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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Shelly Kagan. 1956~
「이 책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 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tfka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원한 삶은 가능한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이런 철학적 질문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연결된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영생은 좋은 것인가? 자살은 합리적 선택인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책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다소 무겁고 어둡게 흘러갈 수 있는 주제를 토크쇼 사회자에 비견되는 특유의 유머감각과 입담으로 흥미롭게 풀어간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방대한 철학사를 다루면서도 난해한 철학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만의 교수법은 대중철학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강의할 때 항상 책상 위에 올라간다고 해서 책상 교수님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의 이 죽음 강의는, 예일대학교 지식공유 프로젝트인 열린 예일 강좌의 대표 강의로서 미국과 영국 및 유럽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에도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롤로그]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에 관하여
이 책은 내가 예일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진행해온 죽음에 대한 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책이자 삶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철학에 관한 책이다. 이 말은 죽음에 관한 기존 책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은 ~~~ 우선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다뤄볼 것이다. 가령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이란 게 정말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가령 내가 오늘밤을 무사히 보내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좀 더 쉽게 질문을 바꿔보자. 내일 오후에 아마도 누군가가 지금 이 컴퓨터를 갖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이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을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동일인물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이 질문은 시간과 관련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죽음과 삶 그리고 영생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영혼, 죽음의 본질, 영생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들을 다룬다. 그리고 다음으로 가치문제로 넘어가서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은 나쁜 것일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살에 관한 문제를 다뤄볼 것이다.
제1장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사후의 삶이 있을까?, 죽고 나서도 나라고 하는 존재가 계속 남아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적인 두 가지 질문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사후의 삶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후의 삶이란 무엇인가? ~~~죽고 나서도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가령 어떤 물건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정체성의 통시적 지속성이란 무슨 의미인가?
죽고 나서도 내가 계속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와 사후의 삶이라고 하는 개념 그리고 구체적으로 시간에 관한 개인의 정체성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사후의 삶이 존재할까? 그런데 이질문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 죽는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답은 자명하다. 당연히 아니오 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묻는 것은 삶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삶이 남아 있는 것인지를 묻는 자기 모순적 질문이다. 그러므로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다. 이는 마치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아직 접시에 음식이 남아 있는지 묻는 셈이다.
첫 번째 관점은 우리는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라고 하는 두 가지 기본적 요소로 이뤄져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두 번째 관점은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다. 이는 인간은 한 가지 기본요소로만 이뤄져 있다고 말한다. 즉 육체만이 존재한다. ~~~일원론에서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곧 육체다. 이런 두 번째 관점은 우리는 물리주의라고 부른다. 인간은 육체에 불과하며,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이와는 다른 세 번째 관점도 가능하다. 영혼은 없고 육체만 존재하는 일원론이 있다면, 반대로 육체는 없고 영혼만 존재하는 일원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음, 비물질적인 정신 또는 영혼만이 존재하고, 물질적 존재는 인식론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기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뿐이다. 여기서 물질적 존재는 마음이 품고 있는 관념 또는 이와 비슷한 것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편의적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물리적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일종의 환상이자 형이상학적 착각일 뿐이다. 철학에서 이런 관점을 유심론(idealism)이라고 부른다.
▪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진 인간 -이원론
이원론에서 육체와 영혼은 서로 작용 한다. 한편에서 영혼은 육체를 조종하고 명령을 내린다.
영혼은 몸을 조종하고, 몸은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인 이원론에서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강력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육체와 영혼은 엄밀히 서로 다른 존재다.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 정확한 위치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에서 사람들은 영혼이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영혼이 몸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몸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한 영혼은 육체에 머무른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은 육체를 떠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가끔 일어난다. ~~~만약 유체이탈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영혼은 몸속의 특정한 장소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시간에 따라 다양한 장소들을 돌아다닐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영혼에게 위치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각에 의해 조작된 환상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환상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영혼이란 어떤 공간적 위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제2장
영혼은 존재하는가
▪ 영혼의 존재 증명
이원론자는 육체의 존재는 물론 영혼의 존재도 인정한다. 물리주의자는 육체만 인정한다. 그렇다면 육체는 두 관점의 공통분모다. 그리고 두 관점이 갈라지는 지점에 영혼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의자, 탁자, 새, 나무와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감을 통해 우리는 이런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은 다르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감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혼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인식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의 눈으로 영혼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자, 이제 여러분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마음의 눈을 열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어보자. 지금 내 안에 영혼이 보이는가? 아마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면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은 아니다.
