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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앙의 자세
출 32: 1-6
이사야49:15절 말씀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남자 분들께 묻습니다.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혹 섭섭한 마음이 안드십니까? 이왕이면 아버지가 어찌 그 자식을 잊겠느냐 고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자구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섭섭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원숭이들이 사는 우리 그 바닥에다 전기코일을 깔아놓고는 죽지 않을 만큼의 전기를 통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원숭이 암, 수 한쌍을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펄펄 뛰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는 그 원숭이들의 새끼들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들을 번쩍 들어서 올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머리 위에 올려놓습니다. 자기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새끼들만이라도 살려보겠다고 머리에 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비 원숭이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 어미 원숭이와 새끼원숭이들을 전부 머리에 이고 자기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가 막히게도 수컷 원숭이는 자기 새끼를 발 밑에 갈고 올라서 있는 겁니다. 새끼는 밑에서 죽는다고 아우성인데 아비 원숭이는 자기만 살겠다고 새끼를 발로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 나쁘죠. 뭐가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아비 원숭이가 나쁘고, 두 번째는 뭐 할게 없어 이런 실험을 합니까? 그 실험한 사람이 더 나쁩니다.
지금은 어버이날 또는 어버이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날 또는 어머니주일이었습니다. 양주동 선생께서 작사하신 어머니 마음 이란 노래에도 보면 낳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어머니날은 있어도 아버지날은 없었습니다.
자식 사랑에 대한 것은 어머니가 제일입니다. 이 세상에 모성애보다 더 강하고 희생적인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편이십니다. 시118:6절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렸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지탱해 나가는 힘입니다.
기독교의 찬란한 시작이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로마정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사자 밥으로 던졌습니다. 십자가에 죽이고,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교인들을 박해하던 무리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살이 다 찢어지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은 십자가를 놓지 않았고, 하나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에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 오직 그것이 감격스러워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분명 이 세상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의 힘인 이 세상이라는 거센 물결 앞에 우리는 너무도 작고 연약해 보입니다.
때문에 우리 앞에 다가오는 어려운 일들이나, 때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들, 또한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갖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끊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 어떤 형편에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된 우리들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산에 이르러 거기서 머물게 되는데 출19장에서부터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금방 내려 올 줄 알았던 모세가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19장에서부터 32장까지 시간으로는 40일 동안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지내게 됩니다.
불안해진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을 가져오게 해서 그것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관심있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의 절일을 공포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것이고, 그 우상이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냈다고 망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알아야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힘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섬겨야할 대상은 아닙니다. 우상은 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소원은 들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명을 바치고 내 평생을 바쳐서 섬겨야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이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어린이 동화에 보면 알라딘이라는 아이가 마법의 램프를 얻게 되는데, 램프를 문지르기만 하면 마왕이 나와서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합니다. 마왕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알라딘이 할 수 없는 일을 척척해 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왕이 주인이 아니라 알라딘이 주인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는 능력이 있는 존재, 그러나 그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인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돈 물론 우상입니다. 내가 주인이면서도 그 힘이란 막강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만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격노하셨는지 자기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하나도 남김없이 싹 쓸어버리시겠다고 화를 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답답하셨겠습니까?
부모 된 입장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만큼 속을 썩이는 존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희 집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무조건 야 인마 소리 한번이면 꼼짝 못하게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제법 자랐다구 때로 아이들 눈치보기에 바쁠 때가 있습니다. 저녁 진지를 드시다가 입맛이 없다고 숟가락 놓으시면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일찍 주무신다고 방에 들어가 누우시면 오늘은 왜 또 저러실까, 말도 안하고 계시면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셨나, 하여튼 자식 모시고 살기가 참 어려운 시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잘 자라길 기대하면서 해달라는 것 다 해주고 사랑하고 공을 들이는데, 정작 자녀들은 부모에게 돈 타갈 궁리만 하고, 제멋대로 다닐 궁리만 하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이용해서 오늘은 어떻게 돈을 뜯어다가 오락실에 가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말입니다.
지난 주일도 말씀 드렸습니다 마는 부모가 돈이 많아서 좋은 것도 있지만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경우를 봅니다.
