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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저
면수168쪽 | 사이즈 135*210 | ISBN 979-11-5634-485-8 | 03810
| 값 13,000원 | 2021년 11월 20일 출간 | 문학 | 시 |
문의
임영숙(편집부) 02)2612-5552
책 소개
이타주의에 대한 철학적 삶을 기초로
힐링과 둥지의 안온함
김광현 시인의 작품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그 첫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일상적 환경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하는 용기 있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고, 둘째는 ‘타인의 얼굴’로서의 친구, 부모 형제,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까지를 자신의 삶 중심에 끼워놓고 돌보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숭고한 인간미의 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신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스스로 일어설 직립의 의지와 정신력과 에너지를 공급받아 남은 인생을 향해 지속적으로 꿈을 꾸는 그 순수성과 진정성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삶의 애착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저자소개
김광현은 전라남도 순천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순천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였다.
2001년 월간문학공간에 조약돌 외 4편의 시로 신인상을 수상하여 문단에 나와 개인시집 『새벽편지』, 『노을』, 『조약돌처럼』을 발표하였고 『임학수 시 연구』 등 5편의 논문이 있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공간시인협회 회원, 순천문협 회원, 순천문학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순천시청에서 공무원으로 퇴임하였다.
차례
펴내는 글 _ | 4
작품해설 _ 시의 숲에서 영혼을 모종하는 시 농부를 만나 길을 묻다 -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 143
1 세월의 끈을 묶고
세월의 끈을 묶고 | 12
아름다운 날 | 14
장미에게 | 15
이제는 | 16
항상 | 18
빈터 | 20
길 떠나는 친구에게 | 21
제삿날 밤 | 22
중년의 사월 | 23
달빛 | 24
아카시아 | 26
나비 | 27
어머니 | 28
비와 나 | 30
이 밤에 | 31
그리움 | 32
연가(戀歌) - 쉰 살 소녀에게 | 34
봄날이 간다 | 36
2 호수가 보이는 찻집에서
호수가 보이는 찻집에서 | 40
카페 아델라 | 42
염원 | 44
바람 | 46
사월 | 48
겨울산 | 50
단풍 | 52
꽃잎 | 53
강물처럼 | 54
외로움에 대하여 | 56
별밤 | 58
다시 시 쓰기 | 60
이슬 | 61
백담계곡에서 | 62
눈물 | 64
친구 | 66
별을 보며 | 68
시월에 | 70
슬픈 그림 | 72
3 순천만 가는 길
그렇게 떠나리 | 75
순천만의 밤 | 76
무진교에서 | 78
뻘배와 어머니 | 80
순천만 노을 | 82
순천만에서 | 84
순천만으로 가라 | 86
순천만 그리고 | 88
삼월에게 | 90
길에 대하여 | 92
인생 | 94
안개 | 95
미련 | 96
가을 소리 | 98
달 이고픈 나 | 100
그림자 | 102
노을 | 104
4 잠자리처럼
잠자리처럼 | 108
아모르파티 | 110
베니스의 꿈 | 112
둥지 | 114
조약돌 | 115
간이역에서 | 116
은하수를 보며 | 118
아직 | 120
외로움 | 122
선암사 흙 길 | 124
아쉬움 | 126
귀뚜라미에게 | 128
가을 | 130
가을은 | 132
겨울을 기다리며 | 134
눈 내리는 날 | 136
파랑새 | 138
골목길에서 | 140
출판사 서평
시의 숲에서 영혼을 모종하는 시 농부를 만나 길을 묻다
-김광현 시인의 시집 『세월의 끈을 묶고』에 붙여-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을 생각하며
나이 들면서 신중함이 점점 더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 신중함이란 범위 안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파악하고 이해해야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어 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람들로 인한 상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비결로서의 학문, 인문학적 장르를 총망라해서 들라면 단연코 시(詩)를 들겠다.
