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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
청룡사대웅전(靑龍寺 大雄殿)
보물 제824호로 서운면 청룡리 28 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원종 6(1265)년 창건되고 공민왕 때 중건되었으며, 다시 조선후기에 중건된 건물이다.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집인데, 공포는 안팎이 다 삼출목으로 되어있고, 앞면은 겹처마인데 뒷면은 홑처마이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내부가구가 모두 드러나 있고, 측면의 기둥에서 대들보 위에 걸쳐지는 충량(衝樑)이 3개씩 있어 매우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공포의 쇠서에 봉오리를 새겨 조선후기의 기법을 보여 주는데, 살미 끝이 곧개 잘려진 첨자형의 공포를 가진 건물이다.
칠장사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역사 소설의 일곱도적과 병해스님 얘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매년 신도 및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연간 관광객수는 약10,000명 이상이 다녀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주위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경관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칠장사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대나무로 만드는 조례미 수공예품도 구입할 수 있어 관광객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관광명소이다. * 가는 길 : 안성 시내에서 완행버스를 이용, 죽산 하차(25분 정도 소요), 죽산에서 칠장리까지는 하루 3회 운행하는 마을버스나 택시 이용(소요시간 약 25분) * 위치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태평무전수관
사곡동 31 에 위치한 곳으로 태평무 원형보존과 후학양성의 목적으로 개관 연습장, 공연장, 강의실, 전시실로 구성 연 2회의 정기공연, 태평무 전수, 일반인 대상 교육 태 평 무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는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마음을 춤으로 표현한 궁중무용으로으로 경기도도당굿에서 행해진 무속음악과 무속춤을 1900년대 명무가였던 한성준이 재구성한 것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의상과 함께 신명이 넘치는 춤사위에 발디딤이 돋보이는 것이 큰 특징이다.
안성향교 (安城鄕校)
문화재자료 제27호로 목조 기와지붕 창건된 역사는 임진왜란 전으로 상당히 오래인 것 같으나, 현재 곳곳에 근대식 보수의 흔적이 눈에 뜨인다. 조선 제11대 중종 27년(1532)에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풍화루(風化樓), 동·서제(東西齊), 삼문(三門)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間, 측면 2間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은 정면 5間, 측면2間의 굴도리집 양식의 홑처마 맞배 지붕이다. 풍화루는 정면 11間, 측면 11間이다. 1969년 11월 3일∼12월 3일 까지 보수공사를 하였다. 관리인이 바로 부근에 거주하며, 관내 유림들의 내왕과 관심으로 보존은 양호한 편이다.
안성객사 (安城客舍)
보개면 양복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인 주심포 양식의 객사(客舍) 건물을 주건물 좌우에 붙어 뻗어나온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되는 건물이 중앙에 있고 양 옆으로 부속사가 있는 날개집(翼舍)으로 주건물인 중앙에 3間, 양족에 익실이 각2間, 측면이 3間으로 이루어진 주심포양식의 배흘림이 약간 있는 건물로서,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49호)과 강릉 객사문(고려말 국보51호)과 같은 주심포양식을 띄고 있다고 밝혔다. 객사란 고려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 하는데,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묵던 숙소였다. 전형적인 객사의 외형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의 지붕에서 「와장승인묘안 숭정후육 십팔년 을해 (瓦匠僧人妙案 崇禎後六十八年乙亥)」라는 명문 암막새가 발견돼 1635년, 즉 17세기초에 중수되었음이 밝혀져 이 건물의 축조연대는 14세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죽주산성 (竹州山城)
기념물 제69호로 토석 안성시내에서 동북방 약17킬로미터 떨어진 매산리 뒷산 비봉산정을 따라 축성되어 있다. 현재 높이 2.5m 가량의 석축만이 남아있다. 산성내에는 낙엽송 및 잔솔이 숲을 이루고 골짜기 남쪽으로는 논들이 흩어져 있다. 당시 동문이었을 듯 한 자리에 장대석과 석재가 흩어져 있고 정남쪽에는 남문으로 보이는 문이 남아 있으며 장대지(將臺址)로 보이는 곳에 4개의 주춧돌과 깨어진 기왓장이 흩어져 있다. 이 죽주산성내에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죽주방호별감으로서 몽골군의 침입 때 발군의 공훈을 남긴 송문주 장군의 전공송각이다. 송문주장군은 고종 23년에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산성을 방어할 때 몽골병이 죽주산성에 이르러 강복을 권유하자 성에서 출격하여 몽골병을 물리쳤고 몽골병이 다시 포로 공격하여 사문이 무너졌으나 성중에서도 포로써 반격하였으며 무려 15일간 다방면으로 성을 공격한 몽골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성구를 불에 태운 후 물러갔다. 장군은 이 공으로 좌우위장에 승진하였다.
