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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에서 젊은 아나운서 몇명이 월드컵공사중 남산도로에서 어느 친일파가 버린 비석이 나온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 해방후 이곳에 버렸을 것이는게 결론이었다. 다들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
이건 그 방송에 나온 모든 패널들,방청객들,시청자들의 조부나 증조부를 욕하는 것이다.
만일 그사람이 자신의 행적이 담긴 비석을 버린후 내려와 아들이나 손자에게 자신의 행적을 숨기겠는가
자랑하겠는가 그사람의 증손자는 대학에 가서 친일청산을 외치고 이 패널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 친일파는 대체 얼마나될까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16세기 콜롬부스시절 스페인땅의 98%를 2%의 귀족이 가지고 있었다.
19세기까지 러시아인구중 90%가 농노였다.
1865년 링컨이 남북전쟁으로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이들 노예들에겐 피부색이란 차별화가 있어 우리는
아직도 피부색만으로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는지 아닌지를 판별해 낼 수가 있다.
일본은 무신정권시대인 에도시대(도쿄)가 260년만인 1868년 막을 내리고 4년뒤인 1872년 조선의 갑오경
장에 해당하는 개혁인 '폐번치현'을 단행해 노비나 천민 일반 양인들에게 성씨를 나누어준다.
조선은 95%가 백정,노비,소작농 같은 상놈이었고 5%만이 양반인 사회였다.
1909년 일본의 폐번치현처럼 조선도 '민적법'을 단행해 성씨가 없는 하층민에게 전주이씨,풍양조씨등
세도가의 성씨를 마음대로 골라가지라며 나누어주어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때부터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가다보면 가끔 대문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란 표시가 된 집이 있다 그런데 조선의 신분구조처럼
20배나 많았던 친일파의 후손이란 표지는 어느집 대문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김해김씨족보를 보자 수로왕의 10아들중 7아들이 구름을타고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일합병후 일본이 최초로 한 일이 김해김씨족보의 출판을 못하게 금지한 것이다.
4세기 야마토의 뿌리는 고령 대가야로 지난 1985년 일본고고학자들이 후지노키 고분의 발굴을 중단하는
사건도 이 고분에서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크게 염려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천손강림신화를 보자 천신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남매간으로 그 부모는 이자나기,이자나미였
다, [삼국사기]에는 고령대가야의 시조는 이지아키로 이후 16대가 520년간이어졌다고 쓰여있다.
임진왜란 때 20만의 왜군이 왔고 그중 1만명이 조선의 문화에 크게 감화되어 귀화한다.
이 중 일부는 인조반정때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반정무리에 참여하기도 한다.
1600년부터 오미(대마도 남쪽섬 큐슈북부지역)상인은 일본최초로 복식부기를 사용하였다.
복식부기는 네덜란드 상인이 1637년경 세계최초로 고안하여 사용했다고하는데 일본의 오미상인이 오히
려 더 빨랐다. 고려 개성상인이 1392년경 고려가 망하자 일본 오미지역으로 집단이주하면서 그들이 쓰던
복식부기가 그대로 오미상인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도요타자동차의 메카도 바로 이 오미지역이다.
일제시대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섞였지만 지금은 모두 순혈한국인,순혈일본인이다.
백제의 유중광은 본래 전주를 보관으로 하는 문화 유씨이지만 그를 일본으로 초청한 장본인이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던 쇼토쿠태자가 '곤고'라는 성을 하사했다. 곤고 시게미쓰는 586년부터 593년까지
오늘날 오사카 최대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를 짓는데 앞장선다 그리고 593년에 시텐노지가 완공되자
그는 쇼토쿠 태자로부터 또 하나의 지시를 받는다. 앞으로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관리하라는 명이었다.
그 뒤 오늘날까지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1,400여년간 시텐노지의 보수,관리를 맡고 있다.
이후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곤고구미라는 사찰전문 건축회사를 설립하였다.
일본에는 지금도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열도가 흔들린다"란 말이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할때 열도에 있는 백제로 본국 백제인 20만명이 건너간다.
그리고 200년후 열도 전체인구는 600만명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총사령관 우히다 수가는 백제인의 후손이란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가 도요토미의 명
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나서기도 한다.
1598년 정유재란때 남원성에서 조선인 포로 80명이 일본으로 잡혀갔는데 그 가운데 심당길과 박평의
두 도공이 있었다. 심당길은 사쓰마(가고시마) 도기의 종가인 심수관가로 일가를 이룬다.
박평의의 후손 박무덕은 도쿄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직업외교관의 길을 걸어 태평양전쟁 시기에 도조
히데키내각의 외상을 역임한다 1945년 종전협상에 참여했으며 A급전범으로 감옥에서 옥사한 도고 시게
노리가 바로 박무덕이다.
