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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1 장
보이는 모든 것은
선의 재료이다 (2)
‘마땅히 빌 바’를 모른다 =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흘려줄 수 없는 상태.
‘아들들’은 그걸 빨리 깨달아 진리를 흘려주어 자연의 존재 목적, 아랫것들의 역할 그리고 왜 이러한 사건과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게 아들들의 일이다. 성령이 오셔서 그 일을 도우신다.
그래서 호 프뉴마가 오더니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깨달아 무엇을 흘려주어야 할지, 프로슈코마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 연약함을 도와준다. 그게 성령의 역할이다. 본문의 뒷부분을 원어로 보면
Ὡσαύτως δὲ καὶ τὸ πνεῦμα συναντιλαμβάνεται τῇ ἀσθενείᾳ ἡμῶν· τὸ γὰρ τί προσευξώμεθα καθὸ δεῖ οὐκ οἴδαμεν, ἀλλ’ αὐτὸ τὸ πνεῦμα ὑπερεντυγχάνει στεναγμοῖς ἀλαλήτοις
위: 인터넷 헬라어 성경 / 아래: 김목사 책의 원문
(주: 헬라어 표기 방식에 차이가 있다)
알랄레토스, ἀλαλήτοις = 말할 수 없는 / 스테낭모스, στεναγμοῖς = 탄식 /알랄레토스: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 와서 “내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 ‘인간의 말로는 할 수 없는’이란 뜻이다.
삼층천:
첫 번째 하늘>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처음 주신 것 = 성전. / ‘나는 이 세상을 하늘의 모형으로 준다.’고 하실 때의 첫 번째 하늘. / 모세에게 “이 식양대로 지어라. 이게 하늘이다.”하며 주신 것 = 성전.
두 번째 하늘> 성전은 말을 못한다. 말하는 성전으로 예수가 오셔서 내가 성전이라고 하신다. => 두 번째 하늘. 그래서 당신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다. /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 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 하심. -> 그런데도 못 알아듣고 죽여 버림.
세 번째 하늘> - 세 번째 하늘을 설명하러 오신 분이 성령, 그리스도의 영, 호 프뉴마.
‘스테낭모스’ = 호흡. / ‘헤’ = 호흡, 소리, 숨
- 호흡, 숨,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없어진다. / 호흡 = 말, 소리
- 스테낭모스 => 호프뉴마(성령)이 역사하면 너희들이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내용을 번역한 것 ->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간구하시느니라 = ‘중재하다’. / 성령이 중재하셔서 말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할 수 있게 도와준다. / 그래야 아랫것들을 진리로 이해하고, 피조물들을 제대로 설명해 준다. / 성경은 문맥을 따라 잘 이해해야지, 자기가 좋아하는 단어나 구절을 뚝뚝 끊어서 행하라고 준 게 아니다.
-> 이 구절은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서 엉뚱한 기도를 해도 성령이 대신해서 탄식하며 기도해 주니 걱정 말고 너희들이 원하는 걸 네 맘대로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 여전히 꼬리의 힘으로만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담긴 진리의 메시지를 진의대로 말하지 못하는 자로 사는 것을 진리의 말씀을 보내어서 말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다. / 왜?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그물에 걸리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시므로 당신이 일을 하신다. -> 선지자서에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너희의 열심이 아니다. / 하나님의 열심으로 진리를 말하는 자를 가리켜 새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한다. 새 언약에서 일컫는 그 새 마음.
“내가 네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줄게, 깨끗이 닦아서 다시 줄게.”라고 말씀하셨다. 새 마음을 가진 자를 (진리를) 가진 자라고 한다. 진리를 갖지 못한 자들은 마음이 없다. / 마음 = 카르디아, 심장이라는 단어와 똑같다. / 마음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고, 마음을 가진 자는 산 자이다. / 모든 존재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로 다음 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나온다. 감찰하신다 = 에류나오 = 찾으신다. / 하나님이 도와서 진리를 알게 되고, 이 아랫것들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가 마음을 가진 자가 된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가진 자를 찾으신다(에류나오).
