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한신대 명예교수)의 知天下 ㅡ ‘친구는 제2의 자신(自身)이다’
매달 한 번씩 친구들과 토요일 아침 모임을 한다. 조촐한 아침 식사로 시작해 주변 공원과 천변을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대화 주제는 삼라만상을 망라한다. 우주의 블랙홀과 기업 경영 비사(祕史), 역사와 명사(名士)들 계보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정치와 종교 이슈는 자제한다. 크게 다투기도 했던 경험에서 나온 나름의 지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재테크 얘기는 사라지고 건강한 노후생활에 관심이 집중된다. 웰다잉과 유서 쓰기, 부모님 묫자리와 풍수로 화제가 뻗어 나가기도 한다. 어느 날 금융계에서 퇴직한 친구가 불쑥 칸트의 선험적 주관성(☆)이 무어냐고 내게 물었다. 유튜브로 이것저것 공부하는 노익장 학구열이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한 사람씩 자유 주제에 대해 '10분 강의'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난 가을 공원 벤치에서 드디어 내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평생 철학사 강의한 가락을 살려 칸트 철학에 대해 열변을 토했건만 청중 반응은 미지근했다. 아리송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나의 한계인지 칸트의 한계인지 알 수 없었다.
의대 병원장으로 퇴임한 친구가 공원 정자에서 조선 당쟁사를 설명하는데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예컨대 이 퇴계 사돈의 팔촌까지 그 학맥과 혼맥, 고향과 장지(葬地)를 연도까지 읊는 것이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임에도 요즈음 기억력이 감퇴했다고 툴툴대면서 우리를 은근히 기죽인다. 세무사무소를 운영하는 다른 친구는 지난겨울 추사 세한도에 대해 일생 쌓아 온 공부를 풀어놓았는데 자료까지 출력해 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절판된 명저들을 수십권씩 사놓았다가 나눠주기도 한다. 이제 날이 풀렸으니 ‘월례 야외 10분 강좌’가 재개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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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유용성이나 쾌락에서 나오는 우정은 곧 사라진다. 인간관계도 그렇거니와 우정에서도 받기보다는 베푸는 게 중요한 이유다. 우리 모임도 작게나마 그걸 실천한다. 신어 보니 시원하다며 한지(韓紙) 양말을 나눠준 친구와, 썬크림이나 손수건을 주는 친구도 있다. 모임 때마다 재래시장에서 찹쌀떡을 사 와서 모두에게 안겨주는 친구도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런 선행(善行)을 격렬히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남기며 폭소를 그치지 않는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이 친구들과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한다. 몇 년 전 전남 신안과 목포를 다녀왔는데 목포역 앞에서 출발하는 1004섬 신안 시티투어가 훌륭했다. 1인당 단돈 만 원에 한나절 동안 자은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 등을 버스로 둘러보고 점심까지 준다. 공무원 퇴직 후 문화해설사로 봉사한다는 안내자의 재능기부가 정겨웠다. 트로트, 판소리, 아나운서 성대모사로 향토애를 풀어내는 사투리가 구수했다. 진짜배기 고향 사랑이다.
한때 사진을 공부했다는 미명으로 촬영 권력을 독점한 친구 덕분에 우리 일행은 계속 모델 노릇을 해야 했다. 퍼플섬 다리 위에선 우리의 ‘여고시절’(?)을 추억하는 숨바꼭질 단체 사진을 시연했다. 동심으로 돌아가 웃음꽃 만발한 하루였다. 장난기 어린 농담으로 하루 만에 한 달 치 웃음을 다 웃게 된다. 강릉·서해안·공주 여행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한다. 볼거리·먹거리에 정담(情談)이 더해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삶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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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오래 겪어보아야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우정은 소금 몇 말은 함께 먹어봐야 완수된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정다운 까닭은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친구는 알아주는 이 없어도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서로 다르면서도 동등한 관계에서 태어나는 게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
*조선일보 2024. 4.20(토)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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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ver.me/xdfTTNU3 ㅡㅡㅡ ☆ -1>칸트의 관념론-
https://naver.me/Gis2k9lV -2>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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