▪ 최선의 방법으로 추론
컴퓨터는 욕망과 목표도 갖고 있으며, 심지어 합리적인 판단까지 한다. 물론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체스 프로그램은 오직 체스만 둘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내 컴퓨터 보다 또는 보다 강력한 슈퍼컴퓨터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동시에 구동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컴퓨터가 믿음과 욕망을 갖고, 생각 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차원에서 모든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컴퓨터에 대해서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여기서 이원론자라면 아마도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를 인간처럼 욕망과 믿음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려고 하더라도 컴퓨터는 절대로 진정한 욕망과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 어떤 순수한 물질적인 존재도 욕망과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컴퓨터 역시 그런 점에서 욕망과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컴퓨터도 믿음과 욕망을 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확실한 증거는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말해서 욕망과 감정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가령 체스에서 퀸을 공격해 상대 진영을 허물어뜨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면 흥분된다.. 반면 자신의 말이 위험에 처하면 걱정이 된다. 그것은 애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심장이 뛰고, 시험을 망치거나 직장에서 나쁜 업무평가를 받았을 때 가슴이 철석 내려앉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욕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순수하게 행동적인 측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순수하게 행동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는 정신적 측면이 존재한다. 이런 측면은 체스에서 이기기 위해 합리적인 판단으로 말을 움직이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주변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거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욕망의 이런 측면은 기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음으로 욕망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감성적 측면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기계는 가질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은 분명히 갖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계가 생각할 수 없고 정신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감성적인 측면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욕망의 행동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
행동적 측면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 욕망,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주변 환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문제다. 컴퓨터와 로봇도 이런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은 다르다. 컴퓨터가 정말로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는 사실 의문스럽다. 로봇도 사랑할 수 있을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체스 게임을 하는 컴퓨터는 있지만,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기계가 지금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앞으로 감정을 느끼는 로봇을 개발할 수 있을까?
▪ 영혼은 체험할 수 있는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또는 수술 중 사망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죽었다가 살아 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죽었던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사실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례들도 종종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개인이나 문화권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육체를 떠나 있었다고 말한다. 가령 공중에서 떠다니면서 수술대 위에 놓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수술실을 벗어나서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그 끝에서 눈부신 빛을 본다. 마지막 순간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성자들을 보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서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다시 육체로 이끌려 돌아와 병상에서 눈을 뜬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임사체험의 시나리오다.
임사체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엄격하게 말해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경계상에서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고 왔다. 국경 너머로 다른 세상을 본 것이다. 그들의 증언이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사무실에 있기 때문에 복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지금 복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저 창문 너머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소위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임사체험에 관한 주장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벽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물리주의자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원론자들은 강령술 또한 영혼에 의지해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영매가 삼촌의 영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라고 말 한다.
제3장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할 수 있는가
제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 소크라테스의 죽음
제1장에서 이원론의 개념을 소개하는 동안 나는 육체와 다른 비물질적인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사실이 영혼의 불멸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영혼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육체가 사망할 때 영혼도 얼마든지 함께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육체적 죽음 뒤에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있는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근거는 무엇일까?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인 <파이돈>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목으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소크라테스는 동료나 제자들과 함께 철학을 논했다. 플라톤은 그 모임의 일원이었다. 모임을 통해 성장한 플라톤은 이후 자신의 철학적 저작들을 썼지만, 정작 본인은 그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실제로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으면서 어떤 대목이 플라톤 자신의 생각이고 어떤 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플라톤 자신의 관점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중니공의 입을 빌려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모든 주장들은 플라톤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자.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료들과 함께 영혼불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파이돈>에서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육체가 죽었어도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이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영혼의 불멸성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다. <파이돈>에서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옹호하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을 설득한다.
▪플라톤의 완벽한 왕국
<파이돈>의 배경이 된 날은 사형 집행일이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근거로 그런 믿음을 가졌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이제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해보자.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다. 그러나 플라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를 상상할 수는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체도 어떤 측면에서는 아름답다. 즉 부분적으로 아름답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면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다양한 차원에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와는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 역시 다양한 수준으로 정의롭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 질서도, 그리고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정의로울 수는 없다. 완벽한 정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일상적, 경험적 세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경험적 세상에서 정의는 다양한 수준으로 공유되고 존재한다. 완벽한 정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정의는 분명히 존재하며, 특정한 한 가지 또는 다른 한 가지 측면에서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나 개인을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그런 존재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한 정의는 일상생활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상상할 수 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마음속으로 완벽한 원형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도 완벽하게 둥글지는 않다. 좀 더 또는 좀 덜 둥근 원들만이 존재한다. 이처럼 일상적, 경험적 차원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완벽한 원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아름다움, 정의, 완벽한 원과 같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다양한 비물질적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원하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든지 다양한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를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가 필요햊니다. 플라톤은 에이도스eid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이 그리스 단어는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데아(idea)로 번역된다. 하지만 영어로 이데아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는 의미로, 우리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외적인 존재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데아라는 표현 대신 형상( for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측정 가능한 일상적인 사물들과는 다른 이상적인 원형 또는 기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존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이 논의에서 핵심은 형상이란 완벽한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형상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다. 가령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세상의 일부가 아니다. 일반적, 일상적인 존재들은 다양한 정도로 형상을 공유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완벽한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한 그 자체의 일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오로지 마음만이 플라톤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때문에 우리가 혼란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플라톤의 형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육체적 욕망들 모두가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상적 존재에 집중하려면 욕망을 외면하고 육체로부터 가능한 멀리 떠나 있으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해 평생 노력했고 그 결과 형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찾아와 몸과 마음이 분리될 때 “영혼은 육체적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천국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갈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아직까지도 플라톤의 형상이 존재하는 초월적 세계인 플라톤의 천국에 대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죽음 뒤에 정신적 영혼은 플라톤의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며, 거기서 형상과 직접 작용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한 가지 사례를 통해 형상의 개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2+3=5라고 하는 간단한 등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2+3=5라고 할 때 우리는 모리로 이해할 수 있는 숫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숫자란 무엇인가? 숫자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념이다. 어느 날<내셔널 지오그라픽>을 읽고 있는데 “드디어 고고학자들이 숫자를 발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게 아니다. 다시 말해 2라는 숫자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지 2라고 하는 숫자는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으며 실제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존재다. 이렇듯 수학에 관해서만큼은 우리 대부분이 플라톤주의자들이다.
