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김수영) 민근홍 언어마을
나무뿌리가 좀 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요도 기침도 한기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의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우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가장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말이 아니다.
ㅁ 해설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김종철은 실존적 가치를 가진 말에 대한 시라고 하면서 이 말이야말로 가장 너그럽게 열린 마음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이 갖는 감정이야 말로 사랑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김우창은 1연을 예로 들어 시인의 개인적인 양심을 표출한 시로 보고 정당화되지 않은 질서를 거부하려는 것으로 이 시의 주제를 보았다. 김혜순은 이 말을 통해 김수영 개인의 언어관을 표현했다고 본다. 그는, 진정한 언어란 무언의 말로 보았고 그 무언의 말이 가진 가치가 곧 시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으로 돌아와 쉽게 생각해 보자. 시인은 소위 말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 다른 연은 상식으로 다가설 수 있어도 4연을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죽음을 꿰뚫는’ 말이 가장 힘센 말이 아니라 ‘가장 무력한 말’이 된다. ‘죽음을 위한 말’이 죽음을 섬기는 말이 아니라 ‘죽음에 섬기는 말’이 된다. 또 ‘겨울의 말’=‘봄의 말’, ‘내 말’=‘내 말이 아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가?
시인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읽은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의를 하며 오래 읽게 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말은 절대로 해독될 수 없는 말은 아니다. 주의를 하며 오래 읽으면 반드시 해독되는 말이다. 이 때 주의를 하며 오래 읽는다는 말은 시의 전체 내용, 즉 구조 속에서 문맥적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는다는 뜻이다. 이 연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첫 연부터 보자.
1연: 나무뿌리가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그러니 나무(나)는 얼어 죽을 것이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뿌리가 얼었기에 나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 수렴될 뿐이다. 입도 당연 얼어붙었다.
2연: 뿌리가 가라앉았기에 지상과 나무의 거리는 너무나 가까워졌고 너무나 분명하게 땅위의 모든 것이 보이니 질문이 없어진다. 가까이서 분명하게 본 것이 많으니 알릴 말도 많은데 세상은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3연: 그래서 나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말한다. 이 침묵으로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침묵의 말을 하고 있으니 나는 무성의한 놈이다.
4연: 무언의 말은 하늘 빛 물빛을 닮은 무색의 말이다. 역사적 필연에 의한 합리적으로 생성된 말이 아니라, 어느날 우연히 나타난 기적 같은 말이다. 나무뿌리가 겨울을 향해 내려앉았으니 이 뿌리를 가진 나무가 하는 말은 죽음(겨울)을 꿰뚫는 말이면서 말이 아닌 침묵이니 가장 무력한 말이 된다. 또 이 침묵의 말은 말이 없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다. 그러니 침묵의 말은 만능의 말이다. 그것은 침묵이므로 겨울의 말이고 그것은 또 말이므로 봄의 말이다. 침묵은 내 말이면서 내 말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으니 또한 내말이 아닌 말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4연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3연까지는 침묵의 말이 가진 부정적 기능에 대해 언급한 것이고 4연은 역설적 표현으로 침묵의 말이 가진 긍정적 기능을 말한 것이다.
이 시는 1964년 박정희 쿠데타의 성공적 정착과 관련을 해서 읽으면 좀 더 쉽게 읽힌다. 혁명의 열기를 얼게 한 겨울, 죽음의 시대에 시인은 침묵의 언어로 시를 쓴다. 이미 죽은 목숨이기에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못하고 모든 것은 죽음의 심연으로 얼어붙었다.(1연)
그런데 이렇게 얼어붙은 밤의 시대가 되면 너무나 부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너무나 명백한 백주대로의 부정이기에 의혹이나 질문이 없어진다. 부정의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마당에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혁명을 경험한 시인으로서 이 분명한 부정은 여러 사람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그 무엇이므로 할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미 쿠데타가 성공한 뒤여서 사람들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2연)
부정의 시대 나는 침묵으로 말한다. 그러나 침묵으로 하는 말은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스스로도 성의가 없는 놈이라고 자조할 만도 하다. (3연)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조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늘처럼 물처럼 아무 색깔도 없다고 해서 하늘의 높이와 물의 깊이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늘을 쏘는 자유와 물이 흐르는 자유를 알고 있는 침묵의 시이다. 침묵의 우연은 말의 필연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역사적 필연으로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우연한 침묵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침묵의 말은 죽음을 꿰뚫는 말이다. 독재정권이 이룩한 밤과 겨울의 언어를 꿰뚫는 말이다. 그러나 침묵으로 꿰뚫으니 가장 무력한 말이다. 이 침묵의 말은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보면 죽음과 겨울을 위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죽음이 섬길 수밖에 없는 생명과 봄의 말이다. 침묵의 말은 그러므로 융통성이 아주 많은 말이다. 이것이 맞지 않느냐고 독재 정권이 물어도 나는 ‘아니요’라고 머리를 흔들지도 않았고 ‘예’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침묵은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그것을 포함한 아주 많은 융통성을 가진 언어이다. 그러므로 침묵의 언어는 만능의 말이다. 표면적으로 겨울이나 밤이나 죽음에 동조하는 말 같지만 끝내 많은 것을 생성해 내는 말이다. 이제 이 침묵의 말은 내 말이면서 동시에 내 말이 아니다. ‘내 몸이면서 내 몸이 아니’던, 독재 정권에 의해 죽음과 침묵을 강요당하던 육체적 시인이 ‘내 말이면서 동시에 내 말’이 아닌 시인의 자존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4연)
이 시는, 전반적으로 독재 정권하에서 쓰는 자신의 시를 ‘침묵의 말’로 규정하고, 그것은 겉으로 보면 침묵처럼 무의미하고 때로는 독재정권을 위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본질적으로 독재정권이 가진 죽음의 본질을 꿰뚫고 다시 태어나는 만능의 말, 봄의 말임을 역설한다. 독재정권은 시인의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나 시인의 말, 시는 죽일 수 없음을 ‘말도 안 되는 말(역설)’을 통해 형상화해 낸 것이다. 침묵의 언어로 쓴 시는 이 [말]처럼 난해시일 수도 있고 [눈]처럼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상징시일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시인이 독재정권 아래서 겪는 침묵의 수모를 그린 것이 아니라, 침묵처럼 말하는 시의 자존을 노래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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