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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광장 Pizza di Spagna
정면에 있는 스페인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의 무대로서 유명하다. 초상화가나 꽃 가게가 늘어서 있는 이 계단에 앉으면 밝은 분위기에 휩싸여서 안락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계단 앞의 조각배 분수 Fontana della Barcaccia 앞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기타를 치고 있으며 사진을 찍는 등 번잡하다. 이 분수는 베르니니 부친의 작품으로 옛날 테베레 강둑이 무너졌을 때 여기까지 조각배가 흘러왔다는 에피소드에서 유래된다. 세 군데의 무도장을 갖춘 스페인 계단 위에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서 잇고 그 뒤로는 트리니타 디 몬티 교회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탈리아인이 설계하고 프랑스인이 지불했고 영국인이 배회하다가 지금은 미국인이 점령하고 있다.’고 하는 스페인 계단이지만 실제 1725년에 프랑스 대사의 원조로 만들어졌으며, 스페인 대사관이 이곳에 있어서 스페인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광장 주변에는 영국풍의 찻집이 아직도 18세기처럼 남아 있어 예전에는 영국인의 게토라는 별명도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 부근에 스탕달 ・ 발자크 ・ 바그너 ・ 리스트 ・ 브라우닝 등 문호 ・ 예술가들이 몰려 들었으며 스페인 계단 오른쪽에는 아직도 키츠의 집(Casina di Keats)이 남아 있다. 지금은 키츠셀리의 기념관으로서 이들 외에도 바이런 등의 자필원고와 편지 ・ 사진 등 풍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애호가는 반드시 가볼 만한 곳이다.
스페인 광장은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계단을 만드는데 프랑스에서 원조했고 바로 옆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스페인 광장으로 불린다는 것과 옛날에 홍수가 나서 조각배가 다녔다는 표시로 조각배 분수를 만들었다는 것과 몬티교회와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면서 우측에 예술가들이 지냈다는 키츠의 집을 ‘가이드’는 설명하고는 약 20여 분간 시간을 주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준비한 카메라 밧데리가 소진되어 촬영이 불가했다. 남에게 부탁하기도 뭐하고 1회용 카메라를 사려고 했더니 역시 아내는 뭐 하러 비싼데 사려냐고 성화다. 다른 사람들과 사진기로 찍었지만 내 마음대로 사진 찍기가 불편하여 계단위쪽의 노상에서 8₤를 주고 하나 사서 찍었다. 마음이 편했다. 계단은 사람들로 분주하였고 몬티교회는 천막을 씌우고 보수 공사 중이어서 복잡하고 산만한 분위기를 더했다. 계단에 꽃 장식은 화사해 보이나 그 또한 계단에 앉은 사람,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오히려 장애물처럼 보였고 일부는 이미 시들어서 산뜻함을 느끼기에는 분위기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시기가 꽃의 축제기간 이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 과 그레고리 펙’이 어쩌구 저쩌구 했다지만 벗어나고 싶었다. 날씨도 덥고 해서 일단 우리 부부는 내려왔다. 앞의 거리를 보니 깨끗하고 산뜻한 가게들의 진열장에 진열된 보석류의 시계, 반지 등의 디자인이 좋아서 한참 구경했다. 오히려 그 거리에서 전체 경관을 볼 수 있다 하여 사진을 찍고 모임장소에 가니 사람들이 일부 모여 있어서 ‘조각배 상’ 앞에서 기념촬영 후 시간이 되어 모였다. 아내는 노상가게에서 ‘피노키오’인형을 사고 싶어 해서 잠깐 들러 보니 가격이 비싸다. 그만두고 바삐 일행을 쫒아 우리는 다음 관광지인 트레비분수로 갔다. 과거에 식수로 쓰였다며 전쟁을 하고 온 병사들이 목을 축였다는 것과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온다고 했다. 아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하여 바로 옆 가게에 가서 줄을 서서 티켓을 끊고 흑인점원에게 주니 바닐라 ・ 포도 ・ 우유 ・ 딸기... 아이스크림을 선택하는데 우리 부부가 각기 다르게 선택하여 영어로 주문하면서 선택을 바꾸자 한국말로 냅다‘미치겠네’하면서, 포도, 딸기, 우유? 하며 손가락으로 안내하며 떠준다. 선택의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 점원의 한국말이 기특하고 신기하기도 하려니와, 한국의 비천한 말 표현을 들으면서 씁쓸한 마음이 기분을 무겁게 했다. ‘좋아라.’ 하는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나오니 비가오고 있었다. 한국동전 10원짜리 하나를 구해서 그곳의 격식대로 뒤 돌아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 너머로 분수 안에 던져 넣었다. 사진도 찍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할 수 없이 거리에서 우산을 갖고 다니는 노상에게서 1개를 바삐 샀다. 1개 5₤에서 눈치껏 3₤까지 내려 살 수 있다. 그곳의 장사요령과 한국인의 거래습관에는 아주 어울리는 생활관습이 묻어 있는데, 어떤 면에서도 한국 사람이 그렇게 버릇을 들여 논 것 같다.
<트레비 분수와 아이스크림>
● 트레비 샘 Fontana di Trevi
샘에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를 찾아올 수 있다고 하는 전설로 너무나도 유명한 곳이다. 많은 여행자가 샘 주위에 진을 치고 동전을 던지는 것은 이 도시에 매혹되었다는 표시이다. 트레비란 ‘삼거리’란 뜻으로 이 앞에 세 개의 길이 뻗어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교황 크레멘스 12세 주최의 분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니콜라 사비노의 설계로 뒤에 있는 궁전을 교묘하게 배경으로 집어넣고 바다 신 넵튠과 트리톤이 힘차게 약동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1762년에 완성되었으며 샘으로 통하는 길이 좁고 조금 찾기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다.