플라톤은 형상의 개념을 더 넓게 확장해간다. 수학만이 형상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정의도 형상이 될 수 있다. 세상에는 정의와 부조리가 혼재한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정의나 부조리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완벽한 정의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한 정의란 또 다른 추상적인 실체, 즉 플라톤의 형상이다. 그밖에 선함, 건강,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들 모두 플라톤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란 형이상학에 대한 깊이 있는 관점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형상의 세계이자, 일상적이고 익숙한 물리적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왕국을 말한다. 일상적인 세상의 일부는 아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형상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다. 단,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육체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의 육체는 오감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하고, 그마저도 물리적 세상에만 국한된다. 우리의 이성, 즉 영혼만이 플라톤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일상적인 물리적 실체와 형상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플라톤의 형상이 경험적 세상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차이점은 또 있다. 일상적인 물체와는 달리 형상에서는 완벽함이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다. 가령 둥글게 생긴 물체는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지만, 원형 그 자체는 파괴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원형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마찬가지로 17마리의 거위들은 그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하지만, 17이라는 숫자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 홀수고 16보다 1이 많은 수다. 16+1=17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다. 우리는 모든 향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반대로 물리적 실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았다가 커지기도 하고 추했다가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오리새끼도 못난이에서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했다. 물론 결국에는 죽어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정의도 선함도 마찬가지다. 경험적 세상의 존재들과는 달리 형상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완벽한 플라톤 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볼 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은 광란으로 가득한 모순 덩어리다. ~~~플라톤은 이를 꿈에 비유해 설명한다.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리는 그 꿈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깨어나서 생각해보면 하나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형상과 형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친다.
형상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플라톤은 이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해야만 하는 근거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할 때 육체적 죽음 이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될 것으로 봤다.
플라톤은 육체로부터 멀어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형상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진실을 깨닫고 훈련을 계속해 육체라는 욕망 덩어리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즉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은 플라톤의 천국으로 올라가 신과 불멸의 영혼들을 만나고 형상과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살아가는 동안 육체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다시 말해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간다면,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다른 육체로 환생한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돼지 원숭이 또는 개미와 같은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 불멸의 영혼 -형상의 본질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영혼이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좀 더 분명히 이야기하면, 영혼이 불멸의 존재라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으로부터 소크라테스의 다양한 답변이 이어진다. ~~~그 기본적인 개념은 간단하다. 정의,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형상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정의 그 자체, 3이라고 하는 숫자 자체, 선함 그 자체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의 이성은 그 자체로 비물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형상이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육체와 같은 물리적 존재는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성은 형상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비물질적인 존재다. 즉, 이성은 영혼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이런 믿음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지 못한다. 비물질적인 형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성이 비물질적인 영혼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령 옳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형상이 갖고 있는 불멸성의 본질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우리는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다.
1)형상은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다
2)이성은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3)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만이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4)그러므로 이성은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다
5)이성이 비물질적인 존재라는 것은 곧 영혼이라는 의미다.
6)그러므로 영혼은 존재한다.
플라톤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영원한 형상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존재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존재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여 첫 번째와 두 번째 명제를 참으로 인정하고 여기에 세 번째 명제를 추가하면 영혼은 불멸의 존재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명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 번째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할 만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어떤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돼야 한다는 말은 대단히 유명한 명제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생물학자는 고양이를 연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명제에 따른다면 고양이를 알기 위해서 생물학자는 스스로 고양이가 돼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소멸하지 않는 존재-영혼의 단순성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동료와 제자들이 지적하고 잇는 것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서 영원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영혼도 그냥 사라져버릴지 모를 일이다. 영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을지 모른다.
