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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가? ⑧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잠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해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했고 그 형용을 보지 못했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나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5장 35절~43절]
주님 말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에서 ‘예수님께 나아간 뒤, 즉 예수님을 영접한 뒤 영생(중생)’이라는, ‘회심 뒤 중생’이라는 중생론 도식을 추출하는 이단은 돌트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알미니안들입니다. “믿음(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들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영접(회심)할 수 있는 것은 성삼위 성부의 영이시자 성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영생(중생)을 주셨기 때문이다.’는 진리, “중생은 믿음(회심)에 선행한다.”는 진리를 아는 우리 개혁 신앙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하며 ‘순간 중생 시 즉각 회심’이라는 중생론 도식을 추출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모두 믿더라.”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우리 개혁 신앙인들은 복음을 전할 때 “영생을 얻으려면 성경을 상고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바람이시자 하나님 예정의 주인이신 성삼위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도구(은혜의 방도)로 삼아 오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정된 나무를 향해 오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도구로 삼아 예정된 나무를 서서히 흔드시며 결국에는 그 나무를 꺾으신다.(여신다. 중생하게 하신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하]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모두 믿더라.
[행 13:48 하]
프란시스 튜레틴 《그는 분명하게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회심은 급작스러운 영혼의 사로잡힘임을 부정했습니다.(역주: 회심은 점진이라는 뜻)》
“급작스러운 영혼의 사로잡힘임을 부정했습니다.”는 프란시스 튜레틴 목사님 중생론에 대한 조엘 비키 목사님 평가는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로 하여금 ‘{양무리 마을} 연중론의 결정타’로 착각하게 만들어 “아멘!”을 외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러께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노승수 목사 신학은 구원론의 기본도 모르는 짬뽕신학입니다. 노승수 목사가 합신에 그만 침을 뱉었으면 합니다.” 하시는 합신 출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바보새 님, 바보새 님을 걱정하시는 이 목사님 말씀대로 바보새 님이 졸업하신 합신, 모교 명예를 그만 더럽히시고 일단 붓을 꺾으십시오. 일단 붓을 꺾으신 뒤 제가 말씀 드린 목사님, 바보새 님 합신 선배님이신 갈릭 목사님을 먼저 만나십시오. 갈릭 목사님을 만나신 뒤에도 계속 연중론을 주장하신다면, 그때는 제가 이보다는 예의를 갖춰 대응해 드리겠습니다.》는 댓글을 썼던 저에게 “튜레틴은 개혁파 신학자가 아닙니까? ㅋㅋ” 하셨던 바보새 노승수 목사님, 노승수 목사님에게는 그 감격이 더욱 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 신학 준비 은혜에 대한 강릉예명 목사님 글’에서 잘 드러납니다만, 개혁 신학 준비 은혜를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보다 더 먼저 말해 왔던 이른바 “순중론자”들 역시 ‘중생 전 일반 소명 영역으로서, 중생의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의 준비 은혜에 따른 일반 회심 과정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튜레틴 목사님과 똑같이 “회심은 급작스러운 영혼의 사로잡힘임을 부정했습니다.”
그러께 임진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 한아름 님, ‘성경 원어에 해박하신 갈릭 목사님’, 철수(어울림) 님, 그레이스 님, 이웃집 님, 해리 님, 아바드 님, 지계표 님, 좋은 편지 님, 진사 님 같은 여러 형제분들 수고로 “중생(회심) 상담”이라는 연중론의 불, 거듭나지 못한 붉은 용의 불이 꺼지는 줄 알았건만, 임진년 불씨를 되살려 놓으신 바보새 노승수 목사님······. 그리고 며칠 전 또 {양무리 마을}에 ‘루이스’라는 별명으로 인사말을 남기심으로써 손성은 목사님에게 청량제를 제공하신 노승수 목사님······. 손성은 목사님은 그 청량제가 스스로 판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독약임을 왜 모르실까요? 손성은 목사님과 노승수 목사님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셨다.’는 점입니다.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가? ②>에서 저는 윤영상 목사님 해석 글, 손성은 목사님이 번역하신 ‘조엘 비키 {은혜를 위해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 일부 내용을 가지고 해석하신 글, “개혁주의 안에는 두 가지 회심 과정 이론이 있는데, ···(중략)··· 이 이론에 의하면 고넬료가 사도를 통해 복음을 들어 회심하기 전에 그가 경건한 자였다는 기록과 그의 기도와 선행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고넬료의 신앙 상태를 효과적 부르심 이후의 복음적 은혜 상태에서 그의 신앙의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라고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는 윤영상 목사님 해석 글’을 비평했습니다. 그 비평 논지는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께 복음을 듣기 전에 이미 복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복음을 알고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복음적 은혜 상태”라는 윤영상 목사님 해석은 조엘 비키 목사님도 놀랄 그릇된 해석이다.’는 논지였습니다.