21세기 우주로 그 육중한 첨단 기구를 쏘아 올린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정신적(마음)인 병을 혹독하게 앓아야만 하니, 이를 두고 이율배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아니면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허수아비들의 춤사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 두고 벌어지는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이 심화(深化)되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가슴앓이를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문명화된 시대에 가장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적 대상을 일컬어 ‘중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중년기에 영혼의 갈증을 경험하면서 지적 노동에 몰입하고 있는 시인들을 보노라면 그리움 저편에서 손짓하는 붕우(朋友)를 만난 듯 반갑다.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한 거룩한 망명자의 귀환을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여정에서 김광현 시인 그 한 시인을 만나게 되어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김광현 시인을 만났을 때의 기억이 삼삼하다. 서로 대면한 경험이 없는 관계로 모 약속장소만을 정해 놓고 이동 중 층을 가로지르는 에스컬레이터 그 바로 뒤를 따라 오르면서 아마도 내가 만나게 될 시인이 몇 계단 앞에 서서 오르고 있는 저 사내이지 않을까?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 에스컬레이터 끝자락에 이르러 전화로 도착 여부를 알림과 동시에 그 사내가 바로 김광현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시의 특징을 하나 기억하고 지나갈까 한다.
시는 순수를 기반으로 한 장르이기에 시를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대하는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영혼이 맑다. 그렇게 첫 만남이 이루어진 셈이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혼탁해 있기에 만남과 대화가 거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슬프고 가슴 아픈 마음이 일기 마련이고 오래지 않아 그 만남은 절단나고 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모진 상처를 안고 만신창이가 되어 결별을 선언하고 마는 것이 마치 천민자본주의에 깊게 물든 시대가 앓는 현상으로서의 그 중심에서 우리는 뒤뚱거리면서 동시에 중심을 잃거나 인간성까지 상실 하고들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들을 만나면 발가벗고 미역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속마음을 다 열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 일기도 하는 것이다.
오규원 선생은 시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현상을 강조하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 편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작품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의도는 어디까지나 계획의 차원이고 작품은 실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더 접목시켜 보려고 한다. 시인이 의도하고 창작했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그가 평생 품고 살아오는 사관이 그 작품의 진정성을 결정 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시인들이 그와 같은 바탕을 시 창작의 기초로 삼지 않고 외연적 명분에 취해 시를 쏟아내거나, 천민자본주의 결과물인 물질축적이나 명예 따위의 불온 적 대상물에 마음을 빼앗긴 채 시를 대하기 때문에 그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목격할 때, 김광현 시인의 순수성이 빚어내는 위의 작품들은 충분히 정화(精華)의 능력과 생명력을 품고 독자들의 영혼 중심을 가로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서 몹시 흥분되고 기쁘다.
송수권 시인은 그의 시 창작 실기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 사실에 대해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문제 시는 혀가 빨라지고 좋은 시는 그 혀를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기교와 멋을 부리는 시는 좋지 않다. 고도의 은유와 상징은 독자를 확보하기 힘들다. 일상의 구문을 비틀고 구부리는 개론서 같은 시는 문제 시는 될지언정 명시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대중성이나 상업성 광고언어나 유통언어에 물든 시는 저널리즘의 시다. 시는 삶과 죽음의 테마 연구다. 따라서 직접적인 생체험의 가락을 몰아치지 않고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시의 운명은 결국 노래일 수밖에 없으며 포퓰리즘(대중)의 공유재산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사유재산이다.”
김광현 시인을 생각하고, 그의 시적 결과물들을 감상하노라면 단연코 위의 두 시인이 말하고 있는 시적 체험의 공통분모를 모두 지니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잘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보여진다.
그 시적 철학과 사유의 순수성이 빚은 질항아리 같은 시의 세계를 경험하기 전 김광현 시인의 고백적 대담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장 폴 사르트르와의 말 걸기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김광현 시인이야말로 장폴 사르트의 문학관과 일맥상통하는 시 정신의 면면이 많이 엿 보이기 때문이다.
“시는 산문의 폐허 위에 떠 오른다. 말이 배반이고 전달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에 하나하나의 말은 스스로 그 개별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패배의 도구가 되고, 전달 불가능한 것의 은닉자가 된다. 그것은 전달할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산문의 전달이 실패함으로 순수한 전달이 불가능한 것이 되는 말의 의미 그것이다. 이처럼 전달의 좌절인 전달 불가능한 것의 시사가 된다. 그리고 말을 이용하는 계획이 실패하면 말의 무관심한 순수 직관이 뒤를 잇는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 시도한 모사에 다시 부딪친다. 그러나 이것은 좌절의 절대적인 가치 인상의 더 한 층 일반적인 전망 속에서 극히 명확한 하나의 기능을 시인에게 부여한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말을 기억하면서 김광현 시인의 시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보려고 한다. 가슴 훈훈한 시의 물결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많이 행복해 하리라.
