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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 공예배의 의의 -
(롬12:1-8)
지금까지 예배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각 신행(信行)의 바른 사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바른 자태(姿態)'로 '예배의 의미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예배의 대상(對象)'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존재성과 그 사역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어떤 자태로 예배에 임하여야 하는지를 잘 배워서 깨달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배의 바른 자태를 더 살펴보겠는데 공예배(公禮拜)를 드리고 있는 우리가 공예배를 어떻게 알고 있어야 하며, 또한 어떤 정신을 가지고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배 하나만이라도 바르게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잘 정리하여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일로 나갔으면 합니다.
예배는 중생자의 가장 기본적인 일임
예배는 중생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주의 백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 무엇인가 할 때 예배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했는데 여기의 '봉사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라트류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다', '예배하다', '섬기다', '「하나님께」봉사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는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나 섬기는 것 모두가 예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안에 이미 봉사나 섬기는 것 모두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얻은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적인 일로서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
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예배하
다)"(히12:28).
따라서 새생명을 얻은 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우선 바르게 갖추고 배워가야 하는 신행은 '예배'입니다. 주의 백성 되었을 때 다른 어떤 훌륭한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우선 '예배'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드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성도는 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되겠다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하나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이 하는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는 격이 됩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것이 우선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것을 하려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예배 하나만이라도 바르게 드릴 수 있다면 신자는 그것이 바른 신앙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예배의 절차를 따라서 기도를 한다든지 찬송을 한다든지 헌상을 할 때라든지 또 말씀을 받든지, 이렇게 예배시에 하는 신행들 하나 하나 만이라도 제대로 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이요 그것이 신앙의 든든한 초석이 되어 바른 신앙으로 장성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29-31).
시편 기자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며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대단한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배 하나만이라도 실질을 다 담아서 제대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하에 없는 대단한 일을 할지라도 신자가 예배 하나 제대로 의미를 담아서 드리지 못한다면 그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지 따져 볼 일이요 부허한 일이 아닌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배 하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신자가 다른 그 무엇을 대단하게 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과는 무관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개인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의 성패가 어디에 있는지, 또 교회 공동체 전체의 바른 교회상의 성패는 어디에 있는지는 공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예배는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지만 이것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교회나 성도가 다른 무엇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표시하는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바로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 하나라도 제대로 드리기 위하여 주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민감하게 주의하여 예배에 임하여야 하고 또 끊임없이 배우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더욱 실질을 담아가면서 예배해야 합니다.
공예배는 삶을 집약하여 표하는 시간임
우리가 공교회가 함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 각 사람들의 생활예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집약하여 표하는 시간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개인이 스스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생하여 새생명을 얻은 주의 백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일상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예배를 드려갈 수 있기 때문에 '생활예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의 백성 공동체가 다 함께 모여서 규범으로써 드리는 예배를 '공예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배를 크게 나누면 신자 각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갖는 '생활예배'와 교회가 규범으로 정해 놓고 온 성도가 다 함께 연합하여 한 몸으로 드리는 '공예배'가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 두 가지의 예배를 통하여 일생동안 하나님과 밀접한 교통 가운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예배는 우리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규범으로써 드리는 공예배는 신자 각 사람이 생활예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그 총체(總體)가 집약해서 드리는 시간입니다. 엿새동안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 돌리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그러한 삶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온 교회 총체가 집약해서 표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엿새 동안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적 삶을 살다가 공교회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나와서 그 생활예배를 집약하여 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적 삶으로 일상에서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살지 않은 상태의 그 몸을 가지고 주일에 규범에 의해서만 예배를 드린다면 그가 드리는 그 규범으로써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로써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신자가 예배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서 규범을 좇아서만 예배를 드리면 아무리 정성을 기울이고 제물을 가져다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필요성을 전혀 갖지 못하십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빠져버린 형식만 갖춘 예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의 실질이 없는 규범만의 예배는 바로 실체가 빠진 예배입니다.