다음은 ‘홀리조이 <싱클레어 퍼거슨 이 책에 대한 서문>’에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이 올해 새해 아침에 정야베스 님에게 쓰신 댓글입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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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정리가 되면 이것만큼 깔끔하고 말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깨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는 것을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던 우리”인 것입니다. ‘예비 은혜’에 대한 것은 일반 은총 가운데서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은총 가운데서 ‘예비 은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설교자와 전도자는 믿든지 아니 믿든지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특별 은총 가운데서 ‘예비 은총’입니다. 이것을 청교도들과 개혁 신학이 강조해 왔습니다. 연중론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상하게도 연중론이 강조하는 이런 특별 은총 하의 ‘예비 개념’을 일반 은총 아래에서 주어지는 ‘예비 개념’으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정야베스 님에게 우리 주님 조명의 은총이 더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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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은총 가운데서 ‘예비 은총’입니다.”는 손성은 목사님 댓글·····. 다음은 ‘홀리조이 <서론: The Question of Preparation-왜 for grace인가? 그리고 예비 개념이 과연 알미니안적이고 율법적인가?>’라는 글입니다. 중요한 글만 옮깁니다. 그리고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 댓글들과 ‘하르’라는 별명으로 쓴 제 댓글들도 옮깁니다. 하늘색 배경색을 칠하는 제 댓글은 ‘눈여겨 봐야 할 손성은 목사님 글’이라서 하늘색 배경색을 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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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책 제목 전체는 {Prepared by Grace, for Grace}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The Puritans on God's Ordinary Way of Leading Sinners to Christ”입니다.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에 대한 청교도들 입장” 쯤으로 번역되겠습니다.
그 통상적인 방식이 무엇이냐는 것이 책 제목에 압축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곧, Prepared by Grace만이 아니고 Prepared for Grace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중략)···
조엘 비키 교수가 이 책 135쪽에서 말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에 대한 다음의 요약 평가를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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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이중의 접근 방식의 예비 개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표준들은 자연인은 회심을 위해서 어떤 공로적인 예비를 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이것은 칼빈, 퍼킨스, 펨블, 그리고 코튼 같은 이들이 로마 캐톨릭에 반대해서 갖고 있는 견해입니다.
둘째,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성령께서 율법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죄인됐다고 확신하게 해 주는 예비 작업을 하셔서 그 영혼들의 토양이 믿음과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갈아엎어진 토양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초자연적인 씨앗을 심겨 주시기까지는 믿음과 회개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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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하르 14.01.02. 17:02
‘조엘 비키 책 제목 “Prepared by Grace, for Grace”를 홀리조이 님이 “은혜에서 은혜로 예비되다.”로 번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by” 뒤에 있는 “Grace”와 “for” 뒤에 있는 “Grace”는 ‘같은 개념’으로 생각됩니다.
┗ 하르 14.01.02. 17:03
그런데 첫째 단어 “Grace”는 그야말로 ‘준비(예비) 은혜’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 단어 “Grace”는 ‘특별 은혜’, “saving in Christ.”, “초자연의 씨앗”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Prepared by Grace, for Grace”라는 제목을 ‘의역’하자면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가 될 것 같습니다.
홀리조이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holyjoy 14.01.02. 17:09
조엘 비키 말을 그대로 옮겨보지요:
“Therefore let us be clear that in this book we are not talking about Puritan preparation for good works, trials, Christ's return, taking the Lord's Supper, hearing the sermon, or other such matters. We are specifically speaking of preparation for saving in Christ.”
┗ 하르 14.01.02. 17:14
똑같은 개념이라는 뜻인지요?
┗ holyjoy 14.01.02. 19:40
이상하게도 거꾸로 읽으시는군요. 똑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본문에서도 똑같은 개념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이상하게 왜 거꾸로 읽으시려고 하시지요?
┗ 하르 14.01.02. 20:07
제가 거꾸로 읽었다는 뜻은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는 의역이 잘못됐다는 뜻입니까? 정말 몰라서 여쭙니다.
하르 14.01.02. 20:34
홀리조이 님은 위 본문에서 “Prepared by Grace, for Grace”를 해석하시기를 “그 통상적인 방식이 무엇이냐는 것이 책 제목에 압축돼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곧, Prepared by Grace만이 아니고 Prepared for Grace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라는 의역이 잘못된 번역이면 “잘못됐다.”고 하시면 됩니다.
┗ 하르 14.01.02. 20:34
그러나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라는 의역이 바른 번역이라면 “두 가지 방식”이 아니라 ‘특별 은혜를 위한 준비 은혜’라는 ‘한 가지 방식’ 밖에 없기 때문에 여쭈는 것입니다.