3.1만세운동
안성에서 3·1 운동이 전개된 것은 3월 11일에 읍내에서 였다. 당시 상인들은 철시하여 이에 동조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출동하자 해산하는 비교적 평화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후의 산발적인 만세운동과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들에 의해 점차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그리하여 3월 29일에서 4월 2일까지의 안성읍과 4월 2일 일죽, 죽산 시장에서 잇달은 만세운동이 있었고, 심지어 군청으로 몰려가 수 천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안성지역의 곳곳에서 뒷산이나 앞산에 올라가 횃불을 신호로 일제히 결집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러한 산발적인 시위를 극복하고 실력투쟁으로 진전시킨 것이 4월 1일의 원곡, 양성지역 독립운동이다. 원곡, 양성 역시 3월 10일 이후 산발적인 만세운동이었다. 그러나 원곡면은 사전 연락으로 3월 28일 내가천리 이시련(李時連) 집에 모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어 마을 단위로 봉화시위를 시행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4월 1일 1,000여명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면장인 남길우(南吉祐)와 서기 정종두(鄭鍾斗)에게 태극기를 주어 만세를 부르게 한 후 선두에 세워 양성으로 향해 나갔다. 접경지역인 성은고개에 이르러 시위군중은 각각 각목과 농기구 등을 지참하여 양성면으로 진행하던 중 그날 시위운동을 전개했던 양성면민 1,000여명과 합류하여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향해 돌진하자 순사와 순사보는 그 기세에 압도되어 피신하기에 급급했다.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가옥도 전수·파괴했다. 그리고 일제 주구들의 탄압에 대비하여 이곳으로 통하는 교량을 차례로 제거한 후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일제는 현지의 경찰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조선 주차군 제40여단 79연대 소속장교와 사병 30여명을 지원받아 주동자의 검거에 나섰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가족들을 협박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회유책으로 4월 19일 현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아놓고 모든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용서한다고 했다. 일제의 공포에 짓눌렸던 가족들은 주동자들을 설득하여 이곳에 나가도록 했다. 그러자 일제는 총검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도주하는 자는 사살(현장 순국3명)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또 6월 1일에도 하사 이하 36명을 투입하여 나머지 색출에 나섰다. 이들은 가족들의 협박은 물론이고 민가에 난입하여 방화 약탈 등을 자행 했다. 그러나 일제의 빈틈없는 색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주동자들은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이처럼 원곡, 양성의 3·1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선 무력투쟁이었다. 물론 일제의 야만적인 토벌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여주군>
파사성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8-10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230m(파사산성지) 정상(頂上)을 중심으로 하여 5각형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석재(石材)로 축성하였다. 주위는 약 943m 동문(東門)은 송촌리(松村里)를 향(向)하고 남문(南門)은 당남리(塘南里)와 남한강변(南漢江邊)의 흥천면(興川面) 계신리를 향(向)하였다.
백로 및 왜가리 서식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285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주읍에서 동북 방면으로 약 8km에 북내면 소재지가 위치하는데 이 곳 당우리 삼거리에서 1km 떨어진 곳에 신접리 마을이 있다. 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약 2,000평 미만의 번식지에는 중앙에 약 400년생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번식해 왔다. 이들은 하루종일 햇볕이 들고 물이 가까우며 들이 넓은 주위에 번식지를 정하고 봄이면 왔다가 가을이면 떠나는 철새다. 최초 1950년도에 교목(橋木)인 은행나무에 번식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가 고사(枯死)하자 주위 숲으로 퍼져 번식하는데 이들의 배설물에 의해 대개의 나무가 고사하였다. 현재는 왜가리와 백로 일부만 남아 둥지를 틀고 500m 떨어진 남쪽 리기다 소나무림에 많은 무리가 집단을 이루고 있다. 매년 3월 하순에 찾아와 9월말 경 월동을 위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로 이동해 간다.
