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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혁명, 아이티 >
시작. 마르코스
“우리들은 발견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잘못 생각했다. ‘종족의 날’(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0월 12일의 축제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그 결말을 잘 안다. 우리는 그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관한 몇몇 문건을 지역 공동체에 돌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왜 우리가 노예 상태가 되었는지 보다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0월 12일에 축제를 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프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9일 기도회를 준비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교황은 우리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들어야 한다. 교황의 역할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교회이다.’ 오늘날에도 정복은 온갖 공포와 슬픔을 동반한 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축제를 기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수도사들은 성서가 말하는 것처럼 형제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노예상태로 만든 스페인 정복대의 일부로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프다.”1)
이 말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EZLN)2)의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말이다. 아이티 혁명에 관한 리포트에 왜 갑자기 뜬금없이 마르코스일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역사 기술은 기록 권력이 움직이는 무대이다. 마르코스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위에서 보듯 지금까지 서구 중심으로 쓰인 세계사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그리고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있어 1492년 10월 12일은 종족의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예의 날이었다. 지금까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의해 잊혀져있던 원주민의 역사를 그는 언어로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신대륙은 ‘발명’된 것이었다.
체 게바라
우리에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친숙한 체 게바라. 그는 의학도로서의 보장받는 부귀영화를 뿌리친 후 혁명을 선택했고, 초기 관료주의가 보장한 호사스런 생활을 떠나 진정한 저항군의 삶을 살았으며, 40세가 채 되지 않은 한창의 나이에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쓰러져 갔다. 그는 민중 혁명의 낭만적 신화 아이콘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3)
그의 일생을 다룬 평전이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고, 그의 얼굴이 나온 티셔츠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그는 이제 자본주의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문화 기호로서 ‘소비’되고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꿈꾸었던 이상이라기보다는,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관료로서의 편안한 삶이 아닌 끊임없는 혁명을 추구한 그의 모습일 것이다.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체 게바라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 혁명을 카스트로와 함께 일으켰고, 또 볼리비아의 혁명에 동참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ahora4)
2005년 12월 18일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에보 모랄레스가 당선되었다. 국내언론은 “볼리비아 첫 인디오 대통령 당선”으로 기사화했다. 2006년 1월 15일 칠레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미체예 바첼렛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내언론은 “칠레 첫 여성 대통령 당선”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 모랄레스는 볼리비아의 첫 원주민 대통령임에 틀림없고, 바첼렛은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모랄레스와 바첼렛의 대통령 당선은 볼리비아와 칠레에서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두 사건은 전혀 별개의, 서로 다른 나라의 대통령 선거일뿐인가? 국내 언론이 애써 무시하려 했던 것은 볼리비아와 칠레에서 ‘좌파’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두 나라만의 얘기도 아니고, 전혀 새롭지도 않고, 일회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1973년 전 세계 최초 선거로 탄생한 사회주의 정권인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의 비호를 받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1979년 혁명전쟁으로 탄생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가 미국의 경제봉쇄와 콘트라 반군과의 내전에 지친 시민들에 의해 1990년 2월 대선에서 패배하여 물러난 이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 등 일부 고립된 사례들을 제외하면 중남미 국가들에서 좌파정권은 과거지사가 되어 있었다.
1998년 12월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대선에 승리했을 때만 하더라도 쿠데타로 국가권력 장악에 실패한 군인이 대중주의5)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정치적 성공을 거둔 것쯤으로 언론은 치부했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차베스는 국가운영 실패와 부패에 대한 사회전반의 팽배한 불만을 자극하고 비공식부문을 중심으로 한 빈곤층에 선정적 레토릭으로 접근하여 계급 적대감을 부추겼고, 그 전략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베네수엘라의 역사적 조건과 특정 정치적 상황 속에서만 가능했던 대중주의의 성공이고,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예외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칠레 중도-좌파연합 꼰세르따시옹의 좌파 리카르도 라고스가 2000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고, 2002년 11월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듬해 1월 취임했고, 같은 해 5월 아르헨티나에서는 좌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정부가 출범하면서 중남미에는 좌파정권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스러져 간 체 게바라의 꿈이 긴 역사의 시간을 돌아 그의 피가 뿌려진 라틴 아메리카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스, 체 게바라,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이티
현재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마르코스, 그가 스러져 간지 30년이 지나서 대한민국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체 게바라 그리고 지금 현재의 미국 중심-신자유주의질서의 반기를 드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6)을 보면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가 다른 대륙들에 비해서 매우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매우 피상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를 알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한 마르코스와 대학교 1학년 때 내 싸이월드의 메인을 항상 차지하고 했던 체 게바라. 그리고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바람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현실에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강렬하고 저항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나의 근원적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현재에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유엔 총회에서 악마라고 비판할 수 있으며, FTA에 반대하는 민중무역협정 PTA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쿠바의 아바나와 브라질의 쿠리찌바는 생태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를 알고 싶어서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펼쳤다.
