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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선의 기초 (1)
시작하는 가르침
죠셉 골드스틴 지음
강건기 역(전북대 철학과 교수,
전북불교대학장)
<역자 주>
'위빠사나 선의 기초'는 죠셉 골드스틴의
" The Experience of Insight:A natural
Unfolding"(Unity Press,1977)의 발췌 번역입니다.
내용은 위빠사나 선의 기초 훈련으로
미국 제일의 위빠사나 선원인 메사츄세츠주의
Insight Meditaion Center에서 초심자들을 위한
2주 코스의 용맹정진 지도 내용입니다.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터는 메사추세츠 주 한적한 시골,
버스 편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데 본래 가톨릭 수도원이었던 곳을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색은 미국인들이 동남아(태국, 버마, 인도)에서
몇 년 씩 선사에게 지도를 받은 다음 돌아와서
현대인들에게 맞게 실용적인 방법으로 지도하여
누구든 2주 과정을 마치면 혼자서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구체화해 놓은 프로그램입니다.
위빠사나 선은 부처님 당시에 실철되었던 '해탈을 위한 유일한 길'
이라고까지 강조되었던 선법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남방 불교에는 잘 전승되어 왔고
서양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누구든 쉽게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선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역자는 1979년 가을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터를 방문,
용맹정진을 함께 하였고 회향식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도 했습니다.
글래 들어 위빠사나 선에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때에
앞으로 연재할 예정인 이 글이
많은 분들께 도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 시작하기 전에 ----
전통적으로 불교의 용맹정진 기간은 부처님, 가르침, 승가에 귀의하는
이른바 삼귀의로 시작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은 우리들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참자유의 가능성인 깨침의 씨앗, 부처의 씨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 부처님께서 갖추셨던 용기와 지혜, 자비의 덕성에 귀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와 존재의 법칙에 귀의하
는 것입니다
. 즉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진리가 우리들 자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로 돌아가 의지
하고 자유와 깨침의 길에서 서로를 돕는 것을 뜻합니다. 위빠사나 선 수행에
있어서 빼놓은 수 없는 중요한 기초는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은 몸과 말, 생각을 청정하게 하는 기본입니다. 이 수행기간 동안에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가지 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불살생.
이것은 산 목숨을 의식적으로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모기를 쳐서 잡는 일이나
개미를 밟아 죽이는 일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둘째, 불투도. 허락되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불음. 남녀간의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 정진 기간 동안
독신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불망어. 거짓말이나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째. 불음주. 이 정진 기간 동안 술이나 환각제를 멀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계율을 지키는 것은 선정과 지혜를 증진시키는 튼튼한 기초를 닦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도량에 모여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정전이 원만하고 조화롭게 되기 위하여 몇가지 중요한 자세가 필요합
니다.
첫째는 참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이 용맹정진 기간이 끝도 없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지고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겁니다. 특히 추운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날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해보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수행 자체가 아름답고 지혜가 넘쳐 흐르는 것 같지만, 또 어떤 때는 지루
하고 고통스러우며 불안정하고 의심에 휩싸일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모든
때에 잘 참고 견디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하는 데에 도움
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티벳의 투룽파 림포체에게 "은총"이란 말이 불교에서는 무엇
에 대비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참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참는 마음을 가직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낼 것입니다.
참는 마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며 항상
마음이 평안하면서도 성성한 상태를 말합니다. 티벳의 유명한 밀라레파는
제자들에게 항상 "단단히 그러나 천천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지속적
이고도 쉼없는 노력, 그러나 평안하고 조용한 마음, 즉 끊임없이 정진하되 푹
쉰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을 심화시키는 또다른 도움은 침묵입니다. 말은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지게 하고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때문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볼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에너지는 '안으로 비추어 보는 힘'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될 수가 있습니다. 선의 실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묵언에 있어서도
평안하고 쉰 자세란 말을 여의고 그저 침묵 속에 침잠하여 조용히 그러면서도
맑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묵언을 함으로써 우리들의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아주 분명해집니다. 묵언은 더 깊은 마음의 침묵을 가능케 합니다.
친구나 부부 간의 관계도 멀리하십시오. 혼자되는 일을 배우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또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선입관
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이 시간을 각자 자신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우리는 죽을 떠 혼자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고독'과 친숙해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 마음은
평화롭고 강인해지며 다른 사람들과 훨씬 아름다운 만남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이 엮어가는 만남은 더욱 평안하고
뜻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 저것 다른 수행을 섞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여러가지 수행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진 기간
동안에는 위빠사나 , 즉 '안으로 비추으 보는 관'을 개발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밝게 비추어 봄(mindfulness)을 통하여 '안으로 비추어 보는
관(insight)'은 개발됩니다. 이 기간 동안 온통 순간순간 밝게 비추어 보는
일에 모든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들의 수행은 심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모든 노력이 경주된다면 마음은 사물을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질 것입니다. 매사에 느슨해지는 것 또한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서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갈 곳도 할 일도 따로 없습니다.
그저 매순간에 안주하십시요. 하루 종일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위, 낱낱의
움직임을 관찰하십시오. 지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우리들의 수행은 심화될
수 있습니다.
---- 일정표 ----
매일의 수행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전 4:30 기상
5:00 - 6:30 경행 및 좌선
6:30 - 7:30 아침공양
7:30 - 8:00 경행
8:00 - 9:00 좌선
9:00 - 9:45 경행
9:45 - 10:45 좌선
10:45 - 11:30 경행
오후 11:30 - 1:15 점심공양 및 휴식
1:15 - 2:00 좌선
2:00 - 2:45 경행
2:45 - 3:45 좌선
3:45 - 5:00 경행 및 좌선
5:00 - 5:30 차마시기
5:30 - 6:00 경행
6:00 - 7:00 좌선
7:00 - 8:00 강의
8:00 - 8:45 경행
8:45 - 9:45 좌선
9:45 - 10:00 차마시기
10:00 ~ 취침 혹은 수행
---- 앉는 수행 ----
이제 우리는 호흡을 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좌선을 시작하려 합니다.
어떤 자세든 가장 편한 자세로 앉으십시오. 단, 긴장을 풀고 허리를 쭉 펴십시오.
허리가 꾸부정하거나 비뚤어지면 쉽게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원하다면 의자에
앉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은 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쯤 뜬 자세를 좋아한다면 그것도 무관합니다. 눈을 뜬다고
해도 단순히 시선을 한 것에 머물게 하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편안한 자세로 감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호흡에 대한 관은 다음 중 한가지 방법으로하면 됩니다. 숨을 들이쉬면
단전 부분이 자연히 올라오고 반대로 내쉬면 내려갑니다.단전부분의 움직임을
느끼십시오.상상이나 형상화 하지 말고 그저 그 움직임을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절대로 호흡을 조정하거나 억지로 하면 안됩니다. 단순히 단전부분이 올라오고
내려가고 하는 움직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호흡을 할 때 공기가 코구멍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때 관하는 부위는 코 끝이나 윗 입술 부분입니다.
