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한 삶
우리들 삶의 밑바탕에는 철저히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동 하나 하나마다 스스로 생각을 했던 하지 못했던 간에 '욕망'이란 놈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함도 '욕망'이고, 보다 많이 돈을 벌고자 함도 '욕망'이며,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함도,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자 함도,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이 모든 행위마다 '욕망'이란 마음은 언제나 고개를 들고 일거수 일투족 우리의 행위에 끼어 들어 모든 판단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클수록 무언가를 얻고자 갈구하는 마음이 커지고, 하고자 함이 클수록 그에 대한 집착도 커지며 집착이 클수록 괴로움도 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대부분 '욕망'에서 옵니다.
그렇다고 물론 욕망을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자 하고, 되고자 하며, 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원동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다만 과도한 욕망에 기인하는 삶 대신에 ‘필요’에 의한 삶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무소유도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소유를 하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과 반찬이 있어 주린 배를 달려면 됩니다. 옷이 필요하면 그저 있는 옷을 입으면 됩니다. 돈을 벌고자 하면 취직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배가 고프면 보다 좋은 밥과 맛있는 반찬을 원하고, 옷이 필요하면 비싸고 좋은 옷을 가지려 하고, 돈을 벌고자 하면 끊임없이 만족치 못하여 수억을 벌어도 모자란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필요에 따라 있는 것을 쓰면 되는데, 우리는 거기에 '욕망'을 더하여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많은 것'을 끊임없이 욕망합니다.
예로부터 수행자는 생명이 있어야 수행하고 교화할 수 있기에 음식을 취할 지언정 맛에 탐닉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필요'에 의해 살아간다는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의, 식, 주를 갖추지 못한 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최소한의 필요'에 의한 삶은 누리고 있습니다. 북한이나 인도, 소말리아 등지의 당장 빵 한 조각에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야말로 최소한의 필요조차 충족되지 못한 사람들이겠지요.
사실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밥 한 끼를 못 먹어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을 생각했을 때, 우리의 삶은 욕망을 충족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에 목메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이타적인 사명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가장 필요한 의식주라는 최소한의 필요조차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비웃듯이 더 많은 욕망과 더 많은 소유를 향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욕망'에 의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욕망에 의한 삶 대신에 '필요'에 의한 삶을 사는 순간 우리는 이 자리에서 곧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행복과 풍요, 만족과 부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내면적인 의식의 전환에서 깃드는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괴롭고 가난하게 만드는 주범인 것이지요.
욕망에 의한 삶이 아닌 필요에 의한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욕망에 의한 삶이 아닌 필요에 의한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필요는 기본적 욕구만 채워진다면 더 이상을 바라지 마라는 뜻인가보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