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조선 천문학자 영주선비 김담
나라 다스림이 하늘에 난 현상 일·월식…우리 고유의 역법 '칠정산' 만들어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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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의 모습으로 오목한 시계판에 그어진 가로선은 24절기를, 세로선은 1각(15분)을 나타내는 시각선이다. 사진상의 영침의 그림자는 절기와 시각을 동시에 나타내는데 어느 해 3월11일경으로 절기상 경칩 후 5일 전후 또는 춘분 전 10일 전후이고 시각은 오전 10시57분 전후를 가리키고 있다.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현 광화문 우체국 부근) 동편 일영대에 설치했다. |
옛 사람들은 나라의 다스림이 하늘에 그 뜻이 나타난다고 여겨 천문(天文)을 알려고 했고 천문으로 책력 만드는 법을 '역법
(曆法)'이라 했다.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중국 역법이 우리 실제와 맞지 않음을 알아 나라 인재를 동원하여 우리
역법을 만들려고 했다. 이십여 년 동안 중국과 이슬람 역법을 연구하고 깨우쳐 마침내 이순지와 김담이 우리 역법 칠정산을
만들었다. 칠정산이란 해와 달 그리고 화·수·목·금·토성인 오행성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 나라의 정사(政事)와 비슷하다 하여
'칠정(七政)'이라 했고 역법은 중국 황제가 만드는 것이라 하여 '산(算)'을 붙였다. 15세기 최고의 천문저술로 우리나라 과학
문명사의 일대 쾌거였다. 숙종 때까지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었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했다. 김담은 금모래 고운 영주
내성천 무섬마을의 무송헌종가 주인이다. 현대 과학으로도 그 정확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칠정산을 들여다본다.
태음태양력
태음태양력은 음력이 주가 되고 양력을 가미한 역법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문화권에서 주로 사용했다. 중국 고대 철학
에서 삼라만상은 음에서 시작했고 음이 양보다 우위였다. 그래서 음양이고 자웅(암수)이고 홀짝이며 역법도 음력을 중시했
다. 한편 농자천하지대본이므로 계절 변화를 알아 농사짓기 위해 농사책력 24절기를 만들었다. 절기는 태양 운동으로 생기
고 날짜는 달의 삭망인 음력으로 정했으니 태음태양력은 무척 만들기 어렵고 복잡했다.
음력인 달의 삭망주기는 29.53일이며 12삭망월은 354.36일이다. 1태양년은 365.25일로 11일 차이 나는 둘을 맞추기 위해
윤달을 넣는데 넣는 방법에 따라 여러 역법이 생겼다. BC 600년경 중국 춘추시대에 19태양년이 235삭망월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스에서는 BC432년에 이를 발견했다. 일수로 6천940일 만에 음력과 양력이 같아지는데 중국에서 장(章),
서양에서 메톤주기라 하며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넣어 둘을 맞추었다.
아무리 역법을 잘 만들어도 오차가 생기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차는 커졌다. 그래서 왕조가 바뀌면 하늘의 뜻이라 하여
새로 역법을 만들었고 조공 받는 이웃나라에게 나누어줬는데 매년 동지사(冬至使)가 이듬해 역법을 받아왔다. 동양 역법은
동지를, 서양 책력은 춘분을 기준으로 삼았다. 절기는 태양의 길인 황도를 단순히 24등분 하는 방법과 타원 궤도상 태양 움
직임의 빠르고 늦어짐을 반영하기도 했다. 케플러 법칙과 삼각함수, 원주율 의 개념을 몰랐던 시대에 고대 수학으로 천체운
동을 계산해 역법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의 천문 열정
세종대왕은 나라를 다스림에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 세상에 절기를 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나라의 책무라 했다. 중국 역법은
북경을 기준했으므로 우리 실제와 달랐고 정확한 우리 역일을 알기 위해 산학에 능통한 관리들을 뽑아 중국으로 보내 천문지
식과 계산법을 배워 오도록 했다. 아울러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바꾸고 경북궁 내에 천문관측소인 흠경각과 보루각을 세웠다.