이 호흡에 대한 관은 마치 수위가 문을 지키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빼놓지
않고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호흡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거나 따라
나가지 마십시오. 또 호흡을 조정하거나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
단순히 들숨 날숨이 코 끝을 통과하는 대로 관하면 됩니다.
처음 훈련을 시작한 경우에는 '올라온다', '내려간다' 혹은 '들어온다'
'나간다' 하고 마음으로 따라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그 대상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몇 분
동안 위의 두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선명한 지 시험을 해 보십시오.
즉 '올라온다-내려간다' ' 들어온다-나간다' 중에 더 선명한 것을 선택하십시오.
선택했으면 왔다 갔다하지 말고 끝까지 그 방법으로 하십시오.
때로는 관이 선명치 않게 되더라도 다른 방법이 더 좋을 것이라 하여
바꾸지 마십시요. 한 번 결정했으면 끝까지 그 방법을 지키십시오.
호흡은 때로 분명하기도 , 그렇지 않기도 하며 깊이고 옅기도 하고,
또 길기도 짧기도 합니다. 이 관은 호흡훈련이 아니라 밝게 보는 정념의
첫 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걷는 훈련 ----
걷는 선은 걸음 마다에 발을 들어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 내려놓는
동작 하나하나를 관하는 것으로 됩니다. '들어올린다, 나아간다.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동작의 하나 하나를 잘 관하기 위해서
다른 걸음을 떼놓기 전에 한 걸을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 역시 동작의 훈련이 아니라 관의 연습입니다. 발의 움직임을 관을
개발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 걷는 선을 하면서 하루 동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천천히 걷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들어올린다-나아간다-내려놓는다'
하고 세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걸음걸음을 '내딛는다, 내딛는다'하는 식으로
관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같은 걷는 선에서 처음에는 빨리 걷다가 나중에는
천천히 걸으면서 다시 '들어올리나-나아간다-내려놓는다' 의 세부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실험을 해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명히
관하는 것입니다. 손은 등 뒤에 뒷짐을 지거나 옆에 두거나 앞에 모으거나
일정하게 하면 됩니다. 눈은 발보다 조금 앞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발을 쳐다보 되면 산만해질 수 있으니까요. 모든 주의는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 동작 그 자체를 느끼는 데 두어야 합니다.
처음 며칠이나 일주일 정도까지는 가능한 한 일정대로 따르십시오.
나중에 하루를 지속적으로 관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각자에 맞는 스케줄 조정도 자연히 될 것입니다.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쉬지말고 좌선과 경행을 하십시오. 공양이나 그 밖의 모든 행위도 하나
하나 관하면 그것이 다 수행입니다.
어떤 때는 더 오랫동안 걷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을 걷고 그런 다음 앉아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오래동안 앉기를 원하여 한번에 2-3시간을 앉게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밤늦게 까지 있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선수행이 깊어질 수록 잠은 점점 덜 오게 됩니다. 잠은 습관에 따른
일정한 시간이 아니라 정말로 피곤을 느낄 때 자십시오. 선이 잘되면
피곤을 모르고 밤낮으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각자에
맞고 무리 없는 노력을 가능케 하는지 잘 분별해 보도록 하십시오.
성프란시스 싸레시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참을성 있게 대하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향하여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결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용기로 일어나십시오. 매일매일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습니다까? 영적인 삶의 성취에 있어서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과 '이만하면 됐다'하고 자만하지 않는 마음보다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결함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웃의 결함에 너그러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실페에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만
훌륭한 시정은 가능합니다"
------- 느낌의 관찰 -------
* 느낌과 느낌의 관
마음의 작용 가운데 하나인 느낌을 관찰하는 일은 위빠사나 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느낌이란 좋다 , 싫다, 싫지도 좋지도 않다
는 세 가지를 가리킵니다. 우리들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고 미워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좋다 싫다'하는 느낌 때문입니다.
즉, 마음에 드는 즐거운 느낌이나 대상은 가까이 하려하고 ,
그렇지 않은 것은 미워하고 멀리하려 하니까요. 그러나 이 느낌들을
밝게 비추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그들을
조용한 마음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몸에
나타나는 감각들을 즐겁다거나 고통스럽다고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각들을 잘 비추어 보는 일은 느낌에 대한 관을
개발하는 훌륭한 방법이 됩니다.
기쁨에 차고 ,경쾌하고 ,가슴설레는 느낌 등에 사로잡혀 집착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긴장된 상태를 싫어하고 회피하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도 비춰봐야 합니다. 즉 , 덥고 ,춥고,가렵고, 불안하고
명랑하고 슬픈 등의 감각이나 그와 관련된 느낌이 일어날 때 그에
집착하거나 멀리하려 하지 말고 그저 보라는 것입니다.
* 호흡과 느낌의 관
호흡을 관하는 것으로 우리의 좌선은 시작됩니다. 즉 , 호흡을 할
때 단전부분이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이나, 콧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관하는 것이 좌선의 기본입니다. 그런 기본 관을 하다가
만일 몸에 어떤 감각이 느껴지면 오직 그 감각만을 100%비추어 보십시오.
이 때 긴장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몸에 강한 고통을 느낄 때 더욱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고통에 대응할 때 긴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긴장은 고통스러운 것을 싫어하고 회피하려는 징표이며 ,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고통 그 자체와 흐름을 관찰하십시오.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주의 깊으면 고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 순간 일어났다 없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경험됩니다.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앉아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을 버리고
단순히 감각의 흐름만을 비추어 보십시오.
통증은 관의 좋은 대상이 됩니다. 몸에 강한 통증이 있을 때
집중 또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강한 통증으로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몸에 어떤 감각이
현저히 느껴지거든 그때마다 그것을 관하십시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지면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가십시오.
예를 들어 '올라온다 - 내려간다' 하고 호흡을 관하다가
허리에 통증을 느끼게 될 경우 마음을 허리 부분에 집중시키어
'아픔 아픔'하고 비추어 봅니다. 그러다가 아픔이 사라지면 다시
'올라온다 - 내려간다 '하는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려움이나 저림이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통증으로 인하여 마음이 긴장되거든 그 긴장과 불유쾌함
자체를 조심스럽게 관찰해 보십시오. 그 느낌 자체를 이렇게 비추어
봄으로써 마음은 스스로 균형 상태에 들게 됩니다.