고달사지
여주 혜목산 고달사지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수리적 위치는 북위 37˚23´95˝, 동경 127˚39´65˝이다. 군의 북부지역에 있는 북내면은 1914년 군내의 북면(北面)과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地內面)을 합하고 강천면 가정리를 편입하여 이루어진 면이다. 자연적 입지는 해발 400~5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의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유적은 여주읍에서 여주교을 건너 우측으로 원주방면 42번 국도를 따라 약 2km 진행하면 좌측으로 용문방면 331번 지방도가 나온다. 지방도를 따라 약 8km 정도 진행하여 고달사지 표지판을 보고 좌측길로 접어들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고달사지가 위치한다. 고달사는 곧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와, 보물 제 6·7·8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혜진탑, 고달사지석불대좌 등이 남아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여주향교(驪州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향교는 서당에서 공부한 15세 이상의 양반 자제를 교육하던 시설이다. 원래 여주향교는 여주읍 상리 마암(馬巖) 근처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에 타버린 후 1685년 여주읍 홍문리의 잣나무 고개에 다시 건립하였다. 그런데 그후부터 부락 주민이 자주 괴질에 희생되고 풍수학상 불길하다 하여 교리(校里)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齎), 내삼문(內三門), 각 8칸의 동무와 서무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동·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집인데 대성전의 옆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익공계의 형태와 가구 수법으로 미루어 대성전과 함께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여주 향교는 강학(講學)공간이 명륜당으로만 축소되어 규모가 크지 않으나 건물들은 부재의 형태나 결구법에서 지역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생가옆에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그녀의 탄강을 기념해 세운 비이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여주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년) 왕비로 책봉된 뒤 조선 말의 격동기를 보내다가 1895년 일본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봉되고 1904년 여주의 생가에 이 비가 세워졌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루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淚敬書,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250cm, 폭 64cm이며 비각정은 측면 각1칸(1.4평)에 익공양식이며, 팔작지붕이다.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 浮屠)
국보 제4호로 높이 3.4m인 부도의 전체 구조는 원종대사 부도와 비슷한 팔각원당형이나, 지대석에서 완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원종대사 부도보다 앞선 연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원종대사 부도는 4개의 돌을 정교하게 짜맞춘 데 비해이 부도는 팔각의 지대석을 놓았다. 기단부·탑신부·지붕돌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으로, 신라의 양식을 비교적 정직하게 이어받은 고려시대 초기 부도의 빼어난 작품이다. 지대석은 중심에 놓인 팔각 대석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여 있다. 지대석 위로는 두툼한 돌로 굄대를 놓아 다소 높다는 느낌을 준다. 아래 부분은 안상을 음각으로 새겼는데, 그 중심에 귀꽃모양의 안상을 한 면에 한 구씩 꾸민 것이 이채롭다. 상단에는 연꽃을 복련으로 둘러 피개 해 시원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중대석의 둥근 몸돌에는 거북을 중심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노닐고 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거북머리는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는 있지만, 주변에 정교한 솜씨로 다듬은 용머리와 힘이 넘치는 그들의 몸짓은 매우 역동적이어서 사실감을 주며 웅장하기 까지 하다. 큼직한 연꽃이 앙련으로 돌려진 받침 위에 팔각 상대석을 놓고 몸돌을 안치하였다. 팔각 몸돌에는 정면과 후면에 자물통이 달린 문짝과 창살문, 사천왕이 번갈아 조각되어 있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몸매의 균형이 잘 잡힌 사천왕상이 돋보인다. 두툼한 지붕돌이 자칫 투박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여덟 귀의 전각을 날렵하게 들어올린 큼직한 귀꽃이 이를 상쇄시키고 있다. 지붕돌 처마 밑에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도의 주인이 지금 천상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붕돌 정상면에 이르러 복련을 두르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으나, 현재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보개만 남아 있다. 그 위에 찰주를 꽂기 위한 원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륜부는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
유형문화재 제46호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인에 의해 시해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 민씨가 출생하여 16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이다. 최근에는 1975년과 1976년에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6년에는 안채가 수리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넓은 바깥마당에 면하여 솟을대문을 가진 一자형 행랑채가 서고 그 뒤에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 一자형 별당채가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안채는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인데 8칸 규모의 팔작지붕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전면에 퇴칸(退間)이 있는 오량구조인데 2칸 안방과 4칸 대청, 1칸 반 건넌방, 2칸 부엌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꺽이어 1칸 반 온돌방과 3칸 부엌, 1칸 반 광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재목도 그리 크지 않고 간살도 넓지 않으나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
<의왕시>
청계산
해발 618m의 청계산은 고목이 우거져 산세가 수려하고 500m에 달하는 계곡에는 항상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어 시민들이 즐겨찾는 의왕시의 자랑이다. 푸른 용이 산허리를 뚫고나와 흰구름을 헤치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예전에는 청룡산이라고도 했으며 관악산과 함께 서울을 지켜주는 '좌청룡 우백호' 로 알려진 명산이기도 하다.
