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18
박초이
역사학과
역사학입문
[답사레포트]
답사를 떠나기 전
2010년 중앙대 역사학과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다녀온 춘계정기답사였다. 처음 가보는 답사라 기대되고 설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3박4일간의 답사를 온전히 100%나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답사부에서 진행한 ‘춘계정기답사 사전교양’과 답사 스터디에서 진행한‘ 스터디 모임’에도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녀온 사전교양은 3박4일간의 답사코스를 전체적이고 요약적으로 간결하게 설명한 것 이였고 스터디는 집중적으로 불상과 절을 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점은 이번 춘계정기답사의 주제가 ‘백제문화’라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백제문화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았었나싶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지도 모르지만 비교적 우리가 고구려와 신라의 역사에 친숙한데 비하여 백제에 대한 역사는 그에 비해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서화된 백제에 관한 사료가 신라와 고구려에 비하여 부족한 게 크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나의 부족한 백제문화권에 관한 지식으로 많은 불안을 안고 떠난 답사여서 많이 걱정되었다.
2010 춘계정기답사
날씨가 맑았다. 화창하고 적당한 햇빛이드는 날씨여서 인지 모두들 들떠있었다. 특히 태안 마애삼존불로 가는 길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많이 훼손되어 얼굴이 불분명하고 얼굴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윤곽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불분명하게나와 본래의 느낌을 가져올 수 는 없어서 실망했지만 내 눈에 담아왔으니 만족한다. 설명에 따르면 태안 마애삼존불은 다른 불상과는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보통 1구의 불입상과 2구의 보살입상의 형태를 갖고 있는 반면 태안 마애삼존불은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의 특이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불보살의 정확한 명칭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어떤 이유에 이것이 만들어 졌는지 또한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게 왼쪽이 석가여래 가운데가 관음보살 그리고 오른쪽이 약사여래로 본고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위로하고 민심을 잡기위해 만들었다고 추청 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은 건 불상의 법의의 표현이다. 두툼한 무게감이라던 지 늘어져있는 정도 주름의 깊이 그리고 목 부분이 깊게 파인 부드러운 U자형 법의가 인상적 이였다. 또한, 굉장히 입체적 이였다. 실제로 불상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옆에서 봐도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듯한 표현력이 기억에 남는다. 이러한 것들이 오로지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이 당시 백제의 수준을 알게 해주었다.
백제시대의 구체적이고 예술적인 불상표현은 태안마애삼존불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장소였던 서산마애 삼존불의 인자한 표정을 보았을 때 비로소 왜 이것이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 우는지 알게 되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1구의 불입상과 2구의 보살입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고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의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 과 왼쪽에는 미륵보살이 서 있다고 보기도 한다. 본존은 태안마애삼존불과 동일하게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친 수인인 통인通印을 취하고 있다. 태안마애삼존불과 흡사하게 서산마애삼존불 또한 두툼한 법의의 표현이라던가, 옷자락이 접히는 부분의 정교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을 가늘게 뜨며 환하면서도 사람의 마을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가 인상적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만큼은 변함없이 한없이 따듯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태안만애삼존불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굉장히 양호한 상태여서 세세한 표현까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실제 사람을 모델로 삼아 새겨 넣은 듯한 얼굴표정과 발가락까지 표현한 세밀함까지 볼 수 있어 좋았다. 서산마애삼존불 또한 입체적으로 앞으로 ‘스윽’ 걸어 나오는듯한 모습이 인상적 이였고 양옆의 2구의 보살들의 입체적인 팔동작, 다리동작, 그리고 표정까지 인상 깊었다. 다시 한번 백제인의 정교한 기술과 예술성 그리고 표현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태안마애삼존불보다 발전된 양식을 보여주어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태안마애삼존불보다 후에 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셋째 날 부여박물관 관람 중 서산마애산존불의 모형을 보았는데 내가 느꼈던 백제의 인자함 온화함 정신적 풍요로움과는 달리 인조적이고 딱딱하며 백제의 특유의 표현의 향을 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 진품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백제문화와 이에 관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국립부여박물관 관람을 가기 전 여러 동기들이 술렁이기 시작 했다. 모두들 국사책 표지로만 보았던 백제 금동대향로를 실제로 본다고 생각하니 많이들 기대되었나보다. 사진으로만 보던 백제금동대향로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 이것이 오래된 백제시기의 유물인 것을 빼면 별 매력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실제로 백제의 향로를 보고 박물관을 떠날 때까지 눈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중국이 이것을 보고 백제가 그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라고 했다면 말 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보면 믿을 수 없이 정교한 기술과 세세하게 그려진 사람들의 표정, 연꽃잎 끝부분과 어느 하나 같은 모양, 같은 표현방법을 쓰지 않은 산봉우리의 정교한 모습 그리고 우아한 봉황과 권위있는 용의 동작 그리고 움직임을 실제 그대로 이 향로에 옮겨 논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향을 피워 연기가 산봉우리 봉우리 마다 피어오를 모습을 상상하니 상상만으로도 넋을 잃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손으로 그것도 6세기 때 쯤 이렇게 알맞은 균형, 전체적인 웅장함, 정교한 기술 그리고 독특한 표현력이 가능 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교과서에서 백제를 표현할 때 번번하게 쓰이는 ‘문화의 발달’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백제 금동대향로 또한 위덕왕을 구하러 떠난 출정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성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덕왕 그리고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백제 금동대향로
카리스마 넘치는 왕으로 기록된 성왕의 아들이자 백제 27대 왕 위덕왕과 그리고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그리고 백제 금동대향로에 대하여 말해보자 한다. 위덕왕은 용감하지만 소박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진다. 태자 때부터 전쟁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 또한 보여주었다. 하지만 544년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한다. 결과는 처참했다. 수많은 군사들과 자신을 지지해줄 신하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성왕의 죽음까지 맛보게 되었다. 그는 전쟁에서의 패와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위를 물려받지 않고 승려가 되어 절에 들어가겠다고 말하였다. 그때의 위덕왕이 느낄 수 있었던 패배감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 그리고 무거운 책임감을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느낄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위로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태안마애삼존불 그리고 백제 금동대향로가 있다. 또한 왕위를 물려받은 위덕왕은 실패한 전쟁과 신하들의 불신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서산마애삼존불까지 위덕왕과 백제 나라자체의 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 호류사에 있는 관음보살상이 실제 위덕왕이 성왕의 얼굴을 본떠 만든 불상이라 한다.