하나님은 “너희들 마음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시니까 생각으로라도 죄짓지 마!” -> 그 생각을 어떻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나? 말도 안 되는 말이다. / 찾다(= 에류나오) -> ‘말을 걸다, 대화하다, 부르다’는 뜻도 있다. / ‘에류나오’가 레마 레오에서 나온 단어. -> 레마로 말을 걸어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 찾는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보내서 당신의 아들들을 찾으신다. 그 말씀에 걸리고 부합하는 자가 아들이 된다. 꼬리가 잘린 자이다. 그게 성령의 일하심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 사족이지만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다는 게 어디 있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내가 인식할 수 있어?’ 이런 고민을 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 감정이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 속에서, 변화된 삶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여러분은 또다시 나타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았다, 복음을 알았다.’하는 것은 인식된 감정이나 나타나는 행위에서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은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삼천 배, 만 배 하고 나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뿌듯해져서 행복하게 내려온다. 그 후로 한 3~4 개월 정도는 그걸 생각하며 조심조심 변화된 삶을 산다. 기도원에 다녀오면 한 2주 정도 효과가 있는 것처럼. / 감정이나 삶 속의 변화된 행위로 내가 진리를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머리로만 아는 건가? 그러다 보니 “서머나교회는 성경 지식만 배워서 머리만 큰 기형아들만 있어.” 이런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가슴으로 내려온 건 도대체 어떻게 증명하나? 다음의 내용을 깨달아 알면 여러분은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의 자원으로 그분 앞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은혜(카리스)를 나에게 부으시고(= 아가페), 그걸 생명으로 받아야 나는 비로소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 그 후에 나타나는 감정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는 그 사람의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다. / 그런데 자기들끼리 수준을 정해 놓고 ‘왜 변화가 안 나타나지?’ // 그 정해 놓은 변화라고 하는 게 고작 간디나 법정, 성철 이런 수준이다. / 거기까지 도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 그분들은 그렇게 살아서 천국에 갔나? 타 종교인들이 그런 건 더 잘한다. / 복음은 그런 사람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다. 또 ‘내가 부인되었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이렇게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다. / 자기부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에겐 또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린다. 일부러 약을 바짝 올려놓은 다음에 “너 자기부인 되었다며? 그런데 아직도 파르르 떨어?” / “그래, 파르르 떠는 나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 이게 자기부인이지, 그걸 꾹 참는 게 자기부인이 아니다. / 뭘 가르쳐줘도 거꾸로 알아들으니 ‘약을 올리면 파르르 떠는지 아닌지’로 변화된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한다.
“나는 과연 자기부인 된 사람인가? 머리로 배운 게 가슴으로 내려와 있나?” 무슨 가슴에서 마음을 찾나? / “하나님이 전부이고, 나는 Nothing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마음을 가진 자이다. / 그걸(마음을) 왜 감정에서 찾아? 원래 우울질로 태어난 사람은 그걸 알아도 우울하다. 원래 낙천적인 사람은 개차반으로 살면서도 굉장히 행복하게 산다. 그런 걸로 ‘마음을 가진 자’인지 확인되는 게 아니다. / 왜 너희들이 진리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해? 왜 육체로 마치려 해? 왜 나타난 감정이나 행위로 그걸 확인하려고 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리를 알게 되면 그들에 의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재해석 된다. /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나서 우발적으로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적어도 진리를 안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
다음 절: 【그러한 목적과 뜻에 의해(프로데시스) 부르심을 입은 자】 = 【하나님을 아가파오(‘아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거구나’)로 알아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 아가파오 할 수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그 선이 아가도스이다.
모든 것(G: ‘파스’, H:‘콜’) / ‘파스’=모든 것 <- 어원은 히브리어 아람어 ‘콜’. - ‘콜’ =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의 것】을 【아랫것(=우리의 것)】으로 전환해 준 것을 가지고 【하늘의 것=(위의 것, ‘카프’)】으로 전환해 준 것 = 모든 것
모든 것이 합력 되어 (합력: 창세기 셋째 날에 그걸 모은다는 말로 쓰임) 선을 이룬다고 할 때 그 선에는 아가도스라는 선과 칼로스라는 선이 있다.
- 아가도스 = 진짜 선 /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 선. 하나님이 모형으로 줄 수밖에 없는 선. / 묵시 속의 하늘, 거기는 어떤 곳인지 우리가 추측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 추측도 하지 말라고 묘사를 안 해 놓았다. / 그런데 하늘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 -> 땅이 있으니까 거기 하늘이 있는 것을 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하늘을 텅 비워 놓았다. 그 하늘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 땅이 있으면 거기 분명히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하늘의 것, 선 = 아가도스 = 선의 내용.
