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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8 - 렌터카를 타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올라 360도 파노라마를 보다!
어제 2024년 1월 25일 아침에 부산에서 NINA 호를 타고 대마도 (對馬 쓰시마) 의 북섬
히타카쓰 (比田勝) 항에 도착해, hotel DAEMADO hitakatsu 체크인후 걸어서
미우다 (三宇田) 해수욕장 을 구경하고는 나기사노유(渚の湯) 에서 온천욕을 했습니다.
여행 둘쨋날인 1월 26일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에서 차량을 인수하는데 이용자 대부분
이 한국인인 탓인지 상호가 한글 인데.... 나중에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회시측
사람과 우리도 차량 외부를 살피면서 사진 을 찍습니다. 여기 렌터카는 차량에 기름을
완전히 만땅 으로 채워서 주어 좋은데 물론 나중에 차량을 반납할 때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일본은 영국식이라 미국식인 우리나라와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으니 좌회전과 우회전이
우리나라와는 반대라 신경 을 써야 합니다. 가미 쓰시마의 히타카츠를 출발한
렌터카는 북쪽으로 올라가 와니우리만에서 죄회전을 해서 가미 아가타 로 접어들어
오른쪽에 한국해협을 끼고 남쪽으로 달려서 근 한시간을 달려서 미네(峰) 지방으로 들어섭니다.
미네마치(峰町) 에서 호타루노유 온천 (ほたるの湯) 을 지나 조금 더 남쪽으로 달리니 바다에
도리이가 2개가 서있는데, 저건 와타즈미신사가 아니라 가이진진자 (海神神社 해신신사)
이니 대마도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로 이즈하라의 시모쓰하치만구에 대해 가미쓰하치만구
(上津八幡宮) 로 불렸으며 1871년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사(官社) 로 국폐중사(國弊中社) 랍니다.
바다의 수호신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 (豊玉姬命)를 주신으로 모시는지라 해신신사 (海神神社) 라고 하는데
영산인 이즈야마(伊豆山) 에 위치하니 큰 도리이를 지나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쓰시마 제일의 장대한
본전을 볼수 있으며 8월 5일 가을대제가 봉행되고 신사에는 고려 청자 10점에 동검과 거울 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이승만 정부 때 최초의 국어 교과서 이름이 “철수와 영이” 인데.... 간혹 “철수와
영희” 로 잘못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여자 이름에 영희, 숙희등 희(姬) 는
도요타마히메 처럼 일본 여자들 이름이라 이를 피해서 영희가 아닌 영이 로 했으니 그
외에 1950~1970년대에 태어난 영자, 순자, 숙자, 명자등 자(子) 자가 붙는 것도 일본식 입니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도착해 200여개 정도의 가파른 계단으로 산을 올라 전망대에 올라서는데 대마도는
동해의 입구 격으로 대한해협 (Korea Strait) 한가운데에 있으니.... 북쪽으로는 부산 해협(서수로
西水路, Western Channel, 조선해협) 남쪽으로는 쓰시마 해협 (현해탄/玄界灘/겐카이나다) 이 지나는데
일본에서는 남북 해협을 통틀어 쓰시마 해협이 정식 이름이고 부산해협(서수로) 을 조선해협 으로 부릅니다.
산 정상의 전망대는 상도와 하도의 경계선에 위치하며 탁 트인지라 360도 파노라마 를 볼수 있는데
쓰시마 북섬과 남섬 사이에 바다 아소만 을 내려다보노라니 가히 절경이라고 할만 합니다.
일본 삼대실록에 신라 경문왕 치세인 870년 쓰시마의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 (卜部乙屎麿呂)
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 라고 대답했다는 데,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해서 대비했다고 합니다.
다만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신라에서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그런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
하며, 당시 신라구(新羅寇) 해적 들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 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新羅寇) 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힌 뒤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 기지 였을 수도 있습니다.
