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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시험
제목 : 시험, 인내, 온전함
성경 : 약 1:1~4
찬송 : 397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1015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를 소개할 때,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단골 메뉴로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the epistle of strow)이라 한 그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바울 서신들에 비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에는 은혜의 복음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야고보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야고보서가 결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님을 증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행위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야고보서의 성향 자체가 실천적이기 때문이라거나, ‘교훈’이라는 문학적 형식을 빌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야고보서가 염두에 두었던 교회들의 정황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 맞습니다. 지푸라기가 너무 가벼워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정말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유적으로,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놓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의 역할은 마치 그와 같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원래부터 여러 차례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개척을 했거나, 혹은 여전히 개척적인 상황에서 대체로 유대교와 맞부딪히면서 세워져 갔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신약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주력했던 선교사요 교사였던 바울의 서신들은, 그래서 대체적으로 신약 교회라는 건물의 머릿돌을 놓는 기초 작업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이 기초만으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건물에 기초가 놓였다면 당연히 그 위에 기둥들을 세우고 또한 벽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지붕을 얹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집을 짓는 그 어느 누구가 머릿돌을 지붕 위에 올려놓겠습니까? 지붕으로 써야 하는 재료는 기초 돌을 놓을 때 쓰는 재료와는 분명히 달라야 하고, 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붕을 얹기에는, 옛날 같으면 정말 ‘지푸라기’ 같은 재료가 적격이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는 그런 의미에서 지푸라기 서신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터가 보기는 제대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지푸라기이기 때문에 기초석이나 기둥이나 벽으로 쓴 재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건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야고보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예루살렘 감독이었던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야고보서는 주후 62년 이전 어느 시점에 쓰여 졌을 것으로 봅니다.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어느 특정 교회나 개인에게 보내진 편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나타납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신자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야고보의 믿음의 형제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만나는 시험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험은 박해, 유혹 혹은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교묘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세상에서 존귀함과 영광과 다스림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심이 바로 그 시험의 핵심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시험에서 인내하며 믿음을 행할 때 이웃 사랑이 중심인 율법을 완성하는 온전함에 이르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선, ‘기쁨’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의 ‘온전히’(파싼)는 4절의 ‘온전히 이루라’는 것과 연결되는 인상을 주지만, 실은 2절의 ‘온갖 종류’(여러 가지)와 더 잘 어울립니다. 즉 기쁘지도 않은데 억지로라도 해야 온전해진다는 의미라기보다,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기뻐할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온전히 기뻐하라’는 말이 부족한 듯이 기뻐하지 말고 억지로라도 감사하여 기뻐할 것을 요구하는 어투라면 문제 있는 번역입니다. 대신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라’는 말은 2절 안에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지 그 종류에 상관없이 우리가 가진 모든 기쁨을 모두 터트려서 기뻐해야 할 어떤 이유가 따로 있음을 선포하는 매우 감격적인 선언입니다.
통상 야고보서 하면, 우선 행위에 대한 부담부터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처음 몇 구절이 주는 인상은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조금 딱딱하고 엄격한 인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는 ‘기쁨’(카란/joy)으로 시작합니다. 수신자들이 당하는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시험들에 빠진 상황에서도 야고보는 우선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야고보서야말로 빌립보서만큼이나 ‘기쁨의 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야고보가 ‘온갖 종류의’(여러 가지)(포이킬로이스)시험이라 할 때, 그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핍박과 환난으로만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갖가지’ 시험들입니다. 외적인 환난과 핍박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스스로 부를 탐하다가 시기와 질투와 다툼에 빠지는 시험일 수도 있고, 멀리 있는 원수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부족함 때문에, 혹은 자신의 약한 부분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시험’(페이라스모스)이라는 단어 자체 역시 어떤 특정한 시련만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14절의 예가 보여 주듯이 사람이 자기 유혹에 끌려 받는 시험도 역시 ‘페이라조’입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복음의 명분이든 자신의 약함이든, 이웃의 부족 때문이든, 나 자신의 부족 때문이든, 1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야고보는 정말 모든 기쁨으로 기뻐할 이유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당연하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종교, 사회, 문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로마의 변두리에 살아가는 ‘흩어진’ 주님의 교회들에게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첫 외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련들 속에서 성도가 온갖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기에 야고보는 그렇게 담대하게 선포했을까요?
