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들꽃피는언덕 원문보기 글쓴이: 신재미.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 단 한 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을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달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 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무덤 몰래 하나 파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 논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 울음소리
빙 빙 첨성대를 따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에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단오날 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 치마 홀로선 누님이여
오늘 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는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 2)
( 3)
------------------------------------------------------------------------------------------------------
( 4)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
( 5)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 6)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 7)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 8)
흐르는 서울역
선운사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서울역은 붉은 벽돌 하나 베고 지친 듯 잠이 든다
나는 프란체스꼬의 집에 가서 콩나물비빔밥을 얻어먹고 돌아와
잠든 서울역에 라면박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을 불고 나자 찬비가 내린다
동백꽃잎 하나가 빗물을 따라 플랫폼 쪽으로 흐른다
보고 싶은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게 되는지
한 미친 여자가 찬비에 떨다가 내게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옷을 벗기자 여자의 젖무덤에서도 동백꽃 냄새가 난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다시 병나발을 불자 비안개가 몰려온다
안개 속에서 포크레인이 서울역을 끌고 어디로 간다
동백꽃 그림자가 눈에 밟힌다
------------------------------------------------------------------------------
( 9)
벗에게 부탁함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 10)
새벽 기도
이제는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홀로 울지 않게 하소서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을 열어주시고
때로는 조그만 술집 희미한 등불 곁에서
추위에 떨게 하소서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을 알게 하시고
아름다움의 추함과 희망의 절망과
기쁨의 슬픔을 알게 하시고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리어카를 끌고 스스로 밤이 되어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이 되게 하소서
------------------------------------------------------------------------------
( 11)
당신에게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
( 12)
까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
( 13)
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
( 14)
첫키스에 대하여
내가 난생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다 기어이 보고 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수평선으로 난 오솔길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난 해당화
그 붉은 꽃잎들의 눈물이었다
---------------------------------------------------------------------------
( 15)
壽衣를 만드시는 어머니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병들어 담배도 한 대 피우지 못하는데
아직도 사랑과 욕정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늙은 어머니 수의를 만드신다
전구를 넣어 구멍 난 양말 꿰매시던 손으로
팬티에 고무줄 넣어 추스려주시던 손으로
이 병신 같은 자식아 지금까지
그런 걸 여자라고 데리고 살았나
힘없이 내 등줄기 후려치던 손으로
삯바느질하듯 어머니 수의를 만드신다
연 사흘 공연히 봄비는 내리는데
버들개지 흰눈처럼 봄바람에 날리는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는데
몇날 며칠째 정성들여 그날이 오면
아,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옷 손수 만드신다
돋보기를 끼고도 바늘귀가 안 보여
몇 번이나 병들어 누워 있는 나를 부른다
돈 없어 안안팎 명주로는 하지 못하고
굵은 삼베로 속곳부터 만들고
당목으로 안감 넣고 치마 저고리 만드신다
죽으면 썩을 것 좋은 거 하면 뭐하노
내 죽으면 장의사한테 비싸게 사지 마라
사람은 죽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숨 끊어지면 그만인데 오래 살아 주책이다
처녀 때처럼 신나게 재봉틀을 돌리신다
봄은 오는데 먼 산에 아파트 창틈으로
고놈의 버들개지 봄눈처럼 또 오는데
나는 이혼하고 병들어 술 한 잔도 못 먹는데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구나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사랑해야 하는구나
사랑이 희생인 줄 모르는구나
-----------------------------------------------------------------
( 16)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 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1982년 민음사 출간
------------------------------------------------------------------------------
( 17)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 18)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자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 19)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엇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
( 20)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외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 21)
사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
( 22)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23)
그네
너도 그네를 타보면 알 거야
사랑을 위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네가 수평을 유지해본 적이 없어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오늘은 빈 그네를 힘껏 밀어보아라
그네가 결국 중심을 잡고
고요히 수평의 자세를 갖추지 않느냐
너도 너의 가난한 사랑을 위해
수평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진실해라
너는 한때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으면 그네가 아니라고
더 높이 떠올라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마치 손이라도 놓을 듯 그네를 탔으나
결국 그네는 내려와 수평의 자세를 잡지 않더냐
사랑한다는 것은 늘 그네를 타는 일이므로
부디 그네에서 뛰어내리지는 마라
수평인 그대로 고요해라
-----------------------------------------------------------------------------------
( 24)
초상화로 내걸린 법정스님
눈 오는 날 거리를 걷다가
초상화를 가르쳐주는 화실 앞을 지나다가
초상화로 내걸린 법정스님을 만났다
서울에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는
법정스님의 맑은 눈이 눈에 젖는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만 가져라
법정스님이 오랫동안 불쌍히 나를 바라본다
네, 스님
만장도 없이 들것에 실려
사리 수습도 하지 않고 떠나가신 법정스님
말없이 말없는 대답을 드렸지만
나는 오늘도 내일을 걱정하면서
분분히 내리는 저 첫눈도 바라보지 못한다
-----------------------------------------------------------------------------------
정 호 승
- 1950년 경남 하동 출생(대구에서 성장).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 여울의 생각 >
시인님의 얼굴에 늘 그늘이 있어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은 시인의 삶과 관련 된 책을 읽거나
강의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교사를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수의에 관련 된 시를 읽고
작은 부분이지만 이해를 하게 되네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지난날에 촬영 된 사진을 들을 보았는데 대부분의 사진이
그늘이 많은데 올해 3월 촬영한 사진에는 웃음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삶이 윤택하여 졌는지 상황은 모르지만
웃음 띤 얼굴이 보기 좋다.
시인은 노년이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여린 몸은 애처로움을 지녔다.
남은 인생을 많이 웃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 사진촬영 / 2024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