------그저 봐라 -----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2천 5백년 뒤에 불법이 다시 새로워지고
꽃피리라는 옛 예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수행에 대한
대중들의 깊은 관심을 통해서 이 예언이 사실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법이라고 할 때 법, 즉 Dhalma의 뜻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달마란 범어로 진리, 사물의 실살, 그리고 좁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또 모든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정신과
물질적 요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수련의 과제
또한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이런 요소들, 즉 개개의 법을 알고 이해하며
또 그들이 어떤 법칙에 의해 서로 관계하고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훈련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경험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저바라봄
진리에 눈뜨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그저 보는(bare attention)'
관찰입니다. 그저 보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의 선호나 비교, 평가, 설계,기대를 다 비운 채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저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저 보는 '것은 바쇼의 유명한 시에
그 특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마리 뛰어든다
풍덩!
이 시에는 연못 저편에 지는 석양이나 아름다운 하늘에 관한
드라마틱한 묘사가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맑고 투명한 지각이 있을 뿐입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마리 뛰어든다. 풍덩!"
그저 볼 뿐, 소박하고 직접적인 관찰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보는 것은 강력히 꿰뚫어보는 마음입니다.
그저 보는 능력이 개발되면 우리들 생에 기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입니다. 즉, 현개의 순간에 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과거에 살거나
걱정 불안과 함께 닥쳐올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마음은 과거의 회상에
잠기거나 미래의 환상에 빠져있어 현재의 순간에 머물기가
어렵기 때문입지다.
'그저 보는 것'은 우리를 지금, 여기에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비추어 보는 마음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전념하여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완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불교에 현재의 순간에 사는 예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스님이 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장마가 져 길은
질퍽거리는 진흙 땅이었습니다.
어느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한 아름다운 쳐녀가 진흙길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를 본 순간 첫번째 스님은 그녀를 들어 건네주었습니다.
두 스님은 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쉬면서 두번째 스님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뱉았습니다.
"출가한 스님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인을 쳐다보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들어서 건네주다니..."
그에 대해 첫번째 스님은
"나는 그녀를 그 곳에 내려놓고 왔는데 스님은 아직도
짊어지고 다닙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저 보는 능력이 개발되어 우리들 내부에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대로 관찰하게 되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훨씬 자유롭고 가식없는 경험과 대응을
하게 됩니다.
* '그저 봄'과 마음의 평화
'그저 봄'은 또한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대상에 따라 맹목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즉, 마음에 드는 대상에는 집착하고 매달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싫어하고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보는 힘이 개발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생각과 느낌 ,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애착과 미워하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조용하고 조화로운 마음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완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저 보는 관찰은 아침이나 저녁의 앉는 시간에만
국한 되어서는 안됩니다. 좌선할 때는 비추어 보고
나머지 시간엔 그러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런 수행은
우리의 삶을 분산시키고 따라서 진정한 수련의 성숙은
어렵습니다.
밝게 비추어보는 훈련은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말하거나,
먹거나 하는 모든 순간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훈련은 모든 대상에, 모든 마음의 상태에 ,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매 순간순간 전력으로 완전히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잘되면 그저 보는 관찰은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보는 관찰의 또다른 속성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악기을 배울 때 경험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처음 우리는 설명을 듣고 시범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연습을 시작하지요.
처음에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고 엉뚱한 건반을
두드려 소리는 엉망이 됩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연습을
하면서 손가락도 쉽게 움직이게 되고 음악은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나중에 숙달이 되면 연주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때엔 연주와 연습이 다르지 않습니다.
연주 그 자체가 연습이지요.
위빠사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들어올린다 - 나아간다 - 내려놓는다'고
관하고 , 호흡을 관하면서도 '올라온다 - 내려간다'
혹은 '들어온다 - 나간다 ' 하고 천천히 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노력과 애씀이 필요합니다.
그때는 비추어 보는 것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끊기기도 합니다.
많은 애씀과 장애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되면 점점 자연스러워 집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비추어 보는 힘이 강해져 자연스럽게
될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매사를 편안하고
단순하며 자연스런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 나와 환경에 귀 기울임
그저 보는 것은 또 우리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주위환경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바다나 강가에 앉아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저 철썩거리는 물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서 오직 그 바다나 강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파도가 해안을 치거나 강물이 흐르는 물살의 섬세한
소리까지도 듣게 됩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으로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주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귀를 기울일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 우리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나'뿐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이 '나'란 생각,느낌, 감성 영상 등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체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오직 '귀기울임, 비추어 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여기 한 비구니 스님의 선시가 있습니다.
이 눈으로 예순다섯 번이나
가을이 변하는 정경을 보았네.
달빛에 관하여도 이미 많은 것을 읊었으니
더 이상 묻지마오.
오직 바람 없는 날 솔잎
나뭇잎 소리를 듣고저 할 뿐이라오.
바람 없는 날 나뭇 잎 소리를 경청하는 그런 마음의
고요와 평화는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인 도의
조화와 묘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깨어있고 꿰뚫어보며 능동적으로 환히 비추어 본다는
면에서 그것은 창조적입니다. 그러나 분별과 판단을 떠난
단순하고 순수한 면에서 그것은 또 수동적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열려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과 명철함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동성과
함께 지각될 때 마음은 완전히 평정의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저 보는 관찰의 개발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속성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concentration)으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밝게 비추어 보는 것(mindfulness)으로
마음이 부주의 하게 되는 것을 막고 그때 그때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환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 즉 집중과 비춰 봄이 함께 개발되면
마음의 균형은 이루어지고 '깊은 들음(profound listening)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런 깊은 들음을 통하여 우리들 존재의
모습은 드러나게 됩니다. 지혜는 특별한 대상이나 경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스즈끼 선사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생긴 것은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행은 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루어야 할
경지나 집착할 만한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나 흐름의 한 부분으로 보면 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 있고 밝은 마음입니다.
특별히 이상한 체험을 얻으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혹 이상한 체험이 일어난다해도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무상할 뿐이며 따라서 관찰의 대상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 흐름을 관찰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 무상의 흐름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우리들 존재의
모든 부분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에
분명히 그리고 직접적으로눈 뜰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오래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흐름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아무 것도 거부하거나 어느 것에도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르마의 자기 나타냄과
하나가 될 뿐입니다.
------ 생각과 감각의 대상 -----
* 생각의 관찰
생각을 비추어 보는 것은 위빠사나 선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그대로를 의식하지 못하면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의 객관적 성격을 알 수 없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각과 우리 자신을 얼마나
동일시 하고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 동일시가 생각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
즉 자아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생각을 관한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날 때,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저 '생각이 일어난다'하고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즉 생각의 내용을 가지고
다른 것과 연상을 하거나 왜 그 생각이 일어날까
하는 분석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별한 순간에 그저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만을 비추어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생각'
하고 마음 속으로 주목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생각의 내용에 대하여 판단이나 반응, 또는 '내'가
생각한다. '내 생각'이다 하지 말고 단순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대로 관하십시오.