훗날 수백 척의 함대로 쓰시마(對馬島) 를 공격했다가 붙잡힌 신라 해적인 현춘 도 자신은 신라 왕이
명령해 출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냥 둘러댄 것이라 여겨집니다. 대마도는 고려시대
에는 진봉무역으로 고려와 교역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먹고 살 식량이
없었으니.... 호구지책으로 삼은게 노략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倭寇) 의 선봉 역할을 했습니다.
왜구(倭寇) 가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14세기니, 1281년 여몽연합군이 쓰시마 섬을 침공했었던때 이후로, 여몽
연합군의 쓰시마 섬 침공은 쓰시마 섬의 농토를 초토화 시켰는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쓰시마섬에 대한 곡물 수출을 끊어 버리자 식량이 부족하게 된 왜구가 더욱 극성 을 부리게 됩니다.
아무튼 1274년과 1281년 두차례에 걸친 고려군을 길잡이로 쳐들어온 여몽연합군의 침략 으로 점령당해 호되게
당했는지, 대마도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어를 때 쓰는 말로 간고(ガンゴー) 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元) 를
뜻하고 고는 고려를 뜻하니, 조선에서 에비야(耳鼻) 라는 말이나 영국에서 보나파르트란 말의 어감과 비슷합니다.
왜구가 고려와 조선을 600여차례나 침공해 한반도가 쑥대밭이 되자 고려(조선) 는 바다를 건너 원정길에
나섰으니 1차는 고려 말 1389년(창왕 2년), 2차는 조선 개국 직후 1396년(태조 5년), 3차는 1419년
(세종 1년) 의 대마도 토벌 인데..... 3차 토벌은 간지(干支) 를 따서 기해동정 (己亥東征) 이라고
하니, '쓰시마 섬 원정' 은 조선의 군사력을 보여주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 1차 목적이었습니다.
명나라 역시 왜구의 피해가 막심해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려 했는데, 이 경우 자연스레 조선이 선봉장 역할
을 하게 될수밖에 없고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배를 만들게 하고 식량을 준비하게 하며 선원과 군사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일본을 침략한 것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니, 조선은 명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을 위험 이 컸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조선이 선수를 쳐서 먼저 쓰시마를 공격한 것인
데... 이를 통해 쓰시마 섬에 잡혀 있는 중국인 포로를 명나라로 귀환 시키는 한편
왜구에 대한 경계는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명나라에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쓰시마 섬 영유권 주장 및 반환 요구 성명 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는 반환
하기로 했으므로, 불법적으로 점령된 쓰시마 섬도 반환 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에 대해 간접 지배 형태를 직접 지배 형태로 전환 한
것으로 볼 때 역사적인 근거가 미약한 주장이지만.... 그러나 당시 일본 열도는
이 말을 듣고 불안해 했으며 언론에서 '쓰시마 섬의 위기' 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합니다.
사실 이승만의 쓰시마 섬 반환 주장은 당시 독도 영유권이 불확실 했던 상황에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협상력 유지를 위한 카드 의 하나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독도에 한국
의 정식 경찰 병력이 입도한 것은 해방후 9년이나 지난... 1954년 으로 아주 늦었기 때문 입니다.
협상 카드로서의 쓰시마 섬 영유권 선언 을 넘어 실제로도 이승만이 쓰시마 섬 영유권
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며..... 진실은 알수
없고, 이후로는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쓰시마 섬 영유권 을 주장한 사례는 없습니다.
일본 시마네현이 우리땅 독도 를 자기 땅이라 영토 분쟁을 일으키며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 하자, 이에
대응하여 2005년 경상남도 마산시가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 로 선포했는데, 마산시가 앞장섰던
것은 그곳에서 기해동정의 조선군이 출항 했기 때문이며, 6월 19일이 작전개시 D- 데이였던 데에
기인하는데, 대마도의 날 제정 자체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명확한 증거에 기반한 행동은 아니었으니 이후 쓰시마 주민들은 한국인들을 곱지않은 시선 으로 보게 됩니다.