청계사
의왕시 청계동 11번지에 있는 청계사는 경기도지정문화재자료 제6호로 해발 618m 청계산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 시중 조인규에 의해 중건된 청계사는 중형사원으로 사원규모와 가람(사찰)의 배치는 조선시대 전형으로 보인다. 조선 연산군이 도성내에 있는 사찰을 없애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자 불교측에서는 이 곳을 선종의 본산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안양에서 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청계사의 현재 사찰 모습은 1955년 이후 역대 주지스님들의 정성스러운 증수로 이루어 졌다. 사찰내에는 조선 숙종 15년(1689)에 세운 청계사 사적기비(174cm×92cm×26cm)가 있고 조선후기의 건물로 보이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 중앙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이 협대하고 있다. 그리고 산신각, 봉향각, 요사, 삼성당, 감로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백운산
백운산은 산봉우리가 항상 구름에 싸여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의왕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산세가 깊고 험하여 관악산에 버금가는 등산 코스로 알려져 있다.
백운사
의왕시 왕곡동 산3번지 백운산 능선에 있는 백운사는 경기도지정 제 36호의 전통사찰로서 고종32년(1895) 청풍김씨종중에서 건평20평 규모의 암자를 세운 것이다. 백운사는 원래 19세기말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백운사에서 3km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었으나 고종 31년(1894) 산불로 소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다. 그 후 1916년, 1955년, 1971년, 1999년, 네 차례에 걸쳐 증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그 곳 빈 절터에는 주춧돌과 기석, 그리고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있을 뿐이다.
철도박물관
철도박물관은 의왕시 월암동에 있는 관광명소로 1988년 1월 26일 문을 열었다. 철도박물관은 민족의 애환과 낭만을 같이 한 철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서, 과학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박물관의 본관은 철도역사실, 차량실, 모형철도파노라마실, 전기·신호·통신실, 시설·보선실, 운수·운전실, 세계철도실로 구성되어 있고 옥외차량 전시장에는 증기기관차·디젤동차·귀빈객차 등 실물차량을 전시, 총 2,677점이 선보이고 있다. 모형철도 파노라마실은 도심의 빌딩숲을 비롯한 전국을 누비는 철도의 운행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총연장 289m의 선로가 거미줄처럼 깔려있고 그 위에 실물의 1/87 로 축소 제작한 새마을호 등 13개 열차가 중앙 집중제어장치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특히 열차들이 야간운행을 할 때는 여의도의 63빌딩, 남산타워 등이 휘황 찬란한 빛을 발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는 등 환상적인 서울의 야경을 만들어 낸다. 철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철도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일 뿐 아니라 과학관 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어 교육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것으로 기대된다. * 관람료 : 일반 (19~64세) : 500원, 일반단체 (30인 이상) : 400원, 할인 (7~18세) : 300원, 할인 단체 (30인 이상) : 200원, 6세 이하 어린이, 노인, 장애인은 무료
백운호수
의왕시 학의동에 있는 백운호수는 1953년 9월에 준공을 한 인공호수다. 백운산과 청계산이 둘러싸고 이들 산 계곡의 물이 호수로 흘러들기 때문에 물이 맑고 주변풍치가 매우 좋다. 호수가 생긴 뒤 아름다운 주위 풍치 때문에 저수지 주변 일부가 유원지화 했고 그 후로는 낚시보다는 행락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유원지에는 방갈로와 여관 등 숙박시설과 음식점, 카페 등이 고르게 갖추어져 있고 호수에는 유선을 띄우고 있다. 이 곳의 별미로는 민물매운탕이 있고 대형주차장과 차집관로, 호수순환도로 를 개설해서 주민의 이용편의를 도모하였으며, 백운호수를 중심으로 도시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자연학습장
푸른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의왕시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곳곳에 자연학습장을 조성해 놓고 있다. 현재 규모가 가장 큰 모락산 자연학습장은 정상을 중심으로 내손동과 오전동 지역 에 조성되어 있으며 모락산은 11㎞읜 산림욕장이 있어 산림욕을 즐기며 자연생태계에 대한 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다.