실체가 없이 형식만 갖춘 예배의 실례들
성경을 보면 주의 백성들이 실체가 빠진 형식적인 예배를 할 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정해진 규칙을 좇아서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선지자 시대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앞세우시고 백성들에게 많은 책망을 하셨습니다. 제사 제도를 직접 내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그만 두라고 하실 만큼 이스라엘이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곳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1장 11-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의 삶 자체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제사만 드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생활을 하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제사를 드렸고 절기들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 생활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으며 빼먹지 않고 절기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무수히 많은 제물을 드린 것을 보면 그들의 정성은 가히 놀랄만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나 절기들을 싫어하신다고 하며 물리친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손수 제정하신 그 절기와 제사를 그만 두라고 하십니까? 언제는 하라고 하시고서는, 이제 와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싫다고 하며 중지하라고 하십니까? 실체가 빠져버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빠져버린 형식적인 제사에 익숙해 있는 백성들의 제사 행위였기 때문에 싫다고 하셨습니다. 생활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한 사실이 없는 예배는 곧 실체가 없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삶 자체가 하나님과 교통이 있는 제사가 되기를 바라셨고, 그 삶이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절기에 임하여 그 몸으로 제사를 드리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5-17).
이것은 삶 자체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는 악업을 행하고 악행을 하면서도 성회를 성대하게 행하면 되는 줄 아는 백성들을 보는 하나님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예를 갖추어서 제사를 드릴지라도 도무지 기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과 교통하여 갖는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의 예배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행이나 공의가 없는 거짓된 예배, 거룩한 삶의 실질이 빠져버린 예배였기에 먼저 그러한 삶이 있어야 할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실질을 가지고 나와서 집약하여 총체가 표하여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의 품성을 품고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엿새 동안의 삶의 전 영역에서 몸으로 하나니께 예배적인 삶을 살다가 한 시간 규범으로써의 예배 의식에 참여하여 그러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며 내 놓고, 또 부족 된 것을 교정 받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살겠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소원합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예배가 참다운 예배입니다. 중생자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가장 압축하여 집약적으로 표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 의식을 행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엿새 동안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 자는 규범으로써의 예배 의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혹시 참여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하고자 하는 실체를 가진 자가 예배 의식이라는 규범을 행할 때 의미가 있으며 그 가치가 발휘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 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이스라엘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스스로 질문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자책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시정하여야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생활상의 실체를 찾기는커녕 여전히 위선과 이방종교의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종교의 실질(實質)을 갖추어야 할 공의와 사랑과 겸손한 순종이 사라지고 종교형식만 무성했던 것이 당시의 어두운 시대상이었습니다. 신국(神國) 전체가 참으로 어두움에 휩싸여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비단 구약 당시에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4장 7-9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이었고, 그것은 또한 이 시대의 상임을 반영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마15:7-9)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적인 형식에만 치중하는 예배를 행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경배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자타가 인정 할 만큼 종교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헛되이 경배하였습니다. 종교적 외형만 갖추었지 그 마음이 작용한 경배의 실질적 내용이 되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진 삶이라는 것은 거기에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를 보면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는 '종교적인 형식'과 '틀' 속에 갇혀서 행하는 예배이기에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인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 들여서 자신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삶의 행보를 가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종교의 외형을 시정하려고 하는 자를 배타시 하는 현실입니다.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는 있지만, 과연 이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실질을 드러내고 가는지, 실질을 상실하고 가지는 않는지를 점검하면서 예배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신을 반성하는 예배가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가 외적으로 번영하면서 그 본상을 찾아 나아가는 일을 소홀히 하면 언제라도 '형식주의'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공예배는 지체들이 한 몸 됨을 표하는 시간임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는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이 되어 공동으로 드리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상관없이 예배 드릴 수가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경륜하에서는 누구나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교통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개체의 의미는 사라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은 순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살아가는데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부인되고 연합된 존재의 의미를 가장 현실적으로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주께 붙어 있는 지체들과 함께 연합하여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에서입니다. 