가령 지금 내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보자. 나는 이 종이를 찢어서 없애버릴 수 있다. 지금 찢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종이가 소멸 가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잇는 걸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분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1) 조합물만이 소멸 가능하다
2) 변하는 것만이 조합물이다
3)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
4) 보이지 않는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
5)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6)그러므로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다섯 번 째 명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소멸 가능하지 않고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혼은 소멸 가능하지 않은 존재, 즉 불멸의 존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정신, 육체가 만들어내는 화음
제5장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 의심스러운 영혼의 존재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을 제시했다. 우리는 그의 주장들이 진지하게 다뤄볼 가치가 있지만 설득력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살펴봤다. ~~~뭔가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 의무는 없다.
강조하지만 나는 영혼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영혼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혼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 정체성과 시공간 벌레
내가 죽음 뒤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내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목요일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머리숱이 많고 허리가 곧고 구렛나룻이 있다. 그러나 2055년에 존재하는 그 사람은 대머리에 허리가 굽었고 구렛나룻이 없다. 그런데 두 사람을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서는 곤란하다. 나는 2055년도에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래의 사람이 대머리인데 지금의 나는 머리숱이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영혼 관점에서의 정체성
제6장
나의 영혼인가 육체인가 인격인가
제7장
죽음의 본질에 관하여
여러분의 몸은 지금 여러 가지 기능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음식을 소화시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심장을 뛰게 하고, 숨을 쉰다. 이런 기능들을 신체 기능(Body Function), 줄여서 B 기능이라고 하자. 반면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도 수행한다. 이를 인지 기능(Person Function)줄여서 P기능이라고 하자. 간단하게 설명하면 육체의 기능이 멈출 때 나는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능이란 어떤 기능을 의미하는가? B기능? P 기능? 아니면 둘 다? ~~~이 질문은 애매모호한 그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P 기능과 B기능은 동시에 멈추기 때문이다.
▪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B 기능이 아니라 P기능이 멈추는 시점으로 정의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내 몸이 P 기능을 하고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내 육체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P기능을 하지 못하면, 나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죽었다. 이는 인격 관점을 추구할 때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가령 어젯밤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새벽 3시 20분, 여러분은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기억을 회상하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즉, 어떤 P 기능도 수행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육체가 P기능을 멈추는 순간을 죽음의 시점으로 정의한다면, 여러분은 어젯밤 새벽 3시 20분에 죽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다. 게다가 순수한 잠과 꿈 사이를 계속해서 오갔다면, 여러분은 밤새 죽었다가 살아나고 살아났다가 죽기를 반복했다는 말이다. ~~~일시적인 중단이라면 P기능이 멈췄다고 해도 죽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어젯밤 2시부터 2시 30분까지 꿈 없는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해보자. 그리고 안타깝게도 2시 30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앞서 설명에 따르면 그는 2시에 죽은 셈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된다. ~~~죽음이란 P 기능이 영구히 중단된 상태라는 정의는 적절치 않다.
다른 사례도 있다. 가령 P 기능이 앞으로 재개될 상황에서도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멈 훗날 심판의 날이 와서 신이 죽은 자들을 부활시킨다고 해보자. 여기서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여러분이 살았을 당시와 동일한 인격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죽었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부활을 맞이해 P 기능을 다시 재개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수백 수 천년동안 P기능이 멈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영구적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다만 꿈 없는 수면 사례보다 그 기간이 좀 더 길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모두 사실은 살아 있었던 셈이 된다.
또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좀 더 납득할 만한 설명인 듯하다. 잠을 자는 동안 P기능이 중단됐다고 하더라도 P기능이 가능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능력은 항상 발현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P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ㄴ는다고 해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P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P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인지 조직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한번 파괴된 조직은 더 이상 살아나지 않는다.
제8장
죽음에 관한 두 가지 놀라운 주장
▪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즉 의식이 있고 생각을 하는 존재로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우선 자신이 죽어 있는 상태를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다. 죽어 있는 나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주장은 어떤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상상할 수 없다면, 그런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9장
죽음은 나쁜 것인가
▪ 죽음이 앗아가는 것들 - 박탈이론
만약 죽음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든지 죽음을 나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면 죽고 나서 자신의 영혼에 벌어질 일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천국에 가게 될까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까? 죽은 다음에 자신의 여혼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해 걱정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죽음은 내게 그 어떤 악도 될 수 없다.
왜 죽음이 나쁜가?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다. 살아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은 오늘날 박탈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나는 박탈 이론을 타당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죽음은 언제 나쁜가 -에피쿠로스의 입장
에피쿠로스가 쓴 이 글은 20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는 인류에게 죽음에 관한 혼란스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a) 우리가 존재할 때 뭔가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b) 죽고 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c)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존재 요건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남아 있는가? 우선 존재 요건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받고, 시력을 잃고, 장애를 입고, 실직을 하는 등의 불행한 사건은 당연히 우리가 존재할 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사례에서 뭔가가 나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즉, 모든 사례에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어떤 특수한 사례에서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고서도 뭔가가 우리에게 나쁠 수 있다.