생각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뒤에 아무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생각은 생각하는 것 자체일 따름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처럼 비추어 볼 수 있을 때,
생각은 사라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밝게 비추어 보면
그 생각은 곧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다시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갑니다.
혹 어떤 사람은 생각에 대한 마음의 주목을
좀더 엄밀하게 하여 생각에 따라
'계획','상상','기억'하고 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력을 더 날카롭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생각', '생각' 하는
마음의 주목으로 충분합니다. 생각이 일어난 한참
뒤가 아니라, 일어난 즉시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정확히 비추어 보게 되면 생각으로
마음이 번거롭게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수행에 방해나 장애가 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생각은 하나의 훌륭한 관의 대상, 선의 주제입니다.
마음이 흐리멍텅해지거나 생각과 함께 놀아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비춰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선의 마음, 시작하는 마음>(Zen Mind,Beginner's Mind)
에서 스즈끼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좌선을 할 때 억지로 생각을 끊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스스로 쉬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생각이 마음 속에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대로 그냥 두십시오.
그러면 곧 없어지게 됩니다.
생각을 억지로 끊으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흔히 마음 밖에서 무엇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물결에
불과합니다. 그 물결에 방해받지 않게 되면 그 물결은
스스로 조용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감각이나 생각, 영상들도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다름아닌 우리들 마음의 물결입니다.
어떤 것도 마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을 그저 있는대로 놔두면 마음은 스스로 조용해집니다.
이런 마음을 큰 마음이라 부릅니다."
그저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두십시오.
모든 영상, 생각, 감각, 등도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냥 두십시오.
그것들을 귀찮게 여기거나 어떤 반응과 판단을
나타내지도 말며 또 집착하거나 동일시 하지도 말고
그대로 두십시오.
단, 정밀하고 조심스럽게 들고 나는 마음의 물결을
비춰 보면서 '큰 마음'이 되십시오.
그렇게 하면 곧 조화곱고 조용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절대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들어온다-나간다', 혹은
'올라온다-내려간다'하고 호흡을 관하건,
감각,생각을 관하건, 순간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비춰봐야 합니다.
조용하고 조화로운 마음으로, 매순간이 대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감각 대상의 관찰
수행 중에 어떤 시각적 영상이 떠오르면 좋다,
싫다 평가하지 말고 그저 '봄' '봄' 하고 마음으로
주목 하십시오. 단순히 그 영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비추어 보십시오.
또 어떤 소리가 현저히 들려오면,
내력을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그저
'들음', '들음'하고 비추어 보십시오.
냄새나 향기가 날 때도 '냄새', '냄새' 하고
비추어 보고, 사라지면 본래의 호흡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기본 관이 잘 되면 될수록 다른 관도 잘 될 수 있습니다.
* 고요하게 깨어 있음
비추어 보는 힘을 키우는 강력한 계기는
대상에 대한 표시(마음의 주목)를 늘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수행의 처음에는 대상에 대한 주목이
잘되지 않아 한참 잊어버린 뒤에 다시 되곤 합니다.
우리들의 수행은 순간마다 호흡의 흐름 -> 몸의 감각
-> 생각 등 다른 대상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될 때
깊어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하여 개발되는 밝게 비추어 보는
힘이 바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세세한 현상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마음 상태를 지켜야
될 지에 대하여 훌륭한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복잡한 저자거리를 물이 가득찬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도록 명령받은 한 사람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뒤에는 칼을 든 병사가 따랐습니다.
물을 한방울이라도 흘리면 목을 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틀림없이 그 사람은 환히 비추어 보는 마음으로 잘
살펴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긴장해서는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여 힘을 주거나 긴장하여 부딪히면
물은 넘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 앞에 변화하는 정경의 흐름에 따라
느슨하면서도 율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순간순간 주의 깊지 않으면
안됩니다.
환히 비춰보는 능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고요하면서도
깨어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 순간 순간의 선
순간 순간 비추어 보는 마음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미래에 무엇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고요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즉 현재에 '있는' 노력입니다.
한 수행자가 선사를 방문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날은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우산을
문밖에 두고 들어갔습니다. 인사를 받고 나서 선사는
수행승에게 신발의 어느 쪽에 우산을 놓고 들어왔는지를
물었습니다. 7년을 더 닦은 뒤에야 그 수행승은
순간순간의 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우리들이 하는
일마다를 비추어 보는 꾸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올라온다-내려간다',혹은
'들어온다-나간다'하고 관하고, 그로부터 일어나고
세면하고 걷고 앉고, 다시 일어나서 식사하러 가는 등,
모든 행위에 관계된 움직임을 낱낱이 비추 보십시오.
잠자기 위해 누울 때도 잠드는 순간까지
'올라온다-내려간다','들어온다-나간다'하는 관을 계속
하십시오. 이와 같은 훈련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행을 오직 앉고 걷는 것 뿐이라 생각하여 그 밖의
시간을 게을리 하게 되면 그간에 쌓아온 지속력을
잃게 됩니다.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강한 통찰력은
우리들 마음을 고요하고 하나되게 합니다.
이렇게 굳고 균형된 마음으로부터 깨침은 가능합니다.
수행에 무가치한 환경은 없습니다.
깨침에 필요한 요소들이 성숙하고 조화를 이룰 때
진리에 대한 깊은 직관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 직관의 순간
부처님을 일생 동안 시봉했던 아난존자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부처님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했던 그는 자신을 위한 수행을 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깨침을 이루었으나 그는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정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되어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큰 결집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중들은 499명의 깨친 제자들과 아난존자를
대표로 뽑았습니다. 그들은 아난이 깨침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일 많이 들었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선출했습니다.
결집의 날이 가까워오자 다른 스님들은 아난에게 용맹정진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들어온다,나아간다,내려놓는다'하고
걷는 훈련을 했습니다. 자정이 넘고, 1시, 2시,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아난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세히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거의 무든 가르침을 다 들은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 마음이 균형을
잃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충분한 집중과 안정없이
너무 지나친 노력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대와 예측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균형을 찾기 위하여 누워서 관을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일거일동을 세세히 비추어 보면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의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그는 깨쳤습니다. 그때가 새벽 4시, 6 ~ 7시까지
그는 열반의 즐거움을 즐겼습니다.
아침에 아난은 시원스런 모습으로 결집에 참석했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깨침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무명의 구름이 언제 걷힐지 모릅니다.
그것은 심지어 눕는 순간에도 옵니다.
항상 비추어 보십시오!
매 순간 순간 일어나는 일에 깨어있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수행을 매일 매일 쌓아 갈 때
마음은 비상한 힘을 갖게 됩니다.
이 수련기간을 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거나,"이만하면 됐다"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늦은 밤에도 잠이 오지 않으면 수행을 계속 하십시오.
흔히 늦은 밤 시간이 수행에는 제일 좋습니다.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힘으로 무리하거나 긴장을 초래케해서는 안됩니다.
