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희들이 병원을 개업하면 지금 받는 월급보다 몇 배는 더 나아요. 그리고 아직 젊으신데 집에서 노실 수도 없잖아요. 병원 개업 후 아버님께서 사무장을 맡아주시면 저희는 믿고 진료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용암동에 자리 좋은 병원이 하나 나는데 아버님이 도와주시면 당장 개업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랬다. 젊음을 몽땅 관공서에 바친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랑방으로 내몰린다는 사실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 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던 평식씨로서는 더욱 그랬다.
아내는 퇴직금을 일시불로 찾지 말고 연금을 신청하자고 했지만 큰아들 내외가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상 기류를 타기 시작했다.
퇴직금과 집을 담보로 10억 가까운 돈을 큰 아들 병원(의원) 개업하는데 투자를 했다. 물론 자신은 병원 재정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사무장이 되었다. 병원은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로 북적였다. 아들과 며느리가 한 건물에 신경외과와 정형외과를 나란히 개업했으니 평식씨를 보는 주변의 눈은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다.
국영기업체 중견간부를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평식씨는 요즈음 하늘은 청잣빛, 바람은 산들바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사는 기분이었다.
아들, 며느리가 원장이니 누가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사람이 있겠는가. 더구나 모든 업무에 빈틈이 없던 평식씨로서는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같이 퇴직한 사람들은 할일이 마땅찮아 친구들을 찾아다니거나 등산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려 안간힘을 쓸 때 평식씨는 꽃 같은 젊은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는 보스(?), 방사선 기사를 비롯해 물리치료사 5명, 간호사 10명 등 모두 2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으니 신바람이 났다. 약속대로 다른 병원의 사무장보다 많은 보수를 받고 있는 것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만 옛날 동료들을 불러내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마시는 일도 잦아졌다.
하늘이 일년 내내 푸르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1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물리치료실 전기기구가 과열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환자 두 명이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헤매고 노인 한 명은 3도 화상을 입었다. 차라리 못할 말로 모두 죽었으면 합의보기나 쉽지,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환자 가족들은 심심하면 우리 아들 살려내라며 병원의 집기들을 마구 부수며 난리를 치니 병원이 운영될 리 만무했다.
병원은 폐업을 하고 아들과 며느리는 이민을 결심하기에 이르렀고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보다 더한 아픔은 곁에서 늘 자신을 보살피던 아내가 홧병으로 몸져누운 사실이다.
당장 아내의 약값이며 생활비가 문제였다. 큰아들 병원 개업하는데 퇴직금 쏟아 붙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아들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담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큰아들에게 돈을 몽땅 주었으니 둘째와 셋째에게는 기댈 처지도 염치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평식씨였다.
과거가 아무리 찬란하면 무엇에 쓸까? 평식씨는 자신의 전직 직함을 모조리 가슴속에 꽁꽁 묻고 남들이 꺼린다는 이른바 3D 직종인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 경비원 자리도 경쟁률이 자그마치 5:1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딸 같고 며느리 같은 젊은 엄마들이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언행을 보이면 어김없이 되받아치는 성깔을 부려 마찰도 잦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자신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서 이곳에 와 있는 몸, 더구나 지금 받고 있는 급여가 아파트 주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의 성격을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 죽자 죽어, 옛날의 평식이는 죽었고 지금의 평식이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즐거웠다. 벽면은 CC - TV 모니터가 완전 장악을 하고 낡은 책상 위에 얹혀 있는 구식 전화기의 벨이 요란하게 울리는 두 평 남짓 좁은 공간.
“예! 감사합니다. 5경비실 우동길입니다. 예? 예, 다시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우 경비원의 얼굴이 벌레 씹은 얼굴처럼 일그러진다. “이거 원, 더러워서 어디 해먹겠나? 금방 청소하고 왔는데 뭐가 또 지저분하다는 거야. 얼른 그만둬야지 쯧쯧쯧.” “내가 가볼 테니 어서 퇴근해요. 시간도 다 됐구먼.” 그렇게 말하는 평식씨의 얼굴도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발그레하다. “아니오. 더러워도 내가 가면서 보리다. 그럼 수고하세요.”
동료 우동길 씨가 퇴근하자 아침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경비실 좁은 책상에 펼쳐놓았다.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살가운 정이 느껴진다. 이때 경비실문을 열고 아내와 둘째, 셋째 아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병자의 얼굴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몇 달 전에는 둘째와 셋째가 어떻게 알았는지 경비원 자리 그만두라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며느리들까지 이곳에 오다니…. 두 아들이 경비실 바닥에 꿇어앉는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안중에도 없고 장남만 감싸고 도는 아버지가 서운했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와 상의해 전셋집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직장 그만두시고 편히 쉬세요. 풍족하진 않아도 매월 생활비도 대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아버님! 그 동안 마음고생 너무 많이 하셨어요. 이젠 다 잊으시고 편히 쉬세요.” 며느리들도 간절한 눈빛으로 제 신랑들을 거들고 나섰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심을 하던 평식씨!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일어나거라. 모두 내 잘못이다. 너희들의 뜻은 가상하다만 아직은 내게 기운이 남아 있으니 집에서 노는 것보다 좋지 않으냐. 이곳에 나오면 시간 잘 가고 또 한 달 지나면 꼬박꼬박 월급 나오고….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하며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 아파트 건물 위로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평식씨 가족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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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둘째,세째가 고맙군요.
끝이 너무 감동 스러워요~~처음엔 둘째,세째 가 다신 안찿아 올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식농사는 성공 하셨네요~~
연세가 많다고 가만히 계시라기 보다는 능력이 있으면 하실 일을 하시도록 하는게 좋을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