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8.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행 16:35~40
*제목; 사도행전강해(29) 복음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보라!
1. 하나님의 로마를 향한 마음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를 친히 준비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를 담당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행 16장’이 그 하나님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이었습니다.
먼저 ‘로마 선교’를 계획하시고, 이를 위해 ‘인간의 어리석은 다툼들’(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속에서 로마 선교사(바울과 실라)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루트(로마를 향한 루트)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공에 취해 여전히 ‘소아시아’에 머무르려 하기에, 성령님이 두 번이나 경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자, ‘마케도냐 사람 환상’을 통해서 유럽으로 그리고 로마로 나아가기를 최종적으로 종용하십니다.
인간이 성공이 하나님의 승리로 이어져야 진정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로 바울이 바울이라, 그 성공의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 생면부지의 땅 ‘마케도냐’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성 “빌립보”에 들어갑니다.
당연히 그곳은 바울의 전도방법이었던 ‘회당거점 전도’가 불가능합니다. 유대인 남자 10명이 없는 완전한 이방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기도처’를 찾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믿기에 믿음의 자녀들은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Waymaker”이십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새로운 복음 전도의 길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그곳에서 기도처(빌립보교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도와주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심한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곳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이해가 되는데 갑자기 찬송을 시작합니다. 왜일까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들었고, 이를 감당하겠다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이 이루실 로마 선교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듣는 것이요, 하나님의 꿈을 내 비전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를 고백하며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에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자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물을 때, 그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행 16:31’입니다.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1)
주를 믿으십시오. 주님을 따르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날이 새매
이제 이러한 놀라운 일이 밤새 있었음을 들은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를 급하게 풀어주라고 이야기합니다. ‘35~36절’입니다.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행 16:35~36)
이들을 풀어주라는 상관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복음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으로 살면, 세상으로부터 이런 경외로운 마음과 태도를 경험케 됩니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입술이 문제가 아니라, 이처럼 복음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출옥 명령에 바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합니다. ‘37절’입니다.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행 16:37)
왜 바울은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이런 고초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또 이제 와서야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회당을 돌면서 유대인들을 전도한 이유도 이러한 동족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냐’로 가서 바로 자신이 ‘로마인 행세’를 한다면, 앞으로 유대인들 전도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은 안 바울이 스스로 숨긴 것입니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 안 듣는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중심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떠난 후에 ‘빌립보 교인들’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옥중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그 계획에 순종하는 자가 되길 소원하였고, 이를 통해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남겨진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루디아, 점치는 귀신들렸던 여종, 간수와 가족, 죄수들,... 정말 보잘 것 없는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밝히지 않았던 ‘로마시민’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로마시민이 만든 교회를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옥에서 나온 후에, 가장 먼저 ‘빌립보 교회’를 찾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40절’입니다.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행 16:40)
앉으나 서나 복음과 교회 생각, 하나님을 향한 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토록 사랑하게 한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 마음 중심에 늘 하나님, 사명, 교회가 자리하는 복된 자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바울이 옥에서 풀려나는 상황에서 갑자기 "자신이 로마인"임을 주장하고 상관이 와서 사과하고 직접 데리고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뒤늦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연약한 빌립보 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바울은 마음(중심)은 교회와 하나님, 영혼구원과 교우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이 마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심은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