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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브리서 4장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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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는 ‘긍휼’에 대해 계속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는, 살아 있을 때 긍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기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죽어서 구하는 긍휼은 일체 통하지도 않으시고, 듣지도 아니하시고, 응답하지도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한 해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짧은 기도문이 끊기지 않고 계속 되시기를 바라고, 그로 인하여 이 어려운 시국에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받으셔서 모든 면에서 회복 하시고, 평안하시고, 소망 가운데 계속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저는 설교 제목을 99%정도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 공부 할 때는 제목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목 한 줄로 그 설교 내용에 관심을 갖게 해서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 교수님의 가르침 이었던 걸로 기억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언베 부터인가 배운 대로 하지 않고 반대로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성경 본문 그대로를 제목으로 정하자는 나름의 원칙을 세워 봤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저만의 이유는, 제가 전달하려는 설교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 설교 제목으로 내용을 포장하려 하지 말고 본문 내용 준비와 전달에만 충실하자, 나의 생각과 의욕 보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항상 앞세우자, 전달하는 말은 내가 하지만 진리의 말씀만이 드러나고, 감동 되고, 새겨 지는 은혜가 입혀지도록 기도하자, 이런 나름의 의미들을 부여해 봤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는 대부분 제목만 가지고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오늘 설교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설교 제목 자체 만으로 이미 은혜가 됩니다. 오늘도 이 제목의 말씀으로 긍휼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하늘의 은총이 입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히브리서가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교 출신 신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기까지는 했으나 얼마 못가서 배교하려는 기미를 보이면서 기독교를 버리고 다시 유대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는 믿음이 연약하고 율법과 전통의 깊은 수렁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위기의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믿음으로, 다시 진리로, 다시 순종으로, 다시 긍휼로 돌아오라고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읽는 대상들은 무뉘만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초와 같이 믿음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면으로 보자면, 자신의 사고방식과 자아가 너무 강해서 말씀을 잘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반박하고 거부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서는 곳곳에서 불순종과 심판에 대해 매우 강하고 무서운 어조로 쓰여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의 내용은 히브리서 3장 1절에서부터 4장 13절까지 이어지는데 그 주제는 “하나님 주시는 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주요 내용들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요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모세는 일시적인 임시직 이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하시므로 모세(율법)보다 예수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시다,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광야 40년 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을 잊지마라, 불순종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 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기억하라”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내용 다음에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11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너희 유대인이 자랑하는 모세의 역사 속에서도 불순종하여 실패한 것을 분명히 보았지, 그러므로 너희는 진짜 안식, 하늘 안식,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고 힘써야 한다. 안식을 위해 나아가는 것의 핵심은 ‘순종’이다, 알아들었지” 이런 말씀이 11절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율법을 그토록 맹신하면서도 하나님이 실시간으로 들려주시는 실제적인 권면의 말씀은 어지간히도 듣지 아니해서 오죽하면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증언들을 무수히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믿어왔던 율법이 더 나아 보이고, 자신들이 그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충분 한 것 같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인 것 같았습니다. 맹신과 습관은 좋게 쓰면 약이지만 나쁘게 쓰면 독이 됩니다. 특히 맹신은 대부분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1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유대인들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나라가 멸망하기 까지 제대로 나가 떨어져 본 쓰라린 경험이 있음에도, 그 아픈 과거의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지 못하고 여전히 불순종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순전한 믿음은 강하고 담대함으로 자라나지만, 믿음의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잠깐 방심하면, 쉽게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을 왜 갈대에 비유하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비유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2021년 성경 일독자에게 드렸던 상장에 쓰여진 성구를 혹시 기어하시나요. 빌립보서 3장, 12, 14절 이었습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바울 사도같이 위대한 믿음의 선배도 믿음과 구원에 대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거기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낮은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 까지 우리는 늘 경계하고, 늘 사랑하고, 하늘의 시민권을 손에 쥐는 그 순간을 소망하며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중심적인 생활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믿음을 지탱해 나가는 고급 영양소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께 긍휼을 간절히 구하고, 내가 받은 긍휼을 토대로 이웃에 긍휼히 마음껏 베풀면서 사는 것, 이것이 믿음을 지켜 나가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유대교 출신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은 이미 다 얻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에 빠져서 더 이상 긍휼을 구하지도, 긍휼을 베풀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선택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릇된 맹신, 이미 다 얻었다는 왜곡된 신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오만과 독선, 이 것들은 당시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의 만의 생각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믿음을 조금씩 갉아먹는 독버섯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12,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아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한, 반드시 내 눈에서, 머리에서 늘 아른 거리는 말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지 쉽게 외우시려면, “히(그가) 4(죽음에대하여) 12(일리)있는 말씀으로 찔러 쪼개신다” 고 암기 하시면 잊어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맞이하게 되는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기 이전에, 내가 다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되겠다는 기회 주심의 말씀으로 삼고, 나 자신을 채찍질 하며, 각성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고, 반드시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심판을 받는 날이 옵니다. 죽는 그 순간 곧바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직행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모든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과 생각이 벌거 벗은 겉 같이 드러날 날이 반드시 올 것인데, 그 판단의 기준이 살아있는 말씀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얼마나 의롭고, 거룩하고, 정의로웠는지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 내 생각, 내 말, 내 행위들이 모두 저장되고 있고 그것이 공개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다가 음부에 들어간 부자 이야기에서처럼, 죽은 다음에 긍휼을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기회 주실 때,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긍휼을 구하고, 또 구하고, 내 영혼의 안전을 보장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는 것만 생각하시면 이 땅에서의 잠깐의 수고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바울 사도도 이 말씀으로 고난의 인생을 버텼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육체의 옷을 벗을 그 날이 우리에게 약속이 되어 있음을 굳게 믿으시고, 힘 내십시오. 곧 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이미 얻었다는 자만과 교만을 물리치시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하늘의 시민권을 받으시는 그 날까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과 회개로 살아가시며, 결산 받을 그 날에 부르심의 상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므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먼저 11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는, 불순종하면 하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 이렇게 연결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14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결산 받을 때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연결이 됩니다. 14~16절 까지는, 결산 받을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성도(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줍니다.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아멘.
