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역사는 지중해에서 시작이 되었고 진화돼 온 과정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었다.
그 전쟁이 품고 있는 전투 가운데는 역사를 바꾼 전투가 많은데,
고대의 전투 중 역사를 바꾼 전투를 이렇게 들 수 있다.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경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 온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 사이 벌어진 전투,
지상전의 열세를 해전에서 단숨에 호전시키는 전략을 구사 한 아테네의 테미스.
여기서 완패당한 페르시아군은 철수하고 그 후로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침략을 체념했다
이 시대 이후 현대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 문화와 문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에게 해는 페르시아 해가 됐을 것이다.
이수스 회전,
기원전 333년 동지중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이수스 평원에서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랙산드로스가 이끄는 그리스군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군대가 격돌한 회전.
페르시아군 15만, 알랙산드 군은 그 5분 1밖에 안되는 전력.
겨우 200명의 전사자만 내고 완승을 거두었는데 그 후 한 번 더 회전을 치루었지만 결국 다리우스는 만회하지 못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한다.
그리고 해외로 웅비하는 기상이 왕성한 그리스인은 이 알렉산드가 만들어낸 제국의 각지로 널리 진출했다
지중해와 중동 지방만이 아니라 오늘 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페르시아 제국 심장부인 메소포타미아 지방 까지 도시를 건설한다
포에니 전쟁의 자마 회전
기원전 202년 당시 카르타고 영토였든 북아프리가 자마 평원에서 로마의 젊은 지휘관 스키피오, 카르타고 총사령관은 그 때 까지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명장 한니발.
결과는 로마 쪽의 완승. 포에니 전쟁은 거의 1세기 동안 3차에 나뉘어 벌어지지만 이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마무리한 자마 회전이었고 이로써 서지중해에서 오리엔트( 카르타고는 중근동의 페니키아인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고 따라서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그리스. 로마 세계로 만드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알레시아 공방전
기원전 52년. 오늘 날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의 알레시아 평야를 무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이끄는 로마군 5만명과 갈리아 부족들이 연합한 30만 대군 사이에 벌어져,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을 결정하는 전투가 된다
이전 까지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서만 패권을 확대했지만 이 전투로 우럽 북부까지 로마 세계에 편입.
만일 알레시아 공방전이 갈리아의 승리로 끝났다면 후세의 프랑스와 영국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가진 전투를 역사를 바꾼 전투나 역사를 창조한 전투라고 한다
여기에 312년 10월 27일에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 전투도 같은 맥락의 사례로 꼽힌다
이 전투가 그후 1천년 동안이나 계속된 중세로 가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고 중세 1천년에 머물지 않고 오늘 날 까지 지속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를 향해 첫 발자국을 찍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격하는 콘스탄티누스와 방어하는 막센티우스,
무슨 거창한 전략이나 기묘한 전술이 가미된 것도 아니고 그냥 멍청한 막센티우스라는 지휘관 아래서 4만 정도의 적 앞에 17만의 보병과 1만8천의 기병이 쪽도 못쓰고 밀비우스다리위와 주변에서 압사, 혼란 그 자체로 살륙을 당한 결과.
다리가 좁아 테베레 강의 급한 물살에 휩쓸린 병사는 무거운 장비로 인해 물 밖으로 얼굴도 못내밀고 가라앉았다.
34살의 막센티우스는 이튿날 강바닥에서 인양되어 참수 당하고 잘린 머리는 창끝에 꽃혀 수도에 입성하는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선두에 섯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쪽에서는 천하를 판가름한 싸움으로 평가했다
우리가 역사를 즐기려면 아무래도 기억해 두어야 하는 해가 있는데 "서기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다
로마 제국 두 명의 황제가 함께 기독교를 공인하는 해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한 것은 서기 313년이 아니라 2년 전인 311년에 제국 동방의 정제( 로마가 땅이 넓어져서 다스리기 용이토록 서방 정제와 부제, 동방 정제와 부제, 그기다가 나중에는 중앙의 황제 까지 다섯명이나 되는 혼란의 시기도 있었다)인 갈레리우스가 이미 공인했다.
그런데도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은 313년 6월에 공표된 밀라노 칙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돼 있다.
왜일까?
기독교도들이 오늘 날 까지 대제라고 부르는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의 업적으로 해두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다신교인 로마에서 이제 "기독교도 로마의 종교로 인정한다"가 5십년 뒤에 그 아들 콘스탄티우스에 가서는 "기독교만 로마의 종교로 인정한다"고 변해버린다
이로써 로마는 외적이 아니고 내전으로 인한 말기증세가 차츰 그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하게 된다.
밀라노에 기차로 첫발을 디디게 되는 시간에 그 시대의 상상이 나를 차악 가라앉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