● 트레비 분수
로마의 수 많은 분수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분수이다. 이것은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에 의하여 니콜라 살비가 디자인하여 30년 만인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완성하였다. 이 분수는 100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1485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7세기에 재건되어 로마의 명물이 되었다. 이 분수의 거대한 물줄기는 조그만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바로 옆에 붙은 궁전의 한쪽 끝을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조각으로 완전히 독차지하고 있다. 이 분수는 흰대리석 작품으로 벽면에는 조각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팔라초폴리 건물의 한쪽 면으로 한 가운데 대양의 신 오체아누스가 있고 양옆의 석상은 풍요와 건강을 상징한다. 브란치의 작품으로 폴리 궁전 배후의 벽면을 교묘하게 이용한 조각은 바다의 신 프리톤이 이끌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은 격동의 바다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하고 분수대의 거대한 수반은 대양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바로크 미술 후기의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해마다 끄는 조개껍데기 전차를 탄 해신의 역동적인 조각이 눈길을 끈다.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은 밤에 조명을 받았을 때 더욱 빛이 난다. 트레비 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지친 병사에게 물이 있는 샘물을 한 처녀가 알려주었는데, 이 트레비 분수의 샘이 그 곳에서 끌어왔다고 하여 전해진 말이라고 한다. 이 분수에서 등을 돌리고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방법은 동전을 오른손에 잡고 트레비 분수를 뒤로 하여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한 개의 동전을 넣으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두 개를 넣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개를 넣으면 이혼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인지 분수 바닥은 세계 각국의 동전으로 가득 차 있다. 베르지네 호수에서 끌어오는 분수의 물은 로마에서 가장 부드럽고 맛 좋다고 알려져 수세기 동안 바티칸 궁으로 실어 나를 정도였으며 로마에 살고 있는 영국인 차 제조업자들은 단지에 담아 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1916년에 음료수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정되었고 오늘날은 전기 펌프에 의해 순환되고 있다.
■ 베니치아 광장
<비오는 베네치아 광장>
짧은 거리는 걷기로 하고 버스를 타기로 하면서 비오는 거리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비토리아노 앞에서 사진만 찍고 옛 로마의 궁궐터인 포로로마노로 갔다. 비토리아노는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여 지은 건축물이 라는 개략적인 설명을 했다.
● 베네치아 광장 주변
이 광장 정면에 서 있는 것이 ‘웨딩케이크’ 혹은 ‘타이프라이터’ 란 별명으로 불리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념당 비토리아노(정식으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당)이다. 비토리아노의 정면으로 가면 왼쪽부터 양쪽 모두 고대 유적 틈에 있는 포리 임페리얼 거리 Via Fori Imperiali가 콜로세움까지 통한다. 광장 정면의 비토리아노 Vittoriano는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여 1911년에 완성된 것이다.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16개의 원주가 호를 그리는 코로네이드가 멋있다. 계단 아래 양쪽에 있는 분수는 오른쪽이 티레니아 해, 왼쪽이 아드리아 해를 나타내며 중앙의 기마상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다. 윗부분의 큰 동상은 오른쪽이 ‘조국애와 승리’ 왼쪽은 ‘사색과 행동’을 나타낸다. 그 밑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두 사람의 자세로 이 무명 전사의 묘를 지키고 있다. 중앙에 녹음이 우거진 광장의 왼쪽에는 베네치아 궁전 Palazzo Venezia이 있다.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옛날 베네치아 공화국이 번성했던 무렵에 베네치아 대사관이 있었던 관계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또 여기에 집무실을 두었던 무솔리니가 2층의 발코니에서 광장을 가득 채운 군중들에게 연설했던 것도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이곳에 이탈리아 각지의 공예품을 모아놓은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다. 기념당을 왼쪽으로 하고 마르첼로 극장 거리 Via del Teatro di Marcello를 나가면 왼쪽에 곧 두 개의 계단이 나타난다. 바로 앞의 계단을 오르면 산타 마리아 다라코엘리 교회 Santa Maria d' Aracoeli이다. 여기서 보면 로마 거리의 뛰어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교회 내부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두 번째의 계단은 고대 이집트의 사자상을 배치해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다. 원만한 계단을 오르면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el Campidoglio이 나온다. 이 캄피돌리오는 영어 캐피털 Capital의 어원이며 옛날에는 고대 로마의 중심으로서 최고 신 주피터의 신전을 비롯하여 이 언덕에 25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오늘과 같은 아름다운 광장이 되었다. 정면에는 로마 시청 Palazzo Senatorio이 있다. 바로크 양식의 정면에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계단이 건물 양 옆에서 2층 입구까지 이어진다. 광장 중앙에 있는 대좌는 고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 아우렐리우스 동상의 것이다. 동상은 9년에 걸쳐 복구하여 1990년 4월에 끝나 미술관 쪽에 안치되었다. 이 시청의 뒤로 나가면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포로 로마노가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타르페이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반역자를 이 바위에서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처형했다고 한다. 황금에 눈이 멀어 로마를 배반하고 적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여사제 타르페이아가 그 적장에 의해 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것이 시초라고 한다. 계단을 내려와 포로 Foro를 따라 150m쯤 나가면 오른쪽이 입구이다. 이 유적의 남쪽에 완만하게 펼쳐진 언덕이 팔라티노 언덕Palatino이다. 늑대에게 자란 로몰로와 레모(로물루스와 레무스)이야기인 로마건국 전설의 발상지이다. 이 언던 동쪽 아래로 펼쳐지는 대경기장 유적이 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이다. 영화 <벤허> 의 유명한 장면에서처럼 고대 전차 경기가 벌어졌던 곳으로 특히 남쪽으로 펼쳐지는 아벤티노의 언덕 Aventino에 날이 저물면 조명을 밝혀서 고대 로마의 낭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시간이 있으면 포로 로마노의 입구를 지나 팔라티노 언덕까지 걷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없을 때는 유적을 따라 달리는 포리 임페리얼 거리에서 팔라티노를 바라보면서 콜로세움으로 향하도록 한다. 콜로세움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린다. 이 거리의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것은 황제들의 포로(광장)이다. 포로 트라이아노는 맨 앞의 왼쪽에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절대적인 영토 확장을 자랑한 117년까지의 일대 모라 제국의 지배 . 확장 과정을 나타낸 지도가 4장의 대리석 판에 새겨져 있다.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한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로 포로라는 이름대로 처음에는 변두리 성의 사람들이 모이던 시장 터였다가 하수도로 만들어진 BC 6세기경부터 차츰 상점, 건물 등이 들어서고 도시의 기능이 충실해져 상업, 종교,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의 포로 로마노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발굴한 것이다. 포로 로마노를 방문하기 전에 캄피돌리오 광장의 세나토리오 궁 뒤쪽 좌우에 설치된 테라스에서 유적지의 장관을 보는 것이 좋다.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의 주요 7개 언덕 중의 하나로 고대 로마 당시 사람들이 가장 신성시 하던 주피터 신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은 바닥이 기하학적 무늬로 되어있어 아름답다. 이곳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으로 왼쪽의 건물은 캄피돌리오 박물관이고 오른쪽의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이다. 이곳에서 내려가 포로로마노 거리를 따라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이 기원후 367년경의 델리데이콘센티 건물의 주랑 현관이다.