240년대를 기록한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이 무렵 '대마국' 으로 울릉도의
우산국, 제주도의 탐라국 처럼 반독립적 세력으로 존재했으며.... 대마도 관리들의 관직명 기록을 통해 이
당시 대마국이 일본 열도의 패권을 쥐던 야마타이국(야마토 정권) 의 간접 지배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8년 2월, 《삼국사기》 에 따르면 왜인이 쓰시마섬에 군영을 설치해 신라 침공을 준비 한다는 소식
을 들은 실성 마립간이 먼저 왜국의 진영을 격파 하려고 했으나, 서불한 미사품(未斯品) 이
이를 말리자 그만두었으니, 이 기록은 삼국시대에 쓰시마섬이 신라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왜계(倭系) 세력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기록 입니다.
664년, 《일본서기》 에 따르면 일본 조정이 백강(금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나당연합군의 침공 에
대비해 쓰시마국, 이키국, 쓰쿠시국에 방(防)과 봉화 를 설치해 방어를 강화했으며, 667년
11월에는 쓰시마섬에 가나타노키(金田城) 라는 성 을 쌓았는데, 671년 11월 10일과 또
674년 3월 7일 기사에는 대마국사(對馬國司) 가 일본 조정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894년 9월, 일본《부상략기》 에 따르면 현춘이 이끄는 신라구(新羅寇) 2,500명 이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일본에 침입했는데 그 중에 45척의 배가 쓰시마섬을 습격 했으니.... 이에 일본 본토
에서 파견된 장수 훈야노 요시토모 (文室善友) 가 이들을 격파하고 뒤쫓아 302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옛을을 떠올리면서 우리 렌터카는 도요타마(豊玉町) 로 접어들어 산 모퉁이를 돌아서니
바다가 보이고 엄청 붉고 큰 도리이 가 나타나는데.... 산 아래로 돌아 내려가니 바다 에
히로시마의 미야지마 신사나 조금 전의 해신신사 처럼 나무 도리이가 2개 가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도요타마초(豊玉町) 지방의 상징 와타즈미신사 는 조금전에 지나온 해신신사 처럼 바다의 신인 도요타마
히메노미코토 (豊玉姫命)를 제사지내는 해궁(海宮) 으로, 본전 정면에 서있는 도리이(鳥居) 는 만조시
2미터 까지 잠기는 지라 먼 신화시대를 연상시키니 음력 8월 1일 아침 부터 고식대제를 열기도 한답니다.
렌터카를 주차장에 대고 와타즈미 신사 (和多都美 神社) 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데 .... 안쪽에서 사람이
나와 한국사람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 한국인에게는 신사를 개방하지 않으니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80% 이상이 신도(神道) 를 믿는 일본인들에게 신사는 신(神) 과 통할수 있는 신성한
곳이니 신사에 입장할 때는 예의 를 지켜야 하는데.... 하지만 한국인들은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들럽니다.
아무곳에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떠들며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전혀 없는지라, 독실한 일본 신도들
에게는 분위기를 흐린다며 불편할 것입니다. 오늘 차에서 내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 귀국
후에 인터넷 에서 찾아 보니.... 와타즈미 신사에서는 어느 반일 성향의 한국인 유튜버의
도촬과 거짓말로 문제 를 일으켜 신사 측에서 한국인의 출입을 아예 금지하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신사는 이전 부터 쓰레기 투척, 흡연에다가 관리인 폭행등 한국인 관광객 매너 문제로
인해 한국인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 신사가 대마도의 유명 문화재라,
쓰시마의 민단대표와 한국 가이드 대표, 현지 교민 및 시청의 협력요청으로 신사
관리인과 이야기가 되어 다시 한국인 관광객의 내방이 가능하게 될 예정 이었다고 합니다.