태안마애삼존불의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 대게 왼쪽이 석가여래, 가운데가 관음보살 그리고 오른쪽 부처를 약사여래로 본다. 하지만 이것이 위덕왕때 제작되어진 것으로 본다면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물품」 에 관세음보살이 무진의보살로부터 받은 보주를 둘로 나눠 하나는 좌측의 석가모니불에게 올리고, 남은 보주는 우측의 다보불에게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이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이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함과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초월적인 깨닮음의 상징인 부처보다는 중생의 구원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중앙에 배치함으로서 두 가지를 표현하기위한 위덕왕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그 중 가장 위덕왕의 성왕의 대한 마음이 가장 잘 들어난 것은 백제 금동대향로라고 본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받침, 몸체, 뚜껑으로 이루어져있다. 받침은 용이 연꽃을 뿜어내고 있으며 몸체는 아직 봉우리 진 연꽃을 산봉우리처럼 표현해 가지각색의 사람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뚜껑은 봉황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뚜껑의 봉황은 부여를 상징 한다고 말한다. 성왕은 특히 부여를 백제의 뿌리임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이 주장으로 하여금 백제가 부여를 계승하여 삼국의 종주국임을 증명하려는 셈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성왕의 뜻을 담아 향로의 뚜껑부분에 봉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몸체의 연꽃은 불교에서 세관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심을 말한다. 이러한 연꽃의 산봉우리에 시켜 여러 사람의 형체와 자유로운 몸짓 표정을 표현하여 성왕의 죽음을 기리고 극락의 세계에서의 아버지의 안녕을 기원하려는 위덕왕의 마음이 엿보였다.
비록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죽음과 계속되는 전쟁에서의 패와 확실한 왕권을 구축하지 못한 자책감 그리고 왕위를 태자에게 바로 물려줄 수 없던 상황까지 겪은 위덕왕이지만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그리고 백제 금동대향로를 보면서 이제는 어엿한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러한 것들을 모두 다 쏟아버리고 권위를 되찾으려는 그의 뜻이 나에게는 보였다. 역사는 그를 별다른 업적이 없는 왕으로 기록한다. 백제 중흥의 터전을 만들어 성군으로 기록되는 그의 할아버지 무녕왕 그리고 진취적 이였던 할아버지를 본받아 백제의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로 옮기는 국가적인 사업을 진행한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 성왕에 비하여 위덕왕은 왕으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번번한 전쟁의 패로 귀족들의 실세에 눌려있던 왕권이 결국 그를 업적이 없는 왕으로 기록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위덕왕은 시도와 마음가짐은 좋았지만 결과가 그의 열정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던 왕이 아니었다 싶다.
답사기 그리고 답사를 마치며
이번 답사기에 중요한 힌트가 되었던 건 카페에 올라와있는 박경하교수님의 답사기였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로 시작된 교수님의 답사기에서 ‘효’라는 키워드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바로 ‘위덕왕’이였다. 위덕왕부터 시작하니 여러 가지치기가 가능해졌다.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위로하고 그의 죄책감을 덜고 떨어진 왕권을 구축하고 민중의 마음을 바로잡기위하여 그가 노력한 것들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던 기회였다. 막상 답사 그 현장에서는 느끼지 못했지만 답사 후에 차근차근 하나하나 되짚어볼 때 수많은 의미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답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해 역사학과 학생으로서 처음 떠난 답사는 물음표 반 느낌표 반이였다. 맑은 날씨 들떠있는 마음으로 떠난 답사는 어리둥절 버스가 나를 이끄는 대로 책에서 본 것이 실제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체 맑은 날씨와 답사라는 향에 취했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차분해진 그리고 한껏 울적해진 날씨의 영향인지 내 마음까지 차분해 진 것 같다. 첫째 날에 비해 여기저기 꼼꼼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답사지를 들쳐보며 이것저것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처음 이 기행문에서 난 백제의 역사적 자료가 비교적 빈약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마치고 그것은 나의 큰 착각 이였다고 생각한다. 국내 어느 삼존불에서 이러한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태안 마애삼존불부터 웅장한 크기에 압도당한 미륵사지까지 백제의 길고 깊은 역사와 그들의 독특한 문화, 예술 그리고 삶까지 느껴볼 수 있는 답사였다고 생각한다.
답사가 끝난 지 4일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본 백제금동대향로의 위엄과 엄마같이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의 입 꼬리가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