바실리카 에밀리아는 로마에 세워진 두 번째 공화당으로 사법, 금융, 사업 등의 거래를 행하는 공공 건물로 410년에 서고트 족이 로마를 점령할 당시 화재로 일부가 소실된 건물이다. 현재 원로원은 바실리카 에밀리아의 북서쪽에 있는 4층 벽돌 건물로 BC 7세기경에 세워졌으며 높이 20m의 건물로 바닥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안토니우스 황제와 파우스티나 황후의 신전, 로물루스 신전, 사투누스의 신전, 베니스 신전, 2개의 개선문이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로원 앞에 있는 루스투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연설을 하던 곳이었으며 당시 시내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조금 내려 가다보면 로마 시대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던 사투르누스의 신전이 있다. 포로 로마노 입구 동쪽에 있는 거대한 신전은 막센티우스 신전이다. 308년 막센티우스 황제가 짓기 시작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완성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신전 옆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안타쿠아 성당은 포로 로마노에 있는 가장 오래된, 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기독교들의 기도소였다. 그 밖의 건물은 기둥이나 초석 등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이곳은 규모가 커서 걸어서 둘러보는 데에도 2시간이 소요될 정도이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사이에 펼쳐진 큰 Foro는 로마 시대의 시민생활의 중심이었다. 포리 임페리얼 거리에서 내부로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늘어선 원형기둥이 아에밀리우스의 바실리카 Basilica Emilla이다. 기원전 179년에 세워진 금융의 중심으로서 상거래 등에 사용되었지만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점령 시 화재가 발생했고 그때 녹은 화폐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실리카의 서쪽에 있는 벽돌 구조의 4층 건물은 원로원 Curia이며 공화제 시대의 최고 정치기관이다. 시저가 ‘브루투스, 너였구나!’라고 외치며 살해당한 것은 이 건물 앞이었다. 원로원 앞 지붕의 유적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로물로)의 묘 Tomba di Settimio Severo으로 높이 23m, 폭25m가 되는 이 문은 세베르스 왕의 동방 변경에서의 전승 기념으로 203년에 세워졌다. 개선문의 정면 좌측에 있는 가늘고 긴 대좌는 연단 Rostri으로 이전에는 키케로 등의 웅변가가 그 말솜씨를 자랑하던 곳이다. 이 왼쪽 끝에 있는 8개의 원형 기둥은 로마의 산업신인 사트르누스의 신전 Tempio di Saturno이다. 당시 제일 중요하게 여겨진 궁전으로 12월의 제삿날에는 노예도 주인과 대등한 모임이나 술자리가 허용되고 사람들은 선물을 서로 교환했던 곳이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풍습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Foro 중앙부를 빠져나간 길이 성자의 길 Via Sacra이며 그 왼쪽에는 지금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있는 시저의 바실리카 Basilica di Cesare가 있다. 이 부근을 걷고 있으면 고대 로마의 역사를 그린 <시저와 크레오파트라의 전설>과 <주사위는 던져졌다.> 등의 루비콘 강을 건넌 먼 옛날의 드라마가 생각난다. 성자의 길을 계속 가면 왼쪽에 원형의 작은 신전이 있다. 이것이 불의 신, 베스타의 신전 Tempio di Vesta이다. 이 신전에 타고 있는 불은 로마의 생명을 상징하는 불절의 성화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방에 이 신전을 지키고 있는 6명의 성 처녀의 집 Casa delle vestali이 있는데 부엌, 식당 ㆍ 응접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앞 왼쪽에 웅대한 아치를 그린 건물이 마크센티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Basilica di Massenzio(di Costantino)로 여름에는 이곳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이 전방에서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Arco di Tito이 보인다. 로마에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개선문이다. 여기에서 포로 로마노는 끝나고 이 개선문 왼쪽의 완만한 고갯길을 오르면 팔라티노 언덕으로 이어진다. 포로 로마노를 견학하려면 적어도 2시간은 걸리고 팔라티노의 언덕을 포함하면 반나절은 필요하다(Via di Gregorio 쪽에도 출구가 있어 팔라티노 언덕에서도 가깝다.)