실제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는 혁명의 연속이었다. 물론 많은 반혁명들 역시 존재했지만 그것은 혁명에 대한 대항 작용으로서 존재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적 전통의 기원을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전쟁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7) 그러나 볼리바르보다 더 앞서서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혁명을 일으킨 곳이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아이티였다.
아이티 혁명이라고?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이티 혁명을 모르고 있느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글 서두의 마르코스의 말처럼 그들의 역사는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8) 흑인 노예와 그 자손들이 스스로 족쇄를 풀고 공화국을 세웠던 아이티 혁명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리만치 유럽 권에서도 소외되어왔다. 뛰어난 카리브 역사가인 미셀-로프 트륄로는 <침묵 지키는 과거 : 권력과 역사 생산>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9) 그는 중심부의 역사 기술이 지배의 차원에서 담론을 조작하고 불리한 담론을 삭제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아이티 혁명은 지배의 차원에서는 매우 불리한 담론이었기에 서구의 역사 기술가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데살린, 크리스토퍼 페티옹과 같은 흑인 지도자들은 민병대를 이끌고 아이티의 독립을 위해서 프랑스를 대상으로 게릴라전을 벌인다. 프랑스인들을 완전히 물리친 다음 1804년 1월 1일 데살린은 산 도밍고10)가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도 Haiti(산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토속어)로 개칭한다. 아메리카에서 미국 독립 1776년을 뒤 이은 쾌거였다. 이제 백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고, 농장주들은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아이티 혁명은 흑인들에게는 마른 가뭄 끝에 단비 같은 희소식이었지만 구미 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악몽’이었다. 특히 아메리카의 농장주들은 아이티의 열병이 자신들에게까지 전염될까 전전긍긍했고 그 소식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최초의 흑인 독립 공화국 아이티의 쾌거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의 역사를 남긴 기록물들에는 인종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백인들은 아이티 흑인들의 부두 신앙을 흑마술, 좀비, 미신, 식인풍습, 악마숭배와 연결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괴기소설이나 공포영화를 만들었다.11)
미국이 보기에 아이티인 들은 자치능력은 없고 미신에 빠진 미개한 흑인들이었다. 독립공화국은 그들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백인들만이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공화’국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백인들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1915년, 미국 해병대는 부두교에 빠져있는 ‘미개’한 흑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아이티를 점령한다. 그리고 1934년까지 ‘미개’한 섬 아이티에서 백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그리고 그곳에는 ‘인디오’들이 살고 있다고 우리는 배운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백인 중심적으로 기록된 역사이다. 라틴아메리카인 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구-백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된 그들의 역사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일어난 노예 혁명12)이자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 전쟁인 아이티 혁명에 이 리포트의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아이티
아이티는 전라도보다 약간 넓은 서인도 제도의 조그만 나라다. 지도를 놓고 보면 카리브 해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이 아이티 공화국이다. 동쪽 2/3는 도미니카공화국이다.
아이티 혁명에 대한 조사를 위해 네이버에 아이티 혁명이라고 입력을 하면 역사적 사실로서의 아이티 혁명(Haiti Revolution)이라기보다는 Internet Technology Revolution의 의미의 아이티 혁명이 등장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아이티 혁명에 대한 인식은 전무하거나 일천한 수준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티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독립을 한 나라이며, 1804년 세계 최초로 노예해방 혁명을 성공시키고 당시의 강대국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다. 아이티의 국기에는 이러한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에 자극 받아 불붙은 노예 혁명의 경과를 보여주듯 국기는 프랑스 삼색기를 닮았다. 결정적 장면은 가운뎃줄에 백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상징으로도 백인을 쫓아버렸다. 원래 삼색기의 백색은 평등의 백색이니 백색으로선 억울한 처사가 아니겠냐만. 그 자리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문장과 ‘단결은 힘’이라는 문구가 들어찼다. 민족주의가 성했을 때는 윗줄 파란색이 흑인을 뜻하는 검은색으로 바뀌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파란색이다.
1804년 아이티 혁명13)
1629년 프랑스의 모험가들(혹은 그렇게 오인되는 부랑자와 범법자들)이 산 도밍고 섬의 북부 해안에 상륙했다. 사탕수수 농장이 번성한 아이티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 해외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부유한 식민지였다.