유튜버 진상처리반은 다짜고짜 와타즈미 신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다며 관리인을 만났는데
신사 측에서는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으로 인터뷰에 응했으나, 유튜버는 이를
어기고 몰래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 에 올렸으니... 와타즈미 신사 측은 한국인에
또 속았다며, 매우 실망이라면서 앞으로 한국인의 방문을 영원히 금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자세한 사건 내용은 나무위키 해당 문서 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개인 소유 신사라 쓰시마 부산사무소
측에서는 신사 방문시 예절 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후 혐한에 관한 게시글 이
올라온 것으로 보아 방문을 삼가야할 듯 보인다 라고 적혀 있으니, 궂이 방문할 필요는 없는
데.... 문제는 바다에 서 있는 저 도리이가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 을 엄청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렌터카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 쓰기나무 숲 이 우거진 산을 넘어가니 푸르른
바다 가 펼쳐지는데...... 문득 한국경제 신문에 강경주 기자가 쓴
“과학 강국' 일본의 역발상… 나무로 만든 위성 쏘아올린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 과 우주 궤도에 떠돌아다니는 로켓 잔해 등 우주쓰레기가 9300t 을 웃돈다.
본격적인 우주 탐사 시대를 앞두고 우주쓰레기 가 위험 요소로 떠오르자 이를 대체하기
위한 방안으로 목재 위성이 개발 되고 있다. 이르면 올 여름 이 위성은 우주로 발사될 예정이다.
(금년에 일본은 인공위성을 달에 착륙시켰는데 한국도 2032년경 달에 인공위성을 보낼 예정입니다)
4일 과학계에 따르면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JAXA) 와 NASA 가 합작해 만든 세계 최초의
목재 위성 은 올 여름 발사를 앞두고 막바지 내구성 테스트를 하고 있다. 무라타 코지
교토대 농학연구과 교수 연구팀 은 일본 최대 목재 회사 스미토모 임업과 손잡고 2020년
4월 나무를 사용해 지속가능한 위성을 만드는 '리그노스텔라 스페이스 우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2년 3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290일간 국제우주정거장(ISS) 에서 운영하는 일본의 실험 모듈인 '키보
(KIBO)' 에서 목련, 산벚나무, 자작나무 등 세가지 나무를 대상으로 우주 노출 실험을 진행했다.
우주 방사선 노출시험 등 극한 상황에서도 변형이 일어나지 않고 견딜수 있는지가 실험의 최대 관건이었다.
ISS 에 머물던 일본 우주비행사 와카타 고이치 가 나무들을 모듈 바깥에 설치했고, 데이터를 수집 했다.
그 결과 나무 표본은 우주 공간의 현저한 온도 변화와 태양에너지 입자선 등에 10개월간 노출되는
극한환경에서도 균열과 휘어짐, 박리, 표면 손상 등 변형이 발생하지 않았고 질량 변화 도 보이지 않았다.
세 가지 목재 중 인공위성 제작에 최종 낙점된 나무는 목련 이다. 목련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다른
수종에 비해 안정성이 뛰어나 목재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적합한 나무 로 꼽혔다. 위성 제작
작업에는 일본 전통 공법 기술을 보유한 시가현 오쓰시의 쿠로다 공방 이 참여했다. 목재
변형과 파손을 줄이고자 요철을 이용해 못과 접착제 없이도 고정 가능한 전통 방식을 적용했다.
인공위성의 이름은 '리그노샛 (LignoSat)' 으로 머그잔 크기의 초소형 위성(큐브샛) 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cm 에 불과하고 무게는 330g 정도로 초경량이다.
나무로 만든 위성이 등장한 이유는 우주 개발의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서다.
지구궤도에는 미작동 인공위성, 로켓 본체나 로켓에서 분리된 페어링과 부스터에.....
부서진 우주선 파편등 우주 쓰레기를 포함한 인공물이 무려 9300t 이상 떠다니고 있는데.... 우주
쓰레기는 저궤도에서 초속 7.4㎞, 정지궤도에선 3㎞ 속도로 돈다. 총알보다 빠른 속도인
탓에 언제든 지구와 정상 작동하는 위성에 큰 위협 이 될 수 있다. 우주쓰레기는 티타늄이나
알루미늄등 광택 금속으로 만들어져 밤하늘 밝기가 10% 이상 증가하는 '빛 공해' 주범으로도 꼽힌다.