어느 부흥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기억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말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재산 갖고 형제간에 싸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개 정도는 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개들이 형제들끼리 잘 지내다가도 주인이 뼈다귀 하난 던져 주면 그걸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거리고 싸웁니다. 그래서 먹을 것 같고 싸우는 사람들, 재산 싸움하는 형제들을 가리켜 개 정도의 수준은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부부싸움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개들은 절대로 암캐, 수캐가 안싸웁니다.
제가 아는 어는 집사님은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문제는 그 자식들이 한번도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본 일이 없는 자식들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큰일 납니다.
인생을 모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자녀들도 5분 늦게 출근했다고 인상 팍팍 쓰는 상사를 만나봐야 되고, 동기들이 승진할 때 누락되어도 감히 사표를 던지지 못하는 아픔도 맛보아야 인생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퇴근시간 지나도록 일에 파묻혀 일하다가 늦게 퇴근하면 집에서는 마누라가 눈을 삼각형으로 치켜뜨고 이웃집 아무개네 엄마는 이번 여름에 하와이로 바캉스를 간다는데 우리는 그 흔한 온양온천도 못 가느냐고 바가지를 박박 긁는 이런 처절한 삶의 비애를 맛보지 않고는 인생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돈이 없어야 자식이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돈 많이 갖고 계시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그 자식들이 매일 교회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부모는 아직 순서가 안되었습니까? 언제쯤 불러 가실는지 미리 가르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런 기도 드리게 되는 겁니다.
자녀들이 자기 스스로 해야할 일을 모두 돈으로 해결하지 마세요. 스스로 성실하게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때로 자녀들이 사고쳐 놓고는 부모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거든 몹시 화를 내셔도 괜찮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부모는 존경해야될 대상이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서 힘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부모가 더구나 우상도 아닙니다. 단지 부모는 존경하고 섬겨야할 대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마땅히 섬겨야할 대상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잠시 능력을 빌려 달라고 기도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바쳐서 섬겨야할 분이시오, 오직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며, 그 분에 말씀에 복종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살다가 급한 일이 생겨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삼상4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블레셋하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은 4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분석하는 회의가 벌어졌는데 결론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다시 전쟁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승리가 아니라 이번에는 3만명이 전사했습니다. 더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언약궤 없이 나갈 때 4천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을 모시고 즉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는데 3만명이 죽고, 거기에다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때로 정말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과연 계신가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기도했는데 간절히 매달렸는데 응답이 없을 때, 뭐 큰 걸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감기 걸린 것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재벌 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 사는 것만큼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우리 아이를 서울대학에 붙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도 붙여달라고 기도했는데 안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확신이 없습니다. 신앙이 자라질 않습니다. 10년, 20년을 믿어도 졸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늘 맹송맹송하고 기운도 없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믿음의 자세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존재하시는가, 어느 편인가를 자세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시기를 기대하는 한, 보세요! 우리의 기도는 헛것입니다. 절대로 응답되지 않음을 아셔야합니다.