식민본국 프랑스의 부의 원천이 된 산 도밍고는 ‘앤틸리스 제도의 진주’라 불렸다. 그건 백인들의 호주머니를 불렸다는 것이지 플랜테이션 노동을 담당하던 흑인과는 무관한 부였다. (흑인독립국이어서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는 손가락질은 가당찮다.) 호황에 비례해 고된 노동을 떠받칠 아프리카 노예들이 우리 같은 짐칸에 손발이 결박된 채 차곡차곡 쟁여져 ‘수입’됐다. 그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노예들을 짐승처럼 덫으로 잡아서 우리에 넣어 운반하고, 당나귀나 말과 나란히 세워 부리고, 짐승을 때린 막대기로 두들겨 패고 마구간에 처넣고” 하는 데 더해 노예주의 기분에 따라 “노예를 목까지 파묻고는 머리에 설탕을 발라 파리 떼가 꼬여 머리통을 파먹게 했”다.
극악무도한 노역 뿐 아니라 아주 짧은 기간에 이뤄진 인종혼합도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 섬은 카리브 해의 소돔과 고모라였다. 곧 백인 농장주들의 약탈과 강간으로 생긴 제3의 인종, 물라토(흑백혼혈)가 등장한다. 백인 농장주들은 차마 입에 옮기기도 힘든 잔혹한 방법으로 흑인들을 지배했다. 물라토들은 백인과 흑인의 중간지대에 서서 백인의 마름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경멸을 흑인들에게 돌려줬다. 흑인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1789년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내건 프랑스혁명이 바다 건너 산 도밍고를 뒤흔들었다. 빅 화이트14), 스몰 화이트15)와 혼혈인 물라토간의 정치적 갈등이 증가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왕당파니 애국파니 편을 가르며 싸웠고 이때를 틈타 물라토들도 정치적·경제적 권리를 따내기 위해 일어섰다. 본국 프랑스의 의회, 산 도밍고의 백인, 물라토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였지만, 아프리카 노예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 때 흑인들의 노예반란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지배층의 분열에 따른 힘의 공백을 노린 폭동이었지만 노예 반란은 한 달 새 4만 명이 가담하며 세를 불려가며 조직화된다. 구심점에는 확신에 찬 강력한 지도자 투생 뤼베르티르가 있었다.
투생 뤼베르티르은 마흔 살이 넘어 혁명에 참여해 탁월한 지도자로 부상한다. 투생의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의 부족장이었다. 총명했던 그는 주인의 마차꾼으로 발탁되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천부의 인권인 자유는 자기 자신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권리이다.” 노예혁명을 부르짖은 책을 접한 그는 “이제 필요한 것은 용감한 지도자뿐”이라는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1801년에 헌법을 작성한다. “이 땅에서 누구도 노예로 취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프랑스인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흑인들은 공화주의 프랑스에서 완전히 이탈할 생각이 없었지만. 프랑스인들은 카리브 해의 영국인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802년 나폴레옹은 1789년 이전의 노예제 법령을 회복시켰다. 투생의 군대는 현지 백인, 프랑스 군대, 스페인 침략군, 대규모 영국 원정대와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이 보낸 원정대를 차례로 물리쳤다.
1804년 1월 투생의 후계자인 데살린이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했다. 노예혁명으론 유일무이하게 성공한 혁명이었다.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은 세계 최초의 해방을 이뤄낸다.16) 지은이의 관점에 따르면 아이티 혁명은 중앙아메리카 모든 지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나중에는 쿠바 혁명에까지 이른다. 실제로 아이티가 독립한 지 3년 만에 영국은 노예무역을 접었다. 곧 이어 볼리바르의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빛바랜 혁명
아이티에서의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는 프랑스혁명의 경제적 토대였다. 이에 대해 한 프랑스의 역사학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인류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르도에서, 그리고 낭트에서, 노예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가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유와 인간해방을 부르짖던 그 자부심을 부여했다니 말이다.”17)
아이티는 그의 말처럼 프랑스혁명을 가능케 하였으나 결국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혁명 프랑스군과의 길고 긴 독립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107년간의 프랑스의 지배를 물리치고 1804년 아이티는 결국 독립을 하지만, 순수 흑인과 백인 혼혈인 물라토간의 권력 다툼으로 쿠데타와 무정부 상태가 계속 되다가 급기야 1915년에서 1934년까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군정을 받는다. 미군정으로도 수습되지 않던 아이티의 혼란은 미군정 이후 뒤발리에 부자의 29년간에 걸친 세습독재로 이어졌다.