인류는 1950년대 부터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2010년만 해도 매년 최대
100기의 인공위성 이 발사됐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상업용 발사가 활발해
지면서 발사 위성 수가 급증했다. 2021년에는 무려 1,400기 가 넘는 위성이 우주로 발사됐다.
인공위성 경로를 추적하는 웹사이트 '오비팅 나우(Orbiting Now)' 는 지난해 8월 기준 인공위성 수가
8,486개 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여기에는 재진입 시 소멸될 예정인 8270기의 저궤도 인공위성이
포함돼 있다. 지난달에 9,000기를 돌파했을 것이라는 게 과학계 추측인데.... 나무는 우주선 제작에
사용되는 복합합금 보다 친환경적 이며, 수명을 마쳤을때 분해나 완전연소가 가능하게 설계할수 있다.
우주 비행사 도이 다카오 박사는 "비도 안오고 벌레나 세균이 번식하지 않는 우주에서는 목재가 썩을
염려가 없다" 며, 효율성을 고려해도 전자파가 나무를 잘 투과 하기 때문에 위성 안테나를 내부에
넣어 위성 구조와 형태를 단순화 할수있다. 위성이 발사된 뒤에 안테나가 잘 펴지지 않아 위성
전체가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내부로 안테나가 들어가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날수 있다.
하기사 몇십년 전에도 오랜 불경기에 시달리던 오사카 동부의 골목 기업과 공장 12개 회사 가 모여 시설을
놀리며 직원을 해고 하는 대신에 인공위성을 만들어 보자고 뜻을 모았으니.... 한국 정부가 단 한개의
위성 도 만들지 못하던 시절에, 불과 5년 만에 인공위성을 제작해 궤도에 올리는 기염을 토했는데 일본의
골목기업들은 흐름해 보여도 미국 나사에 부품을 납품 하는등 기술력 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0년전의 통계라 지금은 조금 늘었겠지만 100년이 넘는 기업은, 한국은 1896년 박승직 상점으로 출발한
"두산" 과 동화약품에 조흥은행 3곳 인데 비해 일본은 무려 3만 3천개 라고 합니다? 이런 기술력이
이어지니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이고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도 3명인데, 우린 평화상 1명에
필즈상 0.5명 이니 허준이씨가 필즈상을 받았지만 국적이 미국인이고 미국대학에서 연구이기 때문입니다.
허준이는 서울대 석좌교수 로 초빙된 세계적인 수학자로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 의
수업을 들으면서 수학자가 되기로 결심 했으니... 중학교때 히로나카씨가 쓴 ‘학문의 즐거움’ 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으며, 히로나카의 권유로 서울대 수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후, 히로나카씨가 싸준 추천장
덕분에 일리노이대학교에 진학했고 미시간대에 재직 중에 에릭 카츠 교수와 ‘로타 추측’ 을 해결했습니다.
백년 기업을 넘어 교토에 결혼용품점 겐다는 1,300년 이 되었고, 부채가게 마이센도는 1,200년
그리고 떡가게 이치와가 천년이 되었다고 하며... 곤고구미 는 쇼토쿠태자의 초청으로 백제
에서 건너와 사천왕사를 짓고 절을 관리한게 578년이니 1,440년 이 되었으며, 여관 호시
는 718년 이시카와현 고마쓰에서 창업해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영업 을 한다니 천삼백년 이라....
규슈 사쓰마의 도공 심수관가도 400년 이 넘었으며 스미토모는 1623년 창업했으니 400년,
다이마루 백화점은 1717년 창업이니 300년이 되는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의
삼성이나 현대며 LG 등은 최종 조립만 할뿐, 수백가지 부품과 중간재며 제조과정에
필요한 용액 을 일본에서 수입하니 몇년전 불화수소등 수입이 지장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