(아가도스)선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아랫것으로 가르쳐 준 것을 (칼로스)선이라고 한다. / (칼로스)선에는 ‘성경, 성전, 예수, 세상, 나’가 있다. 다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선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다 선하다. / 사도 바울도 율법이 선하지 왜 나쁘냐고 한다. 그러나 율법에 갇히면 그건 죽는 것이다.
칼로스(아래의 것)로 위의 것을 알면 ‘그렇지, 이것으론 안 돼!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다 불태워 버려야 돼! 이건 영원한 게 아니야.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이야.’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아래의 것’ 안에는 성전, 성경, 율법, ‘나’가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어떤 집단에서는 “세상과는 절대 사귀지도 말아, 율법에 빠지면 죽어, 이 육신은 죽어야 돼!”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래의 것으로 선(아가도스)을 알면 아래의 것이 나쁜 것인가? 아래의 것을 통하여 아가도스를 알게 되었는데 왜 나쁘냐고?
모든 것은 아가도스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그걸 알게 되면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자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 좌도 없고 우도 없다고 한다. / 사람은 항상 선, 악으로 분별하여 판단하게 되어 있다. - 이건 좋은 것, 저건 나쁜 것, 잘생긴 것 못생긴 것, 추한 것 예쁜 것, 어두운 것, 밝은 것 -> 이걸 좌우라고 한다. / 성경이 이것을 罪•義, 惡•善으로 설명한다. / 의는 무엇이고 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말하는 의와 선을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래의 것, 아래에 충만한 모든 것을 죄로 주셨다. /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죄인으로 온다는 것은 이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 빛이 왔는데 세상이 온통 어둡더라. -> 다 죄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죄는 나쁜 죄가 아니다. / (창1:1)의 말씀에서 배웠다. / 하나님께서 빛을 설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깊음, 아래의 것, 물을 주시는데 그걸 흑암, 호쉐크, 어두움이라고 한다. 그 어두움으로 선과 의가 뭔지 알았으면 그게 오르, 빛이다. 그러면 빛과 어두움은 같은 것이다.
아래의 죄를 통하여, 죄인으로 태어난 여러분을 통하여, ‘이렇게 살면 안 돼! 이건 하나님 앞에 절대 가져갈 수 없어.’ 하고 깨달아 알면 그걸 ‘의’라고 한다. / 이 義는 죄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디카이오수네, 사다크, 義)라고 하지 만 원래 우리가 모르는 내용이다. / 罪를 통하여 義를 알게 된 사람이 ‘그렇지, 하나님이 義를 알려주기 위해 罪를 나에게 주셨지.’라는 원리를 깨달으면 그에게 죄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 罪가 없는 자가 된 이에게 罪의 상대적 개념인 義는 무엇인가? -> 그냥 없는 것이다. 진리가 된다. -> 죄와 상관없다고 해서 용서라고 한다. 몇 가지 죄를 없는 것으로 봐주는 게 용서가 아니라 죄와 아예 무관한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 惡을 통해서 善을 알았다. ‘善이 아닌 게 惡이구나’라고 알았으면 그 사람에게 惡은 善으로 향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 사람은 이제 선악과 안 먹은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런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죄인으로 어둠 속으로 던져 보내신다. 그게 카라(부르시다)이다. 빛을 가르쳐 주려고 여러분을 흑암으로 부르신다. / 그렇게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상태가 된 사람을 쿰이라 한다. / 좌도 없고 우도 없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로 똑바로 서다. -> 이스테미(똑바로 서다) / [아나 + 이스테미] -> 아니스테미 => 부활이 된다. / 부활 = [좌우, 선악, 죄의]에서 벗어나서 ‘그렇지, A는 B를 설명해 주는 것이지.’라고 알게 된 자 = 그를 아나이스테미(아니스테미), 위로 똑바로 선 자라고 한다. / 이스테미에서 스타오로스(십자가 언약의 기둥)란 단어가 나온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된다. 그가 쿰, 십자가, 기둥, 똑바로 선 자가 된다.
복음은 심플하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성전 마당에서 풀려나면 된다. 하나님은 주님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성전이나 회당에서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표적을 행하실 때 길거리에서, 집에서도 행하셨다, 그 집이 전부 오이키야, 오이코스, 성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