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기존체제 벗고 탈유럽화 가속화…개혁 가속도
세계 가톨릭계가 술렁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성직자성(聖職者省·Congregation for the Clergy) 장관으로 한국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69) 대주교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럽 출신 성직자들이 장악해 온 로마 교황청(The Vatican) 핵심 보직에 가톨릭계 변방인 아시아의 지역 교구장을 서임한 것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동안 여러 차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으나, 이번 인사가 가장 예상 밖이었다는 평가다.
500년 역사를 지닌 성직자성은 교황청 행정기구인 9개 성(省) 중 주요 부처로 꼽힌다. 역대 장관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추기경들이 맡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에 한국의 주교를 대주교로 승품시키면서까지 서임했다.
올해 김대건 탄생 200주년…유흥식 대주교, 교황 방북 중재자 역할할 듯
이에 대한 가톨릭계의 해석이 분분한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 즉 유럽 중심의 가톨릭교회를 ‘탈중앙화’하는 작업의 하나라는 것이 그 첫 번째다. 다음으로는 올해 ‘김대건 성인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을 맞은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세계 평화를 위해 남북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교황이 방북(訪北)을 추진하면서 그 적임자로 유 대주교를 꼽았다는 관측이다.
▲ 로마 교황청이 관할하는 바티칸 시국.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성 장관에 한국인 대주교를 파격적으로 임명한 것은 교황청 ‘탈유럽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미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3년 즉위한 후 바티칸(교황청)의 기존 체제를 바꾸려는 개혁 성향을 뚜렷이 보여왔다. 특히 추기경 인선에서 출신 국가를 다양하게 하려는 모습이 돋보였다. 그의 재위 기간 처음으로 추기경을 배출한 국가가 18개국이나 된다.
교황은 지난 2019년에 교황청 인류복음화성(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 장관에 필리핀 출신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성직자성 장관에 유 대주교를 서임한 것이다.
유 대주교 “교황, 北 방문 원해…주선 적극 노력할 것”…8월부터 바티칸서 장관직 수행 예정
“교황님의 방북을 주선하는 역할이 맡겨진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
6월11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직자성(省) 장관에 임명되고 대주교로 승품된 유흥식 대주교의 말이다. 유 대주교는 6월12일 대전교구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난 4월 바티칸에서 교황님을 알현했을 때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며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북한이 교황님을 초청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 대주교는 이날 향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교황의 방북(紡北)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교황과 사전에 교감한 내용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교황님께서도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유 대주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내며 북한을 네 차례 방문했다. 교황이 남·북(南北), 북·미(北美) 간 중재 역할을 위해 북을 방문할 경우 그것을 추진할 최고 적임자임이 분명하다.
교계 밖에서는 그가 이념적으로 좌파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으나, 교계 내부에서는 중도파로 분류된다. 대전교구 홍보국장인 강대원 신부는 “핵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방안을 만들기 위해 방북을 추진하자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념, 정치 논리를 벗어나 평화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성직자성(省) 장관으로 임명한 유흥식 대주교가 6월13일 충남 서산시 해미국제성지에서 열린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대전교구에 따르면 유 대주교의 성직자성 장관 임명은 바티칸 내에서도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인사에는 한국인 성직자로는 드물게 교황과 직접 소통해온 유 대주교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訪韓)은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에서 열리는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해달라는 유 대주교의 초청을 계기로 이뤄졌다.
유 대주교는 지난 4월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해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 시복 문제와 한반도 평화 이슈 등을 설명했고, 바로 이 자리에서 성직자성 장관 임명 사실을 들었다. 유 대주교는 “사제의 쇄신 없이 교회의 쇄신도 없다는 말은 항상 맞다”며 “교황님의 교황청 쇄신 노력을 힘껏 돕겠다”고 밝혔다.
유 대주교는 6월13일 최근 국제성지로 선포된 충남 서산시 해미국제성지를 찾아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제게 무거운 역할이 주어진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 때문이 아니다”며 “김대건 신부님과 순교자들이 한국 교회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교황님은 주변 성직자들에게 한국 순교자와 성지에 관해 자주 말씀하신다”며 “해미국제성지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치유와 휴식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 대주교는 7월 말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출국하며 8월 초부터 바티칸에서 성직자성 장관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통상 장관의 임기는 5년이다. 성(省) 장관은 추기경 직책으로 분류돼 유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도 점쳐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으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만 있는 상태다. 염 추기경은 12일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에 유 대주교님 개인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뜻깊은 큰 선물을 받았다”는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이 세종시 교구청을 찾아 전달한 축전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대주교님의 사목 표어처럼 차별 없는 세상, 가난한 이들이 위로받는 세상을 위한 빛이 되어 주실 것을 믿는다”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오신 분이어서 더욱 기대가 크다”고 밝혔다. 아시아인 장관 임명은 네번째…높아진 한국 가톨릭교회 위상 확인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 아시아인이 교황청 장관에 임명된 것은 두 차례다. 1990년 필리핀 출신의 호세 토마스 산체스 추기경이 성직자성, 2006년 인도의 이반 디아스 추기경이 인류복음화성을 맡았던 것뿐이다.