(포로 로마노에 있는 개선문)
시청 청사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면서 ‘가이드’도 설명을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시대 전성기의 건물 흔적이 남아있고 계속 발굴 중에 있었다. 멀리 팔라티노 언덕이 있어서 로마 건국 전설의 장소였으며 왕들의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네로황제가 로마를 불태우며 지켜봤다는 궁궐이 있다는 곳이며 바로 앞에는 세베르스 왕의 개선문이 있었으며 개선문 우측에도 연단이 있어서 시저나 부루투스 등의 연설가들이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여러 개의 궁전 기둥만이 당시의 영화를 말하는 듯 했고 먼발치에 티투스황제의 예루살렘 공략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또 있었다. 시저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의 글이 있다는 곳, 죄수들의 감옥 등 유적위에 유적이 있어서 가히 발굴이 어려운 곳이고 옛날의 생활방식과 양식이 배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개별적으로 구경을 한 다음 1km쯤 멀리 보이는 개선문 우측에서 모이기로 하고 시간이 주어졌다. 비가 계속 내리는 데다, 아내도 사진 찍기도 좋아하지 않고 하여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는데 좌측에 좁은 광장이 있고 성당인 듯 한 건물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아내가 아는 성당이라는데 ‘소화’성당이랬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신부님 두 분이 앉아 있었고 내부는 제대가 있으며 미사 할 수 있게 의자도 소규모(100여석)마련되어 있었다. 한 신부님이 어디서 왔냐며 일본이냐고 묻기에 한국-남한에서 왔다고 했다. 들어가 구경해도 되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제대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잠시 묵상하고 더 있으려는 아내에게 일행이 있으니 나가자고 했다. 아까 언뜻 보니 같이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 서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기다리고 있다면 미안하므로 아내를 재촉하여 나오니 어디가고 없었다. “거 봐라!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할 텐데, 괜히 신경 쓴다.” 한마디 듣고 바로 옆에 건물 쪽으로 옮겨서 구경을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무슨 전시회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조금 있어서 옆의 층계를 보니 성당처럼 주보도 있고 하여 올라가니 아주 조그만 성당이 잘 꾸며져 있었고 십자가 도상이 특이하게 영성의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촛불과 촛대의 모양이 아주 화사하게 가꾸어 꾸몄는데 숙연하면서도 아름다움에 우리 부부는 의자에 앉아 묵상하였다.‘가이드’에게 우리가 갔던 성당을 질문했더니, 옛날 베드로 사도가 갇혔던 지하 감옥인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위에 건물을 짓고 성당을 꾸몄다고 했다. 성당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마음으로부터 뭉클하니 느껴오는 ‘성령의 기쁨'이랄까? 형언키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행복함이 어떤 계기가 아닌데, 그냥 즐거운 기분, 가볍다고 할까? 하는 마음으로 대뜸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자.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 우리를 무언가 이렇게 이끌고 있지 않느냐?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자. 우리 성당의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예레미아 1~9)는 문구가 순간 머리를 스쳤다.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그런 것 같았다.
한참동안 묵상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밖을 나오니 아래 지하에도 표나 요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듯 수금함이 놓여 있었고, 시간이 여의치 않아 아내와 나는 지정 장소를 향해 대로를 걸어갔다. 옛날 로마 전성기 때 가꾸어진 도로라서 모든 것이 돌로 되어 있었으나 군데군데 비로 인하여 웅덩이가 있어서 걸어가는데 불편하였다. 우리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우리 때문에 기다린 듯 하였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진실의 입’이 있는 ‘코메스딘 성당’의 문 닫는 시간이 있어서 문을 닫기 전에 먼저 그곳을 가게 되었다면서 최초 자신의 약속한 장소가 변경되었기에 거기서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를 보자 모두 모여 있다며 안내 했다. 조금 가니 한 쪽에 일행들은 모두 모여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합류하자 ‘가이드’는 ‘진실의 입’이 있는 곳으로 걸어서 안내했다. 조그만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을 따라 일행은 바삐 걸었다. 때로는 어떤 건물사이의 길을 가로지르기도 하여 어느 정도 큰 길을 접어들어 계속 걸었다.
로마(영화 ‘로마의 휴일’에도 등장했던 ‘진실의 입)
●진실의 입 광장
마로니에 나무가 늘어선 테베레 강변을 200m쯤 가면 포르투나 빌리리스 신전 Tempio della Fortuna Virile이 나온다.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을 정면으로 하여 세 방향을 기둥형 벽으로 둘러싸고 있다. 강과 하구의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기원전 2세기 것이며 현재 로마 신전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앞이 베스타 신전 Tempio di Vesta이다. 화로와 화롯불의 신에게 봉헌된 20개의 코린트식 원주로 둘러싸인 원형 신전이다. 이 신전 앞이 진실의 입 광장 Piazza Bocca della Veritá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친숙한 진실의 입은 이 광장의 안쪽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Santa Maria in Cosmedin의 입구 왼쪽에 있는 트리톤의 얼굴을 본뜬 원반형을 띠고 있다.
진실의 입
베네치아 광장의 남쪽에 위치한 진실의 입은 옛날 가축 시장이 있던 곳에 자리잡은 곳으로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에 있는 산타 마리아 코메스딘의 성당 현관에 수호신처럼 새겨진 부조상이다. 이곳은 콜로세움이나 카라칼라 욕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 BC 4세기에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새긴 대리석 부조물로써 평소에 거짓말을 한 사람은 이 조각상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관광지로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이 이곳에 가서 손을 집어넣고 깜짝 놀라는 장면으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명소이다. 이곳에 가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진실의 입안에 손을 넣어 보고 잠시 긴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장면을 연출하며 손을 집어넣은 채 기념 촬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곳은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곳이지만, 구석에 있어서 놓치기 쉽다. 현재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알려져서 한참동안 줄을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광관지이기도 하다.
