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옛 그림 읽기 1. 김명국의 달마상
호방한 선(線) 속의 선(禪)
<그린이와 그려진 이가 하나>
눈처럼 흰 화선지가 펼쳐져 있다. 옆에는 검은 먹물이 담긴 벼루와 그 농담을 조절하기 위한 빈 접시 하나. 그리고 붓 한 자루가 있다. 화가는 한참 동안을 텅 빈 화면 속에서 무엇을 찾는 것처럼 가만히 쏘아보고만 있다. 이윽고 붓대를 나꿔채어 하얀 종이 한복판에 옅은 선을 빠르게 그어 나간다 (도판 1). 억센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 풍성한 눈썹과 콧수염, 한 일 자로 꽉 다문 입, 턱선을 따라 억세게 뻗쳐 나간 구레나룻을 거침없이 그어댄다. 구레나룻 선을 쳐 나갈 때는 마치 한창 달아오른 장단에 신(神)이 들린 고수(鼓手)처럼, 연속적으로 퉁기듯이 반복하면서 묵선을 점점 더 길게, 점점 더 여리게 조절하며 붓에 운율을 실어 풀어놓았다. 끝으로 이마와 뺨의 윤곽선을 긋고 나자 미묘한 표정의 달마가 확실하게 떠올랐다.
아마 붓을 종이에 대기 시작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예리한 붓끝으로 빠르게, 그러나 약간은 조심스럽게 몇 줄의 먹선을 그은 게 다지만, 이로써 달마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얼굴에 만족한 화가는 이제 좀 더 호기롭게 가사(袈裟)로 감춰진 몸 부분을 그리기 시작한다. 진한 먹물을 붓에 듬뿍 먹여 더 굵고 더 빠른 선으로 호방하게 쳐 나갔다. 꾹 눌러 홱 잡아채는가 하더니 그대로 날렵하게 삐쳐내고, 느닷없이 벼락같이 꺾어내서는 이리 찍고 저리 뽑아낸다. 열 번 남짓 질풍처럼 여기저기 붓대를 휘갈기고 나니 달마의 몸이 화면 위로 솟아올랐다. 달마는 두 손을 마주잡고 가슴 앞에 모았다. 윗몸만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세는 분명 앞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다시 화면을 지그시 바라본다. 구레나룻 오른편 끝이 두포(頭布)의 굵은 획과 마주친 지점에 먹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슬쩍 붓을 대어 위로 스쳐준다. 훨씬 좋아졌다. 다시 구레나룻 아래 목 부분에 날카롭게 붓을 세워 가는 주름을 세 줄 그려넣었다. 이제 달마의 얼굴과 몸은 하나가 되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끝으로 달마의 얼굴 앞쪽 화면 가장자리에 기대어 ‘연담(蓮潭)’이라는 자신의 호(號)를 휘갈긴다. 글씨 획은 그림의 선과 완전히 꼭 같은 성질의 선이다. 빠르고 거침없는 그 획들은 그려진 달마와 그린 사람이 하나임을 말해준다. 인장(印章)을 찾아 누른다. 화가의 호와 이름이 선홍색 인주 빛깔에 선명하다. ‘연담(蓮潭)’ ‘김명국인(金明國印)’……
<달마상을 통해 읽는 달마>
달마는 누구이고 김명국은 누구인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렸는가. 달마가 김명국을 시켜 자신을 그리게 하였는가? 김명국이 달마를 그린 것은 관지(款識)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면 밖으로 뿜어나오는 강력한 자장(磁場)은 선사(禪師) 달마가 김명국에게 자신을 그리게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의 진실이다. 그림의 필선(筆線)들은 화면 위에 각각 서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가? 선과 선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필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이 그것이다. 그것은 옷 주름 선뿐만이 아니라 얼굴선, 그리고 관서 글씨의 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기(氣)의 주인은 김명국인가, 달마인가?
달마는 인도 스님이다. 그는 석가모니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을 때 스승의 뒤켠에 서서 조용한 미소로 답함으로써 부처의 심법(心法)을 전수받았다는 마하가섭 이래 인도선(印度禪)의 제28대 조사(祖師)였다. 달마는 서기 520년경 중국에 건너와서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그리고 당시 이론 중심의 교종(敎宗) 일변도였던 중국 불교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이심전심(以心傳心)’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최초로 전하여 중국선(中國禪)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달마는 선(禪)의 대명사이다. 달마는 9년 동안이나 벽을 마주하고 수련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던 진정한 대장부였던 것이다. 그러한 달마가 조정과 귀족들에 기대던 기성 종단을 꾸짖어 참된 깨달음과 실천행을 강조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 무서운 집중력은 어떠한 원력(願力)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토록 용맹정진할 수 있었던 심지(心地)는 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달마상>을 보면 달마를 알 수 있다.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이 아닌, 바탕이 아닌 온갖 부차적인 껍데기들은 모조리 떨구어낸 순수 형상이다.
그러므로 몇 줄의 짙고 옅은 먹선으로부터 강력한 의지와 고매한 기상(氣像)이 곧바로 터져 나온다. 아무도 곁눈질을 할 수 없게 하는 이 맹렬함, 이것은 바로 선(禪)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라. 달마는 한편으로 이 모두가 역시 허상(虛像)이라는 듯이 진정 거짓말처럼 깊고 고요한 눈매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아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닐까? 어떻게 저 들끓는 역동성과 고요한 침잠(沈潛)이 한 화면 위에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과연 선(禪)일까? 어떠한 집착도 거부하는 것이 선이라고 들었다. 집착이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어떠한 집착도 거부한다”라는 말이 또다시 집착의 대상이 되는 순간 선은 그것을 거부한다.
(2025년은 새롭게 그림으로 시작합니다. 전체가 11회입니다.)
첫댓글 유정민 성님
2025년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새롭게 그림 공부를 시작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 형! 그래요, 신년 새해 새로운 글로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