▪ 내가 없던 과거, 내가 없을 미래 -루크레티우스의 경우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에 대한 예상이 암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믿는다. 왜? 죽고 나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탈이론이 설명하는 것처럼, 살아 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모든 축복들을 죽고 나면 절대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역시 이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난 이후의 기간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시간은 아니다. 즉, 살아있다면 삶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 유일한 시간은 아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간이다. 내가 죽고 나서도 영겁의 시간은 이어질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묻는다.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겁의 세월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죽은 이후에 무한한 비존재의 상태가 이어진다고 해서 우울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결론 내리고 있다.
한 가지 보편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다. 내가 죽은 이후의 시간을 생각해보자. 죽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내 삶을 모두 앗아간다. 물론 생전의 기간 동안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을 빼앗겼던 것은 아니다.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빼앗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출생 이전의 비존재 기간은 상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사후 기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후 기간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생전 기간과는 달리 사후 기간은 상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생전 기간과 달리 사후 기간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관련 있다는 설명은 옳다. 결국 우리가 상실이라고 말할 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생전 기간 동안 우리는 당연히 상실을 경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생전 기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삶이란 걸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상실할 것이 없다. 물론 출생 이전동안 나는 삶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갖게 될 예정이었다. 즉 미래에 언젠가 갖게 될 삶을 아직까지는 갖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후 기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해 나는 삶을 상실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후 기간은 생전 기간과 갈라선다. 사후 기간은 미래에 삶을 갖게 될 그런 상태가 아니다.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그런데 미래에 갖게 될 뭔가를 현재에 갖고 있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용어는 없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실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태를 쉬모스(schmoss)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로 하자.
사후 기간 동안 상실은 있으나 쉬모스는 없다. 반면 생전 기간에는 쉬모스는 있으나 상실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철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쉬모스 보다 상실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 지금은 갖고 잇지 않지만 앞으로 갖게 될 상태 보다 갖고 있다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다.
비존재의 두 기간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현대철학자 토모스 네이글이 제안한 것이다. 네이글은 더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로 논의를 시작한다. 가령 내가 80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가정 해보자. 그런데 그때 내가 죽지 않았더라면 90t라 또는 100살까지 살 수 잇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80살에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시기를 뒤로 미뤄봄으로써 더욱 오래 사는 상황을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사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내게 충분히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이 찾아오는 시기를 더 늦출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네이글은 생전 기간의 비존재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더 일찍 태어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출생을 앞당겨서 더 오래 사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가령 나는 1954년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1944년이 아니라 1954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내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네이글은 내가 더 일찍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1944년에 태어나지 않은 게 나쁜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흥미진진한 설명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올바른 답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인공수정 병원이 있다고 해보자. 그 병원에는 수많은 정자와 난자들이 냉동 보관돼 있다. 거기서 특정한 한 쌍의 정자와 난자를 2025년에 결합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면 하나의 고유한 인간이 탄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례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일찍 태어나게 만드는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 병원이 그보다 10년 전에 동일한 wdj자와 난자를 수정시켰더라면 자신은 10년 전에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잇을 것이다. 이 사례에서 1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은 그의 형제가 아니라 바로 그다. 동일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동일한 사람이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이 10년 전에 인공수정을 시도했더라면 그는 분명 10년 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이 말이 옳다면 더 일찍 태어나는 가능성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네이글의 설명은 틀린 것이다.
이제 또 다른 대안으로 넘어가보자. 현대철학자인 프레드 펠드먼이 제시한 것이다. 내가 더 나중에 죽는다면 이라고 상상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련 80살이 되는 2034년에 내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거리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때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지 않ㄴ느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나는 80살이 아니라 85세나 90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이다. 즉, 더 이후에 죽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더욱 오래 이어지는 삶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 태어났더라면 이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펠트먼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더 오래 이어지는 삶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출발점을 앞당김으로써 전체 인생을 앞으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여러분이 1800년에 태어났다고 상상해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200살이 넘었겠군. 대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마 1860년이나 1870년 즈음에 이미 세상을 떠났을 거야.