결산 받을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바로 믿음의 주인이자 근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고, 귀가 따갑게 들어온 기본적인 권면이어서 뭐 대단한 새삼스러움이 없어 보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에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진 자들에게 권면을 하는 편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은 그냥 대제사장이 아니라 ‘큰 대 제사장’이 되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대제사장 앞에 ‘크다’는 말을 덧 붙였을 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경직된 사고와 허망한 맹신주의를 깨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론의 후손만이 대제사장 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지식과 전통 안에서 유다 지파의 후손인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권세 보다, 율법 조문을 지키고 사는 것이 더 확고한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속담 중에 “고집 쎄고 딱딱하기가 삼년 묵은 물 박달나무 같다, 잘난체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입술을 꿰매도 말릴 수 없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매운다, 집에서는 냉수 마시고 밖에서는 배 두들긴다”는 속담들이 있습니다. 고집, 자랑, 욕심, 허영...이런 것들이 내 안에 자리 잡은 자기 확신적인 대제사장 의식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믿음을 굳게 잡지 못하는 방해 요소들입니다.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굳게 잡지 못하는 최대의 방해요소가 주변의 환경과 생활의 곤란 때문에 발생하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그릇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으로 표현 한 것은,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 예수님만이 맹신을 깨트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예수님만이 그릇된 자기 의(애, 확신)를 바로 잡아 주실 수 있다, 예수님만이 위로자요 능력과 은혜의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살아있는 말씀이 결산의 근거가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아무리 내 주변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내 귀에 무수히 들리우고, 내 마음에서 요동친다 하여도, 그 말씀이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 역사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승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문자화, 활자화 된 상태로 눈으로만 보이고 마음에 담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여 역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도리, 즉 믿음의 주인이자 근본 되시는 에수님을 붙잡지 않으면 말씀은 살아 역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일 통해서만 말씀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강력한 신앙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고 살아 있는 말씀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압축해서 세 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 앞에 엎드리며 죄와 죽기까지 처절하게 싸우고 또 싸워 이겨 내는 것,
② 어떤 일과 상황 때문에 한 순간에 넘어지고 쓰러질 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것,
③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구하며,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거룩과 경건으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
세 가지 핵심 키워드는, 죄, 성령, 회개입니다. 이 세가지에만 집중하셔도 큰 대제사장이시며 믿음의 도리인 예수님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대해 완벽히 막아내고 있다는 자만감과,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데도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함과, 남을 정죄하고 회개하라는 권면은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독교를 떠나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나약한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죄, 성령, 회개의 대척점에는 자만, 교만, 오만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는 죄, 성령, 회개의 마음과 vs 자만, 교만, 오만의 마음들이 우리의 영혼을 두고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합니다.
우리 다같이 15,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16절만 다시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아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긍휼’이 표준새번역에서는 ‘자비’로 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구하지 않으면, 그로 인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결산의 그날을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몸소 체험 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모든 시험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이 삶 속에서 겪고 있는 처절한 생존투쟁의 고난을 동일하게 느끼고 계십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남몰래 흘리는 아픔의 눈물을 동일하게 느끼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 처해 있든지 항상 그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묵묵히 지켜 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함께하여 주시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나악함)을 동정(긍휼, 불쌍히)하실 수 있는 위로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우리에게 큰 대제장이 되어 주신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모두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위로 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대목의 설교 글을 쓰다가 그만 울어 버렸습니다. 000목사, 인간 000, 내 이름 석자가 무엇이기에, 먼지 같은 내 인생이 무엇이라고, 내 삶의 모양새 없는 꼬라지가 무슨 그렇게 주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소중하다고, 맨날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는데도 싫다고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더럽고 추잡한 일만 너저분하게 벌려 놓는데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신다니, 이게 웬 말인가, 이게 웬 은혜인가, 내가 봐도 내 인생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예수님이 나를 대하심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울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이 로봇 같고, 돌 같이 딱딱한 인간도 울리 실 수 있는 것을 보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합니다. 눈물이 나오면서 제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하나님! 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도하다 보니 책상이 또 이마에 닿았습니다. 그래, 내 평생에 이 기도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자, 그러면 살려 주시는 은혜가 떠나지 않겠그나 그런 확신적인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기독교를 떠나고, 에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날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왕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은, 시간을 들여 여러 가지 신앙생활을 하는 한은, 무언가 좀 믿는 티는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산 받을 그날에 살아 있는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으려면, 무언가는 꺼리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하나만 제대로 하십시오. 그 단 한가지가 바로 내 영혼 구원의 확신과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구하는 것이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버지! 내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 육체를, 내 인생을, 내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한마디만 죽는 그 날까지 외치고 또 외치십시오. 그러면, 긍휼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진심과 마음의 고백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항상 함께 하여 주십니다. 너무나 든든합니다. 때를 따라 도움을 주시려고 늘 위로와 긍휼과 은혜가 대기 중입니다. 이제 제발, 고집 부리지 말고, 자랑 하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고, 허영에 빠져 시간을 더 이상 기회의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이 한가지만은 절대적으로 놓치지 마시고, 큰 대제사장이시며 믿음의 도리가 되시는 예수님만을 굳게 붙잡고 결산의 그 날을 향해 당당하게 행진해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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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약속하시고,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게 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결산을 받을 그 날까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긍휼로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구원의 길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