<평택시>
충의각
충의각은 조선 중종 때 인물인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과 인조 때 인물인 추담 오달제(1609~1637)선생의 넋이 담겨 있는 유허지비를 보존하는 비각이다. 유허지비는 당시 진위유림에서 어릴 때 조광조 선생이 학문을 배우며 지냈던 곳이자 삼학사의 한분인 오달제선생의 옛집이 있던 곳에 비를 세울 수 있도록 나라에 소를 올려 허가를 득하여 1800년 세우게 된 연유를 지닌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중종 때 사림파의 거두로서 왕도정치를 주장하고, 사회개혁을 하는등 혁신적 정치를 꾀하다 실각한 분이며, 당시 진위 유림과의 교우가 두터워 경포산인 최수성, 오좌동의 개척자 최자반 선생들과 시론했다고 진위 현.읍지에 나올만큼 송탄에 그의 유지가 남아 있다. 추담 오달제 선생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의 거두로 순절한 삼학사의 한 분이며 현 동령마을에 옛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분으로 인하여 이충동이란 마을명이 있게 되었다. * 가는 길 : 대중교통(평택에서 2-2번 버스 승차, 송탄부영아파트 2단지에서 하차, 도보 10분), 자가용(1번 국도 송탄 이충주유소 앞에서 동령마을로 진입 5분 소요). * 문의 : 중앙동사무소(610-8604)
평택향교
문화재자료 제 4호로 팽성읍 객사리 185 에 위치한 이 향교는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조선 초기라 전하여 지고 있다. 향교의 배치는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잡은 관계로 강학처소인 명륜당이 앞에 오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오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최근에 쌓은 사괴석 담장 중앙으로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 집으로 민도리집양식이다. 명륜당 뒷편으로는 솟을 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에 이른다. 배향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이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익공을 짜올린 익공식 건축이다.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유림에서 춘추제향을 지내고 있다. *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평택시내에서 안정리행 버스 승차, 부용초교 앞에서 하차 , 도보 5분 소요 (자가용) 평택에서 온양방면(45번 국도)으로 진행, 안정리방향. * 문의처 : 팽성읍사무소(691-3003)
진위천유원지
진위면 봉남리(진위천내) 432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659-4142, 659-5067(사무실) 610-8385, 664-3000(유원지). 입장료 : 개인(대인 1,000원, 소인 500원), 단체(대인 800원, 소인 400원). * 찾아오시는 길 : (국도) 서울▶수원▶오산▶하북삼거리에서 진위면사무소방향, (국도) 안성(천안)▶평택▶송탄▶하북삼거리에서 진위면사무소방향, (버스) 평택에서 오산방면 2번, 2-2번 버스 5분마다 운행, 수원,천안에서 직행버스 5분마다 운행
평택호관광지
현덕면 권관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호수주변에 위치한 잔디밭과 솔밭, 오솔길 등 휴식장소, 주변횟집에서 싱싱한 회와 장어구이, 꽃게요리 등 먹거리, 방조제사이의 도로에서 보이는 시원한 바다, 평택호 호수 위의 요트 및 유람선, 평택호친수공간으로 조성된 수변데크, 배수관문 앞 평택호 기념비와 평택정, 호숫가의 석축등을 볼수 있다. * 찾아오시는 길 : 버스(아산시, 삽교행 직행버스 08:30분부터 수시, 안중행 시내버스 15분간격), 자가용(평택에서 안중을 거쳐 39번 국도를 따라 서산방면으로 20여분 소요, 서울에서 90km(80분 소요) , 수원에서 45km(45분 소요), 온양에서 18km(25분 소요)
민세 안재홍생가
기념물 제 135호로 고덕면 두릉리 646 에 위치한 이 건물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시대의 선구자이며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던 민세 안재홍(1891~1965)이 태어나 살던 집이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학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귀국후 중앙학교 학감, 조선일보 주필 및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교육활동을 통한 민족계몽과 독립사상고취에 헌신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해방 직후 미군정의 한인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을 역임하고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동란 중 납북되었다. 가옥은 원래 대문간채까지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건물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914년, 사랑채는 1932년에 건립되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의 전형적인 경기도 지역의 건축형태를 따르면서 20세기 초 생활 상의 변화를 반영하여 부엌과 대청 사이에 연결 통로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역시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 가는 길 : (대중교통) 서정리에서 청북행(90분 간격) 승차, 고덕주유소 앞에서 하차, 30분 소요 (자가용) 송탄에서 청북방향, 고덕주유소에서 하차, 20분 소요. * 문의처 : 고덕면사무소(663-2002)
첫댓글 가고 싶어서 그러시죠
넹.
가까운 곳부터 공략해야죠. 함께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