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찌 살라하고
- 가시리 -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슬픔은 그지없다. 사랑했던 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낼 때는 한이 맺힐 것이다. 정말로 가시나요, 나를 버리고 기시나요. 나는 어떻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나요. 그러나 떠나는 님은 말없이 떠나간다.
가시리 가시리 있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나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꼭 잡아두고 싶지만
내가 너무하면 아니 올세라
사랑하는 님을 보내오노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가시리, 가시리, 떠나가셔도 가시는 듯 돌아오시기를 애원을 한다.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싸우다 죽은 온달은 사랑하는 아내 평강공주와 헤어지기 싫었는지 그의 관(棺)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주도 온달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관을 잡고 호소했다. “사생이 정해졌으니 어호라 잘 가시라(死生決定 於乎歸矣)”하니 꼼짝 않던 관이 드디어 움직였다. 온달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이 너무나 싫었을 것이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북망산(北邙山)에 가시는 님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시는 듯이 돌아오기를 빌어봤을 것이다.
여말(麗末)의 예성강(禮成江) 나루터에는 이별이 너무나 많았다. 명(明) 나라나 원(元) 나라에 공녀(貢女)로 떠나가는 여인들은 이 강나루에서 통곡을 했을 것이다. 예성강곡(禮成江曲)은 이 강나루에서 불러진 한 맺힌 이별의 노래다. 공녀로 떠나가는 이별 말고도 여기 기막힌 이별이 또 있었다.
송나라 상인 하두강(賀頭綱)은 바둑의 고수였다. 그가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장사차로 왔다가 예성강변 벽란도(碧瀾渡) 주막집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의 남편인 주막 주인이 바둑을 좋아하니 그에게 접근하여 내기 바둑을 두었다. 하두강은 일부러 자꾸 저주면서 그의 배에 싣고 온 명주를 주막 주인에게 주니 주막 주인은 정말로 자기가 잘 두어서 이기는 줄 알았다. 며칠이 지나자 하두강의 배에 가득했던 명주는 모두 주막 주인에게 넘어갔다. 주막 주인은 하두강의 흑심을 모르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두강은 마지막으로 주막 주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여보, 나는 이제 밑천이 다 당신에게로 갔으니 마지막으로 바둑 한판에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냅시다.”
“좋소이다.”
“내가 지면 저 배를 몽땅 당신에게 넘기겠소. 만약 당신이 지면 가져간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 부인까지도 내게 주어야 하오.”
이 말에 주인은 쾌히 승낙하였다. 부인까지 걸고 하는 한판 승부에서는 하두강은 자기의 진짜 실력을 발휘하여 주막 주인을 보기 좋게 이겼다. 주막 주인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남아(男兒 일언(一言)이 중천금(重千金)이거늘 어찌 허언을 하겠소.’ 하고 하는 한 마디를 하고 부인과 작별인사를 했다. 바다 건너 송나라로 가게 되는 주막집 여인은 부두에 서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바둑에 미쳐 사랑하던 부인까지 잃어버린 주막집 남편은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했으나 배는 점점 멀어져 갈 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다가 어디론가 정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부인을 실은 배가 망망대해로 접어들자 웬일인지 갑자기 큰 배가 한 치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뱅뱅 맴돌기만 하였다. 영문을 알아차린 하두강이 뱃머리를 고려 쪽으로 돌리니 배는 움직였다. 데려 온 그 여인을 벽란도에 다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예성강 나루터에 돌아온 여인은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행방이 묘연한 남편을 찾아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으나 끝내 남편을 찾지 못하였다. ‘예성강곡’은 그 여인이 울면서 남편을 찾아 헤매는 슬픈 노래다. 그 연인도 예성강 가에서 ‘나를 어찌 살라 하고 가시리 있고 하는 슬픈’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인 김소월은 ‘개여울’이란 시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면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시면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결 바람에 헤적이는데 무슨 청승으로 개여울에 혼자 앉아 가시더라도 아주 가지는 말라는 간절한 애원을 했을까. 가도 누가 가고 싶어서 갔겠나. 가야할 사연이 있어 떠나갔겠지. 소월의 ‘개여울’, 그 시어도 정감이 넘치지만 그때 개여울을 노랫말로 가요를 불렀던 그 노래를 잊을 수 없다. 성량(聲量)이 풍부했던 그 1 )여가수는 애초에 그림을 좋아해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그림을 그리는 교수가 되어 있단다.
총탄을 맞고 죽은 아내가 그리워서 宮井洞 安家에서 젊은 2 )여가수의 노래 ‘그때 그 사람’ 을 듣던 우리 시대의 권력자는 노래가 끝이 나자 그도 그 자리에서 총탄을 맞고 아내 곁으로 갔다. 노래를 불렀던 여가수도 남편과 헤어지고 사랑했던 어린 두 딸과도 쓰라린 이별을 했다. 헤어진 남편을 따라 먼 이국으로 딸들을 떠나보내고 어느 무대에서 ‘개여울’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단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 살아서 헤어져도 슬픔을 주고 산자가 죽은 이를 떠나보낼 때는 통곡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실연의 아픔을 안고, 님을 저승으로 떠나보낼 때 가슴에 恨을 묻는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두 번 이별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여인들은 출가할 때 부모 형제를 뒤 두고 떠나야하고, 부모가 늙어 세상을 떠날 때는 靑山에 부모를 묻는다.
가시리 가시리, 얼마나 정감이 넘치는 가사인가. 이 가사를 노래처럼 무던히도 불렀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도 불렀고 만났던 여인이 떠날 때도 불렀다. 이런 옛 가사 때문에 내가 고시가를 좋아했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반 백 년 전에 불렀던 그 노래를 지금쯤 잊을 만 한데 아직도 못 잊는다.
우리에게는 이별의 노래가 많았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 부관연락선을 타고 떠나는 ‘산 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는 노래 말도 있었고, 전란 때 불러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라는 노래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더 슬픔 이별이 있다. 잠시 잠간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남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반 백년이 넘도록 만나지도 못한 슬픈 이별이 있다. 지척에 두고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남과 북 사이에 있다. 남과 북의 시인들이 백두산에서 만났을 때도 북의 시인에게는 위대한 수령과 장군이 그들의 시어 속에 숨어있었다. 북에는 증오에 가득한 원수(怨讐)만 있었고 가시리의 애절한 서정(抒情)은 없어진 게다. 지금, 영변에는 아름다운 진달래꽃은 없고 그곳엔 공화국의 야망이 숨어 있다.
가시리는 이별의 한이다. 백년을 같이 살자고 기약했다가 헤어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지금은 잠시 잠간 만났다 헤어지니 가시리를 불러볼 그런 이별이 없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니 이별의 노래를 부를 겨를도 없이 떠나 간다. 가시리의 서정이 무디어 간다. 이별이 너무나 쉽다.
- 김성복 -
1 ) 정미조, 수원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음.
2 ) 심수봉, 남편과 이혼하고 사랑하는 어린 두 딸을 미국으로 떠나보냄.