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에서 함께 보낸 한백년 역사가 내쫓은 국사당·선바위
많은 사람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아는 사람만 즐기는 비경(秘境)이기도 하고, 그곳에 얽힌 사연을 모르고 흔히 지나치는 역사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2011년 주말매거진에서는 2주일에 한 번씩 이들 숨은 장소들을 독자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시대가 '글로벌'한 21세기가 됐지만, 한국인에게 일본은 여전히 큰 앙금이다. 축구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된다. 광복절만 되면 극일·반일 등의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런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아직 일제의 상징 '신사(神社)'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남산 내목신사와 조선신궁
1934년 9월 13일 일제 치하 당시 경성에 살던 조선인들은 남산 중턱에서 속 쓰린 장면을 목격했다. 혹자는 강제로 그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일본의 전쟁 영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를 기리는 신사, 내목신사(乃木神社)의 준공식이었다. 그보다 9년 전 총독부는 내목신사 위편에 메이지 일왕을 기리는 조선신궁을 지었다. 경복궁의 정남쪽, 조선 왕실의 안산인 남산은 그렇게 차근차근 일본 땅으로 변했다.
- ▲ 서울 남산 남산원에 있는 내목신사의 흔적
소문에 따르면 1945년 해방과 함께 8월 15, 16일 이틀 사이에 전국에 있는 신사들이 모조리 파괴됐다고 했다. 조선신궁도, 내목신사도 그때 파괴됐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조선신궁은 1945년 10월 6일 일본인이 자발적으로 해체, 내목신사는 1979년 화재로 소실'이 정답이다.
내목신사 자리에는 지금 예장동 리라초등학교 옆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있다. 남산원은 1952년 전쟁고아 51명을 수용하며 시작된 복지법인이다. 남산원 박흥식 원장은 "내목신사 본관은 남산원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1979년 화재로 무너졌다"며 "1993년 창고건물을 헐고 사무실을 지었는데, 하도 단단하게 만들어서 해체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남산원에 가면 내목신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신사 입구에 놓여 있던 '손 씻는 돌항아리' 두 개, 등불을 켜놓던 돌 등롱(燈籠) 등이 운동장 주변에 남아 있다. 돌항아리 옆에는 '御手水舍', 그러니까 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곳이라는 글과 당시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로 시작되는 건립날짜가 새겨져 있다. 박흥식 원장은 "답사 단체들이 이 사실을 알고 눈으로 확인하러 온다"며 "또 내목신사 설명이 있는 가이드북을 들고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인왕산 국사당
총독부가 조선신궁을 만든 곳은 조선왕조의 사당인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곳이다. 조선 개국 후인 태조 4년 12월, 조선왕조는 남산 산신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세우고 이를 국사당이라 칭했다. 근 600년 세월이 흘러 총독부가 조선신궁을 지으려 보니, 그 터 위편에 조선의 신사가 있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국사당을 내쫓아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와중이었다. 국사당 터에는 지금 팔각정이 서 있다.
- ▲ 국사당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이 이사 간 인왕산 바로 옆 기슭에 '선바위'가 있는 것이다. '선'은 불교의 '禪'이다. 장삼을 입은 두 승려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리 지었다. 아들 갖기 원하는 여인들이 기도하는 곳이라 해서 기자암(祈子巖)이라고도 한다.
- ▲ 인왕산 선(禪)바위 뒤로 태양이 진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까치 한 마리, 바위에 앉는다. 바위는 유학자에 밀려 한양성 바깥으로 밀려났고, 훗날 일제에 쫓겨난 조선 왕실 사당 국사당은 남산에서 내려와 선바위 아래에 자리 잡았다.
여행수첩
내목신사 터: 서울 남산 리라아트고등학교 옆 남산원 안에 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3번 출구에서 숭의여대, 리라아트고교 방향으로 올라가면 된다. 출입구는 리라아트고교 정문을 이용할 것. 사무실에 문의하면 안내해준다. 버스는 0013, 7015, 0211, 104, 108, 604, 9411번 등 이용해 명동 하차. 남산원 주소는 서울 중구 예장동 8-6, www.namsanwon.or.kr
국사당과 선바위: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현대아파트 입구 왼편 골목길로 오른다. 겁나게 가파른 500m 길 끝 왼편에 ‘인왕산 인왕사’라 적힌 일주문이 있다. 국사당은 그 위편이고, 선바위는 오르는 도중에 보인다. 사직공원 입구 왼편으로 북한산 둘레길을 이용해도 된다. 사직공원~황학정~군부대 갈림길에서 왼편~주차장 입구~국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