‘가이드’는 한국 유학생으로 성악을 전공하는데 석사과정이라고 했다. 가끔 귀국하여 근무할 학교를 찾기도 하는데 국내의 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는 등 우리가 보기에는 그가 대단히 실력 있고 훌륭해 보였는데 결국 그런 인재들도 국내에서의 자리문제로 고민하고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세상사는 것이 모두 다 그렇지 뭐! 국내 들어와서 친구인 코메디언 유재석과 만났다는 얘기, 내가 보기에는 그 ‘가이드’도 거의 코메디언 수준으로 말과 재치가 보통 수준을 넘었다. 교수들을 만나보고 진로를 고민했던 말들, 짧은 시간 비록 걸어가면서 나눈 얘기이지만 그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공사를 하는 듯한 건물 옆을 지나니 바로 그 복도 비슷한 곳에 ‘진실의 입’이라는 부조물이 붙어 있으면서 기다란 줄이 서 있었다. 시간상 앞 팀의 양해를 구했다면서 ‘증명사진’ 찍기에 여념 없이 우리 팀은 행사를 했는데 막상 우리가 찍으려 하니 선배 내 사진기 밧데리가 다 되어서 다른 팀의 사진기를 빌리러 가서 얘기 하니 모두가 못 들은 체 한다. 할 수 없이 바로 와서 방금 전까지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마치 자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그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이 금 새 마음을 감춰버린 그 상황이 오히려 우스웠다. 그래, 세상은 역시 코메디다. 휴대용 필름 카메라로 부탁했지만 많이 어두워서 안 찍힐 듯 했다. 겨우 사진 한 장이지만 어리석게도 마음은 무슨 귀중한 순간을 놓친 것 같고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온통 헐크러진 심리가 초라함을 주었다. 애써 아무 일도 아닌 듯 아내의 손을 잡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마치 남남들이 애써 모른 체 하듯 무시하면서 오직 나의 목적만 이루면 문제 안 되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부족하거나 천박스러운 것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입’은 로마시대의 하수구 뚜껑이었다고 한다. 비는 좀 더 많이 내렸다. 관광의 허가권을 가진 ‘가이드’가 필요하다며 할머니 년 배의 ‘현지 주민 가이드’ 가 나왔다. 우리는 버스로 다음 이동지로 옮겼다. 다시 내려서 벌판과 같은 곳에 이르니, 옛날 전차경기장이란다.(마시모경기장이었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와 같이, 옛날에 전차 경주 트랙 흔적이 있었고 관람석 흔적도 있었다. 지금은 시민들의 조깅코스인 듯 비가 오는 가운데 한 시민이 트랙을 따라 구보를 하고 있었고 바다가 가까운 듯 갈매기 몇 마리가 넓은 경기장 터에 앉았다 날아오른다.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팔라티노 언덕을 끼고 다음 유적지로 걸었다. 한참을 큰길을 따라 걷는데 조그만 우산은 비를 다 가리지 못하고 모처럼 아내와 한껏 밀착하여 걸었지만 다른 쪽 어깨는 다 젖었다. 아래 바지도 젖고 하여 금방 그칠 것 같은 비는 끈질기게 내렸다. 얼마를 걸어왔더니 바로 앞에 개선문이 나타났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란다. 그런데, 그 개선문에 소요된 기둥과 조각들이 모두 전쟁 후 동방에서 모두 가져와서 만들었다고 하니 현지의 얼마나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겠는가 생각되었다. 후에 나폴레옹이 로마에 입성하여 다시 가져가려 했는데 도저히 못 움직일 것 같아서 파리에다 유사한 것을 만든 것이 이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했다. 비가오고 너무 시간이 없다고 바삐 설명하고 스치기에 대충 보았지만 부조된 내용은 많은 역사의 내막을 지닌 것 같았다. 콜로세움에 가까이 가려 앞으로 나가니, 좌측에 포로 로마노와 연결된 길이 나 있었고 먼발치에 티투스황제의 개선문이 보이며 여기 콜로세움으로 이어진 길이다. 바로 옆의 콜로세움은 형편없이 훼손된 채 보수 중이었다. 과거 원형극장이었으며 검투사들의 격투시험장으로 사용되었는데 로마가 몰락하면서 귀족들의 집이나 교회 축성에 채석되었고 중간 중간 ‘동(구리)’ 지지층도 그런 용도로 취발 되고 2차 대전 때 무기제조에도 도발되었다 하니 국력이 쇄잔해지면 격조 높은 문화재도 수난을 받기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똑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 아피아 구가도(舊街道)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대로 로마를 기점으로 하여 광대한 지배지로 향한 많은 군용도로가 뻗어 있다. 이 아피아 가도도 그런 길의 하나로 기원전 312년에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크라우디우스가 가프아까지 개통시킨 것이다. 그 후 이탈리아 반도의 동남단의 브린디시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 길을 ‘여왕의 길’이라 불리었다. 지금은 도로변을 따라 큰 빌라가 서 있지만 카라카사 소나무가 이어진 길 양 옆에는 많은 묘와 사당ㆍ폐허가 이어져 고대의 진영을 읽을 수 있다. 아피아가도 곳곳에 있는 유적,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돌바닥 등 그야말로 조용한 고대 로마의 잔영이 떠돈다.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 양이 무리져 있는 녹색의 언덕과 수도교 등 로마의 시골을 흠뻑 맛볼 수 있다.
<아피아 구가도에는 아직 카타콤베가 많이 잔재해 있다.>
● 카라칼라 목욕탕 Terme di Caracalla
217년에 완성한 카라칼라 황제의 욕탕은 당시 세계 최대의 욕탕이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곳곳에 남아있는 모자이크로만 그 모습을 집작할 수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광대한 정원이 펼쳐진다. 정면의 큰 돌담장은 예전의 수도시설이며 그 양 옆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목욕탕이라고는 해도 넓은 부지 안에 산보장ㆍ체육실ㆍ예배당ㆍ도서관이 있어 하나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 체칠리아 메테라의 묘 Tomba di Cecilia Metella
큰 원통형의 묘로 아피아 가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이다. 묘의 주인은 로마 최고 귀족의 딸로 삼두 정치를 성립시켰던 크라수스의 장남과 결혼했다는 체칠리아 메테라이다. 지름 20m의 원형 묘였으나 14세기에 이것을 요새로 이용했기 때문에 윗부분에 성(城 )이 덧붙여졌다.
● 산칼리스토의 카타콤베 Catacombe di san Callisto
이 주위에는 약 30개에 달하는 카타콤베가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며 중요한 것이다. 카타콤베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박해받은 그리스도 교도들의 집회장이며 지하묘지였던 곳이다.