그래서 주께 연합된 자라면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지만,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지체 의식을 가지고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데는 그만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있는데, 몸 전체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 된 몸, 곧 한 몸을 표하는 것에서 자신의 신앙의 양태와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게 됩니다. 신자는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가장 현실적으로 잘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존재의 의의를 깨닫고 은혜를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실질적으로 확증하고 경험을 할 수 있는 예배가 바로 공교회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각각 따로 따로 흩어져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공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행위의 '집약된 형태'가 바로 '공예배'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예배는 마치 명절이나 아버지의 생신 날에 흩어져 있던 자녀들이 다 함께 모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다 함께 모이는 명절이나 아버지의 생신에 큰 절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 예배하는 것이 바로 공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절만 하려면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해도 되겠지만 구태여 이 날에 하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형제 자매들이 다 함께 모여서 절을 할 때의 의미라는 것은 혼자서 드리는 의미와는 달리 생각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절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형제 자매들이 각각 개체로서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그것도 하나의 신령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로 묶어서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는 그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규범화 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내가 개체의 몸이 아니라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서 온전한 하나의 신령한 몸을 이루어서 드린다는 정신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는 예배는 지체인 내가 예배적인 삶의 전부를 '집약해서 표'하는 시간으로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표할 때 개체들이 각자 떨어져서 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한 몸이 되어 공동으로 표하는 것입니다. 중생자는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공동체의 한 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규범으로써 예배 의식을 행할 때 개체로 떨어져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지체로서 공동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에 '공예배', 그러니까 '공교회적인 예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 시간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행동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예배 순서 가운데서 개인이 대표로 하는 행위들은 공동체 모두가 드리는 행위로써 함께 마음을 기울여서 해야 할 일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움직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공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한 몸으로 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순서 하나 하나가 다 공동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공교회적인 예배의 의식(意識)은 신자들이 모임을 갖는 것이나 또는 집회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목적을 갖고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여 모임을 갖고자 할 때, 그것은 교회원 일부만이 갖는 생각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 전체가 공히 갖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교회 일부만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갖는 생각이요 교회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수요일에 정규적으로 집회를 가질 생각을 갖고 그 일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교회원 모두가 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며, 교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분자 의식을 가지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써 교회가 가진 생각을 펼쳐 나가고 활동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또한 힘써 섬겨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교회의 일부만을 위한 행사인 듯한 모습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공교회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마치 몇 사람을 위한 그런 모임이나 집회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교회가 연합하여 모임을 갖는 성격은 열심 있는 신자나 몇 사람 때문에 가져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속에 들어와 있으나 교회원이 아닐 경우는 이런 의식(意識)을 갖고 있지를 못하여서 공교회적 모임이나 집회를 소홀히 하기도 하겠지만, 교회원의 신분과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관심을 가지지를 않고 소홀히 한다고 하면 주일 공예배만 놓고 볼 때도 그 자신이 교회로부터 누릴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의 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 전체적으로도 근심과 염려를 끼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만일 주일 공예배 외의 경우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연합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 온 교회가 연합할 수 있는 분명한 의식과 명분을 가질 때까지 서로 세워주는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고 공교회적으로는 이런 모임 저런 집회를 만들어 놓기만 하고 일부만 참여한다고 하면 자칫하면 공리주의로 흘러가기 쉬우며, 그것 자체가 율법이 되어서 율법의 종이 되는 우를 범하기도 쉽습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일을 한다고 했으면 교회가 해야 합니다. 비록 적은 것 하나라 할지라도 교회 전체가 그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고서 교회 전체가 달려들어서 해야 교회 전체의 거룩성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 전체에 깨달음을 주시고 능히 행할 만한 힘을 주시는 것이지, 교회의 일부에게만 깨달음을 주시고 그 일부만 움직이도록 하지는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령 기도에 있어서 대표기도만 해도 대표 한 사람이 기도하지만 그것은 교회원 전체의 신앙과 마음을 담아서 하는 것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일부만 참여하는 주일 오후 예배나 수요일 집회나 기타 기도회 같은 모임은 문제점이 있으며 심각히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결코 교회의 대표가 되는 분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만든 모임의 성격이 아니잖습니까?