더 일찍 태어나는 상황을 상상할 때, 우리는 더 길어진 삶이 아니라 단지 더 이른 삶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박탈이론에 따르면 삶이 더 일찍 시작한다고 해서 좋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찍 태어나지 않았다고 슬퍼할 만한 이유도 없다. 반면 죽음의 시점을 뒤로 미루는 상황을 상상하는 건 다르다. 그것은 동일한 기간의 삶을 뒤로 평행 이동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펠드먼은 생존의 비존재 기간이 아니라 사후 비존재 기간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시전이 더 이후에 찾아온다고 상상할 때 우리는 더욱 길어진, 그래서 더 많은 축복을 포함하는 삶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더 이른 출생을 상상하는 것은 이런 것과 상관없다. 단지 시작점이 다른 삶을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10장
영원한 삶에 관하여
▪ 영생이라는 형벌
삶의 모든 축복을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생이 아닐까? 박탈 이론을 기반으로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삶은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다음 주에 트럭이 치어 죽는다고 하자. 박탈이론을 기반으로 할 때, 트럭에 치지 않았더라면 20년이나 30년을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많은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80살에 암으로 죽는다면? 그것 또한 나쁜 일이다. 암 때문에 80살에 죽지 않았더라면, 10년이나 20년을 더 살 수 있었을 테고, 그동안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장마비로 100살에 죽는다면? 마찬가지로 그것도 내게 나쁜 일이다. 혹시 110살까지 살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첫째, 박탈이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영생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둘째, 모순의 문제는 제쳐두고, 영생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박탈이론은 삶의 모든 축복을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삶이 주는 축복이 하나도 없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죽음은 여러분에게서 그 어떤 좋은 것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 말은 곧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박탈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얻고 있어야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앞으로 펼쳐질 삶이 전체적으로 좋은 것일 때만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영원히 살고 싶은가
제11장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 본질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
삶에서 계속 좋은 것들을 얻고 있다면, 죽음이 그런 축복 모두를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전체적인 자원에서 삶이 좋은 것들을 전혀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면, 다시 말해 삶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거라면, 그때 죽음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라 하겠다. 좋은 것으로 가득한 삶을 앗아갈 때라야만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어두운 미래만을 빼앗아간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뭔가가 우리의 삶 또는 삶의 일부를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무엇이 도덕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주는지 묻고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이 한 인간의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주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으로부터 나는 많은 축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삶에서 얻어야 할 가치 있는 것들일까? 가령 직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즐거움, 돈, 섹스, 초콜릿, 아이스크림, 에어컨도 그럴 가치가 있다. 반면 피해야 할 것들엔 무엇이 있을까? 시력을 잃는 것, 강도를 당하는 것, 고통, 해고, 전쟁, 질병 등이 그럴 것이다.
좋은 것과 행복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도구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것 자체로 가져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것들이 그것 자체로 가져야 할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답변은 쾌락이다. 거꾸로 그 자체로 피해야 할 것은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다.
그럼 여기서 과감한 가정을 해보자. 쾌락과 고통이 본질적인 선악의 유일한 사례라고 가정해보자. 즉,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유일한 요소이고,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쁜 유일한 요소라고 해보자. 바로 이런 관점을 쾌락주의라고 한다. ~~~쾌락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삶이 앞으로 가져다 줄 것이 전체적으로 나쁜 것일 때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모든 쾌락을 더하고 모든 고통을 뺀 최종 합계가 플러스로 나오면 그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총합이 높으면 높을수록 인생은 더 가치 있다. 반면 총합이 마이너스로 나왔다면 그 삶은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삶보다 죽음이 더 나을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택한다면 쾌락도 없고 고통도 없는 완전한 제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쾌락주의자들의 설명이다.
쾌락주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쾌락을 경험했는지 또는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오직 미래다. 천국의 문 앞에 서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내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들 중 어느 것이 최고의 미래를 선사하고 어느 것이 쾌락과 고통의 차원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오늘밤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예상해볼 수 있다. 집에서 원고 작업을 할까? 일을 하는 것보다 파티를 즐기러 나갈까?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인생 전체뿐 아니라 삶의 특정 기간에 대해서도 평가 작업을 할 수 있다.쾌락조의를 받아들이면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문제가 있다. 쾌락조의를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쾌락주의는 매우 보편적이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도 인기가 높다.
▪ 경험 기계에 연결된 삶
그렇다면 쾌락주의를 포기해야 할까? ~~~하버드대에서 오랫동안 강의했던 로버트 노직이 제기한 실험을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날 과학자들이 뇌 자극을 통해 쾌락중추를 활성화시키는 단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완벽하고 현실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세련된 장치를 개발했다고 해보자. ~~~~이제 경험 기계에 연결돼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해보자. 우리가 원하는 최고의 경험들을 데이터파일로 다운로드해 마음대로 경험해볼 수 있다고 하자. 가령 위대한 소설을 쓰는 경험을 선택했다면 여러분은 이제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줄거리를 고치고, 원고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초고 파일을 컴퓨터에서 몽땅 지워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는 암을 정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경험을 선택했다고 해보자.
이제 경험기계에 연결돼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해보자. ~~~이제 생각해보자. 여러분은 이런 삶을 원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경험 기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물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독하게 나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경험기계 속의 삶이 분명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경험 기계 속 인생으로부터 여러분은 삶이 가져다주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능한 최고 형태의 삶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뭐가 빠져 있을까? 경험 기계에 뭐가 부족한 걸까? 아마 다양한 답변들이 나올 것이다. 우선 가장 분명한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그릇과 같은 삶 -글스 이론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는 소위 삶의 내용물을 모두 더한 합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가치적 그릇 이론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생각해보자.
