖가지 형태의 에너지들은 역학적 에너지의 변형의 형태로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아래, 1865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한 두 가지 기본 법칙으로서, “(1)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2)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 당시의 이러한 선언은 열역학의 제 1,2법칙의 탄생이자 물리학의 성립을 공포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세계의 변화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창안된 엔트로피(Entropy)라는 용어는 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적 개념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는 <열역학의 역학적 이론에 관하여 (On the Mechanical Theroy of Heat>란 논문에서 모든 언어에 두루 쓰이도록 그리스어의 ‘변형(tropy)’이라는 단어를 빌어 ‘energy’라는 용어에 유사하게끔 ‘entropy’라고 명명했노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 이론에 근거해 볼 때,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화가 인류의 미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어떤 것일까?
클라우지우스 등 당대의 석학들은 다같이 우주종말의 비관론에 휩싸였다.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 법의 우주론적 결과로써 ‘열죽음(heat death)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우주는 결국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이르러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원한 정지상태에서 이 세상은 시간이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종말에 이를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1877년 볼츠만에 의해 증명되었듯이, 엔트로피 법칙은 확률적 법칙이다. ‘맥스웰의 도깨비’를 등장시킨 사고실험에서 추론 되었던 것처럼, 이 법칙에 위배되는 과정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란 ‘한 떼의 원숭이들이 타자기 위로 멋대로 돌아다녀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모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가능성’보다 못한 것이다.
슈뢰딩거(Schrodingur)는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라는 유명한 저술에서 생명에 관한 물리학적 성격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가 생명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도입한 개념 중의 하나가 ‘부 엔트로피(negative entropy)’이다. 그는 생명과 엔트로피를 다음과 같이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유기체는 지속적으로 그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또는 정 엔트로피를 생산하며, 따라서 최대 엔트로피의 상태, 즉 죽음이라는 위험한 상태에 접근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오직 주위로부터 지속적으로 부 엔트로피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상태의 모면, 즉 생존을 취할 수 있다.” 슈뢰딩거가 생명현상에 도임한 네겐트로피(negentropy)의 개념은 부분계에 국한되는 것일 뿐, 어떤 이론이나 기술에 의해서도 계 전체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방면의 석학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건대, 결국 인류는 에너지 고갈과 특히 화석연료의 과다소비로 인한 환경문자의 심화로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엔트로피의 증가와 그에 따른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 앞에서, 엔트로피 증가가 초래할 수 있는 역기능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나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에너지의 확보와 사용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ns 세계 모든 나라가 고도의 산업화를 추구하는 한 공통된 문제이다. 현재로는 산업사회의 선진화에 비례하여 화석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와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화석연료는 고갈과 환경오염이라는 문제에, 원자력 에너지는 안전성 문제에 걸림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현실 비판 운동의 구체적 쟁점으로서 공해추방이나 원전 건설 반대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공해추방과 원전 반대라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사안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재생 에너지(아무리 소비해도 무한히 공급되는 자연 에너지)의 사용은 어떤가? 태양열, 지열, 풍력, 조력, 해양열 등은 환경 문제나 안전성 차원에서 가장 바람직한 에너지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에너지원은 아직 우리의 일상 생활에 널리 보급될 만큼 실용화 단계에 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그들 자원의 실용화가 상당한 과학 기술적 난제(難題)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세기의 전환점에 서서 인류 사회가 또 다른 단계의 문명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그 단계에 부응하는 사고의 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문명이 야기하는 엔트로피를 처리하는 데는 자연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 최상의 지속적 방법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귀결점에 이르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엔트로피 법칙은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 또는 서양의 근대 이전의 자연관에서 암시를 얻는다. 엔트로피 개념이 제시하는 ‘성장 한계론’ 또는 ‘반성 성장론’이 얼마나 강력하고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겠으나, 그 법칙의 골자가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해 시사하는 바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시각에 대해 예를 들면, 리프킨(I.Rifkin)은 역사상의 기술 혁신에 의해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잃는 것은 무엇인가, 선진산업 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경제·에너지·제도·가치관·과학·교육·종교·군사 등의 분야로 세분하여 구체적 데이터로 실감있게 제시함으로써 현대 문명에 탐닉해 있는 사람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준다.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을 문명 비판의 시각에 도입하고 있는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른바 세계관의 변혁을 촉구한다.
세상은 ‘끊임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으로 위기를 넘겨 왔는데, 이러한 문제는 최고 권력자나 대단한 사상가라도 해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붕괴 일로의 상황에 있는 인류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킨 주범이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없더라도 뜻있는 사람들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어찌되었건 물질적인 진보를 추구한다든가 ‘클수록 좋다’는 식의 고(高) 엔트로피적 개념이 헛되고 뜻 없는 것임을 탄식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체계였으면서도, 잊어버렸던 동양적 자연관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것이 결국 저(低) 엔트로피 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 아마 저 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하는 발전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과도 잘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옴살스런’(전체론적) 모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 이후의 과학과 동양의 오늘날의 과학은 그러한 원초적인 유기성(有機性)과 통일성을 깨뜨린 상태에서, 오로지 인간의 실리적인 관점에 탐닉하여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결국 자연을 무모하게 착취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현대인의 삶에서 과학과 기술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이 때 동양의 전통사상과 서양의 근대이전의 여러 사상을 현대의 과학기술 사회에 가져와 재해석하는 것은, 현대문명이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현대의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한 오늘날의 문명의 피폐현상은 치유될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한 책
- 스튜어트(김동광 역) 「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 김명자「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동아출판사
- P.데이비스 외(안상청 외 역)「과학혁명의 뉴패러다임」세종대학교 출판부
- 김용정「과학과 철학」 범양사 출판부
- 장회익「과학과 메타과학」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