즉, “Prepared for Grace(은혜를 위해 준비되다)”에서 “Prepared(준비되다)”는 “Prepared by Grace(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특별 은혜를 위한 준비 은혜’라는 ‘한 가지 방식’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 holyjoy 14.01.02. 20:32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는 의역이 결코 잘못된 번역이 아닙니다.
┗ holyjoy 14.01.02. 20:34
만일 한 가지 방식만을 강조해야 한다면, 그 한 가지 방식은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 모두를 포함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하르 14.01.02. 20:36
예. 잘못된 의역이 아니군요. 친절하게 답변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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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방식”이라는 손성은 목사님 주장······.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 준비 은혜에 대한 조엘 비키 목사님 설명’은 손성은 목사님이 뜻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까? 손성은 목사님이 우리말로 옮기신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 준비 은혜에 대한 조엘 비키 목사님 설명’을 다시 옮깁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전”은 강조하려고 제가 더하는 말입니다. 하늘색과 노랑색과 빨강색으로 칠하는 배경색은 아래에 옮길 강릉예명 목사님 글ㅡ“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의 준비 은혜 개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강릉예명 목사님 글ㅡ에 적힌 말들을 위해 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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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이중의 접근 방식의 예비 개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표준들은 자연인은 회심을 위해서 어떤 공로적인 예비를 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이것은 칼빈, 퍼킨스, 펨블, 그리고 코튼 같은 이들이 로마 카톨릭에 반대해서 갖고 있는 견해입니다.
둘째,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성령께서 율법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죄인됐다고 확신하게 해 주는 예비 작업을 하셔서 그 영혼들의 토양이 믿음과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갈아엎어진 토양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초자연의 씨앗을 심겨 주시기 전까지는 믿음과 회개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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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이중의 접근 방식”은 위 “첫째”와 “둘째”입니다. 그러나 손성은 목사님이 이해하신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이중의 접근 방식”은 ‘일반 은총 아래서 준비 은혜’와 ‘특별 은총 아래서 준비 은혜’입니다.
손성은 목사님 이 이해를 윤영상 목사님 이해로 바꾸자면, ‘일반 은총 아래서 준비 은혜’는 ‘연중론 1차 중생 후부터 2차 중생 전 복음적 은혜 상태, 즉 2차 중생을 위해 분투하는 기간, 연중론 임신 기간 복음적 은혜 상태’입니다. 그리고 ‘특별 은총 아래서 예비 은혜’는 ‘연중론 2차 중생 후 복음적 은혜 상태’입니다.
그러나 조엘 비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인정하는 이중의 접근 방식”은 ‘중생을 위한 준비 은혜가 있다. 그러나 준비 은혜로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가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천주교나 알미니안 준비 은혜 개념은 중생에서 신인협동을 강조하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대하는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 은혜 개념은 중생을 위한 준비 은혜조차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개념이다. 즉,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 은혜 개념은 신인협동 개념이 아니다.’입니다.
‘조엘 비키 {은혜를 위해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 전체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만, ‘“이 두 가지 방식”라는 손성은 목사님 말은 “이중(두 가지)의 접근 방식”이라는 조엘 비키 목사님 말을 오독하신 데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제가 ‘하르’라는 별명으로 ‘손성은 목사님이 조엘 비키 목사님 책 제목을 {은혜에서 은혜로 예비되다.}로 번역하신 일’을 두고 이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제 {페북} 담벼락에 ‘존 머레이 목사님 준비 은혜’에 대한 글을 올렸을 때, “알미니안 예비 은혜와 무엇이 다릅니까?” 하셨던 윤영상 목사님······. 그리고 “예비 개념이 과연 알미니안적이냐?”는 물음을 하시는 손성은 목사님······.
이 시점에서 개혁 신학 준비 은혜에 대한 강릉예명 목사님 핵심 문장들을 옮깁니다.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강릉예명} 카페에서 이 글을 마우스 님이 옮기시고,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이 “강릉예명은 토론 불가 대상입니다.”며 삭제하셨던 이 글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 준비 은혜에 대한 조엘 비키 목사님 설명’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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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는 복음 전도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새 생명의 씨를 주입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십니다.
일반 은혜로서 일반 소명은 중생을 위한 하나님 부르심의 수단입니다.
한 번 중생과 함께, 중생을 통해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사람은 결코 그 신앙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을 통해, 중생과 함께 회심한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를 떠나 타락할 수 없습니다. 중생의 생명은 비록 그가 일시적으로 타락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유기적으로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중생에 이르도록 그 마음을 각성하게 하시는 외적 소명은 모든 인간을 향한 것이며 그들에게 남겨두신 종교심을 통한 그 마음을 개간하시는 사전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일지라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는 준비 은혜가 새 생명을 가리키는 것은 전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준비 은혜는 의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지만 전혀 중생 자체와는 조금도 오버랩된 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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