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발흥과 제국과 도시의 그리스화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7세기 들어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제국에 시리아, 이집트 등의 곡창 지대를 빼앗기자 황제 헤라클레이오스는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 주어졌던 무료 빵 지급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674년부터 67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이슬람 군에 의해 해마다 포위되었지만 강력한 수도의 성벽 그리고 이 무렵에 발명된 비밀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이용하여 이슬람 해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잇따른 전란으로 시민 수는 줄어들고, 수도나 공중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도 방치되어 시내는 텅 비다시피 했다.
717년부터 718년 사이에 다시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지만 황제 레오 3세에 의해 이슬람 군이 격퇴되고, 이후 동로마 제국도 국력을 회복하면서, 콘스탄티노플에도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 제국은 700년간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패로서 큰 역할을 맡게 된다. 물론 본의는 아니었다.
오랜 숙적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순식간에 멸망당한데 비해 동로마제국은 많은 영토를 잃기는 했지만 두 번의 대 포위를 견디어 내고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플 덕분이었다. 도시의 방어력이 충분히 증명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위용을 되찾았다. 하지만 도시의 성격은 변했다. 전차 경주에 열광하던 고대의 시민 대신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 등의 기술자와 동서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많이 사는 상공업 도시로서 변신하였던 것이다.
사실 도시의 정신적 성격 역시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옮긴 순간부터 미묘한 변화가 시작했다. 헬레니즘 세계에 이식된 로마제국이 서서히 그리스화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530년경 유스티니야누스 황제는 라틴어로 쓰여진 기념비적인 로마 법전을 새로 편찬했으나 라틴어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마지막 황제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옛 제국은 형식상으로 계속 존속했고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여전히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여겼지만 로마제국의 옛 정체성은 점점 사라져갔다.
시민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궁정과 관청에서도 이내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플은 10세기가 넘어가기 한참 전에 완전한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물론 열렬한 그리스도교 도시이기도 했다. 교회는 겉으로만 로마의 교황을 섬기면서 동방정교회 의식을 따랐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사실상 교황과 황제들은 십이사도와 동등하다고 자부했다. 동방의 로마 제국은 거의 그리스 화 되었다. 라틴어는 그리스어로 대체되었고, 로마법도 그리스어로 씌여졌고 그리스 재판관에 의해 해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