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두유
김지혜
지글지글 끓는 듯한 매미 소리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더운 일요일 오전이었다. 일주일간 장염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급기야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고, 극심한 어깨 통증을 호소하여서 인근 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생연어 초밥에서 비롯되었다. 아들이 먹고 남긴 초밥을 한 입 베어 물자, 역한 맛이 나서 바로 뱉어낼 정도로 상해 있었다. 제발 아무 탈이 없기를 바랐지만, 이튿날 오후부터 아들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밤을 새웠다.
아이가 배탈이 나서 처음 병원을 찾았던 날은 공교롭게도 보건 위생과 해썹 심사 업무를 보는 지인들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들은 아들의 상태를 걱정해 주면서, 식중독 사건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이 만나서 거미줄처럼 촘촘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소중한 인연들의 따뜻한 위로에 힘을 얻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아들이 응급실 침대에 누워 전해질 링거주사를 맞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운 환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의사가 자기를 나이롱환자로 취급한다는 이유였다.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옆자리 여성은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는 낌새였다. 겨우 연결된 통화를 끝내자, 커튼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몸이 너무 안 좋으니 입원해서 치료받고 싶다는 요구였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녀의 증상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녀가 느끼는 아픔은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 쉬고 싶다는 그녀를 보니,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토요일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생 선배님에게 전화가 왔다. 대뜸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경로당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슐런 경기 자격증과 심판 자격증을 따느라 하루가 짧은 날이었다. 자격증 과정이 끝나고, 교육생들과 함께 먹을 간식으로 준비하고 남은 두유 두 팩을 조그마한 핸드백에 챙겼다.
가는 길에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살림을 맡고 있는 단체에서 가장 고령인 회원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일단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반년 만에 보는 인생 선배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까만 원피스에 빨간 망사 카디건을 입은 모습이 싱싱한 장미꽃 같았다. 그 장미꽃 같은 모습으로 복숭아가 담긴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두유 두 팩을 들고 얼른 내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고 팔짝팔짝 기뻐하며, 마치 접선이라도 하듯이 복숭아와 두유를 교환하였다. 우리 동네 노인정의 우두머리인 인생 선배님은 내가 요즘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마당발의 능력으로 소식을 다 듣고 계셨다. 서로서로 파이팅을 외치면서 정붙이기 무서운 사람들처럼 금방 헤어졌다.
집으로 올라가서 재킷만 벗고, 급히 앞치마를 둘렀다.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고, 비벼 먹을 새싹 나물을 씻고, 소고기 등심과 버섯을 구웠다. 마트 초밥으로 저녁을 때우겠다고 아들을 고생시키고 있으니, 속죄하는 마음으로 저녁상을 뚝딱 차렸다.
남편과 아들만 밥상에 앉히고, 다시 재킷을 입고 병문안하러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제과점에서 롤케이크를 사고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병원 편의점에서 두유 한 상자를 더 챙겼다. 병실을 찾았더니, 얼굴이며 팔이며 붕대를 붙이고 감은 모습으로 너무나 반가워하셨다. 외상에 비해서 다소 안심할 수 있는 상태라 마음이 놓였다.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푹 쉬시라’ 했더니,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웃는 동안, 나도 병실에서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병원은 아니지’하고 속으로 머리를 흔들며, 말동무를 하다가 일어서니, 부인되시는 분께서 두유 두 팩을 손에 쥐여 주었다.
괜찮다고 도로 내려놓으니, 이번에는 열린 핸드백에 얼른 두유를 넣어주었다. 그렇게 들고 온 두유가 복숭아와 맞바꾼 두유와 오버랩 장면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오늘 하루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온몸을 감싸니,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호자님!” 옆자리 여성이 나를 불렀다. 커튼을 살짝 들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침대 안전 난관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침대에서 내려가는 그녀에게 “조심하세요.”하고 말하며, 커튼을 닫았다. 옆자리로 살며시 건네줄 두유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누워 있는 아들에게 소곤소곤 돌고 도는 인생 같은 두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은 내가 벌써 어제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아빠한테 말한 것 같은데?’라며 머쓱해하니, 엄마는 참 열심히 살아서 보기가 좋다고 말한다. 툭, 미안한 마음이 한 점 먹물로 번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들이 아팠던 그 주에 딸아이와 일본 여행을 떠났다. 딸아이는 일중독 엄마를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며,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용돈으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했다. 아들의 상태가 괜찮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아들이 식중독으로 일주일 동안 4킬로그램의 몸무게가 빠졌던 동안, 엄마와 딸은 얼마나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를 실험하듯 식도락 여행을 즐기고 왔다는 것이다.
고3 아들의 짧은 여름방학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두유를 데워주었다. 돌고 도는 두유 같은 세상이 아들에게도 따뜻하게 스며들 것만 같았다.
아, 도쿄 타워에서 아들에게 쓴 엽서가 언제 도착하려나. 그 엽서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돌고 도는 두유는 어디쯤 돌아 다시 오려나.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주 잘 퇴고하셨군요.
그런데 원문의 주석은 미주이지요?
미주는 책 편집할 때 맨 뒤로 가버립니다.
각주로 하셔야 해당 페이지 아래 붙습니다.
네,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