요한 일서5:14절 말씀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전부 들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단 구했으면 이미 얻은 것으로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응답의 근거 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냥 나갈 때는 4천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그래서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갈 때 3만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단지 우상으로 생각하고 그 분의 능력만 빌려달라는 기도는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거 명심해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라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 보너스로 주십니다.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솔로몬에게 하루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해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말씀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응답 받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보너스로 받을 줄 믿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먹고사는 것이 심각한 국가적 문제였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단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왕이 되시면 우리들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고 아무도 몰래 그 자리를 빠져 나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요6:15절은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말씀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침부터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아 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 믿음이 예수를 믿으면 내 욕심이 채워지고, 예수를 믿으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며, 뭐! 이런 것은 아닙니까?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만일 이런 이유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것처럼 우리 그런 신앙도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됨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시간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섭섭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모든 생각과 삶을 드리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출32:1-6
어떤 과수원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과수원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푸른 잎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이제 새싹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나무들을 본 주인의 마음은 대단히 흡족했습니다. 그런데 과수원을 돌아보던 주인이 한 나무 앞에 섰습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은 새로운 싹을 내고 있는데 이 나무는 전혀 싹을 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지를 꺽어보았더니 그 가지는 마른 가지였습니다. 좀더 굵은 가지를 꺽어 보았더니 역시 그 가지도 죽어 있는 가지였습니다. 어쩔수 없어서 그 나무의 뿌리를 캐어보니까 그 나무는 뿌리째 죽어있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를 본 주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봄을 알고 있는데 죽은 나무는 봄을 알고 있지 못하는구나!"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와 산들을 보십시오. 마치 봄을 알고 있는 것 처럼 푸른 싹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푸른 색깔로 변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나무와 산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봄이 된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나무는 봄을 봄으로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생명으로 우리의 삶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를 알아야 되겠습니까? 생명이 있는 나무가 봄을 알고 있듯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은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더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여러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대답을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크게 칭찬을 합니다. 칭찬을 넘어서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한 베드로의 이름위에 교회를 세워주겠다. 천국의 열쇠를 줄 테이니 너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하겠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만류를 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서는 안됩니다."라고 만류했을 때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은 그 이름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주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잘못 알면 그는 사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이 사실을 통하여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생명의 길을 걸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먼저 중요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 내가 신랑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생명이 아닌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 중에 무엇을 바르게 알아야 하나님의 자녀,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는 여러가지의 속성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다. 거룩하신 분이다. 영원하신 부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시는 분이다. 온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이런 여러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 말씀드린 하나님의 속성, 전능성, 거룩성, 영원성, 전지성, 온전히 자유로우신 분, 이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 사람과 이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사람에게서 초월하고 계시는 본성과 연관하여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 짓는 방법을 계시 받는 시간이 지체되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늦게 내려오니까 백성들이 아론을 통하여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금 고리를 다 가져오게 해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일을 벌인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과 좀 구별되어져 있는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4절 하반절에 보면,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다"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하면, 금송아지 우상의 이 신은 너희를 애굽에서 출애굽시킨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섬겼다든지 산이나 바다나 강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우상이 우리를 출애굽시킨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형상화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도저히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백성들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장소의 신으로,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신으로 바꾸어치기 하고 있는 것을 본문의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 이후를 계속해서 읽어보면 21절에 가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는가?" 이 중죄라는 말은 무거운 죄악입니다. 중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무거운 큰 죄를 범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장소에 고정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겁고 큰 죄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 한 것 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있는 모든 우상들은 장소의 신입니다. 무엇인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장소에다가 그 우상을 모셔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소를 성역화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이 장소의 신, 어떤 장소에 고정된 신인데 그 신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우상화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였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금 고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애굽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유랑생활을 하면서 재산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무슨 집이 있었겠습니까? 땅이 있었겠습니까? 무슨 귀한 재산이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아무런 재산이 없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아마 그들에게는 가장 귀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 금고리를 다 모아서 금송아지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니 이 하나님을 우상화하고 하나님을 장소에 고정시키는 하나님으로 만드는데 열심히 있고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고정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항상 계시는 분이시고 살아 계셔서 움직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케 주셨습니다.