* 한 밤의 수행
내가 인도에서 처음 수행할 때 복도 건너편에
한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정진의
귀감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볼 때마다 그는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열시나 열한시 쯤이면 나는 잠자리에 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에 켜진 불을 보고 용기를 얻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걸은 후에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앉아 한 두시간을 더 앉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앉고 걷는 훈련을 번갈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었고
그것은 아주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쌓아온 선정과 관조의 힘이 응축되었기
때문에 하루의 수행이 끝나는 밤시간에 우리들 마음은
꿰뚫는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만약 그런 마음의 상태를 느끼면 수행을 계속 하십시오.
경험할 것도, 경험할 우리들 마음의 단계도 아주 많습니다.
버마에 있는 많은 선원에서는 수행자들이 처음에는
네 시간의 수면으로 시작하여 수행이 깊어질수록
수면시간을 더 줄여갑니다.
우리는 일곱 내지 여덟시간은 꼭 자야한다는
인습적인 생각의 덫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낡은 습성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하루종일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편가르지 않고 균형과 평정을
유지하면 긴장이나 피로는 쌓이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버마에서 수행할 때 닷새 동안 잠을
자지않고 정진해도 전혀 피로한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도 다름아닌 이 위빠사나 수행을 차분하고 리드미컬하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때의 상태에 민감하십시오.
그래서 피곤하거나 졸리지 않으면 밤새 수행을 계속해도 좋습니다.
---- 의지 작용을 비추어 봄 ------
의지의 작용은 순간 순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일반적인 모습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강하게 나타날 때는 관해야 합니다.
의지의 작용은 어떤 행위에 앞서 일어나는
마음의 충동이요 신호입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의지의 작용을
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생각대로 행위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의지의 작용을 의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저 자동적으로 행위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일어날 때,
실제 일어나는 행동이 있기에 앞서
'일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작용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일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작용을 관할 수 있을 때
필요하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의 작용을 관할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대로 그저 일어나고 맙니다.
우리 몸의 모든 자율적인 행동은 그렇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앉아있다가 일어나든가, 서있다가 걷는 등 ,
자세의 변화를 일으키기 전 의지의 작용이 마음 속에
나타나면 그것을 관하십시오.
걷는 선 중에 멈출 때에도 멈추려는 의지의 작용이
먼저 있습니다. 그것을 비추어 관하십시오.
매 걸음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걷는 끝까지 와서 걸음을 돌릴때
돌리려는 위지의 작용을 비추어 보는 것은 훈련에
도움이 됩니다.
발이 저절로 돌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전에 돌리려는 의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의
인과관계가 일어나는 모습을 알게 됩니다.
어느때는 몸이 원인이 되고 마음이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마음이 원인이 되고
몸의 움직임이 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돌리려는'의지작용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다리가 움직입니다. 돌리는 어떤 고정불변한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반적인 인과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돌릴 때 어떤 과정으로 돌리게 되는지
그 과정을 관하지 못할때 우리는 돌리는 어떤 주체가
따로 있는양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한기를 느껴서 스웨타를 입었다고 해봅시다.
한기라는 육체적인 감각으로 인하여 따뜻하게 하려는
욕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욕구로 인하여 옷을 더
입어야겠다는 의지의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 의지작용으로 인하여 몸이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비추어 봄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 과정이 어떻기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좌선에 있어서도 어떤 움직임이 있기 전
그 의지작용을 관해야 합니다.
자세를 바꾸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작용이 먼저 있을 것입니다.
침을 삼킬 때에도 그에 앞서 그러려는 의지작용이
있습니다. 눈을 뜰 때에도 뜨려는 의지가 작용됩니다.
이 모든 의지의 작용들을 반드시 비추어봐야 합니다.
의지의 작용이 항상 생각이나 말로
구체화되어 나타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순히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충동이거나 신호로 느껴질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 적절한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자극을 알면 됩니다.
몸과 마음의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모습을 알게 되면
'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없어지게 됩니다.
'나'는 어떤 고정불변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들이 인연따라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 먹는 것도 선
우리가 무엇을 먹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의
여러가지 다른 과정은 계속 됩니다.
그 과정을 차례대로 비추어 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먹는 일을 완전히 즐길 수 없습니다.
음식을 씹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다니기 쉽습니다.
음식을 먹게 될 때 우리는 먼저 음식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 때 "본다, 본다"하고
마음속으로 주목 하십시오. 다음은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의지의 작용이 나타납니다.
그 의지의 작용도 '의지,의지'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먹으려는 의지의 작용은 팔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때도 '움직인다, 움직인다'하고 봐야 합니다.
손이나 수저가 음식에 닿을 때 접촉의 느낌이 있게 됩니다.
그 느낌을 느끼십시오.
다음엔 팔을 들어올리려는 생각이 있고, 들어올리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하나 하나 관해야 합니다.
입을 열고 음식을 넣고, 입을 닫습니다. 팔을 내리려는
의지작용, 그리고 실제 팔을 내기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차례로 관해야 합니다.
입안에 있는 음식의 감촉, 씹는 움직임, 그것들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씹기 시작하면 맛에 대한 감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맛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계속 씹으면 맛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삼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차례로 하나 하나 관하십시오.
그 일련의 과정 뒤에 '먹는'어떤 누구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의지작용 -> 움직임 -> 맛 -> 감촉의 연속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존재의 식상입니다. 일련의 일어남이며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과 흐름을 잘 비추어 볼수 있을 때
'나'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모든 작용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입니다.
의지, 생각, 감각, 움직이, 이 모든 것은 서로 깊은
상호관계 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 원인이 되고, 또 몸의 감각이
욕구와 의지작용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먹을 때 그 과정을 관하지 않습니다.
맛은 금방 느꼈다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맛을 계속해서
즐기려는 욕심으로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도 팔은
더 많은 음식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을 비추어볼 여유가 없습니다.
입안에 든 음식을 먼저 완전히 드십시오.
그런 다음 그 다음 숟갈로 드십시오.
이렇게 하면 관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할때 우리는 우리들 몸에 대하여 예민하게
되고 필요한 음식의 양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먹는 것을 비추어 보는 관이 가능할때
과식이란 좀처럼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수련기간 동안 모든 것은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필 수 잇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수행이 잘 되어 관이 성숙되면 매사를 빠른 속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훈련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서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침묵 속에 환히 비춰 보면서 천천히 하십시오.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관의 훈련이 하루 종일
끊이지 않도록 먹는 선을 일상적인 훈련 속에 끼워 넣으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 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대로 관이요 선이 되도록 비추어 보십시오.
* 호흡을 세는 집중 훈련
오늘은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것은 호흡을 세는 수식관입니다.
이 훈련은 특별히 마음이 산란할 때 유용합니다.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내쉬는 숨, 즉 아랫배가 내려갈 때 하나, 둘, 셋.......