● 도미네 쿠오 바디스 교회 Domine Quo Vadis
64년 네로 황제 통치 하에 로마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던 때가 있다. 네로 황제가 도시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그 죄를 그리스도교에게 전가해 대규모 박해를 가했다. 사람기둥을 만들어 불태우고 맹수와 싸움을 시켜 죽이는 등의 잔혹 행위로 방화 소문을 없애고 자신의 죄를 잊도록 했다. 그때 페테로(피에트로)는 박해를 피해 시내를 빠져나오는 도중 아피아 가도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Domine Quo Vadis(도미네 쿠오 바디스)?”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는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하였다. 이에 페테로는 수치심을 느끼며 다시 시내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한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는 멸망하며 그때 세계도 멸망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로마의 일대 명소이다. 콜로세움 Colosseo은 지금도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옆에 서 있는 큰 문은 서기 315년에 건축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이다. 2,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거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콜로세움으로 이어진 왼쪽의 지하철에서 100m 정도에 서 있는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모제 상으로 장식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교회 San Pietro in Vincoli를 볼 필요가 있다. 이곳은 산 피에트로가 팔레스티노와 로마에서 체포되었을 때 의 쇠사슬을 보존하기 위해 5세기에 세워진 곳이다. 그 후 15세기에 재건되었으며 산 피레트로의 쇠사슬은 브론즈의 뚜껑 아래와 제단 위에 있다.
로마의 상징적인 명소인 콜로세움은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포리 엠페리알리 거리에서 1Km정도 거리가 다하는 곳에 있다. 이것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72년에 시작해 80년에 완성된 원형 경기장이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며 이곳의 명칭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근처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인 클로소(Colossus)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거대한 건물(콜로사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로마를 상징하는 원형극장으로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고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는 5~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오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에는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는 등 몹시 훼손되었는데 18세기에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수난의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 경기장은 로마시대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사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으로 검투사들의 검투시험장으로 또한 맹수들의 사냥 시합장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정기 때에는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장내에 물을 채워 넣고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생명을 내건 검투사들의 싸움인 검투사의 격투, 맹수와 인간과의 사투와 맹수들끼리의 싸움 등이 시행되어지는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영화'글레디에이터'의 배경). 그 후 300년 이상이나 처참한 사투가 되풀이 되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막을 내렸다. 현재는 통로와 방의 칸막이가 노출되어 있다.
●팔라티노 언덕 Palatino
고대 로마의 공화제 때의 고급 주택지로 제정시대의 황제들이 궁전을 개조한 땅이다. 프라네제 정원 Orto Farnesiani ㆍ 리비아의 집 Casa di Livia ㆍ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궁전 Domus Augustiana 등이 남아 있다.
●포로 트라이아노 광장 Foro Traiano
베네치아 광장의 비토리아노 왼쪽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광장이다. 예전에는 광대한 광장 ㆍ 신전 ㆍ 바실리카 ㆍ 커다란 2개의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광장의 가장 서쪽에 있는 큰 원기둥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 기둥 Colonna Traiana이다. 황제의 루마니아 지방의 승전을 축하하여 101~106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리스산의 대리석을 18개 쌓아 올려 높이가 30m나 되는 원기둥으로 그 표면에는 2,500명의 인물들이 훌륭하게 부조되어 있어 한 장의 회화와 같다. 이야기는 밑에서 위로의 나선상으로 200m 이상 이어진다. ‘92년에 복구를 끝내고 그 근사한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이 광장의 안쪽에는 반원형을 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시장이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을 시민에게 배급했다고 하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는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넓은 시장을 개설하여 곡물 ㆍ 와인 ㆍ 올리브유 등을 시민에게 배급했다고 한다.
콜로세움의 웅장한 모습의 안타까움을 느끼며 내부를 보려고 했더니 입장료를 내고 관람할 수 있었고 철책으로 막아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짧은 여유시간 때문에 돌아볼 수도 없고 하여 내부 틈새로만 안을 조금 들어다 보았다. 사진이라도 좀 더 잘 찍어 보려고 아내에게 권했더니 어쩐 일인지 쾌히 찍자고 한다. 마음이 변했는지, 사진 찍자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하여간 덕분에 조금 수월해 졌다. 그래도 2~3 장뿐이다. 시간이 다 되어서 우리는 숙소로 가기위해 버스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이동했다. 도로 맞은편 층계를 오르니 언덕 쪽의 좁은 골목과 연결된 도로가 나왔다. 비도 바로 멈췄다. 조금 걸으니 외곽으로 빠지는 듯한 공터가 나왔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왔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콜로세움의 맞은편을 끼고 돌아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번잡한 시내를 빠져나와 일식집에 들어갔다. 회를 먹은 게 아니라 한식으로 했는데 야채가 신선하여 인기 있었다. 사람들은 곁들여 술도 한잔 하였지만 나는 사양했다. 힘들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가능한 많은 역사를 알려주고 싶어서 틈틈이 얘기를 하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쉴 새 없이 말을 하였으나 머리에 완전히 남지 않았다. 피곤한 일정도 숙소에 도착하면서 끝나고 휴식을 하였다.
● 아벤티노 언덕 Aventino
아벤티노 언덕의 남쪽 치르코 마시노를 끼고 건너편에 있는 로몰로와 레모 광장 Pizzale Romolo e Remo은 밤에 방문하면, 조명이 비춰진 팔라티노 언덕의 고대 로마의 주거와 그 아래에 펼쳐진 치르코 마시노의 전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지금도 그 전차(戰車)의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기분으로 누구나 먼 고대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 광장의 뒤쪽에 아벤티노 언덕이 펼쳐져 있다. 녹음이 짙은 이곳에는 큰 저택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또 이 언덕의 볼 만한 곳은 말타기사단광장 Poazza dei Cavalieri de Malta이다. 이 광장에 서 있는 십자군 기사와 단장의 별장 Villa dei Priorato di Malta에 있는 커다란 열쇠구멍을 들어다 보면 안쪽 정원의 가로수 맞은편으로 작은 산 피에트로 사원의 돔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 의하면 로마의 볼 만한 곳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라고 한다.