그 대답은 우선 3절에 말하는바 ‘앎으로써’(기노스콘데스) 혹은 ‘알기 때문에’라는 분사구절에 숨어 있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사실 시험을 당하는 과정 속에서 그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를 듣습니다. 사방에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처방해줍니다. 더구나 절박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조언들이나 노하우나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들 대부분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처지에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면(2:1-6), 이들의 해결책은 아무래도 ‘돈’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에 귀를 기울였을 법 합니다(1:9-11; 4:1-10). 하지만 만일 그런 해결책이 그들의 시험에 종지부를 찍게 해 주었다면,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야고보는 이 여러 가지 시험들을 겪더라도 정말 큰 기쁨으로 압도할 수 있는 이유와 방법으로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연이어 기록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것’을 처방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1)믿음이 주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이 믿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3절).
2)이와 더불어 이미 그들 안에 인내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3절).
3)이 믿음과 인내는 그 정해진 목적이 그의 ‘온전함’이라는 사실, 또한 이것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4절)
√당신의 믿음은 살아 있다!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을 만나더라도 그 시험이 주는 고통과 아픔, 불안과 좌절을 압도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살아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믿음의 연단’으로 표현합니다.
먼저 ‘연단’(도키미온)이라는 말은 ‘시련’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개역 개정). 그 뜻은 ‘검증’의 의미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원래 ‘도키미온’이라는 말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평소에 쉽게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본질이 테스트와 같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 진정성이 비로소 드러나 보다 온전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고후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인정된 자로’(도키미온), ‘옳다 인정함을 받는’(도키모스)이라고 한 예들과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서 흔들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그의 속에 있는 믿음이 비로소 그 진위(眞僞)를 드러내는 기회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를 어떤 화학용액에 집어넣으면 그 용액의 성질이 그 시험지에 색깔로 나타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평소에는 모릅니다. 정말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험을 만나면 다 드러납니다.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깨어지면 그 그릇 안에 담긴 것이 쏟아집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이 깨어지면 향유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 안에 먼지나 잡동사니뿐이었다면 그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불신앙으로 반응합니다. 때로는 분과 노와 절망과 허무와 억울함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한(恨)이 많은 세상입니다. 반면에 성도도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처음에는 비슷한 것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한숨, 원망, 비난, 절망, 억울함, 좌절 … 하지만 결국 성도는 놀랍게도 그 밑바닥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부인할 수 없는 소망의 근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드디어 하나님을 진실로 찾게 됩니다. 그렇게 가까이 계신 줄 몰랐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편 22편을 보십시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편을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 절망과 좌절, 비참의 탄식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곧 간절한 기도가 터집니다(19절).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찬송이 터집니다(22절). 그런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서, 그동안 입으로 고백했지만 막연했던 믿음이 드디어 그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며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놀라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이 모든 시련의 힘겨움보다 더 가슴 벅찬 발견이 있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감추어져 있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됩니다. 그 보화를 모르고 지나갔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 가운데서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함께 역사하시며, 지금 여기서 적극적으로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검증받게 됩니다. 그는 이미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매 순간 십자가의 능력으로 해방하시고 부활 생명의 능력으로 살려내시는 살아 있는 역사를, 그 믿음을 통해 실제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누리게 됩니다. 시험의 고난을 이겨낼 비밀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련과 연단의 과정은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됩니다.