이렇게 열까지 세는 것입니다.
열까지 세곤 다시 하나로 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중간에 몇까지 셌는지 잊어버리면
'하나'로 부터 다시 시작 하십시오.
이 훈련 중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호흡만 세면 됩니다.
때로는 호흡이 빠르기도 느리기도,
또 가늘어지고 깊어지기도 하는 등 불규칙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말고 그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세기만 하면 됩니다.
한 5분쯤 세다가는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내가 열까지 세려고 이렇게 앉아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십시오. 만일 그런 생각 때문에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렸으면'하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몸에 긴장과 고통이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시하고 오직 '하나,.......열' 세십시오.
이 방법은 우리들 마음을 통일시키고
한 곳에 집중시키는 특별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유용하다고 느껴지면 가끔 좌선
중에 활용해도 좋습니다.
* 믿음
이 수행의 길에 있어서 믿음은 소중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가질때
장애가 되는 의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의 믿음은 단순히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저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믿을 뿐입니다.
그런 믿음은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좀 높은 차원의 믿음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지혜나 자비 등 그 사람의 훌륭한 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그 사람의 훌륭한 면을 통하여
나에게도 그같은 면을 개발케 하므로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의 진리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있습니.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깊은 차원에서 알기 시작할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맹목의 느낌이나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재의 깊은 관조로부터
오는 그런 확신이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스스로의 가능성에 관한 믿음입니다.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확고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지 하여라.
그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아니된다.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 하여라.
그 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아니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나 자신과 진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 죽음과 자비의 명상 ----
* 무상, 죽음, 그리고 무집착
안으로 비춰 보는 이 훈련은 줄타기에 견줄 수 있습니다.
줄 위를 걸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줄 위를 걷는 동안 시야에 여러가지가 스쳐가듯 우리의
수행 중에도 여러가지 정경과 소리들 그리고 감동, 생각,
깨달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그 경험들이 즐거운 것이면 우리들 마음은 그들을
가까이 하고 붙들고 늘어지며 오랫동안 함께 하려 합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불유쾌하면 싫어하고 멀리하려 합니다.
어느 경우나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대상을 향한 좋은 반응, 나쁜 반응 모두 똑같이 위험합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나 ,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나
마음의 균형을 잃게 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잃으면 줄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그러한 경계들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하지 않는 조용한 마음을
개발하려 노력합니다.
즉,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나 오고 가는 것을
그저 비추어 보는 마음의 개발입니다.
무상을 꽤뚫어보는 일은 죽음의 블가피성과 긴박성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에 이런 문답이 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신이 죽으리라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망각 속에서 물건을 모으고 소유하며 또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우리는 야심과 욕망과 자아를 채우는 일을 생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적은 마음'의 행위들로 분주합니다.
그러므로 큰 마음의 시각, 죽음으로보터 생을 조명해 보는
그런 시각을 잃고 있습니다.
돈 쥬안은 죽음을 우리들 생의 충고자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후회나 슬픔,
걱정 없이 맑은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우리들 생의 순간순간, 행위의 하나 하나를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온전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하는 일을 그렇게 하도록
하는 스스로의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그 경향은 성냄이나 자기 비하와 같은
파괴적인 습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마음 속에 새겨두고
그것이 우리들 삶의 일거 일동을 증거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을 생의 충고자로 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의 순간순간을
내가 금생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듯이
힘과 완전함으로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항상 눈앞에 있는 사실로 의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덜 분주하고 눈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을
채우는 일에 그렇게 무리하지 않게 됩니다.
욕망과 환상에 사로 잡히지 않을 때 물건이나 소유에
덜 집착하게 되고 자비롭고 너그러운 열린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의식은 나의 존재를
더 밝게 알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무상에 대한 통찰은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의 흐름 속에 있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매 순간순간 마음과 몸의 움직임,
나아가서는 전 우주가 생하고 멸하며 또 죽었다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변화와
흐름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자비
우리의 수행은 현재의 한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저 환히 비춰 보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인도의 한 스승은
'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저 앉고 ,
앉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는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낼것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자연의 이법을 확연히 알게 되면 진리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됩니다. 마음의 균형과 무집착으로 성숙되는
우리들 수행에서 여러가지 아름답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마음의 속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慈,metta), 사랑입니다.
그것은 내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가벼운 마음으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입니다.
또 그것은 필요나 욕망이나 집착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텅빈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장사꾼의 사랑이 아닙니다.
지혜를 바탕으로 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즉, 우리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마음입니다.
수행을 따라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또 다른 마음의 속성이 '비(悲,karuna)입니다.
그것은 단순이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냄과 탐욕 등 수 많은 번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은 확실히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한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느끼고 아파하며
그 아픔을 없애려는 마음이 자비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가장 높은 마음의 속성이
공(空), 즉 무아(無我)입니다.
'내'가 없을 때 '남'도 없습니다.
나와 남을 나누는 의식은 없어지고 모든 것이 하나
됨을 경험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
"사람은 우주의 한 부분이.
그런데 그는 그 자신을 전체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한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은 우리들 스스로를 감옥
속에 가둔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을 개인적 욕망에 국한
시키고 나에게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마음을 쓰게 한다.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포용할 수 있는 자비의 원(圓)을
확대해서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 자비의 명상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구름은 우리들 마음에
본래부터 있는 사랑과 자비의 광명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가 밝게 비추어 보는 수련을 통해서
이러한 구름들을 제거할 때 자비의 광명은
자연히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자비의 마음이 우리들 생활 속에
살아움직이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한 수행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자비의 명상'이라 불리는
가르침입니다.
이 수행은 우리의 마음을 가볍고 넓게 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선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자비의 명상을 좌선 시작 전이나
끝나기 전 5 ~ 10분간 합니다. 또 좌선의 앞뒤로 해도
좋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 훈련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너른 공간을 창출하게 되어 위빠사나 선
자체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또 끝날 때 할 경우에는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먼저 편안한 자세로 앉으십시오.
마음을 긴장이나 적대감으로부터 풀어주기 위하여
용서를 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혹 몸이나 입 그리고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해쳤다면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혹 다른 사람이
나를 해쳤다 해도 다 용서하겠습니다. "
조용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두번 되풀이 하면
마음 속에 쌓인 나쁜 감정과 분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다음엔 몇 분 동안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기원합니다.
"내가 행복하게 하여지이다. 내가 평화롭게 되어지이다.
내가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이다."
하나 하나의 뜻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면 좋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향한 이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표현 자체는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원한다면 더 공감할 수 있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자비의 진언입니다.
계속해서 이 자비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킵시요.
" 내가 행복을 바라듯 모든 생명이 행복하여지이다.