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의 감동케 해 주셔서 이방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포로에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역사 하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는 어디든지 찾아가시고 어디든지 계셔서 그곳에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계시지 않으면서 이 세계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계시면서 이 세계에 계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역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만 이 말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분명히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계시지 않는 초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초월해 계시면서 이 세계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움직이시는데 살아 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믿음생활하고 주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곳에 고정시키고 있는 잘못된 무거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에게만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 안에만 계시고 교회 밖에는 전혀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만 역사 하셔서 성공하게 하고, 부자 되게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하고, 건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내게만 역사 하시는 하나님, 이기적인 신앙, 하나님을 내게만 고정시키는 신앙,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운동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그 운동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운동경기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편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편에도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언제나 내편의 하나님, 그리고 내게만 고정시켜서 나를 출세시키고, 성공시키고 내가 잘되게 하는 하나님으로만 고정시키면 여기에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내게 역사하십니다. 내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도 역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요나의 생각에는 이 '앗시리아'라는 이방나라 니느웨 도시는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다 멸망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해서 없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의 사람들을 아끼시고,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은혜로 역사 하여서 그들에게 회개를 받으시고 구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요나와 같은 나에게만 역사 하는 고정된 하나님을 장소의 신으로 우상화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받았습니다. 설교하여 3,000명 5,000명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 베드로가 왜 고넬료의 집에 못갔습니까? 고넬료의 집에 가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움직이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유대인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고넬료의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면, 바르게 아는 응답이 새로워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에게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에게 역사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너에게도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예배를 받으시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시지만, 이 세상에도 역사 하여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 나에게도 능력을 주시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움직이는 기차는 가볍다. 그리고 그 움직이는 기차는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멈추어서는 기차는 무겁다. 그리고 그 무거운 기차는 전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때에 하나님은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어떤 영어 번역에는 "I am that I am."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온전한 문장이 아니지요. 또는 "I be"라고 번역한 영어 성경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어떻게 말씀했는가 하면,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런데 이 움직이시고,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왜 가두어놓는 것입니까? 나에게만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여기에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무거운 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바르게 아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나에게만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으로 오늘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거듭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살아 계셔서 움직이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면, 그보다 중요하게 알아야 되는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 넝마주의 촌에서 야학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넝마주의가 많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남의 대문을 두드려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들입니다. 대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결정적인 병이 많이 있었는데, 그 병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폐병입니다. 폐병환자가 애들에게 많았어요. 한번 저의 선배와 함께 야학에 공부를 가르치려 갔는데, 제 선배 되는 분이 강의를 했어요. 한참 강의를 하는 중에 한 아이가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각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어쩔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선배는 빨리 저에게 말했습니다. "물수건을 가져오너라" 그리고는 깨끗하게 닦아주었는데도 계속해서 각혈을 했어요. 그는 각혈을 하고 있는 이 아이를 바로 등에 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택시를 저와 함께 타고는 응급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 응급실에서 나오는 선배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 선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든 모습들은 사랑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허둥대는데 저의 움직임은 사랑의 움직임이 아니라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움직이었지만 그러나 그 선배의 움직임은 하나 하나의 모든 행동이 바로 병원까지 데리고 가는 모습이 이마에 흘리는 땀의 수고가 사랑의 움직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선배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제 가슴에 잊혀지지 않고 기억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움직이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왜 움직이십니까? 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십니까? 왜 어두운 곳에 가셔서 빛을 비추십니까? 그 이유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서 절망적인 자리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아픈 가슴을 가지고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가셔서 꾸중했습니까? 야단을 치셨습니까? 그리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찾아가셔서 고요히 그들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까?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 제가 만약 하나님이었다면 꾸중하고 심하게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내 자식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면, 이세벨도 이기게 해주시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여주십시오 라고 말하느냐" 꾸중하지 않겠어요? 야단치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 성경말씀에 읽어보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번역이 '어루만졌다' '위로하신다' 어루만지시고는 보리떡과 물을 주시면서 "일어나라. 네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움직이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난과 치욕과 고통과 어려운 길을 걸어가시고 드디어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어서 피를 흘리시고 살을 다 쏟으시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저 어두운 세상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오늘도 살아 계셔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구원의 움직임은 언제나 사랑의 길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6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여러분 하나님을 우상화하면 어떻게 되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장소의 신으로 자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놓으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 아십니까? 그 우상화한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먹고 뛰놀고 그리고 춤을 추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방신 앞에서 하는 애굽에서의 이방신들의 잔치와 똑같은 것을 했어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육체적인 쾌락입니다. 자기 만족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고정시켜 놓으면 그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가 만족을 얻고 자기 육체의 유익이 되고,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빈들에 있는 5,000명의 배고픈 것을 보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은 "이들을 돌려보내야 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리고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여 기도하시고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가 역사되어졌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이 되면 의례이 금식도 해보고 특별기도도 해 보고 그리고 적당히 구제도 해 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더 중요한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살아 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오늘도 일으키시는 분이시라면 살아 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나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주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는 결단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험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눈물이 날 수 있습니다. 손해가 날 수 있습니다. 모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결단할 때에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아플 때에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함께 울어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더 기뻐하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여러분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우리의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고통 하는 이웃이 없습니까? 눈물을 흘리는 이웃이 없습니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이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