공동으로 드리는 신행의 각론(各論)
따라서 공예배시에 드리는 '대표기도'는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원하는 객관적이고도 공적인 내용으로 간구해야 힙니다. 공교회가 꼭 구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대표로 나서서 하는 기도이기에 그 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의 몸, 곧 교회원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자는 대표로 서서 기도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교회 전체가 대표할 만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거기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것을 올려놓고 기도해서는 안 되고 공교회와 상관없는 내용을 가지고 기도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은 그 기도의 내용에 마음을 기울여서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 시간에 다닌다거나 별개의 다른 행동을 취하면 몸으로써의 예배는 상당히 지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공기도는 공적으로 대표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나 회중들 모두가 충분히 이해하여 마음을 모아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흠 없는 예배가 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중 모두가 그 찬송의 가사나 곡에 담긴 정신이나 정서를 공유(共有)하여 하모니(화음)를 이루어서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여한 성도 모두가 그 찬송가의 가사나 곡 속에 담긴 정신이나 정서를 충분히 담아서 드려야 하며 곡 속에 담긴 정신이나 정서에 일치가 되어서 공동으로 드리는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찬송에 담고 있는 정신이나 정서에서 이탈하여 자기 감정에 도취되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공예배시에 받으실 찬송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각자 개인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자유롭게 찬송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할 때 신자 각자가 각기 생활 속에서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회로 모여서 공예배시에 드리는 찬송이라면 반드시 회중 모두가 그 찬송가 속에 담긴 정신과 정서를 충분히 담아서 일치된 찬송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 속에 담긴 정신이나 곡 속에 담긴 정서를 무시하고 각자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서 다른 정서로 드리거나 각기 정신을 다른데 두고 드리는 찬송이라면 공적인 예배시에 드리는 찬송으로써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예배에 부합하게 찬송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예배시에 찬송을 드릴 때는 꼭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기본적인 마음이 서 있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드리지 않으면 그만큼 예배는 손실이 올 것입니다. 형식적이고도 습관적인 자세로 찬송을 하거나 열심히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서 부른다면 하나님 앞에 큰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찬송이 그저 좋은 노래를 하는 정도로 생각할 것이고 그런 정도의 인식을 갖기 때문에 찬송을 하면서 합심기도를 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하기도 하고 자리를 정돈하는 데 쓰기도 하고 흥미를 돋구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헌상을 드릴 때도 지체들이 다 같이 참여해서 하나로 묶어서 공적으로 드린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헌상을 드릴 때 우리가 조시매야 할 것은 내가 개인으로 하나님 앞에 헌상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체의 한 분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몸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모여서 공적으로 드리는 헌상은 개인이 드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지체의 한 분자들이 다 같이 참여해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서 공적으로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헌상에 개인의 이름이 거론되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또 목사가 헌상한 개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기도한다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공교회가 하나의 인격체로 예배하는 행위의 하나로 드리는 헌상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은 맞지 않는 행위입니다. 공예배시에 드리는 헌상은 회중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적인 헌상 행위'여야 합니다.
교회적인 헌상 행위라 할 때 물론 개개인이 각자 자신을 대표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이지만, 그렇게 개인은 자신의 대표의 표시로 헌상을 하고 그것이 모아지고 연합될 때는 또 교회 공동체가 대표하는 표시로써 하나님께 드려지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예배시에 드리는 헌상은 개인은 교회에 한 분자로 들어가서 감추어지고 교회라는 몸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개인의 이름이 드러나거나 개인의 헌신이 나타나버리면 오히려 공동으로 드리는 헌상의 정신을 깨뜨리게 됩니다.
