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3장 8-13절
설교제목 : 복을 만드는 사람
이기심의 병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습한 무더위가 지치게 합니다. 건강유의하시길 빕니다. 비피해로 고통받은 이재민들이 삶의 일상을 회복하기를 빕니다. 우리가 작은 일상이 얼마나 귀한지 자주 잊곤 합니다. 허리가 아플 때는 걷는 것의 소중함을 알고, 배가 아프면 밥 한끼 잘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상을 더욱 감사로 채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길거리에 현수막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서로를 비난하며 볼만하게 걸려있습니다. 모두가 내로남불인 듯 보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관적 판단에 좌지우지됩니다. 각자 서로 입장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권력적 욕망과 이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최대의 복병인 듯 보입니다.
니콜라우스 폰 플뤼에는 스위스의 수호성자로 일반 수사로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특별한 환영을 경험하였습니다. 중년을 지나서 그가 경험한 환영 중에 하나는 노래하는 곰 전사의 환영입니다. 지팡이를 집고 모자를 뒤집어 쓰고 할렐루야를 부르며 니콜라우스에게 나타납니다. 노래를 마치고 그가 기부를 청하자 니콜라우스는 그에게 일페니의 돈을 줍니다. 그때 그는 고귀한 품위를 지닌 사람처럼 변모합니다. 니콜라우스가 그를 향한 동경이 생각나자, 커다란 기적이 일어납니다. 필라투스 산이 지면 높이로 내려 앉고 평평해졌습니다. 그 방랑자는 온 세상을 열었고, 세상에 있을 수 있을 모든 죄들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 배후에 진실이 나타났고, 사람들 마음에 커다란 장애가 나타났습니다. 그 장애는 이기주의였습니다.
필라투스 산이 내려 앉은 것은 모든 사람들을 가렸던 장애물이 거두워지고, 모든 사람의 내면의 진실이 들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배후에 커다란 장애는 집단 속에서 깃든 이기주의였습니다. 이기심은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만들고, 남을 이용해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 몰두하게 됩니다. 남의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탑을 높이 쌓아간다면 사회는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기심의 뿌리는 탐욕입니다. 탐닉하기 시작하면 곁에 있는 이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고, 급기야는 자신을 병들게 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을 만드는 사람 : 내려놓음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아브라함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지만, 그 일로 이집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렸습니다. 바로는 속은 사실을 알게 되어 아브라함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롯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납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베델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다시 곱씹으며 하나님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하는 행위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다시 그 약속을 붙드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고단한 인생의 걸음을 심기일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소유가 많아지자 함께 머물기게 땅이 좁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축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치는 목자들이 자주 다투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우리가 한 친족, 핏줄이니 다투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네가 보는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고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9)”
지금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에게 좋은 땅을 양보합니다. 여러분, 양과 소를 키우는 유목민들에게 좋은 목초지는 생명과도 직결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력과 직계서열을 내려놓고 그에게 좋은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위해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고 포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평화를 위한 길, 복을 만드는 길은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시작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975년 출시된 라면 CF가 1978년에 제작되었는데, 그때 광고대사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라면이 귀하던 시절, 라면 한 그릇가지고, 형은 동생 먼저 맛보라고 하고, 동생은 형 먼저 맛보라는 내용입니다. 서로를 향해 배려와 따뜻함이 있는 광고였습니다. 오늘 우리 세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평화이며, 사랑이며, 생명일 것입니다. 그것을 짓는 길은 바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너를 향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단단함과 따뜻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락함과 편리함의 끝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롯은 각기 갈라서서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 가까기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롯은 도시가 잘 형성되어 있고, 거주하기 편한 곳을 찾아다니며 결국은 소돔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소돔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실로 비추어보면, 그의 선택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들은 모든 인프라가 잘 구성된 곳입니다. 여러 조건들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것을 따라가다고 결국 당도한 성이 소돔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락한 편리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계속적으로 그런 익숙함을 쫓아가게 되고, 편리함에 우리의 영혼도 서서히 젖어들어 우리의 분별력을 망가뜨립니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여 관계를 형성해야하는 자리에 컴퓨터나 휴대폰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인간의 관계망은 점점 줄어들고, 활동 반경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점점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고 영혼을 좀먹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운 길이란 없습니다. 안락함과 편리함은 때로 악마의 유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을 때로 병들게 하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도시적 안락함과 편리함을 갖춘 소돔은 결국 불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진 상징성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편리함과 안락함을 쫒아간 인생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락함이 주는 유혹은 무엇인가요? 그 길의 끝에서 불덩이를 만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부르심
하나님은 롯이 떠나간 뒤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런 선택을 한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신도 자식도 아내도 목자들도 책임져야하는 사람인데 좋은 곳을 다 내어주고 힘들게 살아야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세요.
“넌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보아라.”
이것이 복을 만드는 사람의 길입니다. 결코 손해보는 것 같아도 복으로 바꾸어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른 길을 가는 자에게 바른 길로 안내하시는 분이십니다.
눈을 크게 떠서 네가 보는 모든 사방을 너에게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눈을 크게 뜨면 모든 곳이 길이고, 그것이 다 나의 땅임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약간의 주의력 결핍과 팃장애가 있는 20대 내담자가 군대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군대가 감옥같고 지옥같을 수 있지만, 나는 그곳에서 운명을 만나고 내 상처의 응어리가 풀리고 길을 찾았다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어떤 곳에 어떤 운명과 행운이 기다릴 수 있으니 두려움은 조금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보라고 했습니다.
손해 안보려고 안감힘을 쓰는 세상에서 자신을 조금 내려놓고 너를 위한 따뜻한 배려를 하는 자는 복을 만드는 사람의 길을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보라하십니다. 모든 길에서 운명과 행운을 우리가 만날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