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용맹정진(勇猛精進)’은 특별히 불교용어로 한정된 말은 아니고, 일반세간에서도 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래 용맹정진(勇猛精進)이란 무수할 정도의 방대한 제불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학적으로는 비유도 할 수 없는 오랜 시간, 스스로 성불을 걸고 불도수행에 면려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금생의 한 평생 동안만 생각해보더라도 우리들이 공부나 스포츠 등 어떤 한 가지 일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아 어느 정도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과거세부터 몇 번이나 생(生)을 거쳐, 다만 오로지 성불(成佛)을 원하여 미미한 해태(懈怠)도 없이 일심(一心)으로 정진(精進)해온 모습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므로 이 모습은 일반적인 ‘용감하게 힘써 나아가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실로 ‘목숨을 건다’라고 하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의 노력입니다.
특히 이 정진(精進)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목적을 향해서가 아니라, 성불이라고 하는 최고의 경계, 어떤 것에도 흔들리는 일이 없는 절대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 그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한 노력과 전진 즉 신심수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불을 위한 끊임없는 신심수행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하므로, 그 모습은 나날의 생활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 우리들 범부(凡夫)로서는 이만저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교시되는 신심수행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요?
견보탑품(見寶塔品)에서는 법화경을 ‘잠시라도 지니 는 것’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하시고 있으므로, 법화경 수지(受持)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오히려 어렵기 때문에 ‘잠시라도 지니는’ 공덕도 지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이 경(經)은 지니기 어려우니」의 예증으로서 이 경문에 이어서 견보탑품(見寶塔品)에서 유명한 육난구이(六難九易)를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말법(末法)에서 이 법화경을 신행하는 것이 얼마나 난사(難事) 중의 난사(難事)이고, 그리고 수지할 때의 공덕이 지대한가하는 것이 이 육난구이(六難九易)의 예증에서도 명백합니다.
니치칸상인(日寬上人)은 ‘용맹(勇猛)’에 대해서《용맹(勇猛)은 이는 신심(信心)이니라. 고(故)로 석(釋)에 가로되「굳세게 행함을 용(勇)이라 하고, 지(智)를 다함을 맹(猛)이라 한다.」운운(云云), 고(故)로 굳세고 용감하게 신력(信力)을 다하여 힘씀을 용맹(勇猛)이라 이름하느니라.》(육권초(六卷抄) p.89)고 교시하셨습니다.
비록 매일 바쁜 생활 속에 있어도, 자신의 지혜를 다하여 환경을 정돈하고,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도 궁리하여 항상 신력(信力)을 분기시키는 것이 ‘용맹(勇猛)’이 됩니다.
또 니치칸상인(日寬上人)은 ‘정진(精進)’에 대해서도《정진(精進)은 즉 이는 창제(唱題)의 행(行)이니라. 고(故)로 석(釋)에 가로되「잡(雜)이 없는 고로 정(精), 틈이 없는 고로 진(進)」운운(云云). 종조(宗祖) 이르길「오로지 제목(題目)을 지니고 여문(余文)을 섞지 않으며」운운(云云), 또 이르길「이 묘법(妙法)에 여사(余事)를 섞음은 대단한 벽사(僻事)이니라.」운운(云云)》(육권초(六卷抄) p.89)이라고 교시하셨습니다.
이 올바른 삼대비법 이외에 일체의 모든 중생을 성불로 인도하는 법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여, 스스로 창제에 힘쓰고, 또 타인도 정법으로 유인하는 모습이 바로 ‘정진(精進)’입니다.
이들 어지남을 배독할 때,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부족한 것 같은 생활 속에 있다손 치더라도 조금이라도 신심수행에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다시금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시간 배분 등을 궁리하여 한 편이라도 더 많은 제목을 부르는, 그것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자행(自行)만으로 그치지 말고, 그 공덕을 남에게 미치게 하기 위한 화타행(化他行), 즉 절복(折伏)에 매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용맹정진(勇猛精進)의 모습입니다.
대성인께서는『니이케어서(新池御書)』에서「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다른 일이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고 해서 석존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신편어서 p.1460) 고 교시하셨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본존님께 제목을 부르고, 본존님의 공덕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현재 우리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착실하게 성불의 경계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연합회 신도 모두는 그 신심수행의 공덕으로써 누구나가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금년『교학(敎學)·정진(精進)』의 해에도 더 한 층 ‘용맹정진(勇猛精進)’해 나갑시다.
첫댓글 용맹정진 정신으로 다시 강성한 신심을 하게한 너무나 좋은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