또 각인이 얼마나 헌상의 정신을 잘 담아서 드리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공적인 헌상의 표현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상이 되느냐 그렇지 않은 헌상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각인들이 그렇게 올바른 정신을 다 담아서 참여해야 교회적인 헌상의 표현이 올바르게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드러내거나 혹은 결핍된 정신을 가지고 헌상에 참여한다면 그 한 사람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회중 모두가 책임을 져야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공동으로 드리는 헌금 전체에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흐리게 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상으로서는 결핍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연대 책임의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인 공예배가 중요하며 아무나 공동체가 일치해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 시간에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 공동체와 한 몸이 되어서 같은 정신과 같은 정서와 같은 의지를 가지고 함께 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공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나 참여하여서 예배를 드린다면 여러 모양으로 공적인 예배의 성격이 흐트러지고 깨뜨려지게 되고 그 교회가 드리는 예배 전체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흠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설교를 하거나 듣는 것도 공적인 행위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위에 필요한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그 교회의 수준이나 현재 필요로 하는 영적인 양식을 분석하여 대언자로 공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예배를 그르치게 됩니다. 교회에 꼭 필요로 하는 말씀을 대언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지 못하고 그저 몇 사람의 요청에 못 이겨서 하거나 당장 무슨 효과를 바라보고 억지로 말씀을 달리 해석해서도 곤란합니다. 특히 오늘 교회들이 부흥회라고 하면서 그 교회에 맞지도 않는 내용으로 몇 시간씩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공교회가 받아야 할 말씀으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들임을 볼 수 있는데, 목사는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직임의 직무 태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회중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시다는 공동의 의식을 가지고 회중 모두가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의례 '목사니까 할 소리를 한다' 하는 정도의 인식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꼭 필요로 하여 공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신자가 교회의 회중 가운데 있다면 회중 모두가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또한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 말씀은 아무게가 들었으면 딱 좋겠다' 한다든지, 아니면 '저 말씀은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이다' 하고 생각한다면 공적으로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겸허히 순종으로 받는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마음을 같이 해서 받아야 하는 말씀이지 누구는 받아야 하고 누구와는 상관없는 받지 않아도 될 말씀이 아닙니다. 공교회가 말씀을 받을 때 한 사람이라도 그 말씀을 바르게 받아 들이지 못하면 그만큼 그 교회는 결핍이 있게 되며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띠게 되기 때문에 회중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예배는 중생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일임
사실 지체들이 공동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시에 아무나 참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지체들이 함께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는 데 비중생자가 함께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그 자격이나 바른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자들이 예배를 드려야 바른 예배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갖추지 못한 자들이 함께 모여 아무리 많은 예배를 오래동안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의미가 없는 예배가 됩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교회를 이루어 나갈 때 중생자와 비중생자를 딱 구별하여 나누어 놓고 예배에 참여시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막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직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당신은 예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리적으로는 공예배의 성격을 잘 아는 주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인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 절하는 행위인 예배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공예배의 성격은 중생한 주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중생한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몸을 이루어서 드리는 예배로 알고 교회의 회원들이 정신을 다 담아서 표해야 할 일이지 비중생자에게 요구할 사항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비중생자들이 중생자의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서 공교회의 예배에 참여한다고 해도 예배의 정신을 표할 수 없는 것이니까 회원들은 그 점을 잘 알고 회원들이 예배의 원리를 잘 담아서 예배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예배는 교회의 회원들이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연대 책임 정신