이 정도만봐도 한일 양국의 피는 거의 같다고해도 될텐데 이제 감정대립 그만해도 될때가 되었다.
전라도 남서해안지방과 큐슈북부지방에만 있는 CIS-AB형의 분포도.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왜구로 왔다 조선군에 포로로 잡혀 양반집에 하인으로 분급되어 나누어준 왜구
들 그리고 1909년 성씨를 받은 그들의 후손들 너무 많이 섞였다.
서재필 훌륭할까 훌륭하다 이완용 훌륭할까 글쎄
서재필은 독집지사가 맞지만 이완용은 어떠한 길을 걸었을까 우선 이완용은 이승만과 더불어 왕실에 출
입하던 전주이씨 종친이었다.
이완용은 명성황후를 측면에서 도와 일본의 침탈을 막고자 친러파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의 열네명 발기
인중 한 사람이었고, 곧 운영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다.
학부대신(교육부장관)에서부터 외무대신까지 요직을 두루거친 그는 외세의 조선지배를 반대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에서 탈퇴할 때도 그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후 1898년 윤치호가 부회장,남궁억이 총무, 이상재와 윤호정이 서기로 뽑혔을 때 그는 그 쟁쟁한 인물
들을 물리치고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에서 그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그를 전라북도 감
사로 임명하여 먼곳으로 보냈을때도 그는 회장의 직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는 변절이
란 카드를 꺼내들어 지금도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하면 연결되는게 독립문이다. 이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그들이 지났던문 '영은문' 무슨 뜻일까 인터넷검색을 해보자.
'모화'란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고 '영은'은 은혜로운 대륙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이란 중국의 동쪽에 붙어 있는 중국에 종속된 나라라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란 립서비스조항이 포함되었겟는가
500년동안 조선왕조의 강압에 의해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어야 했으니 백성들의 분노가 독립문을 만든
것이다.
쿠데타로 왕조를 수립한 이씨왕조는 극도로 군비 확장을 기피하고 의도적으로 문명의식만을 고취한 것이
다.
조선사회는 의식주 모두 자급자족으로 기존의 생산양식에 만족했으며 금속인쇄술과 한글, 복식부기같이
조상이 만든 창조물에는 무관심했다. 조선왕조는 세계적인 장수왕조이면서도 너무나 허무하게 국권을 빼
앗겼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이성계.
현대 군사정부들에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끌어들여야할 역사적 인물을 찾아야했으니 그가
바로 쿠테타로 집권한 이성계이기에 드라마마다 그를 미화시키기 열풍이 집권시기마다 일고 그래서 아직
도 한국인들의 머릿속엔 이성계가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것이다.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금 중국이 랴오닝성(요동성)이라 부르는 요동(랴오닝)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의 뒤를 봐주는 댓가로 세운 건축물 영은문 그리고 모화관.
천안이 한국땅이기에 천안함이라 이름이 붙는다.
중국이 건조한 최초의 항공모한 랴오닝(요동)호 왜하필 하고 많은 이름중에 랴오닝(요동)을 붙였을까 자
신들이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원주인(고려)에게 되돌려줄뻔한 위화도회군이란 위기가 있었기에 자신의
것이란 영역표시를 단단히 하고자하는 의도가 담긴 이름 항공모함 랴오닝(요동)호.
이성계의 첫재부인 신의왕후 한씨 그녀는 고려시대 명을 다하고 정릉에 묻혀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계획
에 의해 조선건국의 밑그림이 설계되고 결국 고려는 멸망한다.
신의왕후 한씨가 고려 공민왕 16년에 함흥부 귀주에서 점치는 사람 문성윤에게 이방원의 사주를 물었더
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하였다.
중국인이 지은 환타지소설 '수호지'를 보자 고려황제와 송나라황제는 친구사이로 나온다.
한국인이 만든 드라마 '대장금'을 보자 조선임금이 명나라사신의 아랫사람으로 나온다.
왕위외교부장이 문재인대통령의 팔을 두 번이나 때린건 괜히 때린게 아니다.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제례악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전주 이씨라고 자랑할일만은 아니다.
영은문,모화관을 보자
위화도역모를 보자
대장금을 보자
1909년 민적법을 보자
종친중 95%이상은 노비나 백정,소작농의 후손들중 성공한 사람들이 족보사서 으스대는 것일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은 남산의 어느 친일파처럼 자손들에게 조상의 행적을 말하지 않은것뿐이다.
제대로 알고 살자./
참고도서
풍수화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구대훈 일본사
일본의 상도
대쥬신을 찾아서
노컷 조선왕조실록
한국분 한국인 한국놈
김두규교수의 풍수강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식민의 바다 제국의 바다
광해군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
헌혈 사랑을 만나다
후쿠자와유키치
한국 보수세력연구
성서의 뿌리p254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욕망하는 지도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