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찬불가
묘정 박근련(妙淨 朴根蓮)|천마 재활원 원장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에 만들어진 작지만 큰 추억 한 토막이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후이기 때문에 나라 사정이 어려웠고 교통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걸어서 직장으로 학교로 다녔다. 그 당시 나는 부산 범일동 자성대 근처에서 현재 일신종합병원이 있는 좌천동을 거쳐서 수정동 수정산 기슭에 위치한 여중과 여고를 한 시간쯤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그리고 좌천동에는 나의 길동무인 정연이 집이 있었다. 내 친구 정연이 집은 불교포교당이었다. 그 포교당은 인자하신 정연이 부모님께서 사랑채를 스님들께 내놓으셔서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절이어서 포교당이 아니라 불심 깊은 그의 부모님들께서 스님들이 불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고 법회 하시라고 내놓은 임시공간이라는 뜻이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의 학교 가는 길이었다. 나는 포교당의 나무대문을 살며시 열고 ‘정연아’하고 큰소리로 친구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날은 정연이가 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날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세 번째 친구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데 사랑채의 미닫이 문이 조금 열리더니 웬 낯선 분께서 아무 말씀 없이 정연이가 이미 학교로 갔다는 표현을 손짓으로 해주었다.
바로 그 분이 그 당시의 고처사님(광덕큰스님)이셨다. 그 날 이후 고처사님께서는 내가 ‘정연아’하고 친구 이름을 부르면 항상 미닫이문을 조금 열어서 갔으면 갔다, 있으면 있다, 또 학교로 갔으면 곧 바로 빨리 뒤따라가라거나 안채로 정연이를 데리러가라는 뜻을 무언으로 해주셨고, 나는 곧 알아차리고 말씀대로 따랐다. 돌아보면 그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세상과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당시 큰스님은 말이 고처사님이시지 승복을 모두 갖춰 입으시고 머리도 깎으신 분이셔서 나는 왜 스님을 보고 사람들이 고처사님이라고 부르는지 영문을 몰라 혼자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 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연이와 나는 고처사님께서 꿈꾸시던 도심포교의 대상이 되었다. 포교당에는 매주 일요일이면 전국의 유명하신 큰스님들께서 『금강경』을 설하시기도 하고 선법문을 하시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경주 불국사에서 오신 월산큰스님이시다. 어찌나 쩌렁쩌렁하신 목소리이셨는지 가만히 소리도 없이 밀려오는 잠마구니를 사정없이 쫓아주셨다. 매주 법사님들의 법문이 끝나면 요즘 표현으로는 동아리가 되겠지만 열 명 남짓 남아서 고처사님의 기획과 진행하에 동아리 모임을 열었다. 물론 나는 동아리의 일원이었다. 우리 동아리들은 열심히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쓰고 외우고 찬불가도 배웠다. 아마도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 절에서 찬불가를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고처사님께서는 대중 포교를 위해 방송 등 언론 매체에 관심을 가지셨고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셨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면 여러 방면으로 활약하시면서 특히 방송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 결과 고처사님께서는 KBS 부산방송국으로부터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를 위한 출연 승인을 받아내시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불교역사상 어린 학생들이 찬불가를 부르면서 방송이 진행되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당시 우리 동아리는 약간 긴장되고 호기심에 가득한 눈초리로 고처사님을 따라 지금 우남공원 어딘가에 있었던 KBS 방송국에 갔었다. 고처사님과 음성이 고운 정연이는 룸비니동산에 대해서 대화로써 풀어나갔고 우리들은 틈틈이 찬불가를 합창하여 보조를 맞추는 식으로 방송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어린 나이였지만 찬불가를 부르는 우리 어린 가슴들은 환희에 차 있었다. 이 모든 진행의 순서와 대화의 내용들은 고처사님께서 직접 만들어 내셨다. 그 일이 범어사 불교교리 전용 선방으로 옮기기 전의 고처사님의 일이었다. 다음해 그 다음해에도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우리들은 범어사에 갔다. 이미 스님이 되신 고처사님께서는 그때 KBS 방송국에서 녹화된 테이프를 금정산이 떠나가도록 높게 틀어 두시고 우리들을 맞이해 주셨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 나에게 발생하였다. 그것은 합창단 모두가 똑같이 발성되어야 하는데 나의 부주의로 그만 한 옥타브 틀리게 소리가 나왔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나에게 저 소리가 근련이 목소리라고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시공을 초월한 50여 년 후, 광덕큰스님께서 범어사 염화실에 잠시 머무신 적이 있으셨다. 어린시절의 동아리는 아니지만 그때처럼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어느 하루, 절하고 앉은 나에게 큰스님께서는 정색을 하시고 이상하게 사라지는 찬불가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사라져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찬불가가 바로 근련이가 한 옥타브 틀리게 부른 곡이라고 하셨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법체 허약하셔서 무척 힘들어 하셨다. 보기에도 너무나 쇠약하신 상태였지만 무려 50여 년 전 나의 실수를 환한 미소로 다독거려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옛 일을 되새겨주셨다. 그리고 사라진 찬불가의 가사를 큰스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1절, 2절, 3절을 곡과 함께 외우시고 나의 중요한 노트에 기록하도록 일러주시기도 했다. 덧붙여 큰스님께서는 매우 좋아하신 ‘금정산 찬가’도 함께 기록하도록 불러주셨다.