12장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거움
▪ 반드시 죽는다 -죽음의 필연성
▪ 얼마나 살지 모른다 - 죽음의 가변성
▪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예측불가능성
▪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편재성
13장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 죽음에 대한 태도 -부정, 인정, 무시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 죽음은 두려운 대상인가
▪ 단 한 번뿐인 삶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전략
거시적 차원의 전략이 적어도 두 가지는 있는 듯하다. 첫째, 목표가 너무 높으면 그만큼 실패의 위험도 높아지는 위험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이 말은 현실적으로 충분히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또한 이 전략은 음식, 우정, 사랑, 섹스등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잇는 즐거움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내일이면 늦으리, 바로 지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전략이다. 우리가 내일까지 살아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현실에서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워 넣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은 그 성취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척 번째 전략의 문제점은 쉽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목표들만 추구하다 보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의 인생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로만 가득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두 번째 전략은 인생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은 실패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 소설을 쓰고, 교향곡을 작곡하고,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이런 목표들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이뤄낼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다. 성공 가능성은 낮지만 그 가치는 높은 성취들로 채워진 인생은, 성공 가능성은 높지만 그만큼 의미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전략일까? 이 질문에 여러분은 세 번째 전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일상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들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한 세 번째 전략이 가능하다. 그리고 세 번째 전략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인생을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어느 정도 중대한 성취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에서 자신이 뭔가를 얻었다는 확실한 성취감을 위해 일상적인 목표들도 적절한 비율로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전략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조합인가?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적인 기반, 즉 삶 속에 가능한 많은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타당한지 따져보고자 한다. 거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 사소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두 가지를 혼합한 형태의 삶 중 어느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든지 간에, 더 많은 것들을 채워 넣을 인생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진실일까?
나는 이미 영생이 우리에게 좋은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상은 물론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축복도 언젠가는 지겨운 게 될 것이다. 때문에 영생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지겨워질 정도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다.
제14장
자살에 관하여
▪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인가
어떤 경우에 자살은 허용 가능한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자살을 적절한 선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도 자살은 비도덕적인 행동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여기서는 합리성의 관점에서 자살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관심 범위를 자신의 이익에 관한 합리적인 선택, 즉 자살을 통해 어떤 이익을 얻고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제한하고자 한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합리성의 개념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자살의 합리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인정할 수 있다.
특정 유형의 사례들은 논의에서 제외해야 한다. 즉 가치 있고 충만한 인생을 t라아가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뜻을 이루기 위해, 또는 동료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특수한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런 사례들은 전형적인 형태의 자살은 아니지만,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언제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첫째,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너무나 비참해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정말로 있을까? 여기서 그런 삶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지금 바로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판단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런 판단을 토대로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관점을 취하게 된다. 즉, 죽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따라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는 게 더 나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죽는 게 더 나은 삶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여기에 우리는 내 특정한 상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자살을 할 경우, 내가 처하게 될 특정한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정한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자살을 통해 내가 이르게 될 비존재 상태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다.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면, 죽은 다음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설명할 수 있는 사후의 상태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셰리 케이건이라는 사람의 첫 번째 상태와 비교할 수 있는 셰리 케이건의 두 번째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상태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상태 또는 상황은 존재를 전제로 한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한가, 우울한가, 지루한가, 신나는가? 이와 같은 특정한 상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먼저 쾌락주의로부터 시작하자. 쾌락주의는 행복이란 쾌락을 높이고 고통을 줄이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 우리는 삶을 끝내는 게 더 좋은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여기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 내가 경험하게 될 인생이 전체적으로 좋은 것일지 아니면 나쁜 것일지에 관한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쾌락 및 고통의 점수를 그 강도와 지속 시간을 고려해서 구할 것이다. 그리고 쾌락의 점수에서 고통의 점수를 빼서 합계를 확인할 것이다. 결과가 플러스로 나온다면 그 삶은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합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삶의 가치는 더 높다. 그러나 마이너스로 나온다면, 즉 앞으로 이어질 삶에서 고통이 쾌락을 압도한다면 그런 삶은 지속할 만한 가치가 없다. 이런 삶을 계속 살아가는 건 나쁜 것이므로 중단하는 편이 낫다. 다시 말해 죽는 게 낫다.
쾌락주의자가 아니라면 행복과 관련해 좀 더 복잡한 이론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총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쾌락과 고통 이외에 다른 요소들도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이어질 삶을 평가하기 위해 내적인 상태는 물론 외적인 선과 악의 문제도 따져봐야 한다.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 앞으로 계속 성공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 혼란과 신체적 장애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인가? 우정과 사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와 이용을 당할 것인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무지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외적인 선과 악의 목록에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 여기서는 생각해보지 않을 것이다. 그 목록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외적, 내적으로 다양한 선과 악을 모두 고려해 총합을 구할 것이다. 그 값이 플러스라면, 즉 미래의 선이 악을 능가한다면 삶은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살아 있는 게 더 낫다. 그러나 마이너스로 나온다면, 즉 악이 선을 능가한다면 그 삶은 지속할 가치가 없다. 죽는 편이 더 낫다.