내가 평화를 바라듯 모든 생명 또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
이렇게 마음 속으로 몇 번 되풀이 한 다음
실제로 자비의 마음을 내 가슴으로 부터 모든 생명을
향해 확산시키십시오.
위의 내용은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지아디."
로 줄여 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5 ~ 10분간 반복하십시오.
* 자비의 마음이 갖는 힘
이 자비의 명상을 특정한 사람들을 향하여 할 수도 있습니다.
즉,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또는 나와 감정이 좋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을 눈 앞에 대한 듯 떠올리며 되풀이해
기원하십시오. 끝날 때에는 다시 시방에 있는 모든 생명을
향해 자비의 파장을 보내십시오.
처음에는 일종의 기계적인 훈련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거듭해서 행할 때 자비의 마음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고도로 집중된 자비의 마음은 강한 힘을 가집니다.
이에 관하여는 부처님과 부처님을 제거하고 교단을
빼앗으려했던 제바달타와의 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을 쉽게 죽일 수 없음을 잘 아는 제바달타는
부처님께서 탁발하러 가시는 길에 미친 코끼리를
풀어 놓기로 했습니다. 제바달타는 부처님께서
미친 코끼리를 피해 도망친다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짓밟혀 죽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름날 아침 부처님께서 좁은 길을 올라오실 때
제바달타는 미친 코끼리를 풀고 그를 향해 질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망치지도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서신 채로 조용히 마음을 집중하여
달려오는 코끼리를 향하여 강력한 자비의 염파를 보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의 힘으로 코끼리는 조용해졌고
급기야 부처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비의 마음은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통하는 강력하고 너른 마음입니다.
----- 수행에 관한 질문과 답변 -----
질문 : 저는 호흠을 관할 때 들이쉬는 숨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고 이것이 저를 긴장케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 : 호흡은 아주 흥미로운 명상의 주제입니다.
왜냐햐면 강도나 깊이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강하고 무거우며 또 다른 때는 섬세하고
가볍기도 합니다. 그 변화는 들숨 날숨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일정 기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거의 느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흡이 훌륭한 관찰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호흡이 섬세해 질 때 우리들의 마음도 그에 따라 아주
고요하고 예민해지기 때문이죠.
호흡이 섬세해지면 그 섬세한 호흡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그만큼 맑고 고요하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정진은 무엇을 새로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호흡이 강하면 강한 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그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 앉아서 호흡을 관할 때 저는 숨이 들고 나는 것이
마치 물이 터널 속을 들락 날락하는 것처럼 영상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런 마음의 영상을 없이 하는
것이 비추어 보는 훈련에 좋을까요?
답 : 예, 그렇습니다. 이 수행의 핵심은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느끼는 데 있습니다.
호흡을 영상화하는 것은 일종의 개념입니다.
즉, 그것은 실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마음의 투시입니다. 중요한 것은 호흡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호흡작용 그자체를 그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질문 : 마음을 밝게 비추어 보는 이 위빠사나 선과 선정(止)
과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답 : 깨침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가지 방법은 먼저 마음의 집중(止 : concentration)을
개발하고 그 힘으로 사물의 실상을 비추어 보는 (觀:mindfulness)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햐면 강한 집중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여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얀마를 위시한 남방불교 여러 나라에서는 100-150년 전부터
위빠사나 선법이 널리 선양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위빠사나 선은 집중과 비추어 보는 훈련,
즉 지와 관을 함께 개발하는 방법입니다.
순간순간 비추어 보는 관과 집중을 함께 함으로써
충분히 깨침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질문 : 자비에 관하여 좀 더 말씀해 주실까요?
답 : 공(空,emptiness)의 표현이 자비입니다. 왜냐햐면 공은 바로
'자아의 빔'(emptiness of self), 즉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남'도 없습니다. 나다 남이다 하는 분별은
'나'다 하는 생각, 자아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멸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그럴 때 자비와 사랑은 그 하나됨의 자연스런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비와 사랑은 '내가 누구를 위해'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질문 : 너무 열심히 하여 마음이 초조해질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 : 수행 중에 너무 무리하고 긴장을 느끼게 되면 밖으로 나가서
나무와 하늘을 보십시오. 이곳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고
광활합니다. 밖에 나가 편안하게 좀 걸으십시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놓치지 말고 관하면서 말입니다.
얼마 후면 자연이 우리들 마음을 식혀 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종종 제자들에게 자연 속에 있을 것을 권했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 때로 저는 호흡의 들고 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도 섬세해 집니다.
만약 호흡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게 되거든
몸의 감각이나 자세를 느끼십시오.
선이 잘되면 몸의 감각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느끼지 못하는 상태 그대로를
비추어 보십시오. 그것도 곧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흡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돌아오게 됩니다.
질문 : 마음 속에 온갖 번뇌 망상의 장애가 들끓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하나 하나를 비추어 보려 합니다만 그 밖에
다른 대치방법은 없을까요?
답 : 티벳에서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저에게는
유용했습니다. 즉 , 마음을 구름 한 점없이 맑은 텅빈
허공처럼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 허공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십시오.
허공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구름이 오고 가고 바람이 오고 가며 비와 햇빛이 오고 갑니다.
그러나 허공은 항상 맑고 비어 있습니다.
마음을 그 허공처럼 가지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곧 고요해지고 평형을 잡게 됩니다.
질문 : 마음의 '밝음'에 관하여 좀 더 말씀해 주실까요?
답 : 훈련 중에 가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환히 비출 수 있을 만큼 맑고
날카로운 때를 험했으리라 믿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희미해 보이는 혼침과는 대조적인 상태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켰을 때 방안이 환해지고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밝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도 충분한 빛이 없을 때 사물의 윤곽만 보일 뿐
밝고 날카롭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충분할 때
모든 것은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마음의 움직임도 밝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빛이 바로 비추어보는 빛이요 반조(返照)
의 빛입니다.
질문 : 깨침은 점차적인가요 아니면 한 순간에 오는 것인가요?
답 : 두가지 다입니다. 깨침은 '직관적인 앎'이기 때문에
항상 갑작스런 것입니다. 그걸 계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깨침은 고요한 마음에서 직관적이고 갑작스러우며 말이
끊어진 앎윷 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적 앎은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갑작스런 앎이 가능키
위해서는 수행을 통한 마음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질문 : 어떤 사람들은 수행에 있어서 특별한 힘, 초능력의 위험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 마음의 힘은 개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는
아닙니다. 힘과 지혜는 서로 다르지요. 수행이 익기도 전에
그런 힘을 개발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햐면 그것은 소아적인 나를 강화할 수 있고
또 좋지 않은 방향으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와 지혜가 확고한 사람이라면 그런 힘을 잘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들
수행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서 깨친 경우도
많이 있으며, 그런 힘은 있으나 깨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또 지혜와 힘을 함께 갖춘 경우도 있습니다.