● 바로크 미술 Arte barocca
바로크의 선구자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1598~1680)는 건축가 ㆍ 화가 ㆍ 조각가로서 활약했던 최후의 만능인으로 일컬어진다. 산 피에트로 광장의 설계나 조각품으로는 아폴로와 다프네 Apollo e Dafne> <프로셀피나의 약탈 il Ratto di Proserpina(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성녀 테레사의 법열<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등 감각적 미를 강조한 것이 있다. 또 로마의 바로크 건축을 특징 짓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Francesco Borromini(1599~1667)의 대표작은 나보나 광장의 산타 아네제 성당 Sant' Agneseㆍ산티보 알라 사피엔차 성당 Sant' Ivo alla Sapienza 등이 있다. 바로크 회화의 특징은 일상 풍속ㆍ정물ㆍ풍경 등의 테마를 주로한 사실주의, 색채와 빛의 깊은 인식, 단축법ㆍ원근법의 교묘한 사용 등에 있다. 고전주의의 카라치 Carracci 일족(루도비코 Ludovicoㆍ아고스티노 Agostinoㆍ안니발레 Annibale), 자연주의와 독특한 명암 양식을 쓰는 카라바조 Caravaggio(1573~1610)의 <성 마타이의 소명(로마, 산 루이지 디 프란체시 성당)>, 전성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1596~1669)등이 이 시대를 대표한다. 회화의 중심지가 된 나폴리에서는 살바토레 로자 Salvatore Rosa(1615~1673), 루카 조르다노 Luca Giordano(1632~1705)가 활약하였다.
[ 베르니니<성녀 테레사의 법열>]
바로크 미술은 이렇듯 복잡하고 어지럽고 잡다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사방으로 끌어당겨 시선을 분산시킨다. 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동적인 양상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이끌어주고 들뜨게 만들며 심리적인 동요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화려하고 과다한 장식성으로 대중에 대한 전시효과가 뛰어나다. 이런 미술을 좋아하는 곳이 권력과 위엄을 내세우는 궁정, 귀족 저택, 성당인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바로크 미술의 특성은 건축 자체의 기이한 구조, 장식적인 조각의 기괴함, 환상적인 벽화의 화려함 등이다. 사람의 눈을 잠시라도 어느 한 곳에 멈추게 하지 않는 변화무쌍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바로크 미술이다. 동적인 선(線)과 빛 그리고 색채의 난무로 야기 되는 활력이 바로크 미술에 극적인 성격과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바로 이런 극적인 성격 때문에 이 미술을 ‘무대 장식적[scenographic]'이라고 하며, 또 그런 점 때문에 이 미술은 보는 사람의 전체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환상을 품게 되고 놀라움을 갖게 되며 격정을 느끼게 된다. 이 미술은 그 격한 성격과 양상으로 인해 종교미술에 아주 접합하다.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 이라는 작품이다. 상은 천사의 황금화살을 맞아 고통스럽지만 희열을 느끼는 성녀의 환상적인 체험을 실감나게 표현하여 그 시대의 표본적인 종교미술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베르니니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미술은 인간적인 열정을 드러내 보이는 수단이 되어 신앙을 전파하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 로마 미술 Arte romana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기원전 753년에 건국했다고 하는 로마는 남쪽의 그리스 식민도시와 북쪽의 에트루리아를 잇는 교역도시로서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 전반부터 중부 이탈리아로 영토를 확대하여 기원전 3세기에는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공략하였으며 시칠리아 섬의 시라크사에서는 전리품으로 많은 그리스 걸작품을 손에 넣는다. 로마인은 그 호화로움과 아름다움에 반해 급속히 그리스 애호가가 되어간다. 기원전 3세기경의 로마 고유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군사상의 승리를 나타내는 개선화(凱旋畵)와 정치적 의도에서 공공광장에 설치한 초상조각 <브루투스 상 Bruto(기원전3세기, 브론즈, 로마, 콘셀바토리 미술관)>이었다. 기원전 2세기가 되면 동 지중해 세계에 로마세력을 확립하여 실질적이고 강건한 로마적 덕성과 그리스의 헬레니즘적 인간성이 융합하면서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 미술의 양식이 차츰 명확해져 간다.
건축에서는 헬레니즘 건축의 장식 미술과 건축양식을 모방한 사례가 많지만 로마적인 장식성도 나타난다. 콘크리트의 발달과 아치 구조의 병용으로 복잡한 구조와 광대한 공간을 지닌 건물이 세워진다. 로마 근교 팔레스토리나의 포르투나 신전 Tempio della Fortuna(기원전 1세기)은 연속 아치를 이용해 장식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 장식으로서의 형태를 더욱 첨가해 마르첼로 극장 Teatro Marcello(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완성된 형태를 보인다. 이런 새로운 건축양식에 의해 정치와 시민생활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로마 광장)를 정비하고, 도시 계획을 세워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건축에 쓰인 대리석은 조각에도 이용되어 고전주의적인 제국 양식으로서 개화한다. 나아가 기원전 86년의 아테네 정복으로 많은 미술가가 로마로 이주해 신고전주의를 형성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엄청난 수의 황제상이 제작되어 신격화된 황제숭배가 제국에 정착한다. 이런 종류의 상에서 나타나는 이탈리아적 자연주의와 그리스적 고전주의의 조화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제국의 평화를 축하해 9년 만에 완성시킨 아라 파치스 Ara Pacis(평화의 제단)에서도 드러난다. 회화에서도 초상이나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회화의 걸작을 숱하게 로마로 옮겨왔으며, 어느 것이나 이동 가능한 타블로(액자) 회화로서 로마의 주택 ㆍ 공공건축의 벽을 장식하던 것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벽화 장식법이었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것을 중심으로 로마 회화의 발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제 1양식 기원전 2~3세기에 행해졌으며 회반죽과 그림물감을 썼고 대리석과 같은 벽화를 모방하거나 표면에 요철을 만들었다.