보루각에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설치하여 시각을 알려줬고 해시계 앙부일구와 간의, 혼천의, 혼상을 만들어 천문을 관측
했다.
'역수' 밝혀 세상에 절기를 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나라의 책무라 여긴 세종
영주 내성천 무섬마을 무송헌종가 주인장, 15C 최고 천문저술 책력 배포
100진법 내편·60진법 외편 일·월식 기록, 현대과학 산출로도 1~3분 차이
초기예보 잘맞아 왕이 칭찬…1603년 선조때 30분 시차로 정확도 떨어지기도
앙부일구는 보물845호로 오목한 가마솥처럼 생겼는데 시계판에 가로선 13줄, 세로선 50줄이 그어져 있다. 가로선은 24절기
를, 세로선은 1각(15분)의 시각을 표시하는데 영침(影針)의 그림자 끝이 그때의 절기와 시각을 나타낸다. 이는 천구상 1년 단
위로 운행하는 태양의 연주운동과 매일 운행하는 일주운동이 가로 세로선에 나타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앙부일구는 설
치장소의 위도, 절기 때 태양위치, 남중시각 등을 정확히 알아야만 만들 수 있는 정밀한 천문기구다.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
교(현 광화문 우체국 부근) 동편에 설치했다.
흠경각에 설치한 옥루는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로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시간과 우주현상이 나타나도록 했다. 일곱 자
인공 산을 한지로 만들고, 그 둘레로 인공 해가 돌고, 방위신이 시각에 맞춰 움직이고, 인형이 때에 맞춰 종을 치게 돼 있다.
모두 세종대왕의 천문에 대한 열정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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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로 24×세로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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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30호 혼천의 및 혼천시계. 〈고려대박물관 소장〉 |
우리 고유역법 칠정산
고려사 역지 편에 천운(天運)이 고르지 못해 역이 오래되면 반드시 차가 생기고 고려는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충선왕이 원의 수시력을 구해 왔는데 역일을 추정하는 법만 알뿐 나머지는 알지 못했고 차가 크면 천문 관리가 임의로 고
쳤다고 했다.
세종대왕은 중국 역대 역법인 당의 선명력, 원의 수시력, 명의 대통력과 이슬람 회회력을 구해 놓고 우리 역법 만드는 것을
국정 과제로 삼았다. 20여년 노력 끝에 이를 완전 이해하고 깨우쳐 마침내 이순지와 김담이 1442년에 수시력과 대통력을
바탕으로 우리 역법 칠정산 내편을, 1444년에 회회력을 바탕으로 칠정산 외편을 만들었다.
그 결과 칠정산으로 측정한 동짓날 한양의 낮 길이가 대통력으로 측정한 동짓날 연경의 낮 길이보다 14분 24초 긴 것으로
나타났다. 동양 역법의 기준은 동짓날인데 위치가 달라 기준점부터 틀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중국과 이슬람의
천문 과학은 세계 최고였고 칠정산은 동서양 최고 천문 과학을 완전히 깨우치고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든 결정체다.
15세기 우리 과학 수준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후 매년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어 나라에 배포했다. 1598년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문책할까봐 조정에서는 우리 책력 앞·뒷장을 명의 대통력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때 대동법의 김육이 청의 시헌력을 주청하여 병행 사용하다가 1706년부터 책력을 시헌력으로만 만들고 칠정산 사용을
중단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아있다. 만든 지 수백 년이 흘러 실제 차가 컸는지 알 수 없지만 1894년 갑오개혁까지 시헌
력이 사용되고 칠정산은 역사 속에 묻혔다.
칠정산의 우수성
칠정산은 해와 달, 오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여 일출 일몰 삭망 절기 일식 월식 영축운동 등을 밝힌 책이지만 고대 역법 용어
와 계산방법이 현대 천문학과 너무 달라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것을 1973년 고(故) 유경로·이은성·현정준 교수가 역주하여 비
로소 그 진가가 알려지게 됐다.