질문 : 밝게 비추어 보는 경지가 깊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특별한 것이 필요한가요?
답 : 오직 한가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환히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현재의 순간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은 몸과 마음의 모든 변화하는 모습에 집착하거나 ,
비판 또는 몰입없이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스스로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조치나 방법이 필요치 않습니다.
수행의 묘는 간단한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복잡하게 하려하고 어떤 이상한 경지를
경험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앉아 흐름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순해지고 쉬워지십시오.
------ 수련을 마치며 --------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그동안 용맹정진을 통하여
쌓아온 훈련을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려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 보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즉 , 항상 밝게 비춰보면 됩니다.
눈, 코, 귀, 입 등 감각의 창문을 통하여 수많은 정보가
들어오고 , 또 그로 인하여 우리들의 주의가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 것도
비난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면 마음은 항상 맑고 균형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밝게 비추어 보는 마음이
제일가는 보호입니다.
*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앉으십시오
마음의 균형과 침묵에 도움이 되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앉는 좌선의 실천입니다.
한 번에 한 시간 혹은 그 이상 앉는 수행을 하루에 두번 씩
실천한다면그 동안 이 정진 기간 동안에 연마한 훈련을 더욱
강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막 용맹정진을 마친 지금, 하루에 한두 시간 앉는 것
쯤은 쉬울 것처럼 생각되지만,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간
다음 계속 그렇게 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좌선에 최우선권을 주십시오. 좌선을 다른 일들 틈에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 좌선을 중심으로 다른 일들을 배치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매일 수련하는 좌선이 당신의 삶을 전환시키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으로 매일 좌선 시간을 정할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매일 특정한 시간에 앉는 습관을 기르면 정기적인 습관을
거를 위험이 적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하루를 명상으로 시작하고 ,
다시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시간으로 각각
한 시간쯤이면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고 각자에 적절한 시간이면 됩니다.
실험을 해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가는 것입니다 .
정규적인 좌선의 훈련은 그 가치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수행을 생활 속에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또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식사처럼 매일 하는 일을 관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루 한 끼 정도의 식사를 침묵 속에 하도록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보면 그 시간이 밝게 비추어 보는 힘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이 정진 기간 동안 개발한 마음의 경향들을 다시
일깨우는 그러한 기간이 될 것입니다.
비추어보는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전에 수행을 통하여 축적한 힘을
계속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많이 걷습니다.
걸을 때 걷는 그것을 수행으로 삼으십시오.
필요할 때를 빼고는 걸을 때 '올라간가 -나아간다 -내려놓는다 '하고
천천히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몸 전체, 혹은 매 걸음이 땅에
닿는 것을 관하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직접 실험을 해보십시오.
생활하면서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느껴질 때는 호흡을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자세는 취할 것없이 눈을 뜬 채 몇분 동안 '올라온다 -내려온다 '
하고 호흡을 관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바로 집중되고 고요해 질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되면 무엇을 하든 발게 비추어 보는 관(觀)이 일여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은 우리들의 삶의 전체입니다.
즉, 수행은 단지 앉아있는 것이나 열심히 명상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그대로가 수행이어야 합니다.
* 항상 단순해 지고 여유를 가지십시오
수행을 통해 씨 뿌리고 가꾸어온 지혜와 자비의 씨앗은 강력합니다.
그 힘은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들이 세상 일에 분주하고 얽매어 있을 때 어느 순간엔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이 연출하고 있는 연극같은 행동을 분명히 비추어
볼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항상 단순해지고 여유를 가지십시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일 때 진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생의 순간순간 그대로가 진래에 맞게 사는 삶이 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진리를 잊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곧 죽음에 이르게 되며
모든 것이 간단없는 변화 속에 있고 흐름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때, 마음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평정과 균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 그럴 때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상황에 대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부터 지녀온 선입관에서 벗어나 더욱 개방되고 ,
빈 마음으로 순간순간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부모나 친구 또는 낯선 사람들과 만날 때
존재의 심층에서 '나와 다른 사람', ' 우리와 그들 '은
본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일 뿐이며
'공'일 뿐입니다. 이 공에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자비가 샘 솟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사랑과 자비를 우리들 삶에서 실천해 갈 때
다른 사람들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는 점차 해소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린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평화롭고
평안하게 하는지의 예를 보여줍니다.
만약 한 숟가락의 소금을 한 컵의 물 속에 탄다면
그 물은 굉장히 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같은 양의
소금 혹은 더 많은 양의 소금일지라도 큰 연못에 넣는다면
물맛의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이 비좁고 경직돼 있을 때는
비록 한마디의 부정적인 말에도 우리들 마음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울 때는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비의 마음은 우리들의 삶을 푸근히 감쌀 수 있는
부드럽고 넉넉한 마음입니다.
세번째는 겸허와 은밀함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며
마치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장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
그는 친절하고 부드럽지만
스스로 그것을 나타내기 않는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또한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그는 재물과 돈을 위해
허우적 거리지 않으며
또한 가난을 미덕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
그러나 혼자가는 길을 뽐내지도 않는다.
여러 사람을 좇지 않지만,
여러 사람을 좇는 이들을 향하여
불평하지도 않는다.
높은 자리와 재물이
그의 마음을 끌지 못하며,
불명예와 치욕이 그를 방해하지도 못한다.
그는 항상 옳고 그름을 좇지도 않으며
찬, 반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말하였다.
" 도인은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높은 덕은 흔적이 없다.
무아(無我)가 참나(眞我)이며
대인(大人)은 내가 없다 " 고.
* 열린 마음, 빈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들의 삶은 더욱 단순하고 평안해 질 것입니다.
다시 장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람이 강을 건너고 있을 때
빈 배가 와서 부딪히면
비록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리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노를 똑똑히 저으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또 소리칠 것이며
그래도 못알아 들으면 옥을 퍼부을 것이다.
이는 단지 그 배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배가 비어 있으면
그는 소리치지도 화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강을 건널 때
만일 자신의 배를 비울 수 있다면
아무도 당신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배를 비우고 , 열린 마음 , 빈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면 아무도 당신을 거역하거나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될 지를 묻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대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먼저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용한 마음으로 그 상황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 조용한 마음에서 우리는 적절한 대화의 방법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절대로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거나 특정의 개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대하거나 특정의 개념적인 가르침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때로 꼭 필요한 것은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일상적인 대화일 수가 있습니다.
경청할 줄 아는 법을 익히는 데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 마치는 말
'위빠사나'란 말의 뜻은 사물을 밝게 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관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모든 것 , 다른 사람, 그들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상황을 밝게 비추어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실천은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을 멀리하고 ,
밝게 비추어 보고, 깨어있으며, 고요한 마음과 사랑으로
항상 함께하는 그런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한 달 동안의 정진과 수행은 진리를 향한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활이 그대로 진리를 실현하는
시간과 장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