√솟아나는 인내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연단 과정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개역 개정)라는 표현은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인내에 대해 ‘역사’(에르곤)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내의 ‘역사’을 표현해주어야 본문의 강조점을 전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인내’의 강조점이 인내하는 사람에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내 자체의 ‘역사’에 우선적인 강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보자면 성도에게 있는 ‘믿음’은 시험을 만나서 드디어 진가를 드러내고 또한 인내를 발휘하여 견딜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한 그 인내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시험을 만났을 때, 정해진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기나긴 과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이 기나긴 인내가 그 작용을 모두 마친 후에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온전함’이란 신자의 바깥에 놓인 어떤 법조문과 같은 외적 기준을 달성하는 것에서 오는 무엇이 아닙니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기록을 갱신해야 할 때, 예를 들어 2m 80에 막대기를 걸어놓고 그 기준을 뛰어 넘기 위해 뛰고 또 뛰라는 식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완벽함, 온전함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함은 기나긴 과정을 전제합니다. 말하자면, 인내는 당신의 허락 없이 당신을 이미 전해진 당신의 온전함을 향해 끌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堅忍)’인데, 이런 인내는 신자가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과 의지만으로 하는 인내, 소위 영웅적인 인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대장장이가 쓸모없는 고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었다가 두드리고 또 찬물에 넣었다가 다시 용광로에 넣고 또 두드리고 하는 긴 과정을 거쳐 어떤 물건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 고철이 모든 과정을 지나가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대장장이가 결정한 목적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예는 씨앗이 땅에 심기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씨앗 안에는 이미 그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그 안에 유전인자(DNA) 곧 정해진 목적, 온전한 상태에 대한 그림과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시간과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화, 변모되어 서서히 그 모습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4절에서 말하는 인내란, 말하자면 이런 생명의 시작과 완성의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무엇입니다.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또한 지나가는 과정 안에서도 그 온전한 목적의 성취를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기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온전함을 목적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내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분이 주신 인내가 그 속에서 솟아납니다. 그래서 인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서의 인내에 뒤따르는 것이 성도의 인내입니다. 그분이 주신 인내가 그 속에서 솟아납니다. 그래서 인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서의 인내에 뒤따르는 것이 성도의 인내입니다.
√온전함이라는 선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자기가 정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온전함이라는 목적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드디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믿어지십니까? 아마도 모두 다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온전함’을 정하셨고, 지금 이 불가마 속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믿기에는 너무나 좋은, 그래서 잘 믿어지지 않는 소식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겉으로는 뭐라 하든지, 깊은 속에서는 자기에게 그렇게 좋고, 그렇게 기쁜 소식이 주어질 리 없다고 믿습니다. 그만큼 가난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다시 가르쳐만 했습니다.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장 큰 병 가운데 하나는, 비록 모든 것을 받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삶이 기쁠 리가 만무합니다. 모든 것을 받고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더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야고보가 지적하는 성도의 문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것’의 온전함을 계획하셨습니다! 내 속에서 인내가 솟아나고 그 인내를 따라 인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변할 수 없는 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힘들지만 막을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다시 4절로 돌아와 봅시다.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의 결과, 곧 인내의 작용이 그 목적지까지 이르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온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텔레이오이)하다는 것은 원래의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구비하여’(홀로클레로이)는 그 최종적인 원숙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잠재되었던 모든 모습들이 비로소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조금도 ‘부족함’(레이포메노이)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부족함’은 빠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잉태된 아이가 태내에서 오랜 성장 기간을 거처 이목구비를 갖춘 후 마침내 건강한 신생아로 태어나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처음 임신했을 때 초음파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잘 분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윤곽이 뚜렷해지다가 출산일이 되면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시험 가운데서 자유와 능력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늘 세상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모든 시험의 초점은 우리 성도들이 과연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골머리를 앓는 세상이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것도,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도, 혹은 이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세상을 다스릴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담도,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오직 순종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온전해지는 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일에 온 세상이 달려 있습니다. 시험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여러분의 관점으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이 목표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도 그것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고 이에 동의하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여러 가지 믿음의 시련을 맞이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살아 있는 믿음, 솟아나는 인내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