내편과 외편은 조금 다르다. 1태양년 길이가 내편은 365.2425일이고 외편은 365.242188일이다.
1태음년은 내편이 354.36712일, 외편이 354.36667일로 현대 과학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내편은 100진법,
외편은 60진법을 사용했다. 1447년 음력 8월1일의 일식 기록과 8월15일의 월식 기록이 남아 있는데 현대 과학으로
산출하더라도 1~3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식과 월식은 나라 다스림이 하늘에 나타난 현상으로 여겼고 해와 달을 잡아먹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구식례(救食禮)를
준비하여 올렸다. 따라서 일·월식이 생기는 정확한 시각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칠정산으로 계산한 일·월식 예보가 초기
에는 잘 맞아 국왕이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고 1603년 선조 때 일식 예보는 30여 분 시차가 생겨 정확도가 떨어졌다. 역법을
만든 뒤 세월이 흐르면 세차(歲差)와 고유운동으로 하늘이 바뀌고 천문상수의 오차가 커지기 때문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옛 사람들이 고(古)천문학으로 계산한 수치가 현대 과학과 큰 차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옛 사람들은
둥근 공처럼 생긴 하늘이 매일 한 바퀴씩 돌고 서쪽으로 1°씩 지나친다고 했다. 오늘날 지구 자전과 공전을 별의 일주운동과
연주운동으로 하늘이 움직인다고 했다. 별은 무한대로 떨어져 있으므로 하늘은 매양 똑같고 태양계 어디서 관찰하더라도 그
위치는 변함이 없다. 매일 서쪽으로 1°씩 움직이므로 계절마다 별자리가 다르고 1년 뒤 본래 위치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붙박
이별이 항성이고 항성으로 항법을 만들었다. 반면 '오행성'이라 하여 태양길 따라 움직이는 다섯 개 별을 고대부터 관찰해 왔
는데 태양계 8행성 중 육안으로 보이는 5개다. 천체운동은 일정하므로 하늘이 돌든지 땅이 돌든지 관측결과는 차이가 없고
고천문학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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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김담 탄신 600주년을 맞이해 영주시에서는 세계 13개국 천문학자 18명과 국내 학자 10명이 참가해 그의 천문학 업적을 기리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후손으로 퇴계 제자 대사헌 김륵을 비롯해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와 영남 명문가 가 됐고, 영주 문수 무섬마을의 예안(선성)김씨 무송헌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사진은 무송헌 종가. |
김담의 생애
20세에 과거 급제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한 김담(1416~1464)은 36세에 사헌부 장령으로 보임될 때까지 16년 동안 천문학자
로 나라에 봉사했다. 10세 위 이순지와 짝을 이루어 우리 고유 역법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비롯해 많은 천문서적을 지었다.
산학 능력이 탁월해 제방공사 치수 산출은 항상 그의 몫이었고 관상감부정(副正·서열2위)으로 있을 때 부친상으로 향리 영주
로 내려갔는데 역법은 국가 중대사이니 상중임에도 빨리 귀임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역대 왕들은 이순지와 김담 같은 인재
가 없어 일·월식 예보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수시로 나온다.
젊은 시절에는 천문으로 나라의 기둥이 됐고 장년에는 고을을 맡아 백성을 보살폈다. 충주부사, 상주목사, 안동부사, 경주부
윤을 지냈고 48세에 마침내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이듬해 1464년 4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순지도 한성부윤,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판을 지냈다.
2016년 탄신 600주년을 맞이하여 영주시에서는 세계 13개국 천문학자 18명과 국내 학자 10명이 참가해 그의 천문학 업적
을 기리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후손으로 퇴계제자 대사헌 김륵을 비롯해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와 영남명문가가 됐고
영주 문수 무섬마을의 예안(선성)김씨 무송헌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입력 2021-12-24 발행일 2021-12-24 제35면ㅣ수정 2021-12-28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