아이티가 내전으로 얼룩진 시련의 땅과 생활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국민 절반 이상이 문맹이고, 평균 수명은 50세를 넘기지 못하며, 제국주의가 심어준 설탕 플랜테이션을 대체할 새로운 산업과 상품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미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힌다. ‘아직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면, 행복한 노예였다면’이라고 되뇌는 사람이 그 곳에 있을까.
나오며
나는 이번 학기에 운 좋게도 학점을 잘 주고, 공부에 별 부담이 없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문화 관련 수업을 2개나 수강하는데 성공했다. 하나는 지금 리포트를 쓰고 있는 스페인어권 문화의 이해이고, 하나는 불어권의 사회와 문화이다. 불어권의 사회와 문화 맨 첫 시간에 강사님은 불어권을 배우는 게 과연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 지에 대해 질문하셨다. 그 때 나온 말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길항 작용으로서의 ‘프랑스’였다.
실제로 나는 프랑스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나름의 독자노선을 보여주면서도 우리나라에서 몇몇 보수 언론들이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동참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인 양 호들갑을 떠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가 어떻게 잘 돌아가고 있는 지, 그리고 프랑스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어떤 것들이 있는 지를 배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내가 강의를 듣고 있던 도중 나에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표적 국가‘ 프랑스에서는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강력한 우파 사르코지가 큰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2007년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 좌파의 무기력한 패배를 보면서 나는 어느 정도에 내가 생각했던 프랑스에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새롭게 접하게 된 것이 바로 아이티 혁명이었다. <시민혁명과 근대사회>를 듣고 있는 내 친구 하나가 시민혁명의 가장 좋은 사례로 교수님이 아이티 혁명을 추천하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 귀로 흘렸지만, 내가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즉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성을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펼쳤던 아이티 혁명에 대한 책은 정말 오랜만에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백인 부르주아들이 백인 구체제 지배층을 몰아내는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백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백인 부르주아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티 혁명은 흑인들이 백인을 몰아낸 것이었고,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를 몰아낸 것이며, 노예가 주인을 몰아낸 혁명이었다. 3중의 어려움을 겪으며 더욱 힘들었을 혁명이었기에 나는 아이티 혁명에 많은 정이 갔다.
이 리포트를 통해서 나는 역사를 다양한 시선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역사에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어떤 특권적인 관점은 이론상 존재하지 않는다. 흑인의 시각에서 아이티 혁명은 독립의 영광스러운 역사였겠지만 백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티 혁명은 악마적인 부두교에 의해 홀린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역사는 다양한 시선으로 읽히지 않는다. 역사의 승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의제만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지금까지 역사의 승자였던 유럽, 백인, 남성의 시각으로 쓰인 역사서는 자연스럽게 제3세계, 유색인, 여성, 원주민을 타자화 시키고 왜곡시킨다. 아이티의 혁명 역시 그들로 인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이러한 유럽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 좀 더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좀 더 다양한 시선을 확보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들의 복원이 절실하다. 역사는 항상 승리하는 자들의 것이었다. 승리한 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에 저항하여 승리한다면 언젠가 미래에 ‘항상 패배했던 자들이 드디어 승리한 역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때 잊혀진 아이티 혁명에 대한 기억은 복원될 것이다.
1) 이성형,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p.30-31
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이다.
3) 필립 뷔통, 『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 p.170
4) ahora는 지금 이 순간, 현재를 뜻하는 스페인어.
5) 실제로 조선일보에서는 차베스를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독재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에 영합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포퓰리즘은 단어 뜻 그대로 인민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된다.
6) 지금까지 미국의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유럽 국가들이 우경화되고, 유럽 내의 좌파 정당인 노동당과 사회민주당도 우파 쪽으로 돌아서는 가운데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은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7)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자신이 추구하는 혁명을 신 볼리바리안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8) 한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어느 교과서에서도 아이티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9) 이성형,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p.204
10) 아이티가 프랑스로 독립하기 이전 프랑스 인들이 식민지를 부른 이름
11) 좀비를 다룬 미국 공포영화들은 대개 좀비와 부두교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부두교의 근원에는 항상 아이티가 존재한다. 이는 백인, 미국 중심의 잣대로 아이티를 보는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이다.
12) 대부분의 노예가 흑인이고 주인들이 백인이었다는 점에서 백인에 대한 흑인의 인종 혁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13) 이 부분은 2006년에 나온 시 엘 아르 제임스의『블랙 자코뱅』을 참고했다.
14) 백인 대지주, 부르주아 계급을 일컫는 말
15) 백인 소지주, 백인 하층민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
16) 아이티 혁명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다. 미국 역시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미국 흑인들의 자발적인 힘이라기보다는 남북 전쟁이라는 외생 변수로 인해 가능했다.
17) 시 엘 아르 제임스, 『블랙 자코뱅』,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