제 2양식 기원전 90년경부터 행해졌으며 로마 벽화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제 1양식이 부조적인데 비해 이것은 순수하게 회화적이며 음영이나 고대 원근법을 이용해 깊이가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대표작으로는 정원의 나무를 묘사한 대프레스코화 <Affreschi dalla Villa Livia a Prima Porta(프리마 포르타의 리비아 별장, 로마 테르메 미술관)>와 폼페이의 비의장(泌儀壯) 벽화 (기원전 150년 경)를 들 수 있다.
제 3양식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양식으로 깊이의 표현을 억제하고 장식적인 모티브를 이용한 화려한 표현을 강조한다. 풍경화의 요소가 강한 신화화(神話畵)가 많다.
제 4양식 AD 50년경부터 폼페이가 매몰된 79년까지의 양식을 말하며 제 2양식의 공간 표현을 보다 환상적으로 시각화해서 장식성을 높이고 있다. 네로 황제의 ‘황금 궁 Domus Aurea' 의 벽화나 폼페이의 ‘베티의 집 Casa di Vetti'에 있는 벽화가 대표작이다.
로마 건축사에서 중요한 네로 황제의 황금 궁은 64년의 로마 대화재 이후 건설이 개시되었으며 그때까지 공공 목욕탕에만 쓰이던 돔 천장을 채용한 참신한 건물로 지붕은 황금색으로 빛났다고 한다. 또 에트루스크 신전에 그리스 건축 배치와 장식법이 응용되어 로마식 신전이 확립된다. 나아가 그리스는 장식으로서의 요소를 강화시켜 콜로세움 Colosseo(원형경기장, 81년)이라는 대건축을 완성한다. 또 티투스 황제의 예루살렘 공략을 기념하는 개선문 Arco di Tito은 고전적 양식의 표본이라고 하며 그 기념부조는 회화적인 음영의 효과를 고려한 공간표현을 지닌 로마 조각의 대표작이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 기둥 Colonna Traiana의 부조에는 다키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114개의 연속적인 장면으로 새겨 놓아서 로마 미술 특유의 형식을 보여준다.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제국의 이념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시 고전주의가 채용되었다. 옛날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 신전 Pantheon을 고쳐서 로마적 우주관의 결정을 보여주었고 티볼리의 아드리아나 별장 Villa Adriana과 같은 장대한 건조물을 실현했던 것이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 Statua di Marco Aurelio(160~180년 경,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 Compidoglio)>은 전성기 로마의 고전적 성격을 지니지만 기념 기둥 (180년)의 부조는 회화적 ㆍ 표현주의적 성격을 나타낸다. 로마가 말기적 양상을 나타냈을 때도 대규모의 건조물은 의연하게 버티었으며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 Terme di Caracalla(212~216년)의 내부는 조각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에는 이미 창조적인 힘이 쇠퇴해서 주요 부조는 하드리아누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것을 빌려쓰고 있다. 395년 제국의 동서 분열에 의해 예술의 중심은 신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구로마에서는 크리스트교 미술이 서서히 형성되어 갔다.
●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Arte palwocristiana
2세기 이후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의 여러 도시에는 그리스도교의 지하묘실 카타콤베 Catacombe 가 생겼고 특히 로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종래 카타콤베는 그리스도교 박해 초기의 피난소 내지 집회소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는 로마법의 보호하에 있었던 개인의 묘였다. 카타콤베의 미술은 약 3세기동안(3~5세기) 계속되었으며 주요 소재는 피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고전적인 테마(오르페우스ㆍ큐피트ㆍ프시케)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교의 집회소로서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당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건설된다. 초기 산 피에트로 성당 San Pietroㆍ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성당 San Giovanni in Lateranoㆍ산 파올로 프로이레 무라 성당 San Paolo fuori lemura 등은 속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또 원당(圓堂, 집중식프란)의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산타코스탄차 Santa Costanza(350년경, 로마)가 있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수도가 로마에서 밀라노ㆍ라벤나로 옮겨지며 라벤나는 후에 비잔틴 지배하에 들어가 화려한 모자이크 미술이 개화한다. 색채를 빛의 집중이라고 생각한 비잔틴의 사람들에게 모자이크는 좋은 재료였다. 갈라 플라치디아 묘 Mausoleo di Galla Placidia(450년 이전)ㆍ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Sant' Apollinare Nuovo(505년 경)그리고 산 비탈레 성당 San Vitale(522~547년)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테오도라 왕비의 모자이크 패널은 상징주의의 전형으로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지은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의 ‘아이네이스’의 줄거리에 보면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신뿐만 아니라 인간도 사랑했는데 트로이의 이데 산에서 아프로디테는 프뤼기아왕의 딸인 척하면서 아름다운 청년 앙키세스 (Anchises)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누고 아이네이아스 Aineias를 낳았다. 앙키세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에 아이의 출생을 비밀에 부치라고 이르고 아이를 요정들에 맞겨 얼마간 키우다가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이는 훗날 트로이의 영웅이 되어 트로이 전쟁에서 렉토르 다음으로 용맹을 떨치게 되며 트로이가 패하자 트로이 병사들을 이끌고 지중해 연안을 방랑한 끝에 이탈리아 연안에 도착해 로마 건국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결국 로마는 새로운 트로이 이고 로마의 기원은 트로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가이드’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신들의 이야기와 오디세우스의 영광에 대하여 경탄에 가까운 얘기 솜씨로 그 많은 신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말하는데 지루한 줄을 몰랐다. 얘기가 끝나자 우리 일행은 박수로서 답을 했다.
출처:이미지; 구글, 일부글; 해외여행 유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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