공교회적 예배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연대 책임을 가진 예배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잘못이 전체의 예배에 해악을 불러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행보에서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아이 성을 침공하는 데 실패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연대 책임을 가진 공동체가 교회로 서서 사명 감당을 위하여 가나안을 침공해 들어가는 마당에 있었는데 아간 한 사람의 잘못은 공동체 전체가 연대한 잘못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여 가나안 정복을 지연시키셨습니다(수 78장). 당시 아간 한 사람의 잘못은 그 한 개인의 잘못 정도가 아니었고, 실상은 이스라엘 전체가 공히 지니고 있는 생각인데 그 표출이 아간에게서 나온 것에 불과했습니다. 가령 어떤 한 사람이 몸의 어느 한 곳에 큰 상처가 나서 몹시 고통스러워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팔이면 팔, 다리이면 다리, 얼굴이면 얼굴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곳은 신체의 한 부분인데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움을 겪는 것은 사람입니다. 즉 몸 전체가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처는 몸의 한 부분에 났지만 그 문제는 몸 전체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경이 어디 몸의 한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있나요? 아닙니다. 몸 전체에 실 그물망식으로 나 있는 것이 신경입니다. 이 신경에 의해서 뇌에 전달되고 뇌는 몸 전체에 싸이렌을 울립니다. 몸의 어느 곳에 이상이 생겼으니까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불행해 하라는 것입니다. 몸의 어느 한 곳의 문제는 몸 전체가 연대 책임을 지고 감당하고 대처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감기 몸살로 온 몸이 열이 끓고 끙끙대며 앓습니다. 그런데 몸이 감기 몸살에 걸려 있다는 것을 몸의 어느 곳이 표현합니까? 코에서 콧물이 나오는가 하면 입에서 재채기가 쉴 새 없이 나오고 편도성이 붓고 합니다. 머리는 고열로 끓습니다. 몸 전체가 이상이 생겼는데 몸의 한 부분 여기 저기에서 그 현상이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한 사람의 범죄는 사실은 그와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전체가 가지고 있는 상태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간 한 사람에게 돌을 던질 문제가 아니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서 책임 의식을 갖고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점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막 거룩한 행보를 내디뎌가는 중요한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룩하고 순결한 공교회적 구제의 행위에 불순한 마음을 취하고 연합하였기에 교회의 거룩성에 많은 손상 끼치어 두 부부를 제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사건들은 모두 당시의 급박한 시대적인 사명을 앞두고 발생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처벌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는 그처럼 즉각적인 처벌을 내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노여움은 오늘에도 그대로 시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 개인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공교회적 예배 때에 나 하나의 결핍으로 인해서 온 교회가 해를 입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시69:5-6).
다윗은 자기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친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잘 인식하고 예배하고 있는지, 올바른 자세로 찬송을 하고 있는지, 정당한 헌상을 하는지, 예배의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결핍이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핍이 있는 나 한 사람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 백성 전체에 해악을 미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나 하나의 잘못든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게 결핍을 안겨다 주기 때문에 나 하나의 잘못이 항상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명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연대적 책임 정신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여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이나 심정을 터득하는 장임
공교회적 에배는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이나 심정을 터득하는 장입니다. 성도 개인들이 삶의 전 영역에 흩어져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이나 심정을 바르게 익힐 수 있는 장이 바로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예배 때에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효과입니다. 성도들은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나 정서를 풍성히 익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어떻게 익히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나오게 됩니다. 성도는 공예배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세상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공예배시에 익혔던 그 이상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공예배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장(場)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공예배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가 형성될 수 있도록 교우들 모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성격의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흥분된 상태에서 '감정주의'로 나가는 공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익힌 사람들은 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도 감정주의로 섬기게 됩니다. 또한 윤리 도덕이나 '인간적'인 사귐 정도의 교제나 혹은 선행을 익히는 장(場)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라면 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도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량하게 살고 선행을 힘쓰면 되는 정도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공예배 시간에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익히고 터득한 사람이라면 삶의 전 영역에서도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라면 공예배시에 가지는 정서나 경외심이 삶 속에서 그대로 연장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가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어떻게 익히고 터득하느냐 하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각 신행의 정신을 충분히 담아서 공예배를 드려야 함
그러므로 예배 속에 각각의 신행의 정신을 충분히 담아서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배라고 하는 큰 규범 속에는 여러 가지 신행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기도'나 '찬송', '헌상', '설교'와 같은 적은 규범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범들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한 정신과 정서를 잘 담아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 규범들 속에 담긴 정신들이 총화를 이루어서 '공예배의 바른 자태'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공예배를 드릴 수 있으려면 그 공예배의 의식 속에 들어있는 각각의 적은 규범들이 담고 있는 그 정신을 충분히 잘 익혀서 그 정신을 담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공예배 속에 들어있는 모든 신행들이 담고 있는 정신들이 총화를 이루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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