2. 시의 여로에서 만난 참된 행복
21세기의 천민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지독한 인간 숲에서 시와 시인들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들라면 단연코 ‘위로’, ‘공감’, ‘소통’, ‘자기 고백의 중요성’ 등을 들 수 있겠다.
셰퍼드 코미나스는 그의 저서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에서 단순 글쓰기의 필요성으로서의 “위로가 필요한 시간,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라.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잠깐만의 위로보다 스스로 치유되는 기적을 만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스스로의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글쓰기다. 글쓰기는 무너진 마음을 회복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과 용기를 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엑기스로서의 ‘감정노출’ ‘자기 희생적 경험을 드러내는 용기’의 부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김광현 시인의 작품에서는 이 모든 부재가 다시 부활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자맥질하는 결과물이 되고 있음을 입증시키는 시적 가치와 의미가 모두 드러나 있어서 시의 치유력을 더하고 있다. 그 진정성과 순수성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나이는 손꼽아 무얼 해
저토록 탐스런
오월의 장미가
세상 향해 손을 흔드는데
청명한 오월의 하늘을 보라
파아란 하늘에
아카시아 꽃등이
대지를 환하게 밝히고
살결처럼 보드라운 신록이
사랑을 노래하며
살랑이는 오월의 바람이
내 푸른 가슴에 입 맞추는데
나이는 세어서 무얼 해
이토록 아름다운 날
-<아름다운 날>의 전문
위의 시를 보면서 데이빗 소로우와 랄프 왈도 에머슨이 노래한 ‘사람과 자연’,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이 났다. 위의 두 사람은 21세기의 속물로서의 인간들이 추구하다가 시대의 거품만을 양산해 내거나 썰물과 밀물에 쓸려 사라지는 허무가 아닌 초월적인 삶을 살다가 간 사유의 거장, 철학적 사유의 순례자라고도 호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김광현 시인의 시적 고백에서 이와 유사한 초(포)월적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 요즘 사람들은 ‘죽음이 삶에게’, ‘삶이 죽음에게’에 말걸기 하는 그 발설의 수위를 가늠하지 못하고 무작정 쫒기는 삶을 살아가는데 급급해 하고 있다는데, 김광현 시인은 그 모든 편린들을 뒤로하고, 자기 초월적 삶을 시적 고백에 담아 형이상학적 삶으로 독자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이정표적 삶을 살고있는 의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자서에서 밝힌 바 ‘이제 이순의 나이를 지나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가 바로 그 의지가 빚어낸 인생의 청사진인 것이다. 백세인생 운운한들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방법론적인 삶의 지향이 절실한 요즘 형이하학적 숫자적 개념에 눈먼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시인의 순수성,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다. 위의 시와 맥을 같이하는 사상적 결실로서의 작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월의 끈을 묶고」, 「이제는」, 「빈터」, 「달빛」, 「이 밤에」, 「호수가 보이는 찻집에서」, 「사월」 등이 그 예다.
하늘끝에 피어난
한 송이 봄꽃은
잔인한 사월
황무지의 축복
환하게 웃는
생명의 용틀림
가슴에 요동치는
봄의 떨림에도
세상을 보지 못하는
허름해진 중년의
발걸음이야
-<중년의 사월> 1~5연
위의 시를 보면서 중년의 중요성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해서 귀 기울이게 된다. “중년의 위기”(짐 콘웨이),“중년의 전략”(로이드 리브),“중년의 수업”(가와기타 요시노리) 그리고 그 주변부 적인 현상들로서의 “잃어버린 인간성”(알랭 핀킬 크라우트), “인간소외”(에리히 프름) 등과 같은 논제를 다룬 저자들의 사유적 결과물이 그리운 것이다. 김광현 시인은 위의 시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시(「길 떠나는 친구에게」, 「카페 아델라」, 「염원」, 「외로움에 대하여」, 「친구」, 「인생,」 「아모르파티」, 「아직」, 「외로움」,「꽃잎」 등)들을 볼 때, 시인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삶, 인생, 나이, 건강, 관계성, 꿈, 자족, 상대적 비교 선상으로부터의 탈출 등에 관한 자의적 질문과 현실 그 중심에서 절대고독의 경지를 경험하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 숨어 자고 일어나는 먼 옛날 자아와의 은밀한 대화 속에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순간의 연속 현상 가운데서 떠 올린 이미지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하는 심사가 다분히 노출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얼마 전 세상을 등진 필자의 친구가 떠 올라 잠시 글을 멈추어야만 했다. 