이와 관련, 교황청 홍보매체 ‘바티칸뉴스(Vatican News)’는 “타글레 추기경의 인류복음화성 장관 임명 이후 성직자성 장관에 한국 주교 임명이 이뤄졌으며, 이는 아시아에 대한 교황의 관심을 보여준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 기간에 바티칸의 탈(脫)유럽이 가속화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유 대주교는 “지난 4월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났을 때 장관직을 제안하며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의 후예답게 주어진 소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줬다”고 전했다. 이때 교황은 한국천주교회가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 지난 2018년 10월 교황청에서 개막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여한 유흥식(오른쪽) 당시 주교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나란히 걷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4년 방한 때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찾은 바 있다. 이때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순교 역사에 대해 발언해 왔다. 아픈 역사를 딛고 오늘날 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또 세계 가톨릭을 지탱하는 공동체로 발돋움한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다.
솔뫼성지를 관장하는 대전교구장인 유 대주교를 이번에 바티칸 장관에 임명한 것은 김대건 탄생 200주년을 맞은 한국 가톨릭교회를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역으로는, 그만큼 한국 교회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은 전통적인 가톨릭 문화권이 아님에도 이례적으로 성장을 함으로써 교황청에 내는 납부금 규모가 세계 10위 권 내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230여 년의 한국가톨릭 교회사에서 한국인 사제가 교황청의 최고위급 성직자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다. 500년 역사를 가진 성직자성은 교황청 행정기구인 9개 성의 하나로 전세계 사제와 부제들의 모든 직무와 생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다. 사목 활동을 감독하고 심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학교 관할권도 갖고 있다.
유흥식 대주교는 6월1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의 성직자성 장관 임명에 얽힌 사연도 나왔다. 유 대주교는 “교황님께서 아프리카 출신 장관은 두 분이 계신 데 아시아 출신은 한 분뿐이라고 하시며 장관직을 제안하셨다”며 “우리나라를 포함해 아시아의 높아진 위상을 교황청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전교구 홈페이지에 쓴 그의 서한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교황님께서 발표하실 때까지 장관직 제안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하셔서 11일 저녁 7시까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주변 누구도 몰랐다. 8월 이후 행사 일정도 잡지 못하며 50일 동안 보안을 유지하느라 매우 힘들었다.”
친화력 남다른 스마일맨 유흥식 대주교…伊 유학 후 사제서품…2013년부터 교황과 인연
유흥식 대주교는 대전교구 신자들에게 ‘스마일 맨’으로 통한다. 늘 웃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날 때도 활짝 웃으며 눈을 감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늘 웃는 연습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善終·타계) 8개월 전에 만난 그에게 “유 주교님은 늘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했다. 당시 유 주교는 “제가 속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며 또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엄격하게 관리하면서도 항상 주변 신도들에겐 너그럽고 온화한 모습을 보여왔다는 것이 후배 사제들의 전언이다.
6·25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유 대주교는 대건고를 졸업했다. 대건고와 같은 재단인 쌘뽈여고를 다녔던 한 여성 문인은 “학생 때 하도 짓궂으셔서 쌘뽈 기숙사생인 우리를 많이 놀려먹었다”며 “저희도 히죽히죽 웃는 여드름투성이 흥식 오빠를 골려 먹은 생각이 난다”고 되돌아봤다.
▲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된 유흥식 대주교
‘흥식 오빠’는 가톨릭대에서 2년 수료한 뒤 군복무를 마치고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라테란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1983년 라테란대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것은 그 덕분이다. 귀국 후 사목활동을 하며 솔뫼 피정의 집 관장 등을 맡았으며, 대전가톨릭대 교수와 총장을 거쳐 2003년 주교품에 올랐다. 2005년 4월부터 지금까지 대전교구장을 맡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유 대주교는 지난 2013년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 대주교가 이탈리아어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교황이 왼손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고 한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유 대주교는 한국에 돌아와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 2014년 8월 대전교구에서 열리는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교황은 실제로 한국을 찾았고, 그는 대전교구 내에 있는 솔뫼성지 등으로 교황을 안내하며 친교를 쌓았다.
그는 지난 4월 바티칸을 찾아 교황에게 한국 가톨릭계의 숙원인 최양업 신부의 시복에 관해 설명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성직자성 장관직을 제안하고, “교황청은 주교님께서 지니신 특유의 미소와 함께 더불어 사는 친교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교황청 장관은 추기경이 맡는다는 관례에 따라 유 대주교도 추기경으로 서임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정진석 추기경이 선종함에 따라 한국은 추기경이 염수정 서울대교구장 한 명뿐이지만, 다시 두 명이 되는 셈이다
한편, 한국 주교회의 회원은 현재 42명(추기경 1, 대주교 4, 주교 36, 자치수도원 구장 서리 1명)인데, 향후 바티칸에서 일하는 유 대주교를 포함시킬지를 결정해야 한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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