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비 三一 萬歲 運動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경기도 양주는 의병의 전통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한 주민들의 역사적 인식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특히 추교시장[현 가래비시장]은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시장으로 많은 사람이 운집하고 각종 문물이 집결하는 곳이다. 따라서 점차 격렬하게 확산되는 서울의 3·1 운동 소식이 상인들이나 인근 파주의 봉일천장과 포천의 솔모루장 등을 통하여 입에서 입으로 시시각각 전해졌을 것이다. 광적면 가납리(佳納里) 일대에서는 1919년 3·1 운동 초기부터 만세 운동에 대한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독립 만세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만세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효촌리 출신의 백남식(白南軾)·김진성(金辰成)·이용화(李龍和) 등이 모여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마을 안을 순방하며 주민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고 거사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일장기를 변조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당초 계획은 3월 28일 9시 효촌리에서 시위를 전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위를 계획한 시각에 한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시위는 점심 이후로 미뤄졌다. 오후 3시경에 김진성·이용화·백남식 등은 인근 지역의 시위대를 이끌고 10여 리 길을 단숨에 내달렸다. 장고개 너머 가납리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가납리에는 광적면·백석면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는 중이었다. 효촌리 시위대가 도착하자 흩어졌던 시위 대원들이 다시 모였고, 시위대 수는 95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논 가운데에 모여 오후 4시경 시위를 재개하였다. 이때 의정부에서 급파한 일본 헌병 5명과 주내면 유양리 헌병 보조원 노호연(盧浩然)이 시위 현장으로 달려왔다.
일본 헌병들은 논둑 위에 서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빨리 해산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김우규(金宇奎)·한춘석(韓春錫)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있었던 이용화는 태극기를 들고 헌병 앞으로 나서서, “뻔뻔스러운 도적놈들아,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이고 삼천리 국토를 강도질한 놈들이 적반하장으로 조국 독립을 하려고 부르는 만세를 부르지 말라. 가거라, 건방진 소리야.” 하며 이들을 크게 꾸짖었다.
이에 고무된 시위대의 기세가 자못 험악해지자, 그 순간 일본 헌병을 따라왔던 면장 이하용(李河鎔)이 슬며시 뒤로 빠져 광석리 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를 본 군중 속에서 누군가 “면장놈부터 타살하라”는 고함이 터졌다. 시위대는 노도같이 몰려가며 돌팔매질을 시작하였다.
시위가 격렬한 양상을 보이는 것에 놀란 일본 헌병들은 백여 보가량 후퇴하더니, 깃발 든 쪽을 향하여 발포하였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있던 김진성·이용화·백남식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외에도 일본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가 해산한 것은 2시간 만인 오후 6시경이었다.
광적면 만세 시위는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시위대 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40여 명에 이르는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가 해산한 것은 시위 2시간 만인 오후 6시경이었고, 이후 4월 3일 2차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광적면의 만세 시위는 양주군 내 만세 시위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1 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군중들의 독립 만세 소리가 드높았던 광적면 가납리 732-4번지 일대의 논을 이후 ‘만세답(萬歲沓)’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 날 시위는 규모나 격렬한 전개 양상 등 여러 면에서 양주군 3·1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6년 6월 18일 군내의 유지와 군민들이 뜻을 모아 가래비 3·1운동기념비를 시위 현장 부근에 세우고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매년 많은 주민이 참여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등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양주문화대전(정창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