김광현 시인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중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를 한마디로 말하면 가와기타 요시노리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중년 이후, 그때야말로 남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시기다. 지금껏 당신에게 그런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곧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오랫동안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나만의 재미를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큰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찬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하얀 풍경으로
서 있나니
실직당한
노동자처럼
고뇌에 찬 모습
그곳에 서 있나니
이른 봄
다시 태엽을 감아
오월
풍성한 녹음을
피우기 위해
-<겨울산>1~4연
김광현 시인의 이 시집 속의 작품들을 보면서 한 사람의 철학적인 사유(“타인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현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 즉 참된 인간성의 차원을 열어준다“)에 천착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만큼 시인은 시를 통해서 자신의 외로움을 잠겨 두지 않고 과감하게 발설하고 동시에 고단한 일상을 더 이상 숨겨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이 고뇌하는 분량만큼, 시인이 타인을 위로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비결을 습득하게 되고, 그 모든 소산물을 향한 대화들의 시도를 통해서 시인 자신의 삶을 대하는 그 깊이가 더 깊게 느껴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시상(詩想) 뿐만 아니라 시인의 지금까지의 삶의 편린들에 관심이 집중됨과 동시에 시인의 삶 그 지나온 길에 존경심까지 일게 된다. 그만큼 김광현 시인의 삶은 타자, 곧 시원(始元)의 수많은 그리움 그 중심에 가 있음을 곧 알 수가 있다. 이 시대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적이라 인간의 참된 맛을 경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김광현 시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험산 준령을 넘나들면서 만나 영혼의 목을 축이는 샘과도 같이 타인의 고통, 현실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을 향한 애증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참으로 좋다.
아지랑이 발길 따라
봄바람에 가슴 일렁이거든
생명이 움트는
순천만으로 가라
파아란 갈대 기지개 펴고
때늦은 철새가
못 다한 사랑에 눈물 뿌리는
순천만으로 가라
잠깨어 일어나는 짬뚱어
칠게의 바쁜 걸음걸음마다
세상의 아픈 기억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천만으로 가라
-<순천만으로 가라>1~4연
위의 시는 참으로 좋다. 이 시집의 엑기스를 들라면 단연코 제 3부 《순천만 가는 길》에 머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읽는 이의 가슴을 잡아 이끌어드리는 흡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떠나리>- ”파아란 하늘/뭉게구름 떠가듯/나 그렇게 떠나려오//비오면/작은 우산 하나/받쳐들고//소리없이/그렇게 떠나려오//밤엔 별 보고/낮엔 구름보며/그렇게/떠나려오“
이 시대의 시류가 조성해 놓은 등대없는 바다로 거침없이 밀려오는 ‘탐욕’의 파도, ‘상대적 빈곤’과 ‘상대적 경쟁력으로부터 맞닥뜨리는 불행과 좌절’, ‘종교와 교육과 문화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성 타락’ 이란 파도가 밀려서 올 때면, 훌쩍 떠나고 싶은 그곳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김광현 시인의 가장 대표할 만한 좋은 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장에 수록된 작품들이 자아내는 순수성, 그리움, 힐링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향토성을 그대로 시 노래에 담아내고 있다. <순천만의 밤>,<무진교에서>,<순천만의 노을>,<순천만에서>,<순천만 그리고> 등이 그 예다. 언젠가는 시대적, 문명적 곤고함이 마구 밀려서 오면 시인이 노래한 순천만 곳곳을 찾아서 여러 날 쉬었다가 돌아오리라 다짐케 하는 작품들로 인해 필자 역시 이날은 확연히 치유를 경험할 수 있어서 시인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신님 못잊어
강변에는
밤새 두견이 울고
조약돌만 남기고
남으로 남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물줄기
보라
야망 가득한
정렬의 물줄기를
강렬한 흐름을
가슴에
차고 넘치는
저 우렁참
드넓게 대양을
향하여
가슴에 표류하는
욕망을 담아
태양으로
달려가는
저 커다란 꿈을
-<강물처럼>의 전문
위의 시와 함께 눈여겨보았던 시들이 <외로움에 대하여>와 <겨울을 기다리며>,<골목길에서>이다.