이 원고를 쓰려고 그때의 사라진 찬불가 원고를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금정산 찬가’의 원고는 찾았는데 내가 틀리게 부른 찬불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중요한 기록을 부주의하게 간수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큰스님께서 법체 불편하신데도 나를 보시자 옛 기억을 되살려 불러주신 내용을 그만 분실했는지, 어디 잘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애석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큰스님 모시던 그때는 앳된 학생이었는데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서 기억력도 가물거리고 한 일도 잘 잊어먹고 늙음이 나를 이렇게 몰아가고 있다.
앞으로 그 가사를 어딘가에서 다시 찾는다면 한 옥타브 높게 부르지 않고 나 혼자서라도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불러서 큰스님영전에 바치고 싶다. 열반하신 큰스님께서 언젠가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보현행원송’과 ‘부모은중송’을 여실 때 나도 다시 태어나 그 합창단에 참여하여 큰스님의 원력에 동참할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2005년 6월 14일
불초 묘정 합장
첫댓글 여기서도 큰스님의 혜안을 공부합니다. 널리 포교할 수 있는 큰 방편인 방송국을 활용하신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찬불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찬불가를 부르며 법회를 연 초량의 한 포교당의 모습,
오직 전법의 열정으로 이끄신 모습에 고개 숙입니다.
작은 하나라도 전법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하루 되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인터넷 이곳 저곳에<금정산 찬가>를 찾아도 가사를 찾기가 어렵네요. 혹여 아시는 분 계시면 함께 올려주시면 더 없이 감사하겠습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처사>는 절에서 그냥 저냥 지내는 남자 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용어가 아니지요. 조선시대에 몰락한 양반들이나 절에서 절일 도와주며 소일하는 남자 분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큰스님 같은 경우는 <처사>가 아니라 <거사>가 맞겠지만, 큰스님이 워낙 출가자나 거사들이 하지 않는 잡일(?)을 많이 하셔서 처사라 불러도 큰 결례(?)는 아니었을(?) 듯...
미닫이 문을 조금 열어 친구 소식을 알려주셨다는 이 간단한 일화에서도, 큰스님의 경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뭐든지 깊어지면 세세한 일 하나에도 신경을 쓰게 됩니다. 거친 자리에서는 안 보이던 미세한, 그것도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보이거든요? 그래서 청하지 않아도 미리 친구가 되어주는 <불청우>가 나오는 겁니다. 아마 웬만한 수행자라면 당신 공부에 방해된다고 큰스님처럼 하지 않고 그 시간에 대신 참선이나 독경 염불 하셨을 거에요.
큰스님 일화를 보면 한결같이 부처님에 대한 깊은 믿음, 전법과 호법에 대한 뜨거운 서원이 느껴져요. 그리고 전법에 있어서 굉장히 하심적이십니다. 당신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기분대로 법문하지 않으시고, 늘 중생의 입장, 어린 근기의 범부 입장에서 일을 진행하세요. 그러니 보는 분 만나는 분들마다 감동을 받는 겁니다. 정말 부처님께서 이러하지 않으셨을까, 할 정도지요. 누구와의 대립도 없고, 어리석은 이들은 지혜로써 바르게 이끄시고, 거친 이들도 오로지 지헤로써 섬기고 받들면서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보고 자신을 뉘우치게 만드신 분...바로 우리 큰스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경계는 한결같이 <보.현.행.원>이시지요! 반야의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행원, 반야가 행으로 현실이 되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우리 큰스님 경계에요! 그래서 큰스님의 행은 모두 <반야행>인 겁니다. 반야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우리 큰스님 행을 보세요! 그게 바로 반야요 반야행입니다. 큰스님의 행이 우리가 늘 염하는 반야바라밀이에요! 반야바라밀은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또한 <보현행>이에요! 그래서 큰스님은 반야가 자비요 반야가 바로 보현행이라고 설벌하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어리석고 거친 이들도 오로지 지혜로써 섬기고 받든다. 오늘 이 구절을 읽으면서 타인의 거침을 마음 속으로 탓하고 있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반야행임을 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알려주시고 일깨워주시니 그 거침이
타인의 잘못이기보다 내가 섬겨야할 대상임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고 덕분에 한결 가볍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_()()()_
큰 스님의 따뜻한 마음과 크신 가르침.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