가령 몸이 점점 쇠약해지다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나 질병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또는 질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삶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모든 질병 사례에서, 죽는 게 더 나은 시점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례에서는 그런 시점이 언젠가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고통과 아픔, 무능력과 비참함으로 가득하게 될 남은 생의 전체 가치는 마이너스로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상태가 악화되면 악화 될수록 죽는 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찾아온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자살이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시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시간과 행복을 축으로 하는 그래프를 갖고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 자살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비도덕적인 행동이다. 합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그런 행동들이 있다. 자살 역시 그 중 하나다. ~~~나는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것이 신의 뜻이며, 그러므로 자살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부득이하게 신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창조주의 뜻이라면, 자살 역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고 주장했다. 만약 자살이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역시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신의 뜻이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결정이 신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 아니면 거스르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고, 따라서 명백하게 잘못된 선택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다.
[에필로그]
이 책을 시작하면서 설명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일련의 신념 체계를 통째 또는 상당 부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영혼이란게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이상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혼이 있으므로 영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죽음은 궁극적인 신비로 남아 있지만,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필요로 하는 가능성으로서 영생을 남겨두고 있다. 죽음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이기에 어떻게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죽음을 떠올릴 때 우리 머릿속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이는 삶과 죽음에 관한 사실에 직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반응이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생은 어리석고 자살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신념 체계가 아무리 보편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믿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놀라운 기계다.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런 기계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기계다. 그리고 그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죽음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축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래 사는 것이 전체적으로 내게 좋은 것인 한 죽음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일찍 찾아온다. 하지만 영생을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거대한 미스터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결코 합리적인 태도라고 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게 얼마나 놀라운 행운인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게 놀라운 행운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게 늘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찾아왔을 때 삶은 무슨 일이 벌어지건 어떤 상황에 처하건 끝까지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할 의무는 아니다. 때로는 포기가 정답일 수도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Review]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할아버지 150살 넘게 사시라는 생일 카드를 보내왔다고 한다. 나름대로 손자는 현재 세계 최고령자가 140살이라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으로 10살을 덤으로 보태어 준 것이다. 옛날 고려시대에는 60살이 되면 죽기로 작정하는 풍습도, 60이라는 숫자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수명을 미리 정하고 거기까지만 살겠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0을 넘어섰다. 그러다 보니 형편에 따라 어떤 이들은 긴 투병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돌보는 가족들에게 경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한다. 팔십 이후에는 병원 도움을 받지 않고 운명에 맡기겠다는 사람도 있고, 감내하는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도 있다. 이렇게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기준은 현실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이에 상응하는 희망과의 상관관계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이렇게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생명을 하나의 물질로 본다는 점에서 사회 윤리에 반하는 것이다.
이 책은 생명 인식에 있어서 물질론 자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룬 책이다. 예일대 철학 교수인 저자가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으로 가르쳤던 내용들을 편집했다고 한다. 종래의 철학에서 다루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의 가치적인 측면에서 생명을 물질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미국 작가 호레이쇼 앨저의 행복과 시간에 대한 그래프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복이 늘어나는 것을 “호레이쇼 앨저” 라고 부르며 반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복이 감소하는 “앨저 호레이쇼”라고 칭한다. 우여곡절이 있는 인생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는 것은 모순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느 지점에 이르면 모든 이들은 행복의 지속적인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그래프에 창안한 저자는 이 책에서 행복지수와 시간의 함수 총합을 행복 합계로 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복 합계가 소진되는 그래프로, 합계가 제로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살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는 시간(오래 사는 것)보다는 오로지 총체적 행복 합계에 있는 것으로 오래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삶에서 계속 좋은 것들을 얻고 있다면, 죽음이 그런 축복 모두를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전체적인 자원에서 삶이 좋은 것들을 전혀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면, 다시 말해 삶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거라면, 그때 죽음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라 하겠다. 좋은 것으로 가득한 삶을 앗아갈 때라야만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어두운 미래만을 빼앗아간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본문)
한편, 영혼 불멸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정신에 뿌리 깊은 사상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 정신에 대한 요소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성경. 전도서3:11)
행복한 삶은 어떤 것인가?
물질론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육체의 즐거움으로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만, 영혼 불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육체의 즐거움에 또 다른 변수가 더해짐으로 더 풍성해질 것이다.
영혼 불멸의 마음은 인간이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지 않더라도 일상의 삶에서 생각과 행동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생명이 끝나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깜깜한 우주의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평소에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서 그리고 현실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본문)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묻는 것은 삶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삶이 남아 있는 것인지를 묻는 자기 모순적 질문이다. 그러므로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다. 이는 마치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아직 접시에 음식이 남아 있는지 묻는 셈이다.”
"쾌락주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쾌락을 경험했는지 또는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오직 미래다. 천국의 문 앞에 서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죽음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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