참으로 삶이 고(苦)되다. 군중의 고독을 넘어서 사람들로 인하여 받은 고통이 태산과도 같다면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싶을 만큼, 인간성 상실 또는 타락의 결과물 앞에서 의연한 척, 지식인이나 지성인인 것처럼 고상하게 구는 것도 역시 오래가지 못하여 곧 탄로 난다는 것, 결국 그 실체가 드러나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쯤은 시대의 뒤란을 넘나 보는 여유와 순수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곧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신뢰의 대상이 아닌 긍휼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 고유의 가치를 점점 더 상실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어디론가 문을 열고 탈출하고자 몸부림한다. 그런데 가도가도 시인을 만족시켜 주는 곳은 아무 곳도 찾을 수가 없다. 곧 시인이 머물고 있는 그곳이 바로 최상의 안식처임을 알게 된다. 그 시시비비를 모두 담고 있는 시가 바로 위의 시 <강물처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현 시인은 자신에게 곧 찾아오게 될(“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항상 세월의 빠름과 나의 삶에 대한 아쉬움으로 상념에 젖는다”)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그 시가 바로 <겨울을 기다리며>- “문풍지를/어루만지며/달려오는 세찬 바람 ……어서 오라/차가운 북풍아/어서 오라/눈 나리는 계절아”이다. 또 한 편의 시가 <골목길에서>-“나지막한/산허리 돌아/맞닿은 좁은 길 끝에//신기루 같은/한 자락 그리움/나를 향해 달려온다”이다. 시인의 영혼의 강을 독자들이 가늠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다. 아무리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해도 절대 무리가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관계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시인의 아픔을 독자가 따라 아파하지 못하는 공간적, 기간적, 사유적,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을 버리고, 쓰러뜨리고, 넘어뜨리고 자빠뜨리고, 회의하고, 망명자가 되고, 혹독한 실연을 경험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뱅이도 되어 보고, 정의의 날 선 검으로 불의의 정체 모를 대상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용기 있는, 순간의 행복을 버릴 줄 아는 용기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들이 바로 시인에게는 있고, 독자들에게는 없는 그 특이성을 그대로 투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시인들이 자기희생적 삶의 중심의 강을 넘나들면서 이루어낸 작품들이 누군가에게 읽혀 위로가 된다면 아마도 시인들의 노고는 곧 풀리게 되리라 믿는 것도 바로 시인의 수고로음을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다.
3. 한 사람 시인의 소리 없는 절규와 안식을 경험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다
김광현 시인의 작품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그 첫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일상적 환경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하는 용기 있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고, 둘째는 ‘타인의 얼굴’로서의 친구, 부모 형제,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까지를 자신의 삶 중심에 끼워놓고 돌보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숭고한 인간미의 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신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스스로 일어설 직립의 의지와 정신력과 에너지를 공급받아 남은 인생을 향해 지속적으로 꿈을 꾸는 그 순수성과 진정성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삶의 애착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타주의에 대한 철학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철학적 삶을 기초로 하여 시를 쓰기에 이 한 권의 시집이 시사하는 바 힐링과 함께 둥지의 안온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박이문 교수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왜 인간은 자기희생적으로 이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증적인 관점과 철학적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타주의는 하나의 개체로서 인간이 자신의 좁은 세계를 사회와 자연과 우주로 확장하여 단 하나의 우주와 화해하고 개체로서의 삶의 허망함과 우주적 허무주의를 극복하여 개체로서의 의미와 우주 전체로서의 의미 즉 가치를 발견하고 경험하려는 궁극적 영역이며 방법이다.”
그렇다면 김광현 시인이야말로 이 우주적 철학의 개념을 이미 깨닫고 이순(耳順)의 삶을 살아오고 있으며 그 사관에 천착하여 자신의 시 문학적 성찰을 경험으로 인간 가치와 의미를 다룰 문학의 고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광현 시인의 또 다른 시의 힘은 ‘마음의 치유’이다. 이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사이 시인과 동행하면서 내면의 치유를 경험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무거운 ‘고통’이라는 짐을 지고들 살아간다. 어느 누구 하나 그 짐을 나누어 지고 싶어하는 눈치가 없다. 무작정 도피 혹은 빼앗거나 그 짐에 짐을 얹어 그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을 채우려고 안달을 부리는 이들 투성 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 모든 현상들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기코르노는 그의 저서 『마음의 치유』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마음은 치유되고 싶다!” - 우리 몸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나 인생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규칙을 위반할 때마다 불쾌감이나 뻣뻣함, 고통 등의 증상으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몸은 그 나름대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를 보낸다. 질병은 우리로부터 배신당한 육체가 우리에게 대화를 요구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광현 시인이 위의 시집에서 은연중 다루고 싶어하는 그리고 다루고 있는 지침은 ‘영혼을 찾는 현대인’을 위로하기이다. 그리고 그 위로받은 이웃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옛날 그 오래전의 행복을 다시 경험해 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재창조하고 싶은 안식과 꿈을 노래하고 싶은 열정의 엿보임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확실성을 선택한다. 의심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를 선택한다. 실험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확실성이 의심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진리조차, 그리고 결과가 실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진리조차 보지 않으려 든다. 문제를 교활하게 부정한다고 해서 확신이 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확신과 명쾌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광범위하고 보다 높은 의식이 요구된다.”
이상은 김광현 시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철학적 현상들과 동일한 혹은 유사한 호흡의 결과물이 독자인 우리 모두에게 가져다 주는 그 가치 선물인 것이다.
이하는 김광현 시인의 시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당부한 선배들의 조언과 함께 시 작업하는데 위로의 양식이 될 잠언을 첨부하고자 한다. 이는 김광현 시인의 시 세계와 순수 그리고 삶의 여백을 공급하는 그 노력에 감사하여 남겨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시면 감사할 일이다.
박목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시 앞에 선 자기에게 고백을 하고 있다. “시를 동경하고, 시를 쓰는 마음은 수목(樹木)과 같은 것이다. 수목이 밝은 햇빛과 푸른 하늘에 그의 손을 뻗고, 또한 자연의 맑은 정기를 모아 그 스스로가 정결하듯 시를 쓰는 마음이야말로, 이 정결한 동경과 아름다움과 영원한 생명의 애절한 꿈을 사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목은 그 자체가 자연의 부분을 이루어 아름답듯 시를 쓰는 마음은 스스로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루려는 심정일 것이다.”
김광현 시인은 분명 순천을 충분히 대표 할 아름다운 그리고 순수시인 임에 틀림없다. 그 순천이란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순수 비전을 제공하는 시인이기를 당부드리며 위 글이 그 문학적 기로에선 이정표가 되리라 확신하며 믿는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그의 저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통해서 이 시대의 거룩한 망명자임과 동시에 단독자임을 선언하고 희생적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판단력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과 판단력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를 거쳐서 나온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퇴비를 섞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남긴 쓰레기 더미는 자꾸 쌓여간다.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경험들만을 수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린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가 버린 달걀 껍데기, 시금치 이파리, 원두커피 찌꺼기 그리고 낡은 마음의 힘줄들이 삭아 뜨거운 열량을 가진 비옥한 토양으로 변한다.”
김광현 시인은 이들의 지침을 모두 함양하고 살아온 생명력이 풍부한 시인임을 이 시집에서 충분히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시인과 동행을 이룬 것에 대하여 감사와 함께 즐겁고 행복했음을 고백 드린다.
끝으로 병든 시대를 향한 시인의 절규를 잊지 않기를 당부드린다. 너무나도 많은 시인들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자기 욕망과 욕구에 매몰된 채 순수성을 잃거나 랄프왈도 에머슨의 초월주의적 삶이나 데이빗 소로우와 같은 삶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거칠게 살아가면서 죄의 파편에 난자당한 양심 불량자들이 되어 말장난, 글 장난을 일삼는 일 군에서 이탈되어 정말 독자들과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와 힘의 공감대를 마련해 주는 그런 진짜 시인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모든 것은 영원한 기록에 쓰여진다. 우리의 전체 삶, 모든 창조물과 행동들, 조우한 사람들과경험들, 모든 삶과 시련들이 담긴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한 기록에 보존되고 잔존한다. 이 세상은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밝힌 바와 같이 해독해야 하는 암호로 쓰여진 원고가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받아쓰게 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극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매일 삶이 우리에게 묻는다. 매일 삶의 심문을 받고, 우리는 대답해야한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것, 자신의 과거에 기록하기로 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다.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중에서)
이 한 권의 시집이 몹시 지친 사람을 위로하고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